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갑주
1924.03.10 - 2010.02.28
국가무형문화재
인물 개인 음악가
유물 무형문화재
국악인이다. 1924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갑주는 대표적인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이자 가야금 명인 한성태의 아들이다.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가 한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어 발림(몸짓)을 곁들이며 구연하는 창악적 구비록사시(口碑錄事詩)이다. 판소리 보유자의 경우 북으로 장단을 맞추는 고법과 판소리 다섯마당, 즉 적벽가, 수궁가,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의 6분야에 각각의 보유자가 복수로 지정되는데, 한갑주는 적벽가의 보유자였다. 성북구 정릉 2동에 거주하면서 공연과 전수 활동을 하였다.
정릉동
  •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한갑주 보유자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20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520 (아리랑로19길 55)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국가무형문화재
  • 지정일: 1976.06.30
  • 비고: 2010.01.28 보유자 사망으로 인해 해제

근거자료 원문

  • ① 판소리 판소리는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기능보유자는 金順玉·丁榕薰·朴奉述·朴東鎭·韓甲珠가 있다. 성북구 정릉 2동에 살고 있는 韓甲珠의 보유종별은 판소리 중 적벽가이며 1976년 6월 30일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唱者가 한 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唱, 노래)와 아니리(白, 말)로 엮어 발림(몸짓)을 곁들이며 口演하는 창악적 口碑錄事詩이다. 판소리는 전통적으로 광대라고 불려진 하층계급의 예능인들에 의하여 가창·전송되어 왔다. 판소리가 언제부터 불려왔는지를 아는데는 最古의 문헌이 朝鮮 英祖 30년 柳振漢의 『晩華集』의 〈춘향가〉를 넘지 못하지만, 판소리가 재인 광대들이 벌이는 판놀음에서 여러 놀음 틈에 끼여 한 놀이로 구실을 하던 것은 훨씬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짐작되어, 어쩌면 조선 전기 문헌에 보이는 〈廣大笑謔之戱〉가 판소리의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봐서 조선 전기에 원초 판소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며 판소리를 부르던 昌優들이 신라 때부터 八關會나 儺禮에서 歌舞百戱를 벌렸던 것을 두고 신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신라의 仙樂이나 倡樂에 판소리의 근원을 대기도 하나 분명히 밝혀진 바는 없다. 판소리는 마을굿에 딸린 판놀음에서 생겨나서 여러 놀이 틈에 끼여 놀이구실을 하다가 판놀음이 마을굿과 떨어져 따로 벌이는 놀음으로 발전하면서 순조때 송만재의 『관우희』에 보이듯이 열두마당이나 생겨 다른 놀음보다 가장 인기있는 놀이로 자란 것으로 생각된다. 판소리가 사대부들로부터도 인기를 얻게 되자 민중의 판놀음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방안놀음으로도 끼이게 되었다. 또 여러가지 판소리 가운데 〈강릉매화가〉·〈변강쇠타령〉과 같은 서민적인 재담으로 된 것은 도태되고 〈적벽가〉·〈심청가〉·〈춘향가〉와 같이 사대부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것은 계속 발달하여 오늘날과 같이 방대한 모습으로 된 것이라 하겠다. 판소리 最古명창으로 이름이 전하여지는 이는 영조∼정조 때 原初 판소리를 부른 것으로 보이는 禹春大 및 河殷譯·崔先達인데 이들의 판소리 음악사 자료는 전하여지는 것이 없다. 순조 무렵에는 權三得·宋興綠·牟興甲·廉季達·朴裕全과 같은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 調와 長短을 오늘날 판소리와 같은 모습으로 구성하여 판소리의 음악적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哲宗때에는 朴萬順·李揆致·金世宗·丁昌業·宋雨龍과 같은 명창들에 의하여 판소리는 크게 확장되었으며 高宗때 金昌煥·李東伯·宋萬甲·丁貞烈과 같은 많은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니 그들의 판소리는 오늘날과 같은 밀도있는 음악성을 갖은 것으로 보인다. 한말에 나라가 기울어지면서 판소리 또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말과 일제시대에 판소리를 이어놓은 명창들로는 張判介·朴重根·朴奉來·金正文·孔昌植·金奉鶴·정응민 등이 있었으며 林芳蔚·金演洙·姜章浣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광복 뒤에는 한때 여성창극이 성행하여 판소리는 더욱 쇠미하게 되고 1960년대에는 창극도 기울어졌다. 1960년대에는 판소리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朴東鎭이 판소리 다섯마당의 전판 공연을 시도한 것을 계기로 박초월·吳貞淑·成又香 등이 판소리 전판 공연을 가진 바 있으며, 1960년대 판소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丁珖秀·박초월·鄭權鎭·朴奉述·韓承鎬 등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사라져가는 판소리 전수에 진력을 기울이고 있다. 