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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꼿딱한 사람이야. 중이 댔어. 내가 안암동 살았는데 한 선생도 부근에 살아서 둘이 가끔 만났어. 참 괜찮은 사람이 댔어요. 딸이 하나 있었지 아마. 아주 순진하고 나쁜 건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소녀 같았어. 한 선생은 소탈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가난했어. 스님이니 어느 절에서 살림을 대 주는 것 같았는데 중처럼 단순한 살림살이였어요. 그는 3·1만세 운동의 민족대표로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지요.
- 서울 북촌에서 4. 성북동 세집, 고 최내영 교수(법학자/역사가), 김유경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만해 한용운.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뒤 3년간 옥고를 치르는 고통을 겪었다. 그 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성북동 골짜기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한다. 1933년, 그는 유숙원과 결혼하여 꼭 1년이 되던 해에 딸 영숙을 낳았다. 어려웠던 살림살이를 제외한다면 한용운과 그의 가족들이 성북동에서 보낸 시간은 매우 단란했다고 한다.
한용운은 그의 딸 영숙을 일본의 체제하에서 교육시킬 수 없다며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직접 영숙을 교육시켰다. 그때는 언문이라고 불리던 한글, 한문, 붓글씨, 산수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일제의 행정 체제에 따라 민적이 처음으로 시행되었지만, 그는 망국민으로서 일제 식민지의 민적에 오르기를 거부했다. 그 뒤에 호적법이 시행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딸 영숙도 입적시키지 않았다.
“아침에 눈 뜨면 세수하고 오전에 공부하고 낮에는 붓글씨 쓰고 숙제하고, 나중에 해방이 되어서 혜화초등학교 3학년으로 들어가니까 학교 공부가 재미가 없었어. 한글 다 알지, 산수 다 알지. 이화여중을 갔는데 6·25가 터지면서 또 그만 다녔어. 나중에 야간고등학교 조금 다녔고.”라고 그의 딸은 당시를 회상했다.
어느 날 그의 어린 딸 영숙이 일본의 가명문자로 된 신문을 보고 “아빠 이건 무슨 글자야?”라고 물었을 때, 그는 “관둬! 그런 것은 몰라도 된다. 그건 글자가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호적에도 올라있지 않았기에, 그의 딸 영숙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다. 제 또래들과 어울리는 기회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것도 아버지의 곧은 뜻 때문에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에 불가피하게 협력하게 된 최린이 한용운 몰래 그의 딸 영숙에게 100원짜리 지폐를 쥐어주고 간 일이 있었다. 그것을 알고 그가 아내와 딸에게 불같은 호통을 친 것도 그의 민족정신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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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은 독립 운동가이자 사상가, 승려이자 시인으로 일제 강점기에 전국을 떠돌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 한편으로, 그는 심우장에 꾸민 가정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꽃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고, 깊은 밤의 고요를 사랑할 줄 알았으며, 아내와 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어머니더러 늘 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대요. 꽃이나 나무와 친하면 사람은 자연히 보살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셨대요.” 영숙은 늙은 한용운의 한 모습을 말하고 있다.
- <한용운 평전>, 고은
“임자는 내가 말하지 아니하여도 이미 보살의 경계에 들어 있어. 하기야 보살이 어디 따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 <한용운 평전>, 고은
그는 궁핍한 시대에 궁핍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현란한 행위의 궤적에도 늘 궁핍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어머님은 병원의 간호원 생활을 오래 하셨지만, 아버님을 맞이해서는 간호원 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가난한 살림의 주부가 되셔서 삯바느질, 삯빨래, 물 길어다 주기 따위로 마을의 여러 집 일을 해서 그 삯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셨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아버님의 원고료도 꽤 큰 수입이었으나 그것은 집에서 쓰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해요. 그리고 원고료 없는 원고도 많이 쓰셨다고 들었어요.” 한용운의 딸 영숙은 어린 시절에 들은 얘기를 하고 있다.
- <한용운 평전>, 고은
이런 생활에서도 그는 아내와 딸을 사랑했다. 그의 아내와 딸도 마찬가지였다. 아내 숙원은 아버지 같은 남편의 종교를 따라 독실한 불교도가 되어서 심우장을 절간으로 여길 정도로 육식을 삼갔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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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麗(화려)한 式典(식전)뒤에 숨은한숨
이날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33인의 애국선열 유가족들은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자 뜨거운 눈물을 맺고 있었다.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유가족 중 수명은 현재 생활난에 허덕이고 있음을 이야기하여 주고 있는가 하면 33인유족회에서 하등 생활보조가 없음을 말하여 주며 기념식에 참석한 기쁨보다 오히려 우울한 표정들만을 하고 있었다.
