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수
1958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지역활동가
인물 개인 교육가
시인이자 시민활동가이다. 최성수는 1968년부터 50년 넘게 성북동에서 살았다. 30여년을 교사로 재직하면서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등의 시집을 냈으며, 청소년 소설 『비에 젖은 종이비행기』, 『꽃비』 등을 내기도 하였다. 퇴직 후에는 성북동 주민과 지역의 공익ㆍ비영리 활동가, 기획자 및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설립한 모임인 ‘성북동천’에서 활동하며, 성북동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성북동을 주민들이 어울려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을로 만드는 데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성북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근거자료 원문

  • [ 55 ] 최성수(시인) 1. 인터뷰 개요 ○ 피면담자 성 명 : 최성수 주소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직 업 : 시인이며 청소년 문학작가. 시집 『장다리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천 년 전 같은 하루』, 『꽃, 꽃잎』을 냈으며, 청소년 소설 『비에 젖은 종이비행기』, 『꽃비』, 『무지개 너머 1,230마일』을 내기도 함. 성북동에 50년 가까이 살며 ‘성북동천’ 등의 마을 단체에서 활동 중임 ○ 면담자 : 박수진(성북문화원 향토사연구팀장) ○ 면담 일시 : 2016년 4월 1일 오전 10시~12시 ○ 면담 장소 : 성북동 거리(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수연산방까지) 2. 인터뷰 내용 ·박수진(이하 박) : 선생님 제가 알기로는 이제 68년에 이사를 왔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찾아보니 성북동에 대해서 시도 많이 쓰시고 수필 같은 것도 쓰시고 하셨는데 혹시 이제 성북동에 대한 애정은 어떻게 보면 살다가 자연스럽게 생긴 건가요? ·최성수(이하 최) : 뭐 처음에는 제가 서울에 올라 올 때만 해도 성북동이라는 데가 딱 성북동이라서 온건 아니고 아버지 따라서 그냥 초등학교 때 올라온 거니까 그런 생각이 없죠. 그냥 사는데죠. 사는데. 근데 여기서 오래 살다보니까 뭐 우리 애들도 성북동에서 태어나서 성북동에서 학교 졸업 다 하고 뭐 그런 과정이니까 여기가 삶에서 생긴 애착인거죠. ·박 : 선생님 그런데 이거 약간 제가 전공이 역사이고,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선생님이 만약 이사 온 동네가 그 당시에 약간 강남이나 이런 동네였다면 이런 애정이 생기셨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거든요. ·최 : 그렇진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여기는 사람들이 이동이 별로 없는 동네라서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래 살죠. 뭐 제가 68년부터 살았으면 꽤 오래 살았는데도 뭐 이 어른들 보면 저보다 훨씬 오래산 분들도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그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성 같은 게 있을거에요. 그런데 강남이라면 그런 게 없겠죠. 당연히. 거기야 뭐 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이주된 것처럼 거기도 이주된 곳일 뿐이니까. 삶의 근거지가 되기는 힘들었겠죠. 그런 면에서 성북동이기 때문에 그런 애착이 생겼다고 할 수 있어요. ·박 : 그러면 선생님 68년에 이사 오셨으면 지금부터 거의 50년 전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벌써 지금 여기도 한옥 3개가 헐리고 건물이 순식간에 이렇게 들어서고 있는데 ·최 : 서운하죠. ·박 : 저도 서운합니다. 산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도 서운한데 선생님이 처음 이사 왔던 시절에 성북동의 모습은 어땠을지 되게 궁금하거든요. 아무래도 성북천도 아직 개발되기 전일 것이고 그때 모습은 조금 어땠나요? ·최 : 그때는 여기는 그냥 시골 같았어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사는 시골. ·박 : 아.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사는 시골? ·최 : 그러니까 보통 시골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었는데 그 여기는 더 많이 몰려있는 시골 같은 느낌? 그러니까 뭐 책들도 다 나직나직하고 한옥집도 많은 집들은 왜 루핑집이라고 그러죠? ·박 : 이렇게 생긴 집들이 많았던 거죠? ·최 : 그렇죠. 이정도 골목이면 그래도 꽤 괜찮은 골목이었죠. 옛날에는. 이 밑에는 이렇고 저 산동네는 가난한 루핑집이나 판잣집 같은 것들이 있었고. 많이 바뀌었지만 제가 서울에서 살면서 다른 동네에서 겪였던 것보단 훨씬 덜 바뀐거에요. 저렇게 공사하고 이러는 게 사실은 성북동이 갑자기 저렇게 바뀌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에요. 그러니까 이 쪽 재개발 추친됐던 한 십년전? 