판소리가 발생할 당시에는 한마당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서 한 歌客이 많은 종류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부를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판소리의 종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 가운데 春香歌·沈淸歌·水宮歌·興甫歌·未壁歌·裵裨將打令·변강쇠타령·장기타령·옹고집·무숙이타령·江陵梅花打令·신선타령 등 열두가지를 「판소리 열두마당」이라 일렀으나 판소리의 길이가 매우 길어지면서 한 歌客이 많은 소리를 부르기에 벅차게 되어 나머지는 다 없어지고 「판소리 다섯마당」이라 하여 춘향가·심청가·수궁가·홍보가·적벽가만이 전승되고 있다. 판소리는 鼓手한 사람이 북장단을 쳐 반주하는데 느린 진양, 중모리, 보통 빠른 중중모리, 빠른 잦은모리, 휘모리, 그밖에 엇중모리, 엇모리가 있어서 판소리의 극적내용의 緊迫과 弛緩에 따라 느리고 빠른 장단을 가려 짜며, 슬픈 界面調, 화평스러운 平調, 웅장한 羽調, 그밖에 씩씩한 설령제(드렁조), 경쾌한 경드름(京調) 등이 있어서 판소리의 극적내용의 喜怒哀樂에 따라 슬프고 기쁜 調를 가려 짜서 음악이 辭說의 극적내용과 융합되는 훌륭한 극음악으로 되어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94-969쪽
  • ▫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시대 : 기능보유자 : 한갑주(韓甲珠)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정릉(2)동 520 지정연월일 : 1964. 12. 24. 판소리 중 적벽가의 기능보유자인 한갑주가 살고 있다. 판소리의 기능보유자는 한갑주 외에도 김순옥(金順玉)・정용훈(鄭榕薰)・박봉술(朴奉述)・박동진(朴東鎭)이 있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가 한 고수(敲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唱, 노래)와 아니리(白, 말)로 엮어 발림(몸짓)을 곁들이며 구연(口演)하는 창악적 구비서사시(口碑敍事詩)이다. 판소리는 전통적으로 광대라고 불리는 하층계급의 예능인들 중심으로 가창・전승되어왔다. 판소리가 언제부터 불려왔는지를 아는 데는 최고(最古)의 문헌이 조선 영조 30년(1754) 유진한(柳振漢)의 ≪만화집(晩華集)≫의 <춘향가>를 넘지 못하지만, 판소리가 재인 광대들이 벌이는 판놀음에서 여러 놀음 틈에 끼여 한 놀이로 구실을 하던 것은 훨씬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조선전기 문헌에 보이는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가 판소리의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아서 조선전기에 원초 판소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며, 판소리를 부르던 창우(倡優)들이 신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신라의 선악(仙樂)이나 창악(倡樂)이 판소리의 근원이라고도 하나 분명히 밝혀진 바는 없다. 판소리는 마을굿에 딸린 판놀음에서 생겨나 여러 놀이 틈에 끼어 놀이구실을 하다가 판놀음이 마을굿과 떨어져 따로 벌이는 놀음으로 발전하면서 순조 때 송만재의 ≪관우희≫에 보이듯이 열 두 마당이 되어 다른 놀음보다 가장 인기 있는 놀이로 자란 것으로 생각된다. 판소리가 사대부들로부터도 인기를 얻게 되자 민중의 판놀음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방안 놀음으로도 끼이게 되었다. 또 여러 가지 판소리 가운데 <강릉매화가> <변강쇠타령>과 같은 서민적인 재담으로 된 것은 도태되고 <적벽가> <심청가> <춘향가>와 같이 사대부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것은 계속 발달하여 오늘날과 같이 방대한 모습으로 된 것이라 하겠다. 판소리 최고(最古) 명창으로 이름이 전하여지는 이는 영조~정조 때 원초(原初) 판소리를 부른 것으로 보이는 우춘대(禹春大) 및 하은담(河殷譚)・최선달(崔先達)인데 이들의 음악사 자료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순조 때에는 권삼득(權三得)・송흥록(宋興錄)・모흥갑(牟興甲)・염계달(廉季達)・박유전(朴裕全)과 같은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 조(調)와 장단(長短)을 오늘날 판소리와 같은 모습으로 구성하여 판소리의 음악적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철종 때에는 박만순(朴萬順)・이규치(李揆致)・김세종(金世宗)・정창업(丁昌業)・송우룡(宋雨龍)과 같은 명창들의 기여로 판소리는 크게 확장되었으며, 고종 때 김창환(金昌煥)・이동백(李東伯)・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과 같은 많은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니 그들의 판소리는 오늘날과 같은 밀도 있는 음악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한말에 나라가 기울어지면서 판소리 또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말과 일제 때 판소리를 이어놓은 명창들로는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澄근)・박봉래(朴奉來)・김정문(金正文)・공창식(孔昌植)・김봉학(金鳳鶴)・정응민 등이 있었으며 임방울(林芳蔚)・김연수(金演洙)・강장완(姜章浣)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광복 뒤에는 한때 여성 창극이 성행하여 판소리는 더욱 쇠미하게 되고 1960년대에는 창극도 기울어졌다. 1960년대에는 판소리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박동진(朴東鎭)이 판소리 다섯 마당의 전판 공연을 시도한 것을 계기로 박초월・오정숙(吳貞淑)・성우향(成又香) 등이 판소리 전판 공연을 가진 바 있으며, 1960년대에는 판소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정광수(丁珖秀)・박초월・정권진(鄭權鎭)・박봉술(朴奉述)・한승호(韓承鎬) 등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사라져가는 판소리 전수에 진력을 기울이고 있다. 