식장에 참석한 유가족들은 다만 가슴에다 유가족이란 표지만을 달고 있었으며 식이 끝나자 제각기 뿔뿔이 헤어져 가는 것이었다.
33인의 유가족 중 수명은 기자에게 이날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여 주고 있다.
(중략)▲유숙원여사=67세(고 한용운 선생 부인)=딸 영숙(25)이와 같이 돈암동 48-44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생활은 동국대학교의 여사무원으로 있는 딸의 월급으로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유족회의 보조라니요? 없습니다. 무엇이라 감상을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경향신문』 1958.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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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진행자)만해 선생님이, 저희는 책으로만 접하니까 실제로 어떤 성격이셨는지?
(구술자: 전보삼 경기도박물관장)아주 그냥 칼날 같은 분이지. 고난의 칼날에 서라 하는 얘기가 있잖아 만해가 쓴 칼럼 중에 응? 성공과 실패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길을 갈까하면 많은 사람들은 성공의 길을 가려고 하지만 만해는 그길 불가하다고 그랬다고. 그 길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봐라. 실패한다 하더라도 옳다면 그 길로 가라. 정의를 위해 싸우고 고난의 칼날을 밟는다면 넌 그 존재의 통쾌함을 느낄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성공의 실패보다도 옳고 그름 것을 먼저 분별할 줄 아는 정의론을 주장 하였지. 그거에 반하면 추호도 용서가 안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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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가 일본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았어요. 그거 잘 알아야해. 절대로 그런 사실이 없어. 근데 사람들은 흔히 만해하면 일본에 무슨 뭐 강력한 저항주의자. 만해를 자꾸 저항주의자라고 하는데 그거 잘못된 표현이야. 저항이 아니야. 뭐에 대한 거냐면 군국주의, 침략주의에 대해서 만해가 질타하는 거지 그거 아닌 일본의 평화를 위해서 만해가 오히려 기도한 사람이야. 일본이 평화, 일본의 평화란 건, 조선의 평화이고 조선의 평화란 건 중국의 평화라고. 아시아의 평화라고. 그런데 그게 깨지면서 다 혼돈의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거야. 그래서 일본은 일본의 길, 조선은 조선의 길로 가야 된다고 하는 것을 역설했지. 공존, 공영이야.(전보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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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인지 문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문인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에도 이미 김일엽, 김기진, 이종린 등이 성북동에 살았고, 만해 한용운도 이태준과 같은 해에 심우장을 짓고 성북동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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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태준의 수연산방과 한용운의 심우장이다. 공교롭게도 두 집 모두 1933년에 지어졌다. 두 집 모두 큰 규모의 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번듯한 기와집이었고 상당한 공사비가 들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태준의 경우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라는 번듯한 직업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한용운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의 도움 등 주변 지인들의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정도의 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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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과 노시산방
1. 1937년 봄, 심우장 - 한용운, 김동삼, 조지훈
선생을 마지막으로 뵈온 것은 일송 김동삼 선생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셨을 때 때가 때인지라 일송 선생의 시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 감옥 구내에 버려둔 것을 선생이 망명시절 고인에게 받은 권우眷遇와 지사志士 선배에 대한 의리에서 결연이 일어나 성북동 심우장까지 일송 선생의 관을 옮겨다 놓고 장사를 치르시던 모습이다.
위 글은 시인 조지훈이 1954년 잡지 『신천지』에 쓴 「한용운 선생」의 일부이다. 이 짧은 글에는 3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용운, 김동삼, 조지훈. 그리고 조지훈은 이 장례를 아버지와 함께 갔으니 아버지 조헌영을 더하면 넷이 된다. 실제로 조헌영은 장례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뒤에 한용운을 대신해서 조사弔辭를 낭독했으니 총 4명이 이 글의 당사자가 된다. 과연 당시의 상황은 어땠으며, 이들은 무슨 관계였을까?
