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
1902.11.24 - 1972.11.14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교육가
인물 개인 학자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이다. 1921년 매일신보에 단편 「깨어진 항아리」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35년 『조광』 창간호에 발표한 「사랑손님과 어머니」로 대중의 인기를 받으며 작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창립동인으로 활동하였고, 『코리아 타임즈』 주필과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영문학자로 한국문학의 번역에 힘썼다. 1943년에는 일본의 대륙 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추방되어 귀국하였다. 이때 돈암동 254-1번지에 자리를 잡았는데 195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길」에선 한국전쟁 전후의 돈암동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돈암동
  • 주요섭_길 표지
  • 주요섭_길 표지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254-1

근거자료 원문

  •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이다. 「불놀이」를 쓴 시인 주요한이 형, 극작가 주영섭이 동생인 문학가 집안이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하였다. 1921년 매일신보에 단편 「깨어진 항아리」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35년 《조광》 창간호에 발표한 「사랑손님과 어머니」로 대중의 인기를 받으며 작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창립동인으로 양주동, 서항석, 김광섭, 백철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중국과 한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코리아 타임즈》 주필과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영문학자로 한국문학의 번역에 힘썼다. 중국에 있을 때 1943년 일본의 대륙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추방령을 받아 귀국하여 돈암동에 자리 잡았다. 이때 돈암동을 배경으로 한 연재소설 「길」을 발표하였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11쪽
  •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작가이자 영문학자인 여심 주요섭은 190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최초의 근대시로 평가되는 「불놀이」(1919)를 쓴 작가 송아 주요한의 동생이다. 평양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부친이 도쿄 한인 연합교회 목사로 부임하며 주요섭 형제도 일본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도쿄 아오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 편입한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났다. 형 주요한은 곧장 상해로 가 춘원 이광수와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 활동하는 한편 도산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원동遠東위원부에 들어갔다. 민족의식과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열일곱 살 주요섭은 평양으로 돌아와 독립을 호소하는 신문을 만들어 배포하였는데, 이 때문에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다. 그 시기 도산 안창호 선생을 존경하여 자신의 앨범 앞 장에 안창호 선생의 사진을 붙여놓기도 하였다. 주요섭은 1920년 매일신보에 단편 「임의 떠난 어린 벗」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중국 상해 후장 대학을 다니는 동안 상해를 배경으로 하층계급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인력거꾼」, 「살인」 등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한편 동아일보에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을 번역한 「보도탐험기」를 연재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모험과 탐험 소설의 태동을 이끈 선구적인 번역으로 평가되었다. 1928년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돌아와 《신동아》주간을 맡았다. 사무실은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동아일보사 2층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검열과 탄압이 심할 때라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내지 못하는 기사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주간이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온통 붉은 잉크로 덮인 원고를 받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공백을 채우기 위해 주요섭이라는 이름 외에 아호인 여심이나 어머니의 성姓에 이름을 지어 붙인 양두식梁斗植, 용악산인龍岳山人, 멍텅구리 같은 필명으로 원고를 쓰거나 외국 잡지 내용을 번역해서 지면을 채웠다. 1930년대 문인들은 일제의 사전 검열 탓에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고, 써낸 글도 군데군데 지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오히려 삭제된 표시를 보며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여 응원하는 독자 덕분에 힘을 얻기도 하였다. ‘글 쓰는 것도 하나의 멋이나 우국지사와 같은 기분이어서 서로 자주 만났다’는 주요섭의 회고처럼 당시 문단활동을 하던 문인들은 시대의식을 서로 공감하며 생기는 끈끈한 유대감을 나눴다. 