판소리가 발생할 당시에는 한마당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서 한 가객(歌客)이 많은 종류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부를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판소리의 종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춘향가(春香歌)・심청가(沈淸歌)・수궁가(水宮歌)・흥보가(興甫歌)・적벽가(赤壁歌)・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변강쇠타령・장기타령・옹고집・무숙이타령・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신선타령 등 열두 가지를 <판소리 열두 마당>이라 일렀으나 판소리의 길이가 매우 길어지면서 한 가객(歌客)이 많은 소리를 부르기에 벅차게 되어 나머지는 모두 없어지고 <판소리 다섯 마당>이라 하여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만이 전승되고 있다. 판소리는 고수(鼓手) 한 사람이 북장단을 치면서 반주하는데 느린 진양, 중모리, 보통 빠른 중중모리, 빠른 잦은 모리, 휘모리, 그 밖에 엇중모리, 엇모리가 있어 판소리의 극적 내용의 긴박과 이완에 따라 느리고 빠른 장단을 가려 짜며, 슬픈 계면조(界面調), 화평스러운 평조(平調), 웅장한 우조(羽調), 그 밖에 씩씩한 설렁제(드렁조), 경쾌한 경드름[京調] 등이 있어서 판소리의 극적 내용의 희노애락(喜怒哀樂)에 따라 슬프고 기쁜 조(調)를 가려 짜서 음악이 사설(辭說)의 극적 내용과 융합되는 훌륭한 극음악으로 되어 있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3, 1991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99-101쪽
    *여기에 기록된 지정연월일은 판소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된 날을 의미하므로 실제 한갑주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연월일과는 다르다. * 한갑주는 1976년 6월 30일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인정받았고, 2010년 01월 28일 보유자의 사망으로 인해 지정 해제되었다.
  • 정의 해방 이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개설 성원목·박종원 등을 통해 김채만의 소리제를 배웠으며,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다.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활동사항 한승호(韓承鎬, 1924∼2010)는 명창 한성태(韓成泰, 1890∼1931)의 3남으로 태어나 10여세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성원목(成元睦)·박종원(朴宗元)으로부터 김채만(金采萬)제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김채만의 소리는 박동실·박종원·박화섭 등을 통해 광주·담양 일대에서 널리 성행했다. 한승호는 김채만의 여러 제자들을 찾아다나며 그의 소리와 특징적인 더늠을 익혔으며, 10대 후반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당대 명창들의 소리를 견문했다고 한다. 한승호는 광복 전후인 20세 무렵 서울과 전남 등지에서 김채만 제를 알고 있는 애호가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30대 무렵인 1950년대에는 임방울의 공연 단체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한승호가 활동하던 1940∼1950년대는 일제 말에서 한국전쟁 기간이었으므로 그의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의 활동은 후일의 대담을 통해 재구성된 만큼 활동사실과 정확한 연대를 재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1960년대에 상경하여 활동했고, 1974년 4월 2일에는 명동예술극장에서 ‘제1회 한승호 판소리 독창회 「심청가」를 공연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976년 6월에는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한승호는 일생동안 김채만 제 판소리의 미학을 추구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9살 때에는 김채만에게 소리를 배웠던 ‘상쟁이영감(당시 80세)’을 강진까지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김채만의 소리는 광주 담양 일대에서 전승된 서편제 판소리의 대표적인 유파이며, 현재 박유전-이날치-김채만-박동실-김소희·한애순으로 이어지는 「심청가」가 널리 알려져 있다. 김채만-박종원-한승호로 전승된 심청가는 성음놀음이나 장단붙임이 더욱 화려하고 분방하다. 이는 한승호가 김채만제가 지니고 있는 성음놀음이나 기교를 극도로 화려하고 분방하게 추구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한승호는 구성진 수리성을 지녔으며,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다. 1976년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 원형보존기록 사업의 일환으로 「적벽가」 ‘새타령-장승타령’ 부분이 녹음되었으며, KBS에서도 「심청가」, 「적벽가」 완창 녹음을 남겼다. 2010년 1월 28일 서울에서 작고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한승호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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