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1938
장소 박물관∙미술관
성북구 성북로 102-11(성북동 97-1)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이다. 전형필(호는 간송)은 1938년 현재 위치에 보화각이라는 건물을 완공하였다.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으로, 전형필 본인이 수집한 문화재를 보관하고 전시하며, 민족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박물관이었다. 1962년 전형필이 사망한 후 공백기가 있었으나, 정비과정을 거쳐 1966년 전형필의 호를 따서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1년부터 전시를 시작하여 해마다 봄, 가을 정기 전시회를 개최해 왔다. <훈민정음(국보 70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을 비롯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다수의 문화재 뿐만 아니라 서화와 도자기 등의 많은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는 휴관 중이다.
성북동
  • 간송미술관
  • 간송미술관 관람객
  • 보화각 전경(1938)
  • 보화각 개관기념일(1938)
  • 간송미술관이 보이는 성북동 일대 모습(1)
  • 간송미술관이 보이는 성북동 일대 모습(2)
  • 성북동 간송미술관(2021)
  • 간송미술관 정문
  • 간송미술관 전경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澗松美術館
  • 이명칭: 보화각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박물관∙미술관

시기

  • 시대: 일제강점기
  • 시기: 1938
  • 비고: 1966년 간송미술관으로 명칭 변경

주소

  • 주소: 02837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성북로 102-11)

문화재 지정

  • 비고: 간송미술관의 중심건물인 보화각이 2019년 12월 30일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됨.

근거자료 원문

  •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 박물관 ‘간송미술관’. 이 미술관을 세운 이는 20세기 초 종로의 거부였던 전응기의 상속자 간송 전형필이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52쪽
    '전응기'를 '전영기'로 바로 잡는다.
  • 1934년 7월, 간송이 그렇게 고대하던 별장 건물이 완성되었다. 선잠단이 사직단으로 옮겨간 후, 북쪽에 있는 선잠단이라는 뜻으로 그곳을 북단이라고 불렀다. 위창 오세창은 그 이름을 빌려와 건물의 이름을 ‘북단장’으로 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2년 남짓 지나고 서서히 건물의 형태를 갖춘 박물관이 그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934년 여름 별장과 북단장이 완성된 후 축대와 담장 공사에 6개월이 흘렀고, 수장고로 쓸 지하실 공사에도 6개월, 2층 건물을 올리는 데 만 1년이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몇 달이 더 지나야 내부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 상태였다. 건물을 짓는 인내의 시간 동안 간송 전형필의 가슴 속에 지닌 우리 문화재에 대한 가치와 확신은 더욱 견고해졌다. 1938년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이 세워지고 상량식을 했다. 상량식에는 간송 전형필의 스승 오세창, 오세창을 만나게 해준 휘문고보의 스승 고희동, 민족과 역사에 눈을 뜨게 해준 외종형 박종화, 한남서림을 운영하는 전속 거간 이순황, 꾸준하게 교분을 나눠온 화가 이상범, 노수현이 함께 했다. 상량식을 마치고 한 달 후,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마침내 박물관이 완공되었다.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 : 보화각’.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문화의 보물창고이자 현재 간송미술관(성북구 성북동 97-1)건물이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54-55쪽
    "1934년 7월, 간송이 그렇게 고대하던 별장 건물이 완성되었다."에서 '별장'이라고 표현되고 있지만, 성북동에 부지를 매입하는 시기에 이미 미술관을 건립한다는 목적이 있었고 기능적으로 별장보다는 미술관으로서 성격이 강했다.
