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숙
1946.05.15 - 1960.04.19
인물 개인 민주화운동가
4.19혁명 때 희생된 민주열사이다. 1946년에 태어나 4.19가 있던 1960년에는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의협심이 강했던 진영숙은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시민들의 저항에 함께 분개하고,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자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4월 19일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를 기다리다 편지를 써놓고 데모에 합류하러 나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고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그의 유서가 되었다. 이 무렵 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아가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고 더러는 죽음을 당하거나 혹은 다치기도 하였다. 모교 한성여자중학교에서는 묘비를 기증하고 동급생이 졸업하는 1962년 2월,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현재 강북구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에 묘가 있다.
길음동 보문동
  • 진영숙 열사
  • 진영숙 열사의 묘

기본정보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46.05.15 - 1960.04.19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218

근거자료 원문

  • 4.19 때 쓰러진 진 양에 명예졸업장 4.19 당시에 불의에 항거하여 일어섰다가 흉탄에 맞아 쓰러진 한성여중 3년생 고 진영숙 양에 대한 명예졸업장 수여식이 오는 6일 상오 10시 한성여중 강당에서 열린다. 학교의 농구선수로 의협심이 강했던 진 양은 4.19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홀어머니 앞으로 “남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는데 내가 어찌 편안히 있겠습니까? 안 돌아오더라도 슬프게 생각하지 마십시오”라는 유서를 써놓고 나갔다 한다. 그날 하오 6시 경 수도의대 부속병원에서 진 양이 총에 맞아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어머니 김명옥 씨가 달려갔으나 이미 절명한 뒤였다 한다. 같이 데모에 참가했던 친구들 말에 의하며 진양은 미아리에서 데모차에 타고 외치다 흉탄에 맞았다 한다. 진양이 죽은 후 학교에서는 묘비를 기증하고 작년의 1주기에도 교직원과 학생 대표들이 망우리의 묘지를 찾아 넋을 위로했으며 지금도 그의 초상화는 학교에 걸려 길이 학생들의 기억에 남겨주고 있다. 어머니 김씨 말에 의하면 진양은 평소에도 신문에서 자유당의 불의를 밝힌 기사를 보면 분개해 마지않았다 한다. 진양의 유가족으로는 어머니를 비롯하여 언니와 오빠가 한 사람 씩 있다. 경향신문 1962. 2. 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115
  • 이젠 울지 않으련다. 뿌린 피 헛되지 않았기에. 영숙아 엄마는 이젠 울지 않으련다. 너와 너의 동지들이 뿌린 피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동터오르는 제2공화국의 새아침을 너는 보고 있냐. 네가 간 지도 벌써 꼭 이십 일이 되는구나. 나는 거듭 결심했다. 어미로서 너의 오빠와 언니를 너의 참된 죽음에 부끄럽지 않게 길러야 겠다는 결심이다. 서울 동대문구 보문동 218번지 어느 조그만 집에서 어머니 김(김명옥)씨는 어머니날에 다짐했다는 슬픈 독백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진양은 한성여중 2학년 2반생이다. 아직 나이 열다섯이지만 그는 성격이 명랑하고 쾌활해서 씩씩했다. 상급생들도 그와 같이 있을 때면 자연히 영숙이의 주장에 따르게 되었다. 영숙이는 농구선수였다. 키가 크고 몸이 건강한 것이 처음보면 누구나 고등학생인가 했다. 얼굴도 예뻤고 공부도 곧잘했다. 그런 영숙 양이 4.19의 밤 미아리고개에서 버스를 타고 시위하다가 귓전에 총탄을 맞아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더구나 영숙이는 그날 학교에서 돌아와 하오 4시 경 어머니 앞에 유서가 된 마지막 글을 써놓고 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엄마는 너의 마음을 안다. 그날 너는 파스포드와 뺏지를 책상서랍에 넣고 나갔더구나. 하루 전에 갈아 붙인 교복 카라를 새것으로 바꾸어 달아입고 밤거리 데모로 나선 너의 그토록 큰 뜻을 이 엄마가 어찌 잊겠는가. 영숙 양이 그날 4.19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는 친척 아주머니만이 있었다. 그때 대문밖 골목에는 영숙이가 데리고 온 급우들 오륙십명이 서성대고 있었다. 영숙이는 아주머니가 차려준 저녁상을 밀쳐놓은채 밥을 먹지 않았다. 바깥이 시위로 소란해서 아주머니가 거리에 나갔다 돌아와 보니 영숙이는 무엇인가 바쁘게 연필로 적고 있었다. 그것이 유서였던 것이다. 영숙이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모두 파스포드와 교복 뺏지를 떼서 다른 데 두고가자고 지시하듯이 말했다고 한다. 경찰에 붙잡히더라도 한성여학교라는 말은 끝내 하지 말라고도 다짐했다는 것이다. 영숙 양은 새 카라로 교복깃을 하얗게 바꾸어 달고 나서 유서를 이불 밑에 넣어 놓고 집을 나섰다. 유서에 적힌대로 (전략) “저는 아칙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은 알고 있습니다. 저 고함소리 지금도 들립니다. 지금 저의 마음은 아무튼 바쁩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후략) 하고 뛰쳐나갔던 것이다. 