한용운이 성북동에 자리 잡은 것은 1933년으로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1929년 한용운은 권동진, 홍명희 등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했다. 좌우합작운동으로 큰 기대를 갖고 참여했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체됐다. 박금동 스님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무렵 만해와 나는 제법 의기가 상합하여 곡차를 무진무진 마셔댔지”
여기서 만해의 좌절은 끝나지 않았다. 신간해 해체 후 다시 힘을 내어 열성을 쏟았던 잡지 『불교』는 1933년 초에 이미 폐간 위기에 놓여 있었고―결국 같은 해 7월 폐간된다―그가 당수로 있던 불교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청년들은 1933년 무렵부터 일제와 타협하고 순응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스로를 ‘세간의 열패자’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새로운 인연이 찾아온 것도 1933년의 일이다. 간호사 유숙원과의 만남이었다. 둘은 결혼했다. 지치고 떠돌던 한용운에게 부인이 마음의 안식처였다면 떠돌던 그의 육신에도 안식처가 필요했다. 김벽산 스님에게 52평의 땅을 받아,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래도 모자란 것은 빚을 내어 집을 지었다. 그리고 이름을 심우장이라 했다. 지친 순간 안식이 찾아왔다.
심우장에서 한용운은 딸 영숙을 낳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옛 친구들이 하나 둘 변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것도 이곳 심우장에서였다. 그러던 중에 김동삼의 옥사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한용운과 김동삼의 관계는 19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권을 상실한 직후 한용운은 만주로 떠났고 둘은 이곳에서 만났다. 김동삼은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서간도에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한용운은 바로 이곳을 찾아간 것인데, 이때 젊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스파이로 오해 받아 총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들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용운은 오래지 않아 조선으로 돌아간다. 그러며 김동삼과 서로 마주할 인연은 끝이 났다.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고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을 동지同志라 한다. 동지 사이에 중요한 것은 뜻이지 잦은 만남이 아니었다. 둘은 나이차도 크지 않았다. 김동삼은 1878년생, 한용운은 1879년생. 한 살 한 살 나이 따지는 것이야 요 근래에 생긴 문화였다. 뜻이 맞는 사람끼리는 나이차가 조금 있어도 서로 벗으로 삼는 것이 우리 전통이었다.
한용운은 조선에서 동지인 그의 소식을 계속 접했을 것이다. 1919년 서로군정서에서 참모장을 맡은 것도, 1920년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를 지원한 소식도, 1929년 김좌진, 지청천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촉진회’를 결성한 것도, 그러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에 의해 체포된 것도,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것도 모두 한용운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체포 소식에 한용운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그의 부고 소식을 접한 후의 모습은 알 수 있다.
“김 장군의 관 위에 앉아서 울부짖으시는 것을 보고 나도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분은 식음을 폐하고 마지막 화장하던 날 빈 속에 술만 마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자 김관호의 증언이다. 최린, 최남선 등 독립운동의 동지들의 변절 소식이 들려오던 시절 그의 호처럼 한 그루 푸른 소나무 같았던 동지 김동삼의 죽음은 한용운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식음을 폐하고 술만 마셔 기운이 빠져서였을까? 아니면 김동삼의 죽음을 안 그 순간부터 온 몸에 힘이 빠졌기 때문일까? 일본경찰의 눈치 때문에 장례식에 유일하게 허락된 조사 낭독마저 한용운은 김동삼의 고향 후배라는 이유로 조헌영에게 맡긴 채 (조사는 한용운이 직접 썼다) 우두커니 서서〔佇立〕 지켜볼 뿐이었다. 한용운은 심우장을 자신의 마지막 거처로 선택했듯, 김동삼의 마지막 동지가 되기를 자처했다.
심우장에서 치른 김동삼의 장례를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 가운데 한명이 바로 조지훈이다. 그는 조사를 낭독한 아버지 조헌영을 따라 한용운을 만나러 다녔다. 그에게 한용운은 여러모로 어려운 사람이었다. 조지훈은 1920년생, 조헌영은 1901년생이었으니 1879년생인 한용운은 조지훈에게 할아버지뻘이었다. 거기에 이미 한용운은 신화적 인물이었다.
난초 중에도 풍란의 매운 향기를 능가하는 한용운 선생의 향기를 나는 일찍이 어려서 들었다.