한 십몇년전쯤에 재개발이 추진된다고 하니까 투기꾼들이 모여들고 부동산이 들어오고 그러면서 주변에 가게들이 많이 생긴 거죠. ·박 : 역시 재개발 문제가 가장 많이… ·최 : 그러니까 오히려 성북동의 정체성을 재개발이 없애버리게 된 거죠. ·박 : 저는 그러면 또 궁금한 게 요즘 서울시에서도 마을 만들기다 뭐다 사업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여기도 뭐 또 하나 없어졌네. ·최 : 여기도 금방 없어졌어요. 무섭죠? ·박 : 와 진짜 무섭네요. 저 여기 없어진지도 몰랐어요. 저 여기 되게 자주 다니는 데인데. 저도 사실 성북동 살거든요. 산지 한 성북동에 산지가 저도 이제 한 3년 정도 됐는데 이렇게 막 없어지는 건 아주 최근인 것 같습니다. ·최 : 최근이에요. 여기가 이제 사람들이 몰리고 그러니까 한옥들이 다 없어지는 거죠. 근데 이게 뭐라 그럴 수도 없는 게 집주인들이야 뭐 이렇게 집값 올려 받고 건물지어서 어쨌든 그 삶이니까, 생활이니까 뭐라 그럴 수 없는데 이런걸 보면 답답하죠. ·박 : 저 근데 너무 아쉽네요. 이게 이렇게 없어졌는지는 생각도 못해가지고. ·최 : 제가 제일 아쉬워했던 게 저 위에 전등사 옆에 전등사 들어가는 입구에 한옥이 정말 좋은 게 있었거든요. 근데 어느 날 가보니까 싹없어졌더라고요. 그 절에서 구청에 기부체납해가지고 그래가지고 거기다 보육원인가 뭔가 짓는다는 소문이 있는데 근데 한옥을 뜯어내고 그런다는 게. 근데 뭐 없어지는 건 아쉽지만 주인의 입장으로서는 그런 것도 아니고. ·박 : 사유재산이라서. ·최 : 그러니까 한옥을 보존하려면 보존할 수 있는 대안이 있어야 될 것 같아요. 그냥 뭐 ‘한옥이 아까우니까 뜯지 않아야 된다’ 이런 게 아니라 그 한옥에 사는 사람들이 거기에 자기 집에 자부심을 갖고 살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이득이 되는 대안들이 제시되지 않으면 계속 없어질 거예요. 이거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73-274쪽
  • ·박 : 아까 전에 없어져서 충격을 받아서 이야기가 좀 돌아갔는데 이제 서울시에서 마을 만들기 사업 같은 거를 하고 있는데 선생님 오셨을 때 사람이 많이 사는 시골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사람이 많은 시골이라는 표현에는 시골 같은 마을공통체가 존재했다라는 말씀이시죠? ·최 : 했었죠. 뭐 음식하나 만들어서 다 같이 나눠먹고 이웃집에 뭐있는지 다 알고 수시로 모여서 함께 어울리는 그런 문화가 있었죠. ·박 : 저는 요새 최근에 생각하는 게 저도 얼마 전에 이제 이쪽 일을 하다 보니까 인터뷰를 할 일이 생겼는데 저한테 마을 만들기 사업에 대해 어떤 분이 여쭤보길래 젊은 사람들은 마을만들기 사업에 관심이 있는 여유가 없다고 얘기를 했거든요. 왜냐하면 집이 없으니까 2년마다 이사 다녀야 하는데 2년마다 이사 다니는 사람들이 마을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최 : 그렇죠. ·박 : 근데 그 당시에는 그러면 선생님 말씀대로 오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장기간 거주하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고 아무래도 주거공동체가 아니고 직업공동체로서는 마을이 존재하진 않았던 것이죠? 그 당시에는. ·최 : 그렇죠. 그런 의식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근데 이게 저는 우리 사회가 변화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 시기에만 해도 집에서 돈을 버는 사람이 아버지 혼자였어요. 그러면 나머지 식구들은 집에서 살림하고 다른 학교 다니고 하는 식구들인데 그러면 동네공간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죠. 근데 지금은 그게 없는거죠. 젊은 사람들은 더 그렇고. ·박 : 젊은 사람들은 거기서 요새 다 친구들도 맞벌이를 하니까 집은 거의 자는 공간이고 하니까 교류할 수 있는 그게 없어져서. ·최 : 그렇죠. 이 골목이 아마 성북동에서 거의 드물게 옛날 모습으로 있는 골목일거에요. 내가 일부러 이쪽으로 오자고 했는데. 차도 못 들어오잖아요 여기요. 이 집이 예전에 솜틀집이었거든요. 솜틀고 이랬던 집이죠. ·박 : 이쪽 골목도 다 옛날 스타일인 집이죠? ·최 : 다 옛날 스타일. 도로 포장은 했지만, 보도블록을 깔긴 했지만 옛날 모습이죠 이게. 성북동이 특징이 이런 골목이 있는 것도 특징이지만, 이 집들이 우리가 뭐라 그러냐면 전통 가옥은 아니라도 근대 건축 양식이 하나인 양옥집 같은 것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것들도 우리가 이제 보존을 해야 하거든요. ·박 : 저도 문화원에서 일 하면서 공부를 하다보니까 이쪽이 1936년, 7년쯤에 이제 도시구획정리사업,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들어오면서 소위 말해 근대 한옥들이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지금 벌써 그게 80여년, 90여년 지난 일이라서 벌써 이게 저희 생각에도 일종의 문화재로서의 일종의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을 하고, 지금 이게 성북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문동 뭐 돈암동 다 있었는데 지금 너무 다 사라져서 아쉽습니다. ·최 : 성북동도 많이 없어진 거예요. 거의, 거의 뭐 별로 없죠. 그 한옥을 살리려면 한옥을 보존하는 데에 대한 혜택도 있어야 되고 이제는 그냥 있는 한옥만 살리는 거 가지고는 안 될 거예요. 그니까 가령 이런 빌라라든가 다른 집들이 이 한옥으로 집을 개조하면, 다시 하면 어떤 보조를 해준다던가 이래가지고 하나하나 해야지. 뭐 한옥마을을 만든다 이래가지고 만들어 지는 거는 아니잖아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74-275쪽