  • 간송미술관 하면 봄, 가을에 보름씩 열리던 특별전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1971년부터 시작된 특별전은 매년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관람객의 행렬이 미술관 입구부터 큰길가까지 길게 이어지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간송미술관 전시의 좋은 점은 우리 옛 그림을 은은한 자연광 아래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뒤따라오는 행렬에 밀려 미처 오래 감상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짧은 일별이 오랜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2014년부터 동대문에 있는 디자인플라자의 상설전시로 옮겨가면서 예전과 같은 줄서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간송미술관이 다시 성북동의 열린 공간으로 시민들 곁에 다가올 날을 기다린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74-177쪽
  • 2. 간송미술관-위창과 간송,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지난 2014년 4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에서는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간송문화澗松文化-문화로 나라를 지키다’로 명명된 이 전시는 그동안 성북동에 위치한 간송미술관에서 봄 · 가을에 한해서만 열리다가 처음으로 외부로 나들이를 한 것이었다. 이 전시의 제목인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즉 ‘문화보국文化保國’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오세창의 글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형필은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을 통해 고 미술 수집에 큰 도움을 받은 한편, 화가 · 서예가 · 고미술수집가 · 미술 사학자 등 여러 분야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그의 예술감각과 감식안을 키워나갔다. 전형필이 보화각을 설립했을 무렵 성북동은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써 기능하고 있었다. 심우장에서 성북동 큰길을 따라 내려오다 성북초등학교 옆 골목길로 들어가면 수풀 사이로 양옥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으로 우리나라 고미술 수장가였던 전형필에 의해 지어졌다. 오세창은 전형필의 고미술 수집 · 감정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전형필이 문화재를 소장하고 연구할 시설을 갖추기 위해 1934년 프랑스 출신 석유상이었던 쁠레장의 별장을 사들였을 때 선잠단先蠶壇의 부근이라는 뜻으로 북단장北壇莊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북단장은 1938년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보화각寶華閣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미술관으로서 고미술 소장 · 연구의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미술사 연구의 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보화각은 전형필이 사망하고 9년 후, 1971년 간송미술관으로 명칭을 바꾸어 봄 · 가을 전시와 연구를 이어갔다. 2000년대 들어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적 수요가 증가하자 늘어난 관람객의 수용과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지난 2013년 8월에는 간송미술 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2014년 4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에서의 ‘간송문화澗松文化-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1부 : 간송전형필’전을 시작으로 2015년 현재 ‘5부 : 화훼영모-자연을 품다’전까지 꾸준한 전시를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간송미술관의 대구분관 설립과 백남준아트센터와의 협업을 통한 우리문화 공동연구 및 공동기획전을 추진하는 등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모를 도모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에는 한 장의 사진이 남아있다. 1938년 보화각의 상량식을 마친 후 찍은 사진으로, 보화각의 주춧돌에는 오세창의 글이 남아 있다. 무인년(1938) 윤 7월 5일에 전군(전형필)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을 굽어본다. 만품萬品이 뒤섞이어,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옛 골동품古董은 자랑할 만하다. 이곳에 모인 것들,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검토 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위창 오세창. 전형필은 3년간의 무효소송 끝에 승소하여 현재 간송미술관 뒤뜰에 ‘괴산 팔각당형 부도(보물 제579호)’는 자리 잡을 수 있었다. 1930년대 보화각이 지어질 무렵 성북동에는 서예가, 화가, 소설가, 고미술품 수장가 및 감정가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교류하고 있었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보화각에 모여 고미술품을 수집·감정·소장하던 성북동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 구심점에는 오세창과 전형필이 있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37-240쪽, 242-244쪽
  • 2. 간송미술관-위창과 간송,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젊은 나이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갖게 된 전형필은 본격적인 고 미술품 수집에 나서게 된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시 미술교사였던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의 소개로 오세창을 만나 우리 문화유산의 수집 · 보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전형필이 스승 고희동의 소개로 오세창을 만날 무렵,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의 편찬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안중식과 오세창은 오랜 세월 교류하며 경묵당을 중심으로 어울렸는데, 안중식의 제자 이상범과 노수현, 고희동 역시 오세창, 전형필과 어울리며 인연을 맺었던 듯하다. 특히 춘곡 고희동은 오세창과 39세, 자신이 19세일 때 처음 만난 것으로 회고하였다. 