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연
1844 - 1916.02.15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교육가
인물 개인 관료
조선시대 내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44년에 경상북도 평해에서 태어나 서울로 와서 양봉협의 양자가 되었다. 1863년 내관시험에 합격하였고, 고종의 호종내관을 지냈다. 본명은 황윤명인데 고종이 수연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호는 춘파이다. 1893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 동소문 밖 별장(현 서울 성북동 별서)에 머무르면서 한시를 지었는데, 유고집 『춘파유고』에 수록된 한시 90편 가량이 대부분 성북동 별장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에는 삼산의숙(三山義塾)을 설립하고 제반 경비를 부담하였으며 항일의병활동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과 긴밀한 관계였던 만큼 그의 활동에 고종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성북동
  • 경향(京鄕)의 자선가, 경향의 여러 자선가
  • 성북동(城北洞)의 명촉(明燭), 황봉시의 아름다운 일
  • 황춘파(黃春波)(수연(壽延))씨의 일생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37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55-1 (선잠로 12-11)
  • 비고: 삼산의숙(활동)

근거자료 원문

  • 삼산의숙의 발의는 김수영이 했지만 실제 학교운영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봉시奉侍 황수연黃壽延이었다. 삼산의숙은 황수연의 지원과 지역 유력자들의 지원에 의해 운영되었다. 1908년에 있었던 소풍 비용을 황수연이 부담했으며, 성북동 노인계老人契에서 공책 및 연필을 제공했다. 또한 삼학의숙 교사였던 이윤희李允熙는 연필을 제공했다. 황수연은 자신의 집에 학생 70여 명이 방문하자 공책과 연필을 제공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05-106쪽
  • 삼산의숙은 전적으로 황수연에 의해 유지되었다. 1912년 『매일신보』기사에 따르면 황수연은 삼산의숙 재학생 60여 명을 인솔하여 인천항으로 소풍을 갔는데 경비 일체를 그가 부담했다. 또한 황수연은 자신의 비용으로 학교를 설립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삼산의숙에서는 무상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수연은 삼산의숙을 정식공립보통학교와 동일한 설비와 제도를 갖추고 운영하려고 했다. 삼산의숙의 첫 졸업생은 1912년에 배출되었다. 삼산의숙의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학교의 운영을 도맡아 했던 황수연이 1916년 별세했기 때문이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08쪽
  • 성북동의 촛불, 봉시 황연수의 아름다운 일 경성부관내 숭인면 성북동은 궁벽한 곳에 있어 그 동리인민의 생활정도는 빨래하기와 지신을 삼아 영업하는데 지나지 아니하므로 백여호 민가가 호구하기에 분주하여 아동의 교육을 돌아볼 여지가 없더니 조선가로 유명한 중부 대묘동 사는 전 奉侍 황수연(黃壽延)씨가 5년 전부터 그 동리의 정황을 궁측히 여겨 자신의 집의 경비를 아껴 쓰며 그 동리에 삼산의숙(三山義塾)을 설립하고 제반설비를 공립보통학교와 동일하게 열심히 유지하다가 금년에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게 되었음으로 그 동리 인민들은 황씨의 공익상 열심함을 칭송한다 한다. 『매일신보』, 1912. 3. 29.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3.
  • 京鄕의 慈善家 교육상, 덕의상에 유명한 전 봉시 황수연씨는 동소문 밖 성북동에 삼산의숙이라하는 학교를 자비 부담하여 설립한 후 한푼도 타인의 의연을 받지 않고 지금 4,5년에 열심히 교육함은 본보에서 여러 번 게재하였거니와 금번 양주군 망우리 목동리 자기묘하에 있는 빈민 사십일명에게 금화 육십일원 오십전과 친회의 □□을 □본하고 백미 한말씩 분급하여 죽게된 백성과 친척을 구휼하였으므로 황씨의 자선은 사람마다 칭송한다 하며.... 『매일신보』, 1912.05.21.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5.
  • 삼산학교 설립자 황수연 별세 黃壽延이 別世하다. 號는 春波, 初名은 允明, 壽延은 御賜名이다. 江原道 平海 胎生으로 14歲時에 楊鳳協의 養子가 되다. 詩書畵 三絶을 嗜好하여 中國 韓國의 古書 古畵 古籍의 蒐集이 富有하였으며 1908年 春 三山義塾을 設立 諸般 經費를 自擔 經營하다. 『매일신보』 1916. 2. 22.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6.