  • ·박 : 그렇죠. 선생님 그러면 저는 제일 궁금한 모습 중에 하나가 성북동에 대해서 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성북천의 모습이거든요. 선생님 어린 시절에 성북천이 이렇게 흘렀을 텐데 그 때 성북천은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모습이었는지 되게 궁금하거든요. ·최 : 그 조선시대나 뭐 이 일제시대쯤에는 안 그랬겠지만, 조선시대나 일제시대는 기록에는 보면 맑고 깨끗하고 저 선잠단지 있는데 사한이라고 그래서 뭐 그런 게 있었는데 제가 서울에 왔던 그 무렵은 소위 그 전쟁 후에 애들 많이 낳고 그랬던 그 시기였기 때문에 여기에 그 무렵에 사람이 많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니까 성북천이 있긴 했지만 완전히 쓰레기장이었죠. 깨끗하고 그런 게 아니고. 이게 성북천이거든요? 이 도로 이쪽이. 저 쪽이 인도 있는 가로수 있는 쪽이. 이건 다 하천이였죠. 근데 뭐 연탄재 다 갖다버리고 쓰레기 갖다버리고. 저 삼선교 쪽 육교 있던 쪽에는 그 밑에 쪽에는 염색했던 사람도 있었고. 닭 잡는 사람도 있었고. 그 우리가 생각하는 깨끗한 성북천은 옛날이에요. 옛날. ·박 : 이미 이제 60년대 후반이면 이미 소위 말하는 산업화 시대에 들어왔던 시절이라 아무래도 인구도 많이 몰려들고 하다 보니까. 그러면 뭐 여름에는 막 악취도 나고 그랬겠네요? ·최 : 아니 그 시기는 어땠냐면, 저 한강에 나가면 똥물이 둥둥 떠갈 땐데요 뭘. ·박 : 아 지금 뭐 환경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했던 시절이 아니라서. 또 이쪽에 선생님이 제가 알기로 시인이기도 하시고 하니까 이쪽에 그러면 사시면서 문학가 같은 분들 있잖아요. 워낙 많은 문학가들이 사셨는데 그 문학가들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생기신건가요?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최 : 뭐 성북동에 살아서 성북동에 사는 문학자들을 안건 아니고요. 제 전공이 문학이니까. 그리고 뭐 시를 쓰니까 그 일반적인 공부를 하다가 성북동에 그런 게 많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거죠. 뭐 그때 사는 사람들이 여기에 누구 시인의 집이 있고, 누구 화가의 집이 있고 이런 것은 모르죠. 그냥 그 당시에 성북동에 살던 예술가들도 내가 성북동이라서 산다는 개념이 아니에요. 그냥 사는데였죠 뭐. ·박 : 여기가 우연히 이사 온 지역이 뭐 이쪽일 수도 있는 거고. ·최 : 사회적으로 보면 이런 데 같아요. 성북동이. 운수 좋은 날에도 이쪽이 나오고 김훈의 소설에도 여기가 나오더라구요. 요새 나오는 소설에도 많이 나오고 그러는데. ·박 : 조정래 『한강』에도 나오더라고요. ·최 : 한강에 나오는 데는 저기 동천학사. 거기. 동천학사가 지금 저기 설렁탕집 있는 도가니탕 있는 그쪽인데. 조정래 선생이 동구여상, 동구여중 선생을 했잖아요. 그래서 동천학사가 전라도 학사였어요. 그래서 그랬고, 여기 뭐 이 사람들이 잔뜩 모여 사니까. 내가 뭔 얘기를 하려고 그랬지. ·박 : 아니 뭐 이쪽에 동천학사 아까 얘기 하시다가. 문인들 얘기하시다가. ·최 : 아 문인들. 그 사회학적으로 문인들이 여기 많이 살고 그런 이유가 그거에요 보면 이게 이제 시내는 아니잖아요. 성곽 밖이니까. 근데 시내가 제일 가까워요 여기가요. 근데 옛날에는 스카이웨이, 저 쪽으로 삼청터널도 없었고 길이 없었으니까 이리 삼선교쪽으로 해서만 나갈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경신중고등학교 쪽으로 난 길도 옛날엔 무서워서 잘 안다녔어요. ·박 : 무서웠구나. 그쪽도. ·최 : 예, 거기 어두컴컴하고 침침하고 뭐 사건도 많이 나고. 그래서 거의 이쪽으로만 다녔거든요. 그리고 마을이 지금처럼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있고. 그 사대문 안이 가깝고. 뭐 사대문이라고 그렇기까지는 뭐하지만 그 시기는 가깝고. 시내에서 가깝고 그리고 소문이 뭘로 났냐면 그래도 여기는 서울답다. 서울 같다. 그래서 여담이지만 우리 아버지가 옛날에 성북동에 저 산동네로 이사를 시골에서 오셨는데, 그 무렵에 누가 창동에 미다리꽝이라고 그러는데 거기다가 땅을 사라고 여기 사지 말고. 그럼 여기에 한 몇 십 배를 살 수 있었나 봐요. 그때는 허허벌판이니까 거기 옛날에 제가 고등학교 다닐때만 해도, 제가 신일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만 해도 거기가 완전히 벌판이었거든요. 집들도 별로 없는. 거기는 수유리인데도 그러는데 창동은 더했죠. 그러니까 거기 땅을 사라고 하니까 그런 시골구석에 내가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또 거기 가서 사냐고 땅을 안사셨대요. 그럴 정도니까 성북동은 비교적 시내하고 가깝고, 사람들 인식 속에 그 당시에는 성북동이 부자다 이런 개념보다는 그래도 서울에 가까운데다, 서울이다 이런 느낌이 있었던 거죠. 지금 서울 그러면 온갖 모순과 문제가 있지만 그 당시의 서울은 사람들의 꿈이었잖아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75-276쪽