조지훈의 말이다. 청년 조지훈은 한용운이 이미 3.1운동 민족대표로 활약한 것, 3년간의 치열한 감옥생활, 신간회 활동을 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용운은 이미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뿐 아니다. 1926년 발표한 시집 『님의 침묵』은 그를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 문학가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그런 한용운을 조지훈이 만난 것이다. 당시의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추정하기 힘들지만, 오래 남았던 것은 확실 하다. 1954년 『신천지』에 「한용운 선생」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사조』 1권 1호에 「한용운론」을, 1966년 『사상계』 14권 1호에는「폭풍·암흑속의 혁명가-한국의 민족시인 한용운」을 발표 한다. 같은 해 ‘근대명언초’란 코너의 「방우한담」이라는 칼럼에선 한용운을 언급했고, 「지조론」이란 글에선 단재 신채호와 함께 민족의 지조를 지킨 대표인물로 한용운을 꼽았다. 「민족주의자 한용운」이란 글에서는 “선생의 님은 중생이요, 또한 한국”이라고 이야기하여 그의 문학도 이야기했다. 조지훈은 해방 이후 최초의 한용운 연구자였던 셈이다.
1937년 봄, 심우장에서는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가 있었다. 차가운 관속에 누워 있었을 김동삼 선생의 시신, 그 관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한용운, 묵묵히 조사를 읽어갔을 조헌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지켜봤을 청년 조지훈이 그곳에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상황이었고, 식민지 안에 심우장만이 조선 땅으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바로 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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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심우장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9길 24
독립지사이자 시인이며 승려였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생이 1933년부터 1944년 입적할 때까지 11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거처했던 한옥이다.
만해 한용운은 1910년에는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으며, 1919년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발기인 33인에 참가하고 3·1독립선언문의 「공약삼장」을 작성하였다. 1926년에는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님의 침묵』을 펴냈으며, 1927년에는 좌우합작으로 중요한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택호인 심우장은 불교의 선종화 심우도尋牛圖(또는 시우도十牛圖)에서 따온 것이다. ‘심우’란,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단계를 동자가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서 묘사한 10단계 중 첫 번째 단계를 말한다. 사랑방 위쪽에 걸린 편액은 서예가 일창 유치웅이 1980년대에 쓴 것이다. 심우장은 일반적인 가옥처럼 남향이 아니라 ‘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남향으로 집을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 심우장 입구에 만해 산책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심우장 관람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가능하다. 매년 6월 29일 선생의 기일에 성북문화원 주관으로 추모 다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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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龍雲 1879(고종 16)-1944
시인·승려·독립운동가. 본명은 貞玉, 아명은 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卍海). 충청남도 홍성에서 應俊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漢學을 익혔고 14세에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6세 되던 해 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五歲庵에 입산,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禪을 닦은 후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순력하고, 27세 때 다시 설악산 百潭寺로 입산하여 連谷의 지도아래 정식으로 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敎學的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고, 36세때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來瑞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採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30세 때 安重根의 장거가 있었는데, 그해 6개월간 일본을 방문하여 주로 東京과 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폼소 체험하였으며, 3·1운동 때의 동지가 된 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됨에 국치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중국 東北三省으로 가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40세 되던 해에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월간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는데, 이 잡지는 비록 3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지만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인, 불교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잡지였다. 3·1독립운동 때에는 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는데, 내용을 좀더 과감하고 현실적으로 하자고 생각하여 崔南善과 의견충돌도 있었지만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데 그쳤다. 이듬해 그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고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47세인 1926년 근대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88편의 시가 수록된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 이 시들은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들이다. 그 중 대표적인 시인 ‘님의 침묵’을 옮겨 적어 본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줌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틀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1928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로 후에 광주학생의거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추진된 新幹會를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맡아 중앙집행위원과 京城支會長 자리를 겸직하였다. 1932년 52세 때에는 權相老가 맡아오던 《불교》 잡지를 인수하여 사장에 취임,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고,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55세 때 부인 兪民와 다시 결합하였고, 57세 때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黑風〉을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後悔〉를 연재하였다. 60세 때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동지들과 자신이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1944년 5월 9일 현재 성북구 성북동의 尋牛莊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 李始榮·申采浩·鄭寅普·洪命熹·崔凡述·朴珖·宋月面·金東三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그가 쓴 것이다.