신동아에는 창간호부터 관여했었다. 그때 미국서 갓 돌아 왔을 때였는데 송 사장(송진우)의 부탁으로 일하게 되었었다. 설의식 선생 주관 아래 창간호의 교정을 보고 있을 때였다. 다음호부터는 설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내가 맡아보았는데 원고 부족, 총독부 검열 등 어려운 일이 많았다. 실명 외에 용악산인龍岳山人, 양두식梁斗植, 멍텅구리 등 가명 필명으로 마구 쓸 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양두식 선생이 어떤 분이냐고 문의가 와서 모두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들이다. 원고를 모아놓고도 고생이었다. 원고 검열이어서 손을 나누어 복사하고 한편으로 조판, 한편으론 검열을 진행시켰다. 신문사에서 하는 거라 보아 준다는 것이 자그만치 한 달이나 걸리곤 했다. 그만두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총독부의 눈을 속이려고 투고의 자구를 요리조리 수정하느라 모두 땀을 빼기도하고. 자유천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여서 더했겠지만 부자유스럽기가 감옥 같았다. 주요섭, <신동아의 초창기> 동아일보 1964.08.22 1935년에는 《조광朝光》창간호에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발표하여 작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주요섭과 각별한 사이로 지내던 소설가 피천득은 후에 여섯 살 옥희와 어머니의 실제 모델이 본인과 어머니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후에 이 소설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영화(1961)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끈다. 제가 형을 처음 만난 것은 열일곱살 났던 해, 내가 상해로 달아났을 때입니다. …형은 미국에서 귀국하여 신동아를 편집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나하고 방을 얻어 같이 살았습니다. 겨울 아침에 형은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고 나는 난로에 불을 지폈습니다. 추운 아침 물을 길러가는 것이 힘이 든다고 날더러 불을 지피라고 그랬습니다. 이무렵 노산, 청전 같은 분이 늘 놀러 왔습니다. 당신이 가정을 갖게 되고 내가 상해로 다시 가게 될 때까지 몇해간을 이 하숙 저 하숙으로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당신의 잘 알려진 작품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어느 부분은 나와 우리 엄마의 에피소드였습니다. 형이 상해 학생시절에 쓴 ‘개밥’, ‘인력거꾼’ 같은 작품은 당신의 인도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형은 정에 치우친 작가입니다. 피천득, <주요섭의 문학과 생애> 동아일보, 1972.11.16
  • 작가와 기자로서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지하독립신문을 발간하던 주요섭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35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푸런[輔仁]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과 짧은 결혼생활 뒤로 혼자 지내던 그는 북경에서 지내는 동안 동아일보에서 함께 근무하던 독립운동가 김조길 선생의 딸 김자혜와 결혼식을 올렸다. 1937년 일제가 지식인 집단을 포섭할 목적으로 단행한 수양동우회사건 이후 친일노선을 걸은 형 주요한과 달리 주요섭은 일본에 항거하는 지식인으로서 지조를 지켰다. 동아일보에 중편 「의학박사」를 연재하며 기회주의에 빠진 지식인들을 비판하였다. 상해임시정부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북경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한 그는 1943년에는 일본의 대륙 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추방되어 귀국하였다. 귀국 후 주요섭의 가족은 돈암동 254-1번지에 자리 잡았다. 부인의 손길이 닿은 2백분 가량의 화초들이 올망졸망 작은 마당을 메웠다. 아내가 심은 꽃에 물을 주며 아이들을 키우며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195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길」에서 주인공 최응석의 손자 정헌의 집을 돈암동으로 설정하여 한국전쟁 전후의 돈암동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주요섭은 대표작 「사랑 손님과 어머니」로만 널리 알려졌지만, 소설 「봉천역식당」, 「해방 일주년」, 「열 줌의 흙」, 영문소설 「Kim Yu-shin」, 동화 「웅철이의 모험」, 「구멍뚫린 고무신」, 번역서 『안데르센동화집』, 『처칠의 제2차대전회고록』 등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뚜렷한 역사인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집필과 번역활동에 힘써 외국에 우리 문학을 알린 주요섭은 1972년 연희동 집에서 7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 주요섭(朱耀燮) 1902-1972 여심(餘心) 소설가. 평양 출생. 3ㆍ1운동 때 지하신문을 발간하다가 상해로 망명한 후 1928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심리학을 전공하였다. 1931년 《신동아》의 주간으로 일하였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작품으로 『사랑손님과 어머니』(1935), 『아네모네의 마담』(193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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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혜
    분류: 인물
    시기: 일제강점기
  • 길
    이야깃거리
    분류: 작품
    시기: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