이도영까지 세 사람은 가을이 되면 도봉산으로 가서 시와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거나 술을 마시는 등 교우관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고희동의 〈아회도雅會圖〉에서는 오세창, 최남선 등의 인물과 일기회一器會[음식 혹은 안주 한 접시씩을 각자 들고 오는 모임] 장면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세창, 고희동, 이도영, 안종원, 최남선 등이 함께 시를 쓴 〈한동아집漢衕雅集 시축詩軸〉을 비롯하여 안종원, 고희동, 이도영, 오세창, 민형식, 윤희구 등의 서화합벽도권인〈방린소회권芳隣小會卷〉 등 여러 예술인들이 모여 쓴 시나 그림이 많아 남아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어울리며 시나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세창과의 인연을 이어가던 고희동은 전형필을 소개하여 전형필의 고미술품 소장에 오세창이 큰 역할을 하도록 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38-239쪽, 241쪽
  • 간송미술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성북초등학교 정문 옆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이다. 1938년 간송澗松 전형필全瑩弼(1906-1962) 선생이 설립하였으며, 미술관의 중심건물인 보화각葆華閣에는 선생이 평생 동안 수집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제일의 고서화 소장처로서 한국민족미술 연구소를 발족한 이래 1971년 10월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국보 및 보물급 등의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한국 미술품 소장 미술관으로 한국미술사 연구의 메카라 할 수 있다. 미술관은 1층과 2층에 전시실을 가지고 있으며 소장품은 전적·고려청자·조선백자·불상·그림·글씨·부도·석탑 등에 걸쳐 다양하다. 2015년 현재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 68호)·「신윤복필 풍속도 화첩」(국보 제135호) 등 국보 12점, 보물 10점 등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이 등록되어 있다. 2013년 8월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사장 전성우)이 설립되어 소장품의 연구와 보존, 전시뿐 아니라 우리 고미술 연구와 민족미술계 전반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2014년부터는 대중과 더욱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 협소한 보화각을 벗어나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내 DDP에 상설 전시관을 만들어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다. 평소 간송미술관 경내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되고 있으므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상설 전시관을 찾는 편이 좋다. (홈페이지 : www.kansong.org) 찾아가는길 버스 : 1111번, 2112번 버스, 03번 마을버스 이용, 성북초교 정류장에 서 내려 도보 2분. 지하철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 6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17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72-273쪽
  • 3. 澗松美術館 성북동 97-1城北國民學校 정문 옆 도시속에 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주위가 한적하고 조용한 4,000여평의 대지 위에는 故 全鎣弼선생의 호를 따서 1938년에 설립된 간송미술관이 자리하고 있어 성북구를 문화의 고장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 葆華閣에는 전형필 선생이 평생동안 수집한 文化財가 소장되어 있는데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제일의 古書畵소장처로서 1966년 4월 「韓國民族美術硏究所」로 발족한 이래 1971년 10월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으며 「澗松文華」라는 圖錄과 논문집을 내고 있다. 澗松은 일본 早稻田大學을 졸업하고 1930년 귀국한 후 민족문화재를 수호하려는 사명감에 韓國文化財의 수집에 착수하여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난을 들어가면서도 조금도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한 열성을 가지고 많은 문화재를 수집하여, 현재 이곳에는 국보 및 보불급의 문화재가 다수 소장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문화재·미술품들이 있어,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미술사 연구인의 성지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알려진 바로는 이곳에는 훈민정음(국보 70호), 동국정운 권 1, 6(71호), 금동계미명삼존불 (72호) 등 국보 9점과 백자박산향로(보물 238호), 금동여래입상(284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376호) 등 보물 12점이 소장되어 있고, 서울특별시지정 유형문화재 4점이 간송미술관 정원에 세워져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550-551쪽
  • 그런데 일본은 1938년 2월 조선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창설하여 젊은이들의 지원입대를 강요하고 3월에는 朝鮮敎育令을 개정 공포하여 중등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는 등 철저하게 우리 문화를 말살하는 강압정치를 진행하고, 간송은 이에 맞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데 북단장안에 사립박물관을 세워 이제까지 수집해 온 문화재의 精髓를 보관 전시하며 그 연구를 통해 우리 문화의 단절을 막고 우리 민족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 주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진행하는 동안 위창과 春谷 高義東, 穎雲 金容鎭 등 당대 서화계 원로들의 자문을 수시로 구하고 그외 젊은 화가들과도 자주 만나 의논하였다. 드디어 1938년 7월 일제의 강력한 물자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북단장 내에 葆華閣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니, 위창은 다음과 같은 定礎銘을 지어 돌에 새겨 놓는다. 「때는 戊寅年 윤 7월 5일 澗松 全君의 葆華閣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복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北郭을 굽어본다. 