성북구 성북동 222번지에 있는 「尋牛莊」은 그가 晩年을 보낸 집이다. 이 집은 그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여 夫人兪氏와 어린 딸 英淑과 함께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곤란에 처했을 때 金鐵中씨가 그의 형 廷國이 東亞日報 大吸支局長으로 떠났으므로 형의 집에 萬海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때 金碧山스님이 자기가 草堂을 지으려고 松林속에 사둔 52평을 드려 집 지을 것을 권유하매 부인 유씨의 소지금 약간과 당시 朝鮮日報社 方應謀사장 외 여러명의 도움으로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는 南向의 좋은 집터를 마다하고 그 반대편 산비탈 北向터에 집터를 정하였으니 그것은 日帝의 總督府가 보기 싫어서 등을 지고 집을 지은 것이다. 이 집을 尋牛莊이라고 이름한 것은 그가 萬海라는 號이외에 筆名으로 五歲人·城北學人·牧夫·失牛 등을 가끔 썼는데 소를 키운다는 뜻인 牧夫는 내 마음 속의 소를 키움은 우리 모두가 가야할 往生의 그 길을 멈출 수 없음을 나타낸 의미심장한 뜻을 가지고 있다. 즉 尋牛莊이란 불교의 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46-7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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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 한용운이 지은 집.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으로 일관했던 그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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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萬海) 한용운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지 세 해째 되던 해 여름인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에서 지방 아전 군속인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용운의 아명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貞玉)이다. 용운(龍雲)은 법명이며, 법호는 만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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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생을 처음 뵈온 것은 정축년(1937) 여름인가 한다. 그 때 나는 성균관 뒤에 살았기 때문에 고개 하나만 넘으면 성북동의 심우장-선생의 우거寓居로 찾아 뵐 수가 있었다. 어느날 가엄(家嚴;아버지 조헌영)을 따라 심우장으로 선생께 뵈이러 가는 도중에서 선생을 처음 뵙게 되었다. 먹물 드린 고이 적삼에 헬메트를 쓰시고 무슨 보따리를 들고 고개를 넘어 오시던 그 고기古奇 청수淸秀한 모습은 매우 인상이 깊다.
- 조지훈, 「한용운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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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 출생. 독립운동가이자 저항문학에 앞장선 시인이며, 불교의 자주화를 주장하던 승려이다.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조선 불교의 현실을 비판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전국을 다니면서 일반 대중과 승려에게 불교 강연을 열었고, 불교계를 대표해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였다. 3년간 옥고를 치르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정의와 평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는 글을 집필하였다. 대표작 「님의 침묵」 외에 시, 소설, 논설문 등 여러 편의 글을 남겼으며,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행하였다. 1933년 승려 김벽산이 기증한 성북동 땅에 지인들의 도움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짜리 집을 짓고 ‘심우장尋牛莊’이라 했다. ‘심우장’은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을 의미한다. 조선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 하여 북향으로 집을 짓고, 나라를 뺏긴 현실이 감옥과 같은데 어찌 불을 지필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자신의 안위安慰를 위하지 않았다. 세상을 뜰 때까지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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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독립운동가·승려. 충남 홍성 출생. 속명은 유천裕天이다. 출가 후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해 일본으로부터 자주화를 제창하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으로 참여하였다. 『조선불교유신론』, 시집 『님의 침묵』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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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 한용운
생애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 출생
·1905년 인제의 백담사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음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
·1927년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 역임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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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불교승려·독립운동가(민족대표 33인)·시인
·1933년부터 1944년 입적할 때까지 심우장 거주(222-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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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卍海 일대기 연극으로 본다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일제치하 독립운동가인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선생의 일대기가 연극으로 공연된다. 성북구는 8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만해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상을 재조명하고 시민에게 애국애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다음달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만해선생의 일대기를 연극으로 공연하기로 했다.성북구의 이 같은 공연계획은 만해선생이 성북구 성북동222「심우장(尋牛莊.서울시기념물제7호)」에서 거주하다 마지막 생애를 보낸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성북구는 관내 공연단체인 신명예술단(단장 朴인배)과 공연협의를 마쳤다. 연극은 8일에는 한차례, 9일과 10일에는 하루 두차례씩 모두 다섯차례에 걸쳐 춤과 노래, 무용 등이 합쳐진 총체극으로 공연되며 관람은 무료다.
『중앙일보』 1995.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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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 출생
○ 1905년 인제 백담사에서 승려로서 출가 (27세)
○ 1907년 고성 건봉사에서 선(禪) 수행, 만화선사에게서 ‘용운(龍雲)’이라는 이름을 받음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 3.1운동시 불교계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선언문 말미에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추가함.
