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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0년대에 일찌기 독일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바이얼리니스트로, 작곡가로 활약했던 고 채동선씨 53년 부산 피난지에서 52세로 작고한 부군을 기념하기 위해 부인 이소란여사(76)가 이번에 2천만원의 기금으로 채동선음악상을 제정, 8일 제1회수상자 김원복씨(72) 에 대한 시상식을 갖는다.
가곡 『그리워』, 합창곡 『새야새야 파랑새야』, 교풍곡 『조국』 등 1백여편의 작품을 남긴 작곡가 채동선 씨. 부인 이 여사가 눈물로 회상하는 남편은 『말은 별로 없었지만 사랑이 깊은 사람』이다.
『중앙일보』 198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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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 출생. 서양 음악을 토착화한 작곡가이다. 홍난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일본과 독일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운다. 1929년 귀국하여 독주회와 현악4중주단 활동을 하고,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고향>을 발표한다.
이무렵 피아니스트 이소란과 혼인하여 성북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일제 강압이 심해지자 칩거하여 창씨개명에 반대하고 우리 민요와 국악을 채보하는데 열중한다. 해방 후 <동백꽃>,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을 작곡하였다. 합창음악과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가져 고려합창협회를 조직하고, 민요를 편곡한 합창곡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가며 마당, 장독 구석마다 악보를 묻어 두었다. 피난 중에 세상을 떠나고, 10년 뒤에서야 악보가 마당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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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양음악은 홍난파, 현제명, 채동선 등 1세대 음악가들이 등장하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채동선은 1930년대부터 한국 음악계를 이끄는 역할을 하며 민족의 정서를 가곡에 담기 위해 노력한다. 채동선은 1933년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여 가곡 <고향>을 만들었다. 정지용의 월북으로 노래가 금지되자 이관옥이 새롭게 가사를 써서 <고향 그리워>라는 노래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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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선(蔡東鮮) 1901-1953
작곡가. 전남 보성 출생. 독일에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 독주회(4회)를 열었고, 많은 독창곡을 작곡하였다. 작품으로 가곡 <추억>, <동백꽃>, <그리워>, <향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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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 졸업 후 베를린에 유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운 뒤 1929년 귀국
19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1932년 <고향>, <내 마음은>, <바다> 등을 작곡
피아니스트 이소란과 결혼 후 성북동 언덕에 양옥집을 짓고 생활
※ 성북동 183-17번지(현재 당시 가옥 보존)
6.25전쟁 때 피난지 부산에서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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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 채동선
주소(현재) : 성북동 183-17
분야 : 음악(작곡)
비고 : 이소란의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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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나라를 위해 맞섰던 성북인들
성북동의 대표적인 작곡가 채동선도 경기고보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 당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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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선은 나라를 빼앗긴 작곡가의 임무가 서양의 음률을 빌려 새 노래를 작곡하는 것에만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식민 지배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가는 우리의 노래들을 찾아 거두어 보전하는 일 또한 음악하는 사람들의 사명 가운데 하나라고 믿었다.
채동선은 일제강점기 '평범한 사람의 저항하는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다. 어쩌면 그는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태어났고 살고 있는 땅에서의 불합리와 민중이 느끼는 아이러니함을 함께 소통하며 당대 지식인으로서 가야 할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든 역경의 세월에서 누군가는 투사처럼 강하게 저항을 하였고 누군가는 시대에 편승하여 이익을 추구했다면 채동선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저항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백외준, 성북동발 신문화운동과 채동선의 음악활동 -채동선 탄생 117주년 기념행사 '성북동, 시민과 시인의 노래'를 돌아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