萬品이 뒤섞이어, 새집을 채웠구나. 書畵심히 아름답고, 古童은 자랑할만. 一家에 모인 것이, 千秋의 精華로다. 槿域의 남은 丹橋로, 攷究 검토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葦滄 吳世昌」 그는 10만석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오직 문화재 수집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 결과 우리 미술사에서 書聖·畵聖으로 높이 추앙할 수 있는 金正喜와 鄭敾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집되어 그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한 것을 비롯하여, 沈師正·金弘道·張承業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서예작품을 총망라하였고, 고려 및 조선의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한 인접자료인 중국 역대미술품의 수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헌자료의 구비를 위하여 1940년부터는 관훈동 소재 翰南書林을 경영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 漢籍으로 1만권의 장서와, 장차의 연구에 대비하여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화사관계 서적들도 가능한한 수집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에는 재단법인 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착수, 광복 후에는 잠시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고 (1945. 10∼1946. 10), 문화재보존위원회의 제1분과 제2분과 위원을 겸임하기도 하였으나, 그 외의 공직생활은 없었고 공식석상에도 참석하지 않으며 市隱을 자처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55-756쪽
  • 그리고 성북국민학교 옆에는 故 全鎣弼 선생이 평생 수집한 문화재가 소장된 澗松美術館(한국 민족미술연구소)이 자리잡고 있다. 이 미술관은 우리나라 제1의 古書畵소장처로써 1938년 전형필 선생의 아호를 따서 개설되었다, 국보 및 보물, 지방 유형문화재 등을 다수 소장하고 있으므로 1971년 10월부터 매년 5월과 10월 두차례 소장품의 전시회를 갖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4쪽
  • ○ 발길 닿는 곳마다 퍼지는 문화의 향기 문화의 향기 30 간송미술관 세계적인 한국 미술품 소장 미술관 - 성북초등학교 정문 옆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으로 북단장(北檀莊)이라 부르는 곳에 고 전형필(全鎣弼)선생이 1938년에 설립하였다. 이 미술관은 대지가 4,000평으로 도심속에 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주위가 한적하고 조용하다. 미술관의 중심건물인 보화각에는 전형필 선생이 평생동안 수집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제일의 고서화 소장처로서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서 발족한 이래 1971년 10월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으며, 전시회 개최시에 『간송문화』라는 도록을 발간하고 있는데 2008년 10월에 제75호를 내기에 이르렀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55쪽
  • 간송미술관 하면 봄, 가을에 보름씩 열리던 특별전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1971년부터 시작된 특별전은 매년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관람객의 행렬이 미술관 입구부터 큰길가까지 길게 이어지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간송미술관 전시의 좋은 점은 우리 옛 그림을 은은한 자연광 아래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뒤따라오는 행렬에 밀려 미처 오래 감상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짧은 일별이 오랜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2014년부터 동대문에 있는 디자인플라자의 상설전시로 옮겨가면서 예전과 같은 줄서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간송미술관이 다시 성북동의 열린 공간으로 시민들 곁에 다가올 날을 기다린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14
  • 성북초등학교 정문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이 있다. 간송미술관은 북단장(北檀莊)이라 불리던 곳에 간송 전형필(全鎣弼)선생이 1938년 설립하였다. 미술관의 중심건물인 보화각에는 전형필 선생이 평생 동안 수집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제일의 고서화 소장처로서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발족한 이래 1971년 10월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으며, 개최 시에는 『간송문화』라는 도록을 발간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국보 및 보물급 등의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한국 미술품 소장 미술관으로서 미술사 연구의 메카라 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에는 『훈민정음』(70호), 『동국정운』권1, 6(71호), <금동계미명삼존불>(72호), <금동삼존불감>(73호), <청자압형수적>(74호), <청자기린유개향로>(65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66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149호),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135호) 등 국보로 지정된 9점과 <백자박산향로>(238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376호), <금보>(283호), <금동여래입상>(284호), <금동보살입상>(285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286호), <분청박지화문병>(287호), <분청사기모란문반합>(348호), <청자상감모자합>(349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241호), <괴산 외사리 석조부조>(579호), <전 문경오층석탑>(580호) 등 보물로 지정된 12점이 소장되어있다. 서울특별시에서 1974년 5월 12일에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한 <삼층석탑>(28호), <석조팔각부도>(29호), <석조미륵불입상>(30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31호) 등 4점도 정원에 세워져 있다.
