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환
1889.02.12 - 1959.07.25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이자 종전평화운동가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을 앞둔 1909년에는 서천군 재무주사로 근무하던 중 망명을 결심하고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공금을 빼돌렸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대동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는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피난 가지 않고 성북동 자택(성북동 260번지)에 머무르면서 북한 당국자와 이승만 정부에 종전을 호소했다. 미군의 도움으로 평양까지 가서 종전을 호소했으나 양쪽 정부 모두 제대로 만나주지 않았다. 1950년에 간행된 『대한민국인사록』에는 주소가 돈암동 458-392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돈암동 성북동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최익환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최익환(1)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최익환(2)
  • 최익환 집터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60번지
  • 비고: 돈암동 458-392

근거자료 원문

  • 2. 한국전쟁 중의 종전평화운동 ○ 최익환(1889~1959, 성북동 260번지)과 박진목(1918~2010) -한국전쟁 중에 최익환과 박진목이 민간인 신분으로 비공식적으로 북한의 지도자를 만나 조속한 전쟁 종결과 평화를 촉구 -이 운동의 주역인 최익환은 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않고 성북동 자택에 머물고 있었고, 박진목이 그의 집을 찾아와 상의하면서 시작 -한국전쟁 중 최익환과 박진목은 성북동 최익환의 집에 묵으면서 더 이상 전쟁을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전쟁을 말려보는 일을 해보기로 함 -1951년 1월 최익환은 박진목과 함께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승엽을 만나 동족 상잔의 전쟁을 당장 종식시키자고 호소했고, 이승엽이 이 제안을 긍적적으로 고려하겠다고 답변 -북한군이 퇴각하고 난 뒤 최익환은 부산으로 내려가 이승만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군의 주선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종전을 호소 -1951년 11월 미군의 안내로 평양을 방문한 최익환은 이승엽이나 북측 지도자들을 만나지 못하고 평양 근교에 억류되어 있다가 휴전협정 직전인 1953년 초에 남쪽으로 돌아옴 -남으로 돌아온 박진목은 간첩죄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최익환은 독립투쟁의 경력이 고려되어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이승만 정권의 핍박 속에 불우한 일생을 마침 -최익환과 박진목의 종전평화운동은 남과 북 그 어느 쪽에서도 주목받지 못했지만, 목숨을 걸고 분단선을 넘어 민족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한 그 고귀한 노력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할 것 -최익환과 박진목이 활동한 종전평화운동의 중심 공간으로서 성북동의 의미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49-150쪽
  • 본적: 충남 홍성 주소: 성북동, 돈암동 계열과 단체: 대동단 <활동 내용> 1905년 서울의 광무일어학교(光武日語學校)에 들어가 2년간 수학한 뒤 1907년 가을에 종사도량형사무국(從事度量衡事務局) 통영관을 거쳐 탁지부(度支部) 세무주사(稅務主事)와 충남 서천군(徐川郡) 재무주사(財務主事)를 지냈다. 1909년 서천군 재무주사 재직중, 그는 한때 일진회(一進會)에 관계했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국외 망명을 결심하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금 3천여원을 사취했다가 이일이 발각됨으로써 징역 7년형을 받았다. 1915년 출옥한 이후 만주 봉천(奉天) 등지를 왕래하던 그는 1917년경부터 세계정세가 급변되면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자 독립 달성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1918년 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 동지 전 협(全協)과 결합하여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들은 독립달성을 위해서, '조선 민족의 정신 통일과 실력 양성'이 급선무라는데 뜻을 모으고 그의 실천 방안으로서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전국적 조직을 목표로 하고 활발한 조직 및 선전활동을 펴나갔다. 이때 최익환은 동단의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동단 발행의 각종 인쇄물 등을 작성·배포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그가 자금 모집을 위해 관여했던 거간(居間) 중매가 금품 사취로 되어 동년 5월 23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일제도 처음에 이들이 대동단과 관련된 것을 몰랐으나 조사 과정에서 대동단원으로 밝혀짐에 따라 최익환을 비롯해 선전물의 작성, 인쇄 배포에 참여했던 권태석(權泰錫)·나경섭(羅景燮)·김영철(金永喆) 등도 피체되었는데, 이를 보통 대동단사건이라 부른다. 이일로 그는 소위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出版法) 위반죄로 징역 6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1925년에 대동단의 동지였던 권태석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폈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될 때에는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9년-최익환 대동단 조직 후 의친왕 이강 망명 주도 1927년-안재홍을 중심으로 한용운, 최익환, 조헌영 등 신간회 활동 참여 1928년-최익환 만주로 망명 후 광복단 활동 1951년-최익환 휴전협상의 비밀요원으로 미8군에 의해 평양으로 밀파 후 억류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13쪽
  • ○ 해방 이후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최익환 대동단과 신간회 창간의 주역 1890~1959 / 애국장 / 돈암동 458-392 거주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과 신간회 결성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며 만주를 오가며 무장독립운동단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십여 년을 복역했고 6·25 전쟁 중에는 휴전협정을 위해 애쓰다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5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한국근현대인물자료에 의하면, 최익환의 생년월일은 1889년 2월 12일이다.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등에는 최익환의 생년월일을 1899년 6월 12일로 표기해 두었으나,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 ○ 최익환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결사단 대동단 독립운동가 전협과 함께 대동단 결성을 주도한 최익환은 성북구의 주요 독립운동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대동단 활동으로 6년간 복역을 한 이후로도 신간회, 광복단 등에서 독립을 위해 힘을 쏟았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의 비밀요원으로까지 활동한 애국지사이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51-52쪽
  • ○ 민족유일당 신간회와 성북인들 앞서 대동단 조직을 주도했던 인물로 소개한 최익환 또한 출옥 후 신간회에서 활동하지요. 그는 창립총회 당시 규칙심사위원이자 간사로 뽑힌 바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6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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