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희
1906.12.03 - 1990.12.21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언론인
소설가이다. 1906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최정희는 잠시 일본에 건너가 활동하다 1931년 귀국하여 『삼천리』사의 기자로 일하면서 단편소설 「정당한 스파이」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1936년 시인 이은상의 소개를 받아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뒤 쓴 「흉가」 이후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걸었다. 작품의 경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문제와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노천명, 모윤숙 등과 1세대 여류작가로 문단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70년대 정릉 4동 산장아파트로 이사했는데, 이곳에서 오정희, 이제하, 딸 김채원 등 ‘정릉그룹’이라고 불린 소설가 모임을 열고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1940년대에 일제의 전쟁 동원을 독려하는 강연이나 글을 써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정릉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근거자료 원문

  • 최정희는 1906년 함경북도 성진군의 작은 마을 예동에서 태어났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맏딸인 최정희를 유난히 아껴 다섯 살부터 집에 훈장을 들여 글을 가르쳤다. 열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외도로 생활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뒤로한 채 어머니의 장사를 거들어야 했다. 시골을 떠나 이사한 단천에서 야학을 다닐 때 만난 여선생들처럼 ‘신여성’이 되고 싶어 책을 읽다가 종종 장사를 그르치기도 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입학 적령기를 한참 넘긴 최정희를 학교에 보낸다. 성진에서 학교를 다니며 기독교 사상이나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으려는 결심으로 5학년 때 친구와 가출을 하였다. 경성에 있는 동덕여학교를 거쳐 숙명여학교에 들어갔지만, 도시 분위기와 신문물에 빠져 공부보다 영화, 운동경기를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신파 연극패 공연을 쫓아다니면서 연기나 노래에 관심을 보였던 최정희는 무용이나 음악을 더 배워보고 싶었다. 졸업을 앞두고 경성의 여학교 졸업생들을 위해 유치원교사 양성학교인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교의 전신)에서 축하의 밤을 열어 주었다. 동경으로 유학 갈 여건이 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최정희는 이곳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함께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에 들어간다. 졸업 후 보육교사로 활동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일 년 만에 조기졸업을 하고 가수의 길로 나간다. 작곡가 전수린을 찾아가 노래를 배우고, 시인 박팔량의 도움으로 방송에 데뷔하였다. 나는 음악도 좋아하고 운동도 즐겼다. 농구선수로서 올림픽대회에 나간 일도 있다. 그땐 외국에 가지 않고 경성 운동장에서 했지만, 문학은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용이 아니면 음악을 할 생각이었다. 영화를 보고 와선 거울을 앞에 놓고 여배우의 흉내를 내어 보았다. 남이 웃지 않는다면 여배우가 되고 싶기도 했다. - 최정희, 「나의 여학생 시절」- 그러나 방송활동은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경남 함안의 유치원에 취직한다. 함안에 있던 최정희에게 중앙보육학교 교장 박희도는 동경의 도가와[土川]무용연구소에서 유치원 유희를 더 배울 수 있게 학비를 지원해 주었다. 1930년 일본 동경에서 공부하며 생활비 마련을 위해 미카와[三河]유치원에서 보모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극작가 김진수를 만나 ‘조선학생극예술좌’에 참여하고, 연극과 신문예운동을 통해 유치진, 김동원 등을 알게 된다. 1931년 귀국 후 일본에서 만났던 연출가 김유영과 재회하게 되고 잡지사 사무실에서 조촐한 살림을 꾸린다. 얼마 후 아이가 생기지만 김유영의 사업이 실패하며 두 사람의 동거생활도 힘들어졌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때, 박희도의 추천으로 1931년 ‘삼천리사’의 기자로 입사한다. 처음에는 집필자의 집을 찾아가 원고를 받아오거나 이야기를 듣고 원고를 작성해 글을 싣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차츰 직접 쓴 글을 기고하며 「정당한 스파이」,「명일의 식대」등의 소설을 썼지만 무용수나 음악가, 여배우를 꿈꾸며 살던 최정희는 여전히 문학이 자신의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원고지라는 네모 반듯 반듯한 바둑 무늬 속에 글자 집어 넣는 법을 배웠다. 사장은 원고지조차 다룰 줄 모르는 내게 그날 당장 산아제한에 대한 의견서를 쓰라는 명령이었다. 나는 윤성상, 허영숙 씨 등이 써온 여기에 대한 글을 읽어가면서 그와 비슷한 것을 원고지 두 장에 베껴놓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땀에 붓대가 몹시 미끄럽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 최정희, 「나의 문학생활 자서」- 삼천리 기자로 활동하며 아들을 낳았지만 김유영과 관계는 더욱 나빠졌고 어머니로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만 늘어났다. 최정희는 자신의 상황과 고통을 후에 장편소설 『강물은 또 몇 천리』(1964)에 담았다. 