  • ·박 : 그렇죠. 저는 또 하나 궁금한 게 사실 지금 저 한옥들이 예전에는 쭉 한옥들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저는 이 제 기억 속에는 없지만, 이쪽에 보면 조지훈 집터도 있고. 혹시 고런 댁들은 기억나는 풍경들이 좀 있으신가요? 이 쪽까지 많이 올라 오셨었나요? 선생님 예전에 사셨을 때. ·최 : 우리 집이 이 근처에요. 이 집은 헐리기 전에 아시죠? ·박 : 아니, 잘 모르겠는데요. ·최 : 여기가 이 동네에서는 꽤 부자 터였는데, 여기가 담이었거든요? 여기가 담이고. 이게 이제 양옥집인데 원래. 지금도 이게 양옥집 틀이에요 그대로. ·박 : 그 틀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건가요? ·최 : 예. 1층, 그 다음에 2층 이렇게 돼 있고 뭐 난간도 있고 그런 틀이고. 요 건물이 있던 데는 여기는 밭이었어요. 그냥 밭이 아니고 집안에 있는 밭. ·박 : 아 이 집의 밭같이? ·최 : 이 하나가 다 하나의 터였어요. ·박 : 엄청 컸네요. ·최 : 네. 부자였죠. 그런데 집은 낡은 양옥집이었는데 그 잔디도 깔려있고 그랬었어요. 이게 평평하고. 지금은 돋구어 졌잖아요. 그랬는데 이걸 어느 날 갑자기 헐더니 이쪽은 건물을 짓고 이쪽은 이렇게 바뀌어 버린거죠. 그래서 너무 아까워했어요. 제가. ·박 : 이 댁은 지금 만약 건물을 본인들이 짓고 한 거 면 돈을 엄청 버시겠는데요. ·최 : 그 원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이국신씨라는 사람 집이었는데, 근데 돌아가시고 그리고 저기 아들들이 이렇게 나눠가졌대요. 저쪽하고 이쪽하고. 그래가지고 저쪽에는 건물을 짓고. ·박 : 이쪽은 이렇게 하고? 선생님 댁은 이쪽에서 어느 쪽이셨어요? ·최 : 여기에요 여기. 이쪽이 가장 옛날모습이 있는 양옥집들인데 한번 가보실래요? 여기는 이쪽은 다 한옥이었고 옛날에. 이런 한옥들. 여기는 이제 좀 낡은 양옥이었고. ·박 : 저는 돌아다니긴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쪽을. 옛날에 어땠는지는 제가 알 수 없으니까 돌아다니면서 사진만 찍고 이렇게 하긴 했거든요. ·최 : 길은 똑같아요. 옛날하고. 포장이 달라지긴 했지만 넓이는 똑같고. 다 여기는 한옥집들이었고 아니면 부르크집. 블록집. 그런 것들이었죠. 그래서 이렇게 바뀌어 버린 거죠. 그래도 크게 바뀐 건 아니에요 이건요. ·박 : 그래도 이 동네는 여전히 쌀 상회도 있고, 서울 시내에는 이런 거 거의 없잖아요. ·최 : 이게 바뀌어도 이제 이게 한옥이거든요? 앞을 요렇게 해가지고 예쁘게 만들어놨잖아요. 여기 이민우씨라고 그 구체관절 인형하고 미술 하는 분이 사가지고 했는데 요렇게 바뀌면 오히려 옛날 모습하고 잘 현대화되는 그런 게 있는데. 한번 들어가 보실래요? 제가 아는 집이니까. 근데 막 뜯어부시는 거하고 확 다르잖아요. 이 정도면. 예쁘죠? 이게 다 하신거거든 민우씨가. 원래 이게 옛날 전형적인 한옥이에요. 조그만 한옥이었는데 요걸 요렇게. 원래 한옥이 이렇게 ㄱ자거나 ㄷ자거든요. 이렇게. 근데 큰 집은 아니고 그냥 이 시기에, 그 시기에 적절한 집. 그 정도인데 이렇게 현대화하니까 옛날 모습도 있고 깔끔하기도 하고. ·이민우(이하 이) : 시멘트가 덮혀 있었는데 벽 같은 경우에는 다 까낸 거에요. 단열문제 때문에 중간에 여기다 그냥 보드 몇 개 더 대시고 그게 시멘트 바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게 못을 쳐서 못 위에 시멘트를 바르면 시멘트가 들러붙으니까 이런 식으로 이제 못 자국이 남아 있는거에요. 그런 못 자국이. 여기 못 자국이 수 백 개가 박혀있어요. 바르려고, 어떻게든 붙이려고 시멘트를. ·박 : 저 문화원에서 일하는데 이번에 책도 내고 해서 책도 들고 한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저희 요번에 성북동 역사를 가지고 나름대로 정리해서 나름대로 책을 한권을 냈거든요. 선생님 덕분에 알게 됐으니까 한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성북동 살아서요. ·최 : 문화원 이런데서 성북동을 살려줘야 우리도 잘 살지. 여기도 원래 재개발 구역이에요. 포함 되있는데 이렇게 이렇게 애써서 예쁘게 가꿔놓은 것들을 살려주지 않고 부시겠다는 문제인거죠 이거는. ·박 : 구청장하고 만나서 그 때 구청장이 기자간담회 할 때 기자들한테 성북동 좀 안내해주고,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를 들었는데 구청장도 되게 답답해하더라고요. 사유재산이라 조례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최 : 이번에 통과됐잖아요. 법이. ·박 : 어떻게든 자기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될 줄 모르죠. 좀 있어봐야죠.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76-277쪽
  • ·최 : 여기가 이제 전형적인 옛날 양옥, 그리고 조금, 쪼끔 부자인, 많이 부자 아니고 조금 부자인 동네 쪽이죠. 이쪽이. ·박 : 그럼, 더 높게는 많이 안 사셨나요? 저 위까지 많이 사셨나요? ·최 : 아니요. 여기가 끝이에요. 여기가 홍익 있는 데가 끝이고, 저쪽이 채석장이었고, ·박 : 아, 저 위에가 채석장이구요 ·최 : 홍익 있는 데가 저쪽이, 홍익 고등학교가 그 돌 깨가지고 마당 넓히고 그랬잖아요, ·박 : 그럼 이제 요 정도까지가 있던 거에요? 요 정도까지? ·최 : 아니 요기도 있었죠. 여기도, 지금. 한번 가보실래요? 이쪽으로 가죠, 뭐 ·박 : 가봤습니다. 얼마 전에, 봄이 돼서 며칠 사이에 꽃이 폈네요. ·최 : 전형적인 양옥집 스타일인거죠. 이런 것들이 옛날에 이정도면 중산층 이상이었죠. 거의, 정원 있고, 이 빌라들도 옛날에 다 빌라 아니었어요. ·박 : 이런 양옥같이.. ·최 : 예 아 요런 집들이죠. ·박 : 아 딱 요런 집들이 비슷했겠구나, 아, ·최 : 예에, 이어져있었죠. 아마 서울에서 요렇게 그, 전통 양옥집 스타일이 보존되고 있는 데는 요기 정도가 드물게 있는 걸껄요? ·박 : 양옥은 한 6,70년대 대부분 만들어진 것은 7,80년대? ·최 : 아니에요, 훨씬 전이죠. ·박 : 아 훨씬 전에 만들어졌어요? ·최 : 그니까, 한, 한, 뭐라 그래야 하나, 한 60년대겠다. 