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
1916.04.27 - 1984.12.15
인물 개인 학자
미술사학자이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났고,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송도고보 재학시절 우연히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이었던 고유섭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감화되어 문화유산과 한국미술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해방 후 서울의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였고 1974년부터 1984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다. 한국전쟁 때에는 목숨을 걸고 국립박물관의 소장 문화재들을 부산까지 안전하게 운반하기도 하였다. 1976년에 성북동 126-20(현 최순우 옛집)으로 이사하였는데, 1930년대에 지어진 낡은 한옥을 그의 안목으로 잘 가꾸었고 지금까지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유고를 모은 『최순우전집』(1~5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등이 있다.
성북동
  • 최순우_성북동 자택에서
  • 최순우옛집 외관

기본정보

  • 영문명칭: Choi Sunu
  • 한문명칭: 崔淳雨
  • 이명칭: 혜곡(兮谷), 최희순(崔熙淳: 본명)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학자

시기

주소

  • 주소: 02880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26-20 (성북로15길 9)
  • 비고: 최순우 옛집

근거자료 원문

  •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성북동이라는 공간에서 전형필과 교류했던 인물이 또 있다. 성북동 길을 따라 조금 내려오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고즈넉한 한옥은 전前 국립중앙박물관장이자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가 거주하던 공간이다. 최순우 옛집은 전형필이 수집유물을 정리할 사람에게 거처할 공간으로 임대해준 장소로 보인다. 최순우 옛집 맞은편(성북동 128번지)에는 오세창이 서화류를 보관하기 위해 가지고 있었던 가옥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골동품의 수집 · 감정이 이루어졌고, 간송미술관과 최순우 옛집을 오가는 사람들의 접대 혹은 객사의 공간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순우는 광복 후 보화각에 소장된 문화재를 정리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화수장가이자 서예가인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과 함께 전형필의 수장품을 지키는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42-243쪽
  • 최순우 옛집 등록문화재 제268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15길 9 최순우 옛집은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1916-1984)선생이 1976년부터 1984년 작고하기까지 거처하던 한옥이다. 최순우 선생은 개성부립박물관 입사 이후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생을 마치기까지 평생 박물관에 재직하면서 박물관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한국미술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와 같은 책을 써서 한국 미美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도 힘을 쏟았다. 2004년에 개관한 최순우 옛집은 2006년 ‘혜곡 최순우 기념관’이란 명칭으로 박물관 등록을 한 이후 최순우 선생의 유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해마다 봄, 가을에 걸쳐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가을에는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특별히 ‘시민문화유산 제1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한옥은 2002년부터 내셔널트러스트 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직접 시민모금운동을 벌여 지켜낸 것으로 유명하다. 1930년대에 지어진 이 근대한옥은 ㄱ자 형 안채와 ㄴ자 형 바깥채로 된 ㅁ자 형 집으로, 아담한 안마당과 뒷마당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는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최순우 선생이 사용했던 책상과 고서들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방하고 있으며, 동절기인 12월부터 3월까지는 휴관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74-275쪽
  • 김광섭의 집 1. 성북동 168-34 그리고 160W 73rd St, New York - 빛나는 노년 1963년 10월, 김환기는 브라질에서 열리는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후 귀국하는 대신 뉴욕행을 선택했다.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예술을 평가 받기 위하여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어나가기 위한 결정이었다. 유학 시절 일본을 오갔던 것을 제외한다면 파리에 이어 두 번째 외국 생활이었다. (뉴욕에서의 생활이 그의 인생의 종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홍익대 미대 학장이라는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된 지위도 과감히 예술을 위해 포기했다. 경제적 고려는 뒷전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순우(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장)가 미국 록펠러재단에 창작지원금을 알아봐 주었고, 한국에 있던 아내 김향안이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원금을 신청하였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47-248쪽
  • 최순우 옛집은 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故 혜곡 최순우 선생(1916~1984)이 197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고택이다. 선생이 기거하던 사랑방 위에는 그의 친필이 담긴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생은 이곳에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와 같은 아름다운 글을 집필하였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20-21쪽