  • 스물일곱 살 때 전형필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에 있는 양옥과 그 주변 땅을 사들였다. 다음 해 그 집을 북단장(北壇蔣)이라하고, 1938년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인 보화각(葆華閣)을 건립하여 상량식을 했다. 보화각 상량식장에는 청천 이상범, 월탄 박종화, 춘곡 고희동, 석정 안종원, 위창 오세창, 심산 노수현, 청구 이마동, 이순황 등 문화ㆍ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북단장은 당대 예술인들이 교류하는 곳이자 예술가들의 아틀리에였다. 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를 앞두고 화가들이 대작(大作)을 그릴 수 있는 작업실이 없자 전형필은 북단장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한다. 심산 노수현이나 청전 이상범 등이 보화각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38년은 일제의 폭압정치와 민족문화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할 때였고 대동아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식량 배급표가 없는 사람은 밥을 굶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보화각을 짓는 공사는 조선 최대의 사건이었다. 보화각을 세운 것은 일제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표시이기도 했다.
  • ㆍ日大卒業한 全營弼別莊 石돌담을 쌋키만에 五千圓을 던젓다하면 그 規模의 豪大를 알니라. 몃해전에 西洋사람인 富來商會主人으로부터 五萬圓에 산 純洋式집으로 요지음 十萬圓에 팔나해도 아니판다는 消息이 잇다. 이 別莊主人 全瑩弼 氏는 아직 30세 전후의 靑年으로 일즉 東京드러가 日本大學을 마춘 鍾路四丁目에 本宅이 잇는 大地主요 貸金業하는 분이다. 『삼천리』 7(5) 1935.6.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0쪽
  • 3. 간송미술관 소재 지정문화재 123쪽에 [표11]간송미술관 소재 지정문화재 목록이 제시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3쪽
  • ○ 1960~7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보화각에서 국보급 고서 발견 고 전형필(간송)씨의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보화각·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서 세계적인 진본인 이조 초기의 용감수감을 비롯한 국보 또는 보물급의 210권의 고서가 발견되어 새 봄을 맞은 학계에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보화각은 5년 전인 62년에 56세로 작고한 전씨가 평생을 두고 수집한 수많은 고서화 및 도자기 등을 간직한 우리나라 유일의 개인 박물관으로만 알려지고 있었다. 6·25이래 문을 닫고 있던 동 박물관을 금년 봄에 새로 개관코자 유족 및 관계자들이 정리 작업을 하던 중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2만여 권의 방대한 한적장서 가운데서 새로 희귀한 책들을 가려대게 된 것이다. 금년 들어 보화각 장서 정리작업에 참가했던 문화재 총 위원장 김상기 박사를 비롯한 이홍직,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씨 등 사계의 권위자들은 장서 속에 간직된 우리나라 유일본과 또는 출판 문화 연구나 국학 연구에 무거운 비중을 지닌 책들이 너무나 많아 흥분과 기쁨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24일 현재 2만여 권의 장서 중 약 절반인 1만여 권에 대한 정리를 끝낸 관계자들은 고인인 전씨가 고 미술품 수장가로서 뿐만 아니라 장서가로서도 으뜸이라고 놀라움을 말하면서 나머지 장서 속에서도 어떤 귀중본이 새로 발견될지 모르겠다고 기대에 부풀고 있다. 즉 전씨 소장본으로 기왕에 「훈민정음」, 「동국정운」, 「안향금보」 등은 모두 국보로 지정된 바 있기는 하였으나 그밖에 이와 같은 방대한 장서와 귀중본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새로 햇볕을 보게 된 용감수감 7책 한 질만 하더라도 그 본 고장인 중국에서조차 완질이 없어 일본에 전래된 것과 합쳐서 영인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전씨 소장의 그것은 보기에 아름다운 송설체의 순천판본으로서 책의 내용과 함께 우리나라 출판 문학사는 물론 서지학상의 중요한 발견으로서 세계적인 진본으로 평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 유일의 귀중 도서인 갑인자 주자본인 「본초」 권7, 「여사서 언해」, 「속오체의」 및 목판본인 「삼한시귀감」, 「몽산화상법어 언해」 초판본 등 이조 전기의 것 10여 종과 서지학상 희귀본으로 지목되는 책들은 별 항의 것들이다. (1967.01.24.)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4쪽
