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덕
1898.09.19 - 1969.08.15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군인
성북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입대하였다. 1922년에는 의열단에 참여하여 폭탄운반 및 투척계획을 협의하는 등 의열활동을 지원하였다. 1922년 이후 1940년까지 중국 공군에서 교관, 수상비행대장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총무처장, 참모처장, 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국방부차관을 역임하였으며,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공군후방사령관·항공기지사령관·공군본부작전참모부장·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최용덕의 자필 이력서에 의하면 본적은 성북동 265번지(성북로 148-5)로 기록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성북동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최용덕
  • 최용덕 집터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65번지 (성북로 148-5)

근거자료 원문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광복군 ·1898년 성북동 출생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 중국군 입대 ·1920년 중국공군군관학교에서 수학, 졸업 후 공군군관학교 교관, 수상비행대장, 공군지휘부 참모장, 공군기 지사령관 등을 지냄 ·1922년 김원봉(金元鳳)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참여, 조선무산자동지회장 김한(金翰)과 만나 폭탄 운반 및 투척 계획을 협의하는 등 상하이[上海]·톈진[天津]·베이징[北京]·안둥[安東] 등지에서 의열활동을 지원 ·1932년 조선혁명당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에 참여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참모처장·사령관 역임 ·같은 해 8월, 대일독립전쟁에 한국인 비행사를 참전시키기 위해 공군설계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군과 본격적인 협의를 진행 ·1948년 대한민국 초대 국방부차관 ·1950년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공군후방사령관·항공기지사령관·공군본부작전참모부장·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1쪽
  • 성북동 출신인 최용덕(崔用德)은 1922년 6월 경 의열단에 가입하여 중국 천진(天津)에서 무산자동맹회원 김한(金翰)과 만나 폭탄의 국내 반입을 도우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김원봉이 1922년 6월 국내의 무산자동맹회의 김한과 연락해서 조선총독부를 파괴하려던 제2차 암살계획, 즉 김상옥사건에 간여하였다.
  • 성북동 265번지 출신이다. 원래 함경도 혹은 평안도 출신으로 성북동에 거주하였다. 자필이력서에는 본적이 성북동 265번지로 되어 있다. 김기동·강창부·이지원, 「최용덕의 항공독립운동과 광복군 내 역할」, 『군사』 95, 2015. 2등군의관을 지낸 최익환과 태안 이씨 사이에서 3남으로 출생하였다. 서울 미동의 봉명학교에서 수학하고 1913년 경 중국 북경에 가서 회문중학(匯文中學), 숭실중학(崇實中學) 등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단기서(段祺瑞)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입대하였다. 1922년 이후 1940년까지 중국 공군에서 교관, 수상비행대장(水上飛行隊長)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20년 북경에서 서왈보 등과 대한독립청년단을 정비하고 활동하였다. 1921년 4월 경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혁을 위한 주장을 하였다. 1922년 6월 북경에서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천진(天津)에서 조선무산자동맹회장(朝鮮無産者同盟會長) 김한(金翰)과 의열활동을 위한 폭탄 확보와 투척 계획 등을 협의하여 김상옥(金相玉)의사를 지원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이후 북경(北京)과 안동(安東) 사이를 오가며 폭탄운반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3년 의열단과 결별하고 신의단(信義團)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보정항공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 오패부(吳佩孚)의 군벌 소속으로 제2차 봉직전쟁(奉直戰爭)에 참전하였다. 1932년 4월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자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조직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임명되었으며, 1942년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에 근무하면서 항일투쟁을 지휘하였으며, 1945년에는 광복군 참장(參將)으로서 총사령부 참모처장으로 복무하였다.