  • ○ 민족주의 계열-의병운동 ·일제의 정보문서에 의하면, 1908년 10월 20일 오전 의병 약 20명이 성북동의 황윤명(황수연) 집에 출몰하여 총기의 제공을 강박하고, 그 손자 김수영(36세) 외 가복 2인을 납거 ·이것은 실제로는 황윤명이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던 것으로 판단됨. ·황윤명은 삼산학교 설립자 황수연과 동일인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0쪽
  • ○ 춘파 황수연의 생애 - 생몰연대: 1844년(헌종 10)~1916년 2월 15일(양력) ※ 본관: 평해 이름: 윤명(允明, 초명), 수연(壽延, 어사명) 자: 집중(執中) 호: 춘파(春坡), 해생(海生) - 1857년(14세):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와서 양봉협(楊鳳協)의 양자가 됨 - 1863년(20세): 내관(內官) 시험에 합격 - 1867년(24세): 장번(長番)에 입사 - 1873년(30세): 원자궁(元子宮) 전언색(傳言色), 종1품 명례궁 대차지(大次知)에 임명 - 1893년(50세): 조정의 문란을 통석히 여겨 병을 칭탁하고 물러난 후, 동소문 밖 별장(성락원)에 머무름 - 1908년(65세): 성북동에 삼산의숙(三山義塾)을 설립, 제반 경비를 자담 항일의병활동 지원 - 1916년(73세): 별세 - 1937년: 양차손(養次孫) 안호영(安鎬瑩)이 유고를 모으고 심농(心農) 홍택주(洪宅株)가 교정을 맡아 문집 『춘파유고(春坡遺稿)』 발행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85쪽
  • ○ 황수연의 성락원 조성과 한시 - 동소문 밖 별장(현 성락원) 내에 ‘추성각(秋聲閣)’을 지어 수집한 고서·고화·고적을 수장 ※ 1893년 조정의 문란을 통석히 여겨 병을 칭탁하고 동소문 밖 별장으로 물러난 후 정원 조성과 한시 창작에 열심 - 『춘파유고』에 수록된 한시 90편 가량이 대부분 성북동 별장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 - 1903년경 계곡물을 끌어와 연못을 만든 후 바위에 각자(刻字)하고 연못 가운데에 괴석을 두어 작은 석가산(石假山)을 조성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86쪽
  • 1907년 혹은 1908년 김수영(金洙瑩), 김기택(金基宅) 등과 삼산의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황수연의 호는 춘파(春波), 초명은 윤명(允明)이다. 수연(壽延)은 어사명(御賜名)이다. 강원도 평해 태생으로 14세시 양봉협(楊鳳協)의 양자가 되었다.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을 기호(嗜好)하여 중국, 한국의 고서, 고화, 고적(古籍)의 수집이 부유(富有)하였다.
  • 그는 고종황제로부터 오래 살라는 뜻의 ‘수연(壽延)’이란 사명(賜名)을 받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 일제의 정보문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금 20일 오전 2시경 폭도 약 20명이 동소문(東小門) 외 성북동 황윤명(黃允明)가에 침입하여 총기의 제공을 강박하였으나 그 소유가 없다고 대답하였던 바 총기의 조달에 취하기까지 동행하자 하고 그 손 김수영(金洙瑩, 36세) 외 가복(家僕) 2인을 납거하였다. 이 보고에 접한 동부경찰서(東部警察署)는 즉시 수색, 순사의 일대를 보내어 이것을 추적(追跡)시켰던 바 오전 6시 동대(同隊)로부터 적은 원산가도 누원(樓院) 방면으로 진행한 형적(形跡)이 있다고 하는 급보가 있었다. 동시에 후속대(後續隊)를 출발하여 추적 중이라고 하는 보고에 접하고 본청(本廳)으로부터는 즉시 기마순사(騎馬巡査) 5명을 증발(增發)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2, 융희2년 10월, 경기도, 폭도침습의 건.) 위의 기록에 의하면, 1908년 10월 20일 오전 의병 약 20명이 성북동의 황윤명(황수연) 집에 출몰하여 총기의 제공을 강박하고, 그 손 김수영(36세) 외 가복 2인을 납거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황윤명이 의병에게 피해를 입은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의병 중에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일어난 것이 많다고 한다. 황윤명은 고종의 내시였으므로 고종의 밀명을 받아 의병을 지원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실제로는 황윤명이 의병활동을 지원하였고, 황윤명의 손자인 金洙瑩도 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 삼산학교를 이야기할 때 지나칠 수 없는 한 사람이 학교의 설립자 황윤명입니다. 고종의 내시였던 그는 왕이 하사한 사명인 ‘수연’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와 그의 아들 김수영은 고종과의 긴밀한 관계 하에 항일 의병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성북구의 독립운동가와 지역에 영향을 미친 주요 인물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34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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