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그 쯤 되죠. 이런 집들도 전형적인 옛날 양옥집이고. ·박 : 선생님, 조지훈 집터 앞에서 우리 직원 한 명 만나기로 해가지고, 카메라 가져온다고 해서 ·최 : 아, 그래요? 그럼 도로 내려가야되겠네. 여기 다 이런, 이런 쪽으로 쭈욱 저 위까지 올라가 있고, 저기 꼭대기에는 옛날에는 집이 없었죠. ·박 : 아, 집이 없었구나. ·최 : 그냥 산이고 ·박: 저기, 저쪽은 어땠어요? 경신고 쪽은, ·최 : 저기 저쪽도 비슷해요. 지금이랑 비슷해요. 거기도 빌라들 들어선 거 말고는. ·박 : 아, 한옥들 쭉 있고. ·최 : 예에, 한옥에 양옥에 뭐 이런 블로크 집에 뭐 이런 거 있죠. 한옥은 그 전에 일제시대나 요 무렵부터 계속 이어진 집들이고, 그담에 그 양옥, 요런 집들. 양옥집 요런 것들은 고게 교체되는 시기에 지어진 집들이고, 그 다음에 돈이 없는 집들은 블록 집을 지었고, 제일 많은 거는 블로크 집이었을거에요. 여기가, ·박 : 블로크집은 남아있는 게 지금 없죠? ·최 : 저기 3번지 일대에 가면 있죠, ·박 : 3번지 일대? ·최 : 예, 거기 많이 있어요. ·박 : 선생님, 저쪽 안으로 들어가면 조지훈 집터 있죠? ·최 : 예예, 알고 있습니다. ·박 : 그 집도 기억이 나시겠네요? ·최 : 그냥 한옥이였어요, (당시에는 누구 집인지는) 모르고 그냥 한옥이었죠. ·박 : 한옥이었다… 아… ·최 : 여기 최순우 옛집도 옛날에 최순우 선생 집이었는 걸 몰랐어요. 그냥 ·박 : 다들 그러시죠. 하하하 ·최 : 그냥 학자가 뭐 하나 있나보다 그랬을 뿐이지 최순우 선생님 뭐 그렇게 널리 알려지시지도 않았었으니까, 그 시기에 뭐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그 골목을 그냥 두부골목이라고 불렀어요. 그니까 최순우 옛집 바로 앞에 옛날에 두부공장이 있었어요. 요쪽으로, 밑에 쪽으로, 그래가지고 거기를 두부골목이라고 그랬죠. ·박 : 저 어린 시절만 해도 저희가 식당을 했는데 아침에 동네 두부가게 아저씨들이 두부 한판씩 주고 가시면 그거 잘라서, 이렇게 그런 게 다 없어져가지고 그런데 아 여기도 저쪽에 있었구나. 두부골목이. ·최 : 그니까 여기가 두부골목이야 여기 크리닉 있는 안쪽이, 아침마다 두부 사러 가기도 하고 두부 배달도 다니고 ·박 : 그, 이쪽으로 들어가면 조지훈 집 있잖아요? 그러면 이쪽도 다 그냥 한옥 식으로 쭉 있던 거죠? ·최 : 그렇죠, 이 집은 이거보다 한창 낮은 그냥 양옥이었고, 목욕탕, 목욕탕, 건물이었죠. 그리고 나머지는 다 한옥이었어요. 이것도 다 속이. 한옥이었고 ·박 : 이것도 지금 속은 한옥인 것 같아요 ·최 : 예, 한옥일거에요. 앞에만 이렇게 해놨지. 여기 다 한옥이었어요 여기. 그리고 여긴 하천이었고, ·박 : 아, 여기가 ·최 : 예, 여기가 하천이었어요. ·박 : 이것도 여기 덮이면서 같이 덮인 건가요? ·최 : 여기가 하천이었고, 여기 샘물도 있었고, 요기 ·박 : 아, 샘? 아~ 샘이 있었어요? ·최 : 한옥집에 마당에 샘물이 있었고 ·박 : 샘은 되게 맑았겠네요. 그래도, ·최 : 그렇죠. ·박 : 아, 이쪽 물은 비교적 깨끗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최 : 깨끗했죠, ·박 : 저쪽 물은 좀 더러워도 이쪽은… ·최 : 근데 여기도 이제 다 연탄재 갖다버리고, 뭐 쓰레기 갖다버리고 그러니까 ·박 : 아, 비교적? ·최 : 옛날에는 쓰레기를 치워주지도 않았으니까, ·박 : 그쵸, 요새나 치우는 거지. 아 그럼, 저 한옥도 그러면 지금 있는 저쪽이 저 뒤에 있는 한옥들이랑 비슷했겠네요. ·최 : 저거는 그대로에요. 이것도 그대로고 이런 한옥들은 옛날 그대로에요. ·박 : 요 자리가 조지훈 집터니까… 비슷했겠네요. 크게 모양이. ·최 : 이것도 한옥이거든요. 여기도 한옥이 있었고. ·박 : 여기 한옥이 다 없어졌네. 여기 두 개만, 이쪽에서, 지금 보니까. ·최 : 예, 뒤에는 한옥이고 그랬어요. 다. 아직 안 왔으니까 한 바퀴 뒤로 보실래요? ·박 : 네네. ·최 : 그니까, 이쪽은 한옥이고 여기는 쫙 다. 그 다음에 여기가 3번지 일대인데, 요기가 소위 재개발을 추진하다가 지금 멈칫한… 저기 다 블록 집이고. ·박 : 아, 저런 집? 사진 좀 잠깐 찍을게요. ·최 : 예예, 거기도 옛날에는 계단이 없었어요. 그냥 비탈길이었지. ·박 : 아 그냥, 비탈길로 쭈욱. ·최 : 예, 옛모습이 그대로 있는 거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77-279쪽
  • ·박 : 제가 선생님 인터뷰도 보고 글도 쓴 거 보다가 요즘 본 시 중에 성북동에 대한 시를 발견했어요. 되게 변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게 많이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워낙 덜 변했다고 하더라도, 옛모습, 근데 어쩌면 겉모습보다도 더 아쉬운 게, 사람들이 공동체가 없어졌다는 게 좀 제일 아쉽긴 아쉽네요. 이런 생각도 좀 들구요. ·최 : 그… 그게 더 심하죠. 이게 사람들이 잘 어울리고 그, 재미있는 게 제가 작년 정월 보름 무렵인가 북정마을에 갔었는데, 우리 집이 옛날에 요 산꼭대기에 살았거든요. 처음에. 근데, 그 북정마을이면 저쪽이잖아요. 집사람하고 산책을 하다가 그 날 거기 무슨 월월축제는 아니고 동네 사람들끼리 떡 해먹고 노는 날이었나봐요 근데 지나가는데 떡 먹고 가라고 막 붙들더라구요? 국도 먹고 가라고, 그래서, 붙들려 갔는데… 어떤 할머니가 절 보고 어 옛날에 저기 그 3번지에 살던 친구 아니냐고 그 아들 아니냐고 누구 아들 아니냐고…. ·박 : 아아, 기억하시는구나. ·최 : 네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아 그렇다고 어떻게 아시냐고 그랬더니… 왜 내가 댁에 가서 점심도 먹고 그 아마 이렇게 그 뭐 이고 팔러다니셨나봐요. 