  • 한국 미(美)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 최순우는 우리나라 미술평론과 박물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개성에서 태어나 송도보통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문학 소년이었던 최순우는 개성부립박물관에서 우리나라 미술사를 개척한 고유섭을 만나 우리 문화유산에 눈을 뜨게 된다. 고유섭은 개성박물관장을 지내며 후학을 키웠는데, 최순우, 진홍섭, 황수영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미술사학계에서‘개성삼걸’로 불린다. 개성부립박물관에서 서울에 있는 국립박물관으로 전근을 오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 최순우는 삼청동 작은 한옥에 거처를 마련한다. 몇 명 되지 않는 직원들과 박물관을 꾸려나가며 한 때 자경전 뒤쪽에 있는 박물관 관사에 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때 전쟁에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박물관 소장품도 부산으로 옮겼다. 최순우는 박물관 이사를 가장 많이 했던 사람으로 꼽힐 정도며 부산 피난과 몇 차례에 걸친 박물관 이전 때마다 문화재를 안전하게 옮기는 일을 맡아서 하였다. 또한 1957년 한국 최초의 외국 순회전시로 미국에서 열린 ‘한국고대문화전’과 1960년대부터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 열린‘한국미술5천년전’을 주관하는 등 우리 문화와 문화재를 해외에 널리 알리는 데 큰 업적을 세웠다. 또한 일본에서 전시를 개최하여 그때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한국 역사와 일본 문화와 관계를 밝혔다. 이후 최순우는 『水墨美術大系』, 『李朝工藝』 등을 일본에서 출판하여 한국미술과 문화를 알렸다.
  • 해방 후 궁정동에 살던 최순우는 1976년 성북동에 있는 한옥으로 이사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있으며 일본에서‘한국미술5천년전’을 개최하는 바쁜 시기였다. 그럼에도 틈틈이 손수 집안 단장을 하였다. 1930년대 지은 ‘ㄱ’자 모양 안채에 앞뜰과 뒤뜰이 1930년대 지은 근대한옥은 주인의 안목과 손길로 때를 벗고 정갈하고 소탈한 분위기를 갖추게 된다. 니스를 칠한 기둥은 칠을 모두 벗겨내어 자연스러운 나무색이 나도록 했고, 방 안에는 전통 목가구를 놓아 조선시대 선비의 방에 들어 온 듯한 분위기를 냈다. 넓은 뒤뜰에는 전통 한옥의 뒤뜰이 그랬던 것처럼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자연을 집안에 들여놓은 듯 산나무와 들꽃을 심고 가꾸었다. 우리 문화재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연구하는 학자이자 박물관인으로서 그의 안목은 모두가 인정할만한 것이었다. 즐겨 수집한 수석과 벼루, 백자를 집안 곳곳에 놓아두곤 했는데, 하나하나 제 자리를 맞춘 듯 집과 잘 어울리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최순우는 개성에 있을 때부터 조선고적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문화유산을 답사했고, 박물관에 있으면서는 강진 고려청자 가마터, 신안 해저유물 등 발굴 현장을 누볐다. 박물관 사업으로 진행된 답사와 발굴 외에도 미술평론가 이경성, 화가 전성우, 시인 이흥우 등 친한 사람들과 우리 문화를 찾아 다녔다. 1960년에는 간송 전형필, 김원룡(고고학자), 진홍섭(개성분관 초대 관장) 등과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여 『고고미술』을 발간하고 연구물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일생동안 문화재를 발굴하고 수집하며 역사를 연구하고 밝혀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더욱 잘 알도록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통을 살리고, 현대화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 1916-1984 개성 출생. 미술사학자이자 박물관인이다. 개성시립박물관에서 우현 고유섭을 만나 문화유산에 눈을 뜨게 된다.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며 도자기와 전통 목공예, 회화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다. 1974년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하여 보존과학, 전시기법, 교육 등 박물관의 발전에 힘썼고, 문화유산을 해설하는 글을 신문, 잡지에 연재하며 일반인들에게 문화유산을 알렸다. 현대미술에도 관심을 가져 김환기, 김기창, 박수근, 변종하 등의 작가들과 교류하였고, 1965년에는 이경성, 이구열, 오광수, 김중업 등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1976년 궁정동에서 성북동 126-20번지로 이사한다. 1930년대 지어진 한옥을 그의 안목으로 가꾸고, 마당에는 소나무, 산사나무, 모란 등 우리 산하에서 자라는 나무와 꽃을 심었다. 조선시대 선비의 방치레를 한 사랑방 위에는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중이다’라는 뜻의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편액을 걸어두었다. 유고를 모아 『최순우전집』(1~5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등이 출판되었다. 2002년 성북동 집이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으로 보전되어 혜곡최순우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87쪽
  • 미술사학자. 개성 출생. 본명 희순熙淳.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다. 한국미술을 외국에 알리고 우리나라 박물관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저서로 『최순우전집』 (5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등이 있다
  •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 별세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67)이 15일 하오 7시10분 서울 성북구 성북동126의20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최관장은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 송도고보를 졸업한 후 개성박물관 근무를 시작했다. 8·15광복 후부터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계속 근무하면서 국립박물관을 확장·발전시켜온 우리나라 근대박물관사의 증인 역할읕 해왔다. 유족은 부인과 결혼한 외동딸이 있다. 장례는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치러지며 17일 상오 9시 자택서 발인, 상오 9시 국립극장 광장에서 영결식을 갖는다. 장지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광주공원묘지. 연락처(782)1218. 『중앙일보』 1984. 12. 17.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2쪽
  • 1. 혜곡 최순우 연보 1916년 4월 27일 : 개성에서 출생 (본명은 희순) 1930년 :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보)입학 - 운보 김기창은 개성 만월보통학교 2학년 무렵 최순우의 동네로 이사를 와 1년 반 정도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 - 1934년 개성 부립박물관장인 고유섭을 만나 고미술연구 권유 받음 1943년 : 개성부립박물관 입사 1945년 : 서울 국립박물관으로 전근 - 국립박물관 학예관,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 등 역임 1950년 : 서울대, 고려대, 홍익대, 이대 등에서 미술사 강의 1967년 :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대표 역임 1974년 : 국립중앙박물관장 취임 1976년 : 성북동 126-20 (현재 최순우 옛집)로 이사 1984년 12월 16일 :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42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최순우 주소: 성북동 126-10 분야: 문화재, 미술사, 문학 비고: 최순우옛집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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