어머니는 울지 않으련다 했지만 뼈를 깎는 슬픔을 어찌하랴, 서울서 크게 데모가 터져야한다던 영숙이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 김주열 군의 시체 이야기가 신문에 났을 때 그 애는 책상에 엎드려 울었어요. 19일 아침 학교에 나가면서 하는 말이 “오늘 우리 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고등학생들이 안 하면 우리 클라스 친구들을 선동해서 나설테야.” 하기에 염려가 되어 너는 공부나 할 일이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었지요. 김여사의 독백은 영숙이가 아직도 어머니 몸속에 있었던 8.15 해방 당시로 돌아가 영숙이를 불러보는 것이었다. “영숙아. 엄마는 1945년 가을에 아빠랑 너의 언니 오빠와 함께 하얼빈 만주를 나섰다. 두만강을 걸어넘어 고향인 청진에 닿을 때까지 그간의 고생스럽던 노정을 어찌다 말하겠느냐. 더구나 엄마는 너를 담은 무거운 몸이었으니까. 그래 그 다음해 5월 15일에 너를 청진에서 낳았는데 아빠가 고향인 수원으로 떠나는데도 네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너와 나만이 뒤에 처졌다. 너의 백일 무렵에야 수원으로 왔었지. 네가 두 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6.25 때 엄마가 괴뢰군에 끌려가 너를 안고 매를 맞았을 때 겁에 질려 울어대던 너의 모습이 엊그제 일 같다. 1.4 후퇴 때 부산 피난 2년 후에 수원으로 돌아와 네가 팔달유치원에 다닐 때랑 초등학교에서 늘 무용반에 뽑혀 즐거웠던 일. 이젠 너는 가버리고 그 날의 사진만이 이렇게 어미 마음을 헝클게 해줄 줄이야. 3학년 때 서울 돈암초등학교로 전학와서 무럭무럭 자라던 너, 한번 크게 앓아본 적도 없었던 너 영숙이가 아니었더냐. 그렇다 다시 엄마는 슬픔을 거두련다. 너의 정신을 밝히고 새 공화국의 탄생을 네 무덤 앞에 보여주게 될 그날을 약속하며. 이젠 울지 않으련다. 경향신문 1960. 5. 11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113
  • 저는 가겠습니다. 한성여중 2년 진영숙 지난 4월 19일 서울의 대학생들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하여 총 궐기하자 나어린 남녀 중학생들도 언니 누나에게만 맡길소냐고 앞을 다투며 혁명 대열에 용감히 참가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거룩한 죽음을 당한 어린 학생들이 많았음은 국민들의 가슴에 분노와 슬픔을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그 중의 한 사람인 한성여중 2년생 진영숙 양이 혁명대열에 참가하기에 앞서 남겨놓은 유서입니다. 진양은 삯바느질로 자기를 학교에 보내주신 편모슬하에서 언니오빠의 네 식구가 난속에서도 굳건하게 공부하다 19일 학생혁명에 참가해서 자유를 외치다 미아리에서 무차별 사격을 받고 희생된 학생입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의 모든 친구는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 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해서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 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경향신문 1960. 4. 30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112
  • 딸이 죽던 날은 꼭 20일 전인 4월 19일이었다. 그 무렵 딸은 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올랐다는 신문 기사를 잃은 뒤 딸은 책상에 엎드려 우는 날이 잦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딸이 울면서 “공산당 나쁘다더니 공산당 같은 짓을 한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죽은 당일 날도 딸은 학교에 나가면서 혼잣말처럼 “오늘 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고등학생들이 안하면 우리 클래스 친구들을 선동해서 나설 테야”라고도 했었다. 어머니는 소란스러운 시국 속에서 이러한 말을 중얼거리는 딸이 염려스러워 “너는 공부나 할 일이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단단히 말하면서 딸의 돌출행동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모습이 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딸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던 친척 아주머니만 있었다. 대문 밖 골목에는 딸이 데리고 온 학교 친구 50~60명이 서성대고 있었다. 친척 아주머니가 차려준 저녁상을 밀쳐놓은 채 딸은 어머니를 보기 위해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이 지나도 어머니를 볼 수 없자 딸은 무엇인가를 바쁘게 연필로 적고는 친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 편지는 딸의 유언이 되었다. 그날 밤 딸은 미아리고개에서 버스를 타고 시위를 하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딸의 이름은 진영숙陳英淑이었다. 당시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 2반에 재학 중이었다. 이 무렵 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아가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고 더러는 죽음을 당하거나 혹은 부상을 입은 경우도 있었다. 진영숙의 사례는 그 일부에 해당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318-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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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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