옛날에 뭐 야채 같은 거 뭐 호박 같은 거 팔고 이러니까 그게 우리집에 오시면 우리 어머니가 밥 차려주고 그러셨대요. 그게 기억난다고… 막 국도 갖다주고 떡도 갖다주고 그랬다고 그러시더라구요. ·박 : 와, 엄청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최 : 근데, 그만큼 가까웠단 얘기죠. 거기서 여기도 다 돌아다니고 서로 친하고 그랬단 얘기죠. ·박 : 한마을이네요. 지금은 마을별로 여기는 북정마을 뭐 이렇게 하지만.. ·최 : 또 하나는 여기에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가 없어지기 시작한 게, 그래도 남아있던 게 없어진 게 재개발 추진되면서부터에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는 거죠. ·박 : 찬성반대로 갈리면서요? ·최 : 찬성반대로 갈렸는데, 이게 뭐가 문제냐면. 저기 저 꼭대기들이 주로 찬성을 했거든요? 뭐 집 한 채 준다고 다 소문이 나니까는, 줄 리도 없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다 찬성을 하니까는 원주민들은 이미 다 세입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투기꾼들이 다 들어와가지고… ·박 : 보통 그렇게 되죠, ·최 : 그니까 살던 원주민들은 없어진 거죠. 거기서 그냥 세 살고 있는 거죠. ·최 : 요거는 여기까지가 옛날 한옥이었으니까 옛날 골목길이 요만한 거죠. ·박 : 요기가, 딱 조지훈 집 딱 하나만 없어졌네요. ·최 : 요 옆에가 저렇게 되고, 주차장도 생기고 요쪽은 그대로에요. 요쪽은 여기는 하나도 바뀐 거 없이. ·박 : 좀 낡아 보이기도 하고…. ·최 : 오와, 달래 나온 거봐 달래. 달랜데 이거. ·박 : 저기 뭐 치우시나 본데? 음, 선생님 오늘 좋은 얘기도 많이 해주시고, ·최 : 아유, 뭘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79-280쪽
  • ·박 : 아 근데 저희가 따로따로 이렇게 많이 뭐, 인터뷰를 저희가 직접 하는 거보다는 저희 역할은 딴 데서 한 것들을 많이 취합하는 것도 있다고 보는데, 근데 제가 또 하나 선생님한테 여쭤보고 싶은 건 이제 이미 많이 변했고 많이 지금도 변하고 있고 하는데 혹시 그 뭐라해야하지 이것만은 안 변했으면 좋겠다 뭐 이런 거 혹시 있으십니까? 성북동에서. 이것만은 좀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최 : 그니까, 제일 중요한 게 저는 그거라고 생각하는데, 성북동의 그 이, 라인. 기본적인 라인이 있을 거 아니에요. 예를 들면 길가 쪽으로 나직나직한 가게들, 조그만 가게들이 있고, 그다음에 저녁때 이렇게 성북동, 삼선교 쪽에서 들어오다 보면 저 쪽 능선으로 아직도 그게 있어요. 저 한신 아파트가 흉물이긴 하지만 쭉 올라오다 보면 이 쪽이 산 능선이 보여요. 저녁 무렵에 그 능선, 이런 것들이 여기 아파트라던가 고층건물이 들어오면 없어질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성북동의 그 고즈넉한 맛이 없어지는 거죠. ·박 : 아, 그거는 좀 지켰으면 좋겠다. 선생님 그럼 이제 선잠단지 얘기만 하고 찻집 들어가서 차 한 잔 드세요. 선잠단지는 선생님 젊었을 때 어땠습니까, 여기는? ·최 : 아, 뭐, 그냥 그 지금처럼 문화재는 아니고, 별로 돌보지 않은 공터. 나무는 있었어요. 뽕나무는, 근데 그냥 뽕나무가 있는 덴가 보다 정도? ·박 : 아, 그냥 그런 정도? ·최 : 그니까 이게 문화재다, 뭐 어쩌다 이런 생각은 하나도 없었고, 그리고 뭐 표지판도 없었고. ·박 : 그럼 그 안의 모습은 또 지금 같진 않았겠네요? ·최 : 그렇죠.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이 된 거죠. 뭐 오디 따먹으러 가고 들어가고 그랬어요. ·박 : 아, 오디가 있긴 있더라고요. ·최 : 오디 많이 달려요. 그 뽕나무 이렇게 큰 것도 드물어요. ·박 : 원래 뽕나무는 이제 좀 누에를 이렇게 해야 하니까 좀 작게 놔두는데 여기는 그냥 키워가지고…. ·최 : 예, 그래서 보존하는 데니까. ·박 : 근데 이 길이 없었지 않습니까? ·최 : 있었어요. ·박 : 원래도 있었어요? ·최 : 예, 뭐 차가 이렇게 다니지 않았으니까 한적한 길이었죠. 옛날엔 이것도 없었어요. 이 문, 홍살문도 없고 나무도 많이 큰 거죠 그때보다. 그래도 지금은 선잠단지라고 이쪽에 뽕나무를 심어놨잖아요. 이쪽에 학교, 이게 다 선잠단지였대요. ·박 : 네, 그쵸, 저희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지금은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정확히 좀 그래서…. ·최 : 뭐 일선에는 이 성북초등학교가 바위에 빨래 말리던 마전터에서 그런 데라고 얘기를 하던데? ·박 : 예, 저희가 찾은 사진만 보면 선잠단지가 이쪽에 있고, 이쪽으로도 말렸더라고요. ·최 : 내가 보기에는 그럴 거 같아요. 왜냐하면 여기가 작아요. 그 바위라 그래도, 그리고 여기가 넓은 개울이었는데. 여기가 사한이거든요? 여기가 뭐 모래 턱이 좋고 어쩌고저쩌고 그러는데, 여기서 빨래하고 그 많은 장안의 빨래를 하면 저기 아까 그 사진 찍으신 그 계단 있던 꼭대기. 거기가 다 바위거든요. 그 아까 샘 있다던 거기서부터 다 바위에요. 그니까 바위에다 말렸겠죠. 당연히 그니까 그쪽이 아무래도 마전터에 빨래 말리던 데라고 생각이 들어요. 물이 또 그리로 흘러 내려가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성락원측에서 나오는 물, 이쪽 물이 합쳐지니까. ·박 : 선생님이 68년에 이사 오신, 그럼 선생님 연세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최 : 아 그 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박 : 그러면 이쪽에서 노시면 어디까지 가서 노셨어요? 