  • ○ 1980~9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 간송미술관 추사 탄생 200돌 기념특별전 추사 김정희 (1786년 음력 6월3일생) 탄생 2백돌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기획전이 25일부터 6월8일까지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추사의 글씨, 사군자, 산수화 등 1백여 점이 출품되었다. 이 중 30여점은 처음으로 선보이는 미공개 작품. 간송미술관의 최완수씨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는 『추사가 30대 후반에 쓴 글씨로부터 71세로 작고할 때 쓴 것까지 연대순으로 진열, 추사체가 성립되는 과정과 추사의 학문적 일생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기획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 가운데는「경전은 날줄로 하고 역사를 씨줄로 한다」는 뜻을 담은 『경경위사』(113×32cm)를 비롯, 추사의 서예이론·화론·경학관 등이 피력된 원고본(16×42cm) 10장도 포함돼 있다. 간송미술관은 올해 안에 추사전집을 발간하고 그 일대기를 담은 『추사실록』(최완수저)도 펴낼 예정이다. (1986.05.26.)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3쪽
  • ○ 1980~9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 간송미술관 설립 60주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세운 한국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 現 간송미술관)이 설립 60주년을 맞았다. 간송미술관은 98년 가을 정기전시로 이를 기념하는 '보화각 설립 60주년 기념특별전'을 지난 18일부터 11월1일까지 열고 있다. 02-762-0442. 간송은 잘 알려진대로 일제 치하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인물. 간송은 보화각 설립에 앞서 1934년 수집과 연구, 보존을 할만한 장소로 서울 성북동 소재 땅을 사들여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고 서화를 보수하는 표구소까지 차려 박물관 준비작업을 벌였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 미처 손대지 못하던 석물(石物) 구입이 시작된 것도 바로 이때다. 지금도 간송미술관을 지키고 있는 석호(石虎) 한쌍 역시 35년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사들인 작품. 이후 38년에 들어선 보화각은 지난 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간송의 문화재 수집은 24세 때 조선 제일의 갑부였던 아버지 형제의 10만석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시작됐지만 이번 전시는 보화각 설립 전후에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 가운데 수집내력이 분명한 작품들 위주로 골랐다. 지난 91년 간송 30주기 특별전과 96년 문화인물 특별전을 통해 소개된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집인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과 현재 심사정의 '촉잔도권(蜀棧圖卷)', 추사 김정희의 '완당 행서대련(阮堂 行書對聯)' 등 명품들이 한자리에 소개되고 있다. '혜원전신첩'은 일본의 거상에게 돈을 아끼지 않고 사들인 작품이고, 거의 손상된 상태였던 현재의 일생일대의 대작인 길이 8m가 넘는 산수화 두루마리 '촉잔도권'은 당시 5천원에 사들여 6천원을 들여 수리하기도 했다. 자식 공부시키고도 평생 편안히 먹고사는데 1만원도 안되는 전답 백석만 있으면 되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그의 문화재 보존 열의를 짐작할만 하다. 도자기로는 37년 5천석 전답을 처분하면서까지 도쿄에 머물던 영국인 변호사 갯스비가 소유하던 세계최고 수준의 고려청자 컬렉션을 일괄 인수하면서 손에 넣은 국보 65호 청자기린형향로 (靑瓷麒麟形香爐) 등이 이번 특별전에 등장하고 있다. 비록 그가 갑부였다고는 하나 명품들은 어느것 하나 쉽게 얻은 것이 없다. 단순히 돈이 문제가 아니라 가치를 알고 내주기를 꺼려한 일본 수장가들과의 끊임없는 싸움의 결과 쟁취된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 (1998.10.19.)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8쪽