당시 김유영은 문학과 예술을 통해 민족의 해방을 주창하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기반의 극단‘신건설’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34년 전주 공연을 앞두고 일본은 극단 광고문구의 불온성을 문제 삼아 관련 인사들을 검거하기 시작했고, 허울뿐이던 남편이 심문을 받으며 최정희를 언급하는 바람에 전주형무소에 투옥된다. 8개월 만에 전주형무소에서 나와 1936년 시인 이은상의 소개로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고, 자하문 밖 허름한 초가집의 건넌방에 세를 들었다. 작은 방에는 낡은 책상과 작은 탈바가지 한 개가 고작이었지만 감나무 사이에 드문드문 피는 배 꽃과 사과 꽃이 아름다운 집이었다. 정릉 근처 암자에서 요양하며『동백꽃』, 『따라지』등 작품을 발표하고 있던 소설가 김유정과 시인 이상이 종종 이 집을 찾아오곤 했다. 최정희는 이곳에서 쓴 「흉가凶家」(1937)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전에 몇 편의 소설을 발표했지만, 문학이, 자신 스스로가,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쓴 첫 작품이었다. 그러나 ‘흉가’라는 작품이름 때문에‘남의 집을 흉가로 만들었다’는 집주인의 타박으로 세 든 집에서 쫓겨난다. 살 곳을 잃고 전전하던 중 1939년 다시 ‘삼천리사’로 자리를 옮겨 김동환과 새롭게 가정을 꾸리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삶을 시작한다. 첩살이, 이혼, 사생아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여성들의 문제까지 시선을 돌려 그동안의 경험과 고통을 작품 속에 형상화했다. 김유영과 사이에 난 아들을 시댁에 빼앗긴 참담함과 가부장제도 속에 남편의 친권만 인정하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도 글의 바탕에 깔렸다. 초기 작품 활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지맥地脈」,「 인맥人脈」,「 천맥天脈」의‘삼맥三脈’시리즈 속 주인공들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었다.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가슴에 가득 차 있는 것을 쏟아 놓아야만 시원할 것 같아서 쓴 것이다.…「지맥」을 시작하던 날 새벽에도 그래서 붓을 들었다. - 최정희, 「문학적 자서」- 경기도 덕소에서 첫 딸을 낳고 시골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중일전쟁에서 수세에 처한 일본은 지식인들을 전쟁에 동원시켰다. 최정희와 김동환은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데, 이 때문에 후에 친일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해방을 맞은 후 서울 동숭동으로 이사한 최정희는 덕소 이웃들처럼 해방이 된 후에도 가난과 무지함으로 여전히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품 「풍류 잡히는 마을」, 「우물 치는 풍경」, 「점례」등을 발표했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혼란스러운 정세에 휩싸이고 만다. 서울로 밀려들어온 북한군은 문인들을‘인민의피를 빨아 먹는 문학을 한 죄’로 잡아 심문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정희는 ‘문학가동맹’에 가입하지만, 얼마지 않아 정세가 바뀌어 북한군이 쫓겨나고 국군이 서울을 탈환한다. 문단에서는 서울에 남았던‘잔류파’와 피난을 갔던‘도강파’를 구분 짓고 서로의 잘못을 따져 등급을 매겼다. 이번에는‘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부역을 한 죄’로 고초를 겪게 된다. 최정희처럼 피난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던 많은 문인들이 상처를 입었고, 더러는 남편 김동환처럼 1·4 후퇴 때 북으로 끌려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최정희는 살아남기 위해 채원과 지원 두 딸을 데리고 대구로 향했다. 1951년 1월, 마해송을 단장으로 한 공군의 ‘창공구락부’가 결성되었다. 시인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구상 등이 참여한 가운데 최정희는 유일한 여성 문인이었다. 종군작가로 박영준, 장덕조, 최인욱 등과 김영수가 쓴 문인극 <고향사람들>의 여주인공을 맡아 서울, 부산 등지를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대구 출신 시인 이상화, 고월 이장희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대구의 종군작가단이 만든 예술 강습학원‘상고尙古예 술학원’에서 문학 강좌를 맡기도 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문인들이 있어 힘든 전쟁을 겪을 수 있었지만, ‘자신을 구원해 주는 것은 자신이고, 문학만이 자신을 지탱해준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생계를 위해, 외로움을 달래고 현실을 견디기 위해 필사적으로 문학에 매달렸고, 남편을 북으로 떠나보낸 슬픔과 남과 북 양쪽에서 받은 고통을 「정적일순」, 「찬란한 대낮」등에 그려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간사」에서는 한국전쟁에서 4·19사태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불행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담았다. 최정희가 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는 여성문인의 문단 진출이 본격화되던 시기이다. 노천명, 모윤숙, 이선희, 최정희는 한국여류문단 4인방으로 서로 가깝게 지냈다. 날마다 어울려 다니면서도 매일 편지를 나누었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찾고, 눈이 오면 누이 온다고 서로 찾는’ 것으로도 모자라 누군가의 집에서 밤을 지새우며 문학이야기, 세상이야기, 사랑이야기를 나눴다. ‘얘기를 위해서 사랑을 했던 것 같은’ 시절이었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취한 박진의 지팡이를 이헌구와 김광섭이 끌어주며 나란히 걸어가던 모습을 시인 조애실이 보고 우스워하며 붙인‘줄봉사’라는 별명이 문단에서 회자되었고, 매일같이 함께 다니던 여류 4인방도 줄봉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유쾌한 성격의 최정희는 문인들의 술자리나 놀이판에 자주 어울렸다. 