성북동. 다 노셨겠지만. ·최 : 제일 끝이 저기 스카이웨이까지 올라갔죠. ·박 : 아, 글로까지 놀러가신거에요? 스카이웨이까지? 와, ·최 : 옛날에 저기 저 간송미술관, 옛날에는 박물관이라고 그랬는데. 우리는 그냥 간송 박물관인지도 모르고 초등학교 다닐 때, 박물관이 있다고 선생님이 맨날 거기 넘어가면 큰 개가 있다. 문다. 이랬거든요? 근데 맨날 몰래 넘어가서 도토리도 줍고 막 그랬어요. 그래서 동네 놀이터였죠 뭐. 거기가 ·박 : 도성도 저런 모습은 아니었죠? ·최 : 아니였죠. 다 부서졌고, 돌들만 조금 있고. ·박 : 어떻게 보면 저기는 정비가 잘된 축이네요. 도성 쪽은. ·최 : 예, 그니까 저기가 옛날 돌이 밑에 있고 위에가 새로운 돌인 거죠. ·박 : 예, 그쵸. ·최 : 여기 가보면 아직 멀었어요. 경신고등학교 저기 담이 한양도성인데, 그 밑에가 옛날 돌이잖아요. 저 위에는 아니잖아요. ·박 : 그냥 쓰고 있더라고요. 그냥, 그게 좀 아쉬운 부분이 저희도 있습니다. ·최 : 그게 복원을 해야 하는데, 복원이 가능할까? 요 학교 때문에. ·박 : 그러니까요. 학교 담벼락이라 이게 참 애매합니다. ·최 : 작년인가 그런 소문이 있던데, 저거를 삼성에서 살라 그랬대요. ·박 : 삼성에서? ·최 : 예, 저 경신을. 사가지고 무슨 의학연구소로 쓸려고 했는데. 결국 계약이 거의 다 가다가 저게 문화재니까 뭘 못 짓잖아요. ·박 : 도성이? 아, 그치그치. ·최 : 예, 그래서 계약이 취소됐다는 소문이 들리더라고요. 여기 있으면 온갖 소문이 다 들려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80-281쪽
  • ·박 : 그리고 워낙 또 활동도 많이 하시니깐. 약간, 이런 질문 사실 저는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 안하는데, 굳이 질문 드리자면 성북동에 여러 역사 인물들이 많습니까? 만해 선생님도 그렇고, 조지훈 선생님도 있고, 이태준도 있고 이렇게 있는데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그래도 성북동을 제일 잘 대변하는, 다 훌륭한 분들인데 그 분의 개인적인 업적하고는 별개로, 성북동을 제일 잘 표현하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어떤 분이 있을까요? 선생님 생각에. ·최 : 글쎄, 그 뭐 문학적이나 역사적 평가 말고? 그냥. ·박 : 네, 그냥 성북동을 상징한다고 했을 때 역사나 독립운동하면 당연히 한용운일테고. 문화재하면 간송일텐데. 뭐 그런거 말고 성북동에서 그래도 잘 어울린다. 그냥 선생님 개인적으로 그냥. ·최 :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이름난 사람 중에서는 성북동을 제일 잘 표현한 사람은 김광섭이죠 역시. ·박 : 김광섭? 아, 예 ·최 : 예, 성북동 비둘기 하나만으로도 그 현재의 성북동 모습까지 포괄하고 있잖아요. 그 당시 채석정에 돌 깨가지고, 이 파괴되는 자연이 파괴되는 얘기하듯이, 지금도 재개발하겠다 뭐하겠다. 그러면 파괴시키는 거 아니에요. 그게 고대로 맞는 거죠. 그리고 그 시인이 살아온 내력도 그 분도 뭐 민주화 운동도 하고 독립운동도 하고, 온갖, 성북동에 맞는 거죠. ·박 : 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요. 사람들이 솔직히 한용운, 성북동에서 한용운, 이태준은 몰라도 ‘성북동 비둘기’는 다 알거든요. 성북동 하면 비둘기니까. ·최 : 그렇죠, 제가 아주 답답한 것 중에 하나가 사실은 조지훈 선생이 성북동에 살았다는 건 별로 유명안 해요. 최근에 이제 막 이렇게 해놔 가지고 그런 거지. 그런데 실제로 저기에 조지훈 산장인가 그거 만들어놓은 거 있잖아요. 조형물. ·박 : 방우산장인가 뭔가, 예. ·최 : 예, 근데 나는 거기에 했으면 성북동 비둘기에 관련된 그 어떤 조형물을 만드는 게 맞지.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공공미술하는 그 최용환씨라는 사람하고 얘기를 좀 했는데. 내가 그런 걸 맘대로 할 수 있다면,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니까. 그 친구하고 저하고 했던 작업 중에 하나가 저런 게 있어요. 그 햇볕이 비치면 그게 반사되가지고, 글씨가 새겨지는, 그래가지고 전에 그 작업은 서울시 문화재단인가 거기서 돈을 받아가지고 했던 건데. ·박 : 서울문화재단에서? ·최 : 예, 서울문화재단에서, 자기 집 위에 햇빛이 비치면 그 집 딸이 쓴 글. 딸이 뭐 3대가 이집에서 살았는데. 그게 쫙 새겨지는 그런 작업을 했었는데, 그게 돈이 많이 든대요. 근데 되게 특별한 작업이잖아요. 거기다가 이렇게 해가지고 성북동 비둘기가 시간에 따라 이렇게 나타나게 만들어주면. 가장 상징적인 조형물이 될 수 있는데, 저거는 흉물이에요. 지금. ·박 : 그렇죠,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 나무도 다 죽었고.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81-282쪽