  • ○ 200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 ‘바람의 화원’ 전시장을 휘감다 19일 오후 1시,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부터 도로변까지 100m 넘는 줄이 늘어섰다.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전신) 설립 70주년 기념전’을 보러 온 관객들이다.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1시간 30분 대기는 기본일 정도다. 박규택(40·회사원) 씨네도 인천광역시 부개동 집에서 일찌감치 나섰다. “가끔 혼자서만 전시를 보러 오다가 이번에는 초등생 두 자녀 등 온 가족이 오기로 하고 어제 인터넷으로 보고 싶은 그림을 점찍게 했다.” 전시장 진열장 앞은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특히 1층 전시장 벽에 걸어둔 단원의 ‘마상청앵’, 혜원의 ‘미인도’ 앞에서는 인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김재은(29·여)씨 역시 “SBS 인기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시작된 후 원작 소설을 찾아 읽었는데, 소설 속의 그림 대부분의 소장처가 간송미술관이어서 관심을 갖고 찾아왔다”고 말했다. 미술관 측은 이날 하루 1만 5000여 명이 다녀간 것으로 추산했다. 개막일인 12일 2만여 명이 몰린 데 이어 평일에도 6000∼7000명씩 왔으니 8일 만에 8만여 명이 간송 소장 조선 서화의 보배들을 보고 간 셈이다. 전시가 끝나는 26일까지 20만 명쯤이 찾아올 걸로 예상된다. 2006년 봄 ‘간송 탄신 100주년 기념 특별대전’ 때와 비슷한 인파다. ‘공짜 눈호사’지만 불만과 우려의 소리도 많다. ‘드물게 나온 귀한 명작들을 보기는커녕 인파에 숨조차 쉴 수 없다’, ‘수천 명이 몰리는 미술관에 단칸 화장실이 웬 말이냐’, ‘낡은 진열장 속 국보급 서화들이 몰려든 관람객들 때문에 훼손될까 우려된다’ 등이다. “70년된 미술관 건물은 간송기념관으로 활용하고, 별도의 제대로 된 상설전시공간을 마련해 개방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경원대 윤범모 교수)는 제안도 나온다. 미술관도 고민이다. 봄·가을 보름간의 정기전 기간 중에는 미술관 산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원 5명 뿐 아니라 전시장 정비를 위한 아르바이트생 두 명을 써 7명이 달라붙지만 역부족이다. 입장료나 후원금을 받아 관람 여건을 개선할 수는 없겠느냐는 얘기도 나온다.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의 삼남인 전영우 관장은 “후손이 간송의 소장품을 가지고 입장료를 받으면서 돈벌이를 하려 든다는 비난을 받게 되면 간송의 뜻을 훼손하는 일 아닌가. 당분간은 어렵지만 지금의 방식을 고수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2008.10.20.)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0-171쪽
  • ○ 성북동의 문화시설 명칭 : 간송미술관 특징 : 한국인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의 설계로 알려진 근대식 미술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31쪽
  • 8. 성북동 박물관 및 미술관(갤러리) 등 현황 ○ 미술관 - 명칭 : 간송미술관 - 주소 : 성북동 97-1 - 연락처 : 미상 - 대표자 : 간송미술문화재단 - 비고 : 사립 미등록미술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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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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