  • 본적: 서울 성북동 계열과 단체: 광복군 <활동내용> 서울 사람으로 1916년 북경에 있는 중국군관학교 졸업 후 중국육군에서 근무하였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사직하고 상해, 북경, 봉천, 안동 등지에서 선전문과 무기 등을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안동에서 황옥을 찾아 권총과 선전문을 솔달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중국군 사령관 진흥(陣興)장군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이 때 안동으로 다시 잠입하여 이륭양행에 맡겼던 무기와 선전문을 찾아 국내 연락 동지에게 전달하여 자신의 임무를 마무리하였다. 1922년 이후 1940년까지 중국 공군에서 교관, 수상비행대장(水上飛行隊長)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22년 6월에는 김원봉(金元鳳)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참여하여, 천진(天津)에서 조선무산자동맹회장(朝鮮無産者同盟會長) 김한(金翰)과 의열활동을 위한 폭탄 확보와 투척 계획 등을 협의하여 김상옥(金相玉) 의사를 지원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이후 북경(北京)과 안동(安東) 사이를 오가며 폭탄운반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2년 4월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자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조직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임명되었으며, 1943년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에 근무하면서 항일투쟁을 지휘하였으며, 1945년에는 광복군 참장(參將)으로서 총사령부 참모처장으로 복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국가보훈처 공훈록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6년-최용덕 중국 육군군관학교 졸업 1922년-최용덕 의열단 가입 1940년-최용덕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역임 1945년-최용덕 한국광복군 참모처장, 사령관 등 역임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13쪽
  • ○ 한국광복군으로 활약한 베테랑 군인 최용덕 한국광복군하면 앞서 의열단원으로 활약한 바 있었던 최용덕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준비된 광복군이었습니다. 이미 마지막 저항을 위한 만전을 기하고 있었지요. 최용덕은 1916년 18살 나이로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육군의 소대장, 중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19년 고국으로부터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중국 군대를 사직한 후 무기 운반 등의 의열단 활동을 하다 중국 관헌에 체포되기도 했었지요. 이후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서왈보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베이징 근처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해 비행사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는 최용덕이 공군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전환점이 되었으며 1922년 이후 중화민국 항공대의 창설멤버, 공군기지사령관, 중화민국항공대 참모부장 등을 두루 거치며 1937년 중·일전쟁에도 참전했습니다. 동시에 임시정부와 독립군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해나갔습니다. 최용덕은 중국 공군으로 있을 때에도 “내 나라 내 공군에서 내 나라 제복을 입고 나의 상관에게 경례를 붙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만큼 애국심이 굳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항공대로부터 받은 월급의 70%를 임시정부에 헌납하고 나머지 30%로 어렵게 가족과 생계를 이어간 일화는 그가 얼마나 투철한 독립투사였는지를 보여줍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군되자 최용덕은 총사령부 총무처장으로 임명됩니다. 이후 1945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장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는 노련하게 항일투쟁을 지휘했고 또한 국내진공작전계획에도 참여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6-117쪽
  • ○ 에피소드 열하나-광복절에 눈을 감은 공군 창군의 주역 내 나라, 내 공군에서 일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최용덕. 그가 대한민국 공군을 창군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공군부대 창군을 위해 그는 미군정이 제시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야 했고 국내 항공 전문가들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최용덕이 ‘이순신의 백의종군론’으로 창군 주역들을 설득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지요. 결국 1949년, 오랜 노력에 힘입어 대한민국 공군이 창군되었고 최용덕은 50세의 나이에 한국 공군의 군복을 입습니다. 마침 대한민국 초대 국방차관으로 있던 그는 공군 독립의 근거를 마련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지요. 공군 창군 후에는 공군사관학교 교장직을 맡았습니다. 공군 창군과 함께 공군가, 공사교가 등을 직접 작사하기도 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제2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해 휴전이 될 때까지 공군의 항공작전을 총괄했습니다. 노장의 활약은 한국 공군의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 손으로 직접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순수 대한민국의 기술로 ‘부활호’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퇴임 후에도 체신부 장관, 중화민국 대사 등을 지낸 최용덕은 1969년 광복절에 영면했습니다. 의열단과 중·일전쟁, 한국광복군을 거쳐 대한민국 공군 창설과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은 이제 ‘영웅의 일대기’로 남았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8쪽
  • ○ 국외가 아닌 국내에, 임시가 아닌 정식의 정부가 수립되다 한편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많은 인물들이 정부수립과 함께 요직을 맡게 됩니다. 최용덕은 국방부 차관을 맡았고 이듬해 대한민국 공군을 창군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8쪽
  • ○ 성북구 출신 독립운동가 최용덕 한국광복군이자 공군 창군의 주역 1898-1969 / 독립장 / 성북동 265번지 출생 15세에 중국으로 망명 후 중국 육군군관학교와 보정항공학교를 거쳐 공군으로 활약했습니다. 중·일전쟁 때는 중국공군의 신분으로 참전했으며 당시 받은 월급의 대부분을 임시정부의 독립 지원금으로 썼습니다. 임시정부 광복군으로도 활동했으며 해방 후 대한민국공군 창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5쪽
  • ○ 의열단의 숨은 조력자 오세덕과 저항의 은신처 성북구 성북동 출신의 최용덕과 안암동 출신의 오세덕의 활약도 돋보입니다. 의열단원이었던 최용덕은 김상옥의 조선경찰서 투탄 계획을 위해 중국 텐진에서 사회주의단체인 무산자동맹회원 김한과 만나 폭탄의 국내 반입을 도우는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61쪽
  • 최용덕 장군은 중국에 있던 1928년 4월, 30살의 나이로 당시 18살인 호요동(胡耀東)과 결혼했다. 훗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최용덕은 부인에게 호용국(胡用國)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은 최용덕이 중국(대만)대사 시절 그곳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하고 그곳에서 1남 1녀를 출산했다. 아들은 계속 대만에서 생활했으며, 딸은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지자 할머니를 따라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 딸이 바로 반춘래 씨이다. 반춘래 씨가 태어나던 해에 최용덕 장군이 사망했으므로 장군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은 없으나, 평소 할머니로 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현재 반춘래 씨는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으며, 2019년 11월 공군사관학교 내에 건립한 촤용덕 장군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한국에 들렀다.
    성북문화원, 2019,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이 나, 135-136쪽
    반춘래 여사는 최용덕 장군의 외손녀이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14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