○ 1925년 인제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탈고, 다음 해 회동서관에서 발행
-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비롯한 「알 수 없어요」, 「나룻배와 행인」등 88편의 시가 실린 『님의 침묵』 탈고
○ 1931년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취임
- 한용운이 만당의 주요 거점인 사천 다솔사에 있을 때, 김동리가 만해와 범부의 대화에서 분신공양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소설 『등신불』을 지었다고 함.
○ 1933년 심우장을 짓고 거주
- 심우장에서 독립지사 김동삼의 장례를 치름(1937. 3.)
- 최범술, 박광과 단재 신채호의 비문을 짓고 단재의 유고 『조선상고사』와 『상고문화사』를 간행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이루지 못함
- 창작뮤지컬 ‘심우’(극단 더늠, 2014년 제작)는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독립지사 김동삼의 장례를 치루어 준 에피소드를 담음.
○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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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해 한용운 관련 시설 등
- 성북동 시설 : 심우장(뮤지컬 심우), 성라암(공약삼장)
- 타지자체 시설·행사
·홍성군 : 한용운 생가, 한용운 문학체험관
역사인물 축제, 만해사당, 민족시비공원
·인제군 : 만해마을(축제), 만해기념관, 만해문학박물관, 백담사, 만해대상
·광주(경기) : 만해기념관(남한산성)
·구리 : 만해 한용운 묘소(망우리)
·종로구 : 중앙고등학교, 유심사, 보성사, 보성학교
- 비고 : 창작과비평사(만해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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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련 자료
○ 심우장 시대(1933~1944)의 작품
- 시
·<심우장 산시(散詩)> 18편 : 산거(山居), 산골 물, 비바람, 강배, 산촌의 여름 저녁, 해촌(海村)의 석양, 반월(半月)과 소녀, 모순, 천일(淺日), 일출, 낙화, 일경초(一莖草), 심(心), 성탄, 세모(歲暮), 쥐, 파리, 모기
·시조 32편 : 심우장(尋牛莊), 남아(男兒), 무궁화 심고자, 우리 님, 사랑, 선경(禪境), 선우(禪友)에게, 직업부인(職業婦人), 표아(漂娥), 조춘(早春), 춘조(春朝), 춘주(春晝), 추야몽(秋夜夢), 추야단(秋夜短), 추화(秋花), 코스모스, 한강에서, 계어(溪漁), 성공(成功), 무제(無題)
·동시> 3편 : 달님, 농(籠)의 소조(小鳥), 산 넘어 언니
·한시 : 곽암 십우송을 차운하다, 회갑 날의 즉흥, 삼가 계초 선생의 생신을 축하함, 신문 폐간 등
- 소설
·장편소설 : 흑풍, 후회, 철혈미인, 박명, 죽음
·번역소설 : 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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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민족주의 계열
- 이름 : 한용운
- 주소(당시) : 미상
- 주소(현재) : 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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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 이름 : 한용운
- 주소(현재) : 성북동 222-1
- 분야 : 문학(시, 소설), 독립운동, 불교승려
- 비고 : 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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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민족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1930년대 성북동 심우장에서 거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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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성북동 심우장에 은거하며 일제의 협력을 거부하며 소극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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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 충남 홍성
주소: 성북동
계열과 단체: 3·1운동
<활동 내용>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이며 불교인(佛敎人)이다. 처음에는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으로 들어갔다. 한때 만주 간도성(滿洲間島省) 등을 다니며 광복운동을 하다가, 1905년(광무 9)에 인제(麟蹄)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 후 출가 입산하여 백담사에 오는 애국 지사에게 조국없는 백성의 비애와 앞날의 광복운동에 대한 방책을 설득시켰다. 1910년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박탈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군관학교(軍官學校)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유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佛敎學院)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해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에는 서울의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서는데 힘썼고,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문화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4일,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한 최 린(崔麟)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또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해인사(海印寺)의 승려인 백용성(白龍城)에게 이 계획을 알려, 불교도로서 적극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승낙을 받고 민족대표로 서명할 인장을 위임받았다. 그는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 했으나, 독립선언서로 표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27일에는 다시 최 린을 방문하여 스스로 민족대표자로 서명 날인하고, 백용성으로부터 위임받은 도장으로 서명 날인하여 주었다. 이튿날인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준비 사항에 대한 최종 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인 민족대표를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을 겸임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투쟁사상 고취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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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0년-한용운 독립군 군관학교 방문 및 만주 지역 유랑