  • ·박 : 선생님 그리고 또 하나 여쭤볼 것 중에 하나가, 아까 이제 대표적인 인물 얘기를 하셨는데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문화재나 건물이 있다면 어떤 것을 또 선생님이 꼽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시는지. ·최 : 뭐 가장 대표적인 게 성곽이겠죠. 뭐, ·박 : 성곽? 아, 성곽, 하긴 성북이란 이름도 뭐 그런데서 나왔으니까. ·최 : 성곽이고, 그 다음에 뭐 굳이 얘기한다면 애들이, 우리 또래가 제일 잘 좋아했던 놀기 좋았던 데는 성락원인데, 그, 막아버렸잖아요. 우리 때는 몰래 들어가서 놀고 그랬어요. 가재도 잡고, 그 뒤에 계곡을 하나 가지고 있잖아요. 거기서 가재 잡고 그랬어요. 그 당시 뭐 들어간다고 뭐라 그러지도 않았고. ·박 : 저희는 성락원을 또 화요일날쯤 한 번 가게 되거든요. 그쪽에 저희도 뭐 직접 압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고 구청 통해서 언제 개방하냐 계속 물어보는데 올 가을이 목표라고 했는데 ·최: 될까요? ·박 : 근데 제 생각에는 개방을 해도 입장료를 지금 가구박물관 하듯이 많이 받고 고급코스화해서 이렇게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아마 그렇게 진행되지 않을까 이런 아쉬움은 좀 있습니다. ·최 : 그건 별로 썩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은데. ·박 : 그쵸, 좀 좋은 건 다 같이 보고 좀 즐겼으면 하는데. ·최 : 아니, 뭐 하루에 입장객을 제한한다거나 이런 건 이해가 되는데. ·박 : 굳이 가격이 비싸지는 건 좀,, 그리고 들어가시기 전에 그 성북동천 활동을 하시잖아요. 성북동에 관한 글을 워낙 많이 쓰셨지만, 성북동천이라는 어떤 조직, 단체, 조직? 표현이 좀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만들어서 활동하게 된 계기 같은 게 혹시 있으실까요? ·최 : 성북동천이 만들어질 무렵에 뭐, 직접적인 거는 서울 희망제작소에서 서울시에 하청을 받아가지고 마을학교를 열었던 게 직접적인 계기지만 실제로 내부적인 거는 고 무렵이 성북동에 그 토박이들 말고 성북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젊은 친구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살거나, 혹은 여기에서 카페를 열거나 이랬던 시기에요. 그래가지고 젊은 친구들하고 성북동의 토박이었던 사람들하고 토박이었던 사람들 중에 생각이 있는 사람들하고, 그 다음에 나이든 사람들이 우리 성북동천에도 그런 분이 계시지만, 여기가 재개발이 된다니까 그 투기 목적으로 들어왔다가 너무 좋으니까 재개발 하면 안 되겠다 이렇게 돌아선 분이 있어요. 너무 아깝다. 그래가지고 그런 분들이 성북동에 대한 인식을 바꾼 사람들이 있으면서 아마 내재적으로는 그런 모임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박 : 선생님도 그럼 이런 취지에 동감해서, ·최 : 저는 이제 그 때, 학교를 명퇴했는데 집에서 놀고 있는데 희망 제작소 사람이 찾아왔더라구요. 시인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성북동에 사는 그러니까 찾아와가지고 같이 좀 해달라고, 그래서 나가게 됐죠. ·박 : 음, 토요일엔 자리가. ·최 : 예, 밖이 더 좋지 않나? ·박 : 밖에서 드실까요? ·최 : 예, 밖이 좋죠. 여기. 수수 꽃다리 그늘이 여기가 꽃 피면 참 좋은데. 여기서 제가 옛날에 술 많이 마셨어요. ·박 : 술 드셨어요? ·최 : 여기서. ·박 : 아 여기 밖에서. ·최 : 내 아는 친구 중 한 사람은 여기가 좋아서 이 근처로 이사 온 사람도 있어요. ·박 : 아이고 이제 차드시죠.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82-283쪽
  • ·박: 요기가 쌍다리지 않습니까 선생님, 여기 쌍다리는 다리가 어느 쪽에 있었나요? ·최 : 여기가 하천이에요. 여기가 ·박 : 여기가 하천이고, ·최 : 이렇게 건너가는 다리죠. ·박 : 두 개가 이렇게 있었던 거에요? ·최 : 하나는 돌다리였다고 그러고, 하나는 나무다리였다고 그러던가. ·박 : 그 그림에 남아있는 것처럼, 여기도 하천이었다고, 여기 이렇게 내려오는 하천이 있었다고, ·최 : 여기는 하천 아니었어요. 여기는 좁은 길, 좁은 골목길이었죠. 여기 하천 아니었는데, ·박 : 아 그래요? ·최 : 하천이었나? 아, 저기서 하천이 있었어요. ·박 : 아, 저위에서? ·최 : 하천이 있었으니 이쪽으로 내려왔나? 나도 정확히는 판단이 안 서는데, 하천이었던 거 같다. 그게 복개됐죠. 여기는 한옥들이 있던 동네는 아니고. ·박 : 이쪽은요? 아, ·최 : 여긴 집들이 별로 없었어요. 여긴 ·박 : 아, 그렇겠죠. 아무래도 여기는 좀 상류 쪽이니까. ·최 : 여기도 뭐 덕수교회에 오기 전까지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고, ·박 : 선생님 그럼 또 하나, 이쪽에는 그럼 이쪽 천변으로 옛날 초가집 같은 게 좀 보이던데, 이쪽에는 초가집이나, ·최 : 초가집이 아니고 블록집. ·박 : 예, 블록집들이 이쪽에 있었던 거죠? ·최 : 예, 블록기어집. 그게 원래 있었던 거죠. ·박 : 이게, 이쪽에 천이 이쪽에 흘렀으니까 이쪽은 국유지에다가 그냥 천변에다가 막 지은 거죠? ·최 : 그렇죠. 하천부지죠. ·박 : 옛날에 여기 보신탕 집 있던 데 거기도 그럼 다 그 때 국유지에다가 이렇게 지었던 블록집, 그 형태죠 이게? ·최 : 예, 그 형태죠 이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82쪽
  • 최성수 / 시인, 청소년 문학 작가. 약 30여 년간 몸 담았던 교직에서 퇴직한 후 현재는 성북동 마을 사람들의 모임인 ‘성북동천’ 대표로 있다. 성북동에서 45년 넘게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성북동을 주민들이 어울려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을로 만드는 데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책 앞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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