삼천리사에 있을 때 ‘누구보다 노래를 많이 알고 잘한다’는 소설가 박태원과 노래시합을 벌인 일도 있었다. 그가 그치면 내가 부르고 내가 그치면 그가 불렀다. 이렇게 하기를 수 시간 뒤에 그는 패배를 자인했다. 내가 그렇게 많은 노래를 알고 있는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노래가 달리기 시작하자‘엄 복동이야, 조 수만이야’하고 소리를 쳤다. 그게 무슨 노래냐고 말하니까 장충단 공원에서 엄 복동이와 조 수만이가 자전거 경주 할 때 부르는 응원가라고 대꾸하면서 하늘을 향해 아주 크게 웃었다. 그것뿐 아니라 제일고등보통학교 교장 선생이 학생들에게 훈시하는 흉내까지 털어놓았으나 그것으로써도 따라 낼 수가 없었던 까닭에‘모리낭아’다과점에 가서 푸팅을 내었다. - 최정희,「 조광·삼천리시절」- 소설가 박종화는 담인淡人이란 호를 지어주었고, 김동리·손소희 내외, 이효석, 박계주, 백철, 박연희, 조연현 등 많은 문인들과 문학 행사나 모임에서 친분을 쌓았다. 화가 김환기와 수필가 김향안 부부와도 각별하게 지내며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김환기는 최정희의 책 『사랑의 이력』, 『풍류 잡히는 마을』, 『 바람 속에서』의 표지그림을 그려주었다. 서교동 후생주택에 우리가 살던 때 화백은 홍익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고, 살림집도 바로 근처여서 화백 내외하고 내왕이 잦았었다. 화백은 종종 점심시간이면 동료들과, 혹은 혼자서 담장 밖에서 아주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 미닫이를 열어 제치고 내다보면 화백은 우리 마당 안의 해바라기보다 훨씬 더 올라간 키를 담장에다 걸놓곤 궁구부정하니 마당 안을 들여다보며‘광야’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 최정희, 「산」, 1975 - 1970년대 서교동에서 정릉으로 이사를 했다. 한국전쟁 이후 생긴 무허가 주택들 사이에 솟은 아파트였다. 베란다에 서면 허름한 집들 사이로 난 작은 길이 갈래갈래 이어진 모습이 내려 보이고, 창문을 열어 놓으면 주변을 두른 높은 절벽과 개천이 만들어 낸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비가 쏟아지는 여름이면 폭포처럼 물이 흘러 큰 물소리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1970년대 《현대문학》에 추천으로 등단한 김지원, 김채원 두 딸은 최정희를 닮아 문인들과 잘 어울렸다. 두 자매와 함께 이제하, 서영은, 오정희 등의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최정희의 정릉 집에 자주 모였고, 문단에서는 이들을 ‘정릉클럽’이라 불렀다. 정릉에 있는 동안「산」, 「탑돌이」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죽음에 대한 담담한 시각을 내비치던 최정희는 1990년 12월 21일 정릉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암울했던 시기 여성으로 겪었던 굴곡진 삶 속에서, ‘여자란 아내, 어머니이기 전에 하나의 자립적인 인격체’임을 문학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최정희. 유쾌한 성격과 사교성으로 문단에서 사랑받았던 한 여성으로서 최정희의 모습은 정릉 시절의 추억을 함께 만든 벗 ‘정릉클럽’의 에세이집 『그들이 떠난 행복의 피난처』에 담겨 전하고 있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18-26쪽
  • 최정희 1906년 함경북도 성진 출생 1928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1930년 일본 미카와[三河] 유치원에 일하며, 조선학생극예술좌에 참가 1931년 삼천리사 기자, 「정당한 스파이」 발표 1937년 《조광》에「흉가」발표 1969년 한국여류문학인협회장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0년 작고 대표작품 『흉가』, 『인맥』, 『천맥』, 『풍류 잡히는 마을』, 『바람 속에서』, 『인생찬가』, 『별을 헤는 소녀들』, 『인간사』, 『찬란한 대낮』, 『탑돌이』 등 상훈 여류문학상(1964), 한국예술원 본상(1972), 3.1문화상(1982)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27쪽
  • 소설가이다. 1931년 잡지 《삼천리》의 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6년 시인 이은상의 소개를 받아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뒤 쓴 「흉가」 이후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는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문제와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작품을 썼다.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난하여 마해송, 조지훈, 박목월 등이 소속 된 공군 종군작가단에 들어갔다. 서울로 돌아온 뒤 노천명, 모윤숙 등과 1세대 여류작가로 문단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박종화는 ‘담인’이라는 호를 지어줬고, 김동리, 백철, 박연희, 조연현,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 등 문화예술인들과 교류의 폭을 넓혔다. 1970년대 서교동에서 정릉4동 산장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한국전쟁 이후 생긴 아파트였다. 이곳에서 오정희, 이제하, 딸 김채원 등 ‘정릉그룹’이라고 불린 소설가 모임을 열고 책을 펴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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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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