1913년-한용운 『조선불교 유신론』 간행
1918년-한용운 월간지 《유심》 창간
1919년-한용운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 서명
1926년-한용운 『님의침묵』발표
1927년-안재홍을 중심으로 한용운, 최익환, 조헌영 등 신간회 활동 참여
1933년-한용운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거주 시작
1944년-한용운 심우장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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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한용운
민족대표 33인이자 민족지도자
1879~1944 / 대한민국장 / 성북동 222-1 거주
민족지도자로, 민족대표 33인으로, 또한 민족시인으로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1905년 승려로 출가 후 불교계의 대표로 불교개혁을 주장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3·1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오늘날 성북구의 명소가 된 심우장은 그가 1933년부터 1944년 입적할 때까지 머물던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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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소드 하나-한용운의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
“그때다! 뒤에서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별안간 총을 놓았다! 아니, 그때 나는 총을 놓았는지도 무엇을 놓았는지 몰랐다. 다만 “땅” 소리가 나자 귓가가 선뜻하였다. 두 본째 “땅”소리가 나면 또 총을 맞으매 그제야 아픈 생각이 난다.” (중략)
1911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한 이듬해 만해 한용운은 만주로 떠납니다. 그는 만주에 자리 잡은 조선인들을 만나 그들의 안부를 묻고 고국의 사정을 들려주었지요. 그러던 어느 가을날 한 산촌에서 머물고 떠나는 길, 자신을 배웅해주던 조선 청년들에게 별안간 총을 맞습니다. 두 발의 총을 맞고 혼미한 정신으로 ‘관세음보살’까지 본 한용운은 간신히 마을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납니다. 그는 그들이 총을 쏜 까닭이 아마도 외지인에 대한 의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그때 한용운이 죽었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사와 근대 불교사는 크게 달라졌을 겁니다. 한용운은 이 아찔한 경험을 16년이 지난 1927년, 잡지 《별건곤》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 만주산간에서 청년의 권총에 마져서’라는 제목의 회고록으로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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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인의 목소리 하나
한용운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그 마음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떠나간 님은 말이 없고 남겨진 이는 절망합니다. 화자에게는 어떤 고운님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남기고 떠나갔을까요. 그러나 화자는 희망을 말합니다.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다고 말합니다.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한용운이 이 시를 발표한 때는 1926년이었습니다. 3·1운동의 주도자로 옥고를 치르고도 항일운동에 대한 불씨를 더욱 뜨겁게 지폈던 시기였습니다. 평생을 독립운동가로 살아온 그에게 어쩌면 ‘님’은 빼앗긴 조국, 그러나 다시 되찾게 될 조국을 의미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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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독립선언의 중심에 선 한용운
3·1운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이 바로 민족대표 33인입니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 인사들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33인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이가 한용운입니다. 1918년 11월 말 천도교의 최린, 오세창, 손병희 등과 만나 대대적인 독립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나눈 한용운은 이후 기독교 측 중진과도 만나 독립이라는 한뜻으로 종교계의 통합을 이룹니다. 이들은 활동의 핵심인 독립선언서 낭독을 위해 독립선언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독립선언서는 육당 최남선과 최린, 그리고 한용운이 주축이 되어 작성되었습니다. 한용운은 최남선이 기초한 선언서를 좀더 명확하고 장엄한 문장으로 다듬었으며 적극적인 독립 의지를 내포한 공약삼장을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는「독립간청서」혹은「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던 것을「독립선언서」로 표제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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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유일당 신간회와 성북인들
조직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신간회에서 활동한 성북인들도 여럿입니다. 한용운은 신간회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겸하며 든든한 지주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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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한용운과 조소앙
여기, 조국의 광복을 갈망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과 조소앙입니다. 다른 듯 비슷한 두 사람은 독립운동가를 넘어 ‘민족지도자’로 칭해지는 이들입니다.
동학혁명 실패 후 승려로서 수행의 삶을 살고 있던 한용운은 일찍이 중국과 일본을 돌며 자주적인 불교 사상을 탐구하고 혼란한 조국의 현실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경술국치 이후 그는 중국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돌며 애국지사들을 만나 조국의 광복문제와 국내 사정들을 의논했으며 동시에 불교의 현실참여와 민중계몽운동을 설파합니다. 귀국 후 그는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당시 불교계의 부패와 친일을 비판하며 우리나라 불교의 자주적인 모습을 되찾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1916년에는 월간지《유심》을 발행해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서고 1918년 말, 종교계의 통합과 독립운동가들의 연대를 통해 거국적인 독립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