조헌영
1900 - 1988.05.23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정치인
성북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한의학자이다.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조헌영(호는 해산)은 1927년 일본에 유학하던 중 신간회 동경지회장을 맡았으며, 귀국해서는 명륜동에 살면서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를 만들어 학술지 『동양의약』을 발간하여 한국 근대 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하는데 공헌하였다. 1935년에는 조선어표준말사정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명륜동에 거주하던 조헌영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대 초에 성북동으로 이사 왔다. 해방 후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6.25 전쟁 중에 피난가지 않고 성북동에 머물던 중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한의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1988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성북동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900 - 1988.05.23
  • 비고: 6.25전쟁 당시 납북

주소

  • 주소: 02836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0-44 (성북로16길 11)

근거자료 원문

  • 심우장과 노시산방 1. 1937년 봄, 심우장 - 한용운, 김동삼, 조지훈 선생을 마지막으로 뵈온 것은 일송 김동삼 선생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셨을 때 때가 때인지라 일송 선생의 시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 감옥 구내에 버려둔 것을 선생이 망명시절 고인에게 받은 권우眷遇와 지사志士 선배에 대한 의리에서 결연이 일어나 성북동 심우장까지 일송 선생의 관을 옮겨다 놓고 장사를 치르시던 모습이다. 위 글은 시인 조지훈이 1954년 잡지 『신천지』에 쓴 「한용운 선생」의 일부이다. 이 짧은 글에는 3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용운, 김동삼, 조지훈. 그리고 조지훈은 이 장례를 아버지와 함께 갔으니 아버지 조헌영을 더하면 넷이 된다. 실제로 조헌영은 장례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뒤에 한용운을 대신해서 조사弔辭를 낭독했으니 총 4명이 이 글의 당사자가 된다. 과연 당시의 상황은 어땠으며, 이들은 무슨 관계였을까? 그의 아버지 조헌영은 한용운뿐만 아니라 김동삼과의 관계도 깊었다. 한양 조씨인 그의 집안은 대대로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김동삼의 고향은 안동이었고 이 두 집안은 인척 관계로 엮이는 경우가 많았다. 조헌영은 단순한 고향 후배의 자격으로 조사를 낭독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성균관 뒤편에 살던 조헌영은 1941년경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긴다(기록이 없어 이유는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혹 한용운 때문은 아니었을까?’라는 상상은 한 번쯤 해봄직 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거하며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의 활동을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북한의 이른바 ‘모시기 공작’에 의해 잡혀가고 만다. 지금 성북동에 남아 있는 조지훈 집터는 아버지 조헌영이 살던 집이다. 조지훈은 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지만, 혹여 아버지가 돌아오실까 죽는 날까지 이사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 이름으로 된 명의도 바꾸지 않았다. 지금 성북동 ‘조지훈 집터’는 사실 조헌영의 집터인 셈이다. 1937년 봄, 심우장에서는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가 있었다. 차가운 관속에 누워 있었을 김동삼 선생의 시신, 그 관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한용운, 묵묵히 조사를 읽어갔을 조헌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지켜봤을 청년 조지훈이 그곳에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상황이었고, 식민지 안에 심우장만이 조선 땅으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바로 그 장면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02쪽, 207-208쪽
  • 한편 이 세 사람과 모두 인연이 닿은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시인 조지훈이다. 처음 상경해서 그는 성북동과 가까운 명륜동에 살았다. 지금도 복구되지 않은 성북동과 명륜동 사이의 헐려버린 한양도성은 두 곳을 같은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1943년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은 성북동 한켠에 자리를 잡는데, 이때 조지훈도 같이 보금자리를 옮겼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23쪽
  • ○ 성북구의 월·납북 인사 조헌영(趙憲泳, 1900~1988, 성북동 거주) 조지훈 시인(1920~1968)의 아버지, 한의학자·민족운동가·1, 2대 국회의원 1927년 신간회 동경지회장 1929년 신간회 중앙검사위원회 상무위원 명륜동과 성북동에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를 개설 → 근대 한의학의 기초 수립 1935년 조선어표준말사정위원회 위원 1936년 인사동에 일월서방(日月書房) 설립 1945년 8월 18일 원세훈(元世勳) 등과 조선민족당을 결성(홍명희 계열) 1948년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뒤 한국민주당을 탈당 제헌의회에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약 1950년 5·30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김동성과 함께 무소속구락부 주도 한국전쟁 기간 성북동에서 강제 납북 북한에서 주로 한의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 1980년 7월 서기장 1988년 5월 23일 평양에서 사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48-149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조헌영 주소(현재): 성북동 60-44 분야: 한의사, 민족운동가 비고: 조지훈의 아버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27년-안재홍을 중심으로 한용운, 최익환, 조헌영 등 신간회 활동 참여 1948년-조헌영 반민특위 활동 1950년-조소앙, 장건상, 안재홍, 조헌영 등 국회의원 당선. 조헌영,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손진태 등 주요인사 대거 납북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13쪽
  • ○ 6·25전쟁의 발발과 납북된 독립운동가들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조헌영 등 독립운동가로, 건국 요인으로 활동했던 성북인들 또한 전쟁 중 납북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 납북 후 그들의 삶은 물론 지난 일제강점기 당시의 업적들까지도 자세하게 알 수 없게 됩니다. 기록의 단절은 곧 후세의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공백이 되는 것과도 같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30쪽
  • ○ 민족유일당 신간회와 성북인들 민족의 단결과 정치 · 경제적 각성, 기회주의자 배격 등의 기본 강령으로 내세운 항일단체 신간회는 점차 규모를 확대해 전국 곳곳에 지부를 두고 만주와 도쿄에도 지부를 설립합니다. 이때 신간회 도쿄지회장을 지낸 이가 조헌영입니다. 한의학자이자 민족운동가로 활동한 그는 성북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에는 반민특위조사위원으로 활동했고 6·25전쟁 중 납북되었지요. 그의 아들이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인 조지훈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66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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