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사
1396
비지정 문화재
장소 종교시설
유물 건축물
성북구 개운사길 73(안암동 5가 157)에 자리한 사찰이다. 1396년(태조 5)에 무학대사가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이름 지었다. 그 후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묘인 인명원(仁明園)이 절 옆에 세워지자, 영도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절의 이름을 개운사(開運寺)로 바꾼 시기는 절을 옮긴 시점일 가능성이 크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절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1926년부터 근대 불교의 대표적인 석학이었던 승려 박한영이 이 곳에서 많은 제자를 키워냈고, 선사 탄허가 개운사의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경 번역에 힘썼다. 현재 개운사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 1점과 서울특별시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 5점이 보관되어 있다.
안암동
  • 개운사 대웅전
  • 개운사(1)
  • 개운사(2)
  • 개운사 경내(1)
  • 개운사 경내(2)
  • 개운사에서 본 고려대학교
  • 개운사 범종루
  • 위에서 본 개운사 전경(1)
  • 개운사 대웅전
  • 개운사 미타전
  • 위에서 본 개운사 전경(2)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42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5가 157 개운사 (개운사길 73)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개운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개운사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국 불교 개혁의 근원지이고, 불교 교육의 근본도량인 중앙승가대학이 있다. 이 절은 조선 초 태조 5년(1396)에 왕사(王師)인 무학대사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안암산 기슭,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한 것에서 연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후 정조 3년(1779) 5월에 정조의 후궁 원빈(元嬪)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도사 자리에 묘소를 정하고, 명인원(明仁圓)을 세웠다. 이에 인파당(人波堂) 축홍(竺洪) 스님이 동쪽으로 몇 리 떨어진 현재의 자리에 영도사를 옮겨지었다고 하나, 『사기(寺記)』라는 문헌에는 영조 6년(1730)에 영도사가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영도사가 개운사로 이름을 바꾼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말 고종 10년(1873)에 명부전을 세웠고, 7년 후인 1880년에 이벽송(李碧松)대사가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현재 대대적인 중건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경내에는 현대식 건물로 지은 지상 5층의 중앙승가대학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 절의 암자로서 대원암(大圓庵)과 보타사(普陀寺:안암동5가 157)가 절 동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 ▫ 비지정 개운사 開運寺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개운사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안암동 5가 157 안암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개운사는 그리 크지 않지만 한국 불교 개혁의 근원지이고, 불교 교육의 근본도량인 중앙승가대학이 있다. 이 절은 조선초 태조 5년(1396)에 왕사(王師)인 무학대사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안암산 기슭,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정조 3년(1779) 5월에 정조의 후궁 원빈(元嬪)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도사 자리에 묘소를 정하고, 명인원(明仁園)이 세워지자 인파당(人波堂) 축홍(竺洪) 스님이 영도사를 동쪽으로 몇 리 떨어진 현재의 자리에 절을 옮겨지었다고 했으나 ‘사기(寺記)’라는 문헌에는 영조 6년(1730)에 영도사가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도사가 개운사로 이름을 바꾼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개운사는 20세기 이후에 한국 교육불사와 불교의 진보적인 운동을 주도해 왔다. 1926년 근대 불교의 대석학이었던 박한영 스님이 머물렀고, 이 절의 암자인 대원암에 탄허(呑虛) 스님이 머물면서 역경(譯經) 사업에 종사했다. 이 절은 현재 조계종이지만 최근까지 태고종에서 관리했으므로 1955년에 대처승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全國布敎師大會)를 개최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 중앙승가대학이 이곳을 교육도량으로 사용하면서 현대사 속에서의 개운사 전통을 꽃피우는 계기를 마련했다. 조선말 고종 10년(1873)에 명부전을 세우고 나서 7년 후인 1880년에는 이벽송(李碧松) 대사가 대웅전을 중건하고,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현대식 건물로 지은 지상 5층의 중앙승가대학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 절의 암자로서 대원암(大圓庵)과 보타사(普陀寺: 안암동 5가 157)가 절 동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데, 최근 보타사 대웅전 뒤의 암벽에 5m 크기의 마애석불(磨崖石佛)이 발견되었으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다. * 참고자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서울-≫ 4, 1994.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62-163쪽
  • ○ 삶을 일깨우는 인생 교과서 사찰 사찰 37 개운사 불교개혁의 근원지, 불교교육의 근본 도량 - 개운산 남쪽 기슭, 봉우리가 높이 둘러 선 아래 오붓하게 자리 잡은 개운사는 조선시대 첫 왕사인 무학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에는 지금의 고려대학교 이공대 부근에 짓고 이름을 영도사라고 했다. 정조 때 원빈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근에 묘소를 정하고 영명원이라고 했는데, 절이 원묘에서 가깝다 하여 북쪽으로 옮겨 짓고 이름도 개운사라고 고쳤다고 한다. 한편 조선조 말에 절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영도사의 도문 스님 처소에서 자랐는데, 왕위에 오른 다음 절 이름을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연다는 뜻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지금은 절 뒤쪽만 남기고 모두 주택이 들어섰지만, 옛날에는 길이 산중으로 깊이 들어가고 주위에 소나무가 무성해 경내가 아늑했다. 개운사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전개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도량의 규모는 그리 큰 편이 아니지만 불교개혁의 근원지라든가 불교교육의 근본 도량이라는 수식어가 개운사의 비중을 말해주고있다. 1926년부터 근대 불교의 대석학이었던 박한영 스님이 머물면서 강원을 이끌어 나갔던 것이 그 시초였다. 이후 탄허 스님은 1970년대 부속암자인 대원암에 머물면서 역경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며 불교 전통을 계승했다. 특히 중앙승가대학의 교육장으로 정착되면서 우리나라 불교 교육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개운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칠성전, 지장전, 일주문, 선방, 정진관, 그리고 자비관 등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68-69쪽
  • ○ tour tip 개운사 인근 기슭은 조선왕실의 주거공간과 묘역이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현재의 안암동3가에 있는 궁리, 원리 등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과 그 아들 영순군이 대를 이어 살았던 곳이다. 더욱이 궁말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된 태조의 일곱 번째 아들 무안대군 방번과 부인 왕씨를 비롯해 광평대군과 부인 신씨, 영순군과 부인 최씨 등을 제사하는 사당이 있어 ‘사당말’로도 불렸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70쪽
  • 안암동 개운사 ― 100년 전에는 대개 영도사永導寺로 불렀다 ― 도 흥천사만큼이나 유명한 운동회 장소였다. 도성에서 가기는 흥천사보다 조금 멀었지만 개운산 아래 평탄한 지대를 앞에 두고 있어서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은 훨씬 넓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문기사에는 보성학교, 관립농상공학교, 국민사범학교, 관립한어漢語학교, 일신의숙, 화동학교, 전동사립중동학교, 청년학교, 광신상업학교, 광흥학교, 돈명의숙, 봉명학교, 융희학교, 관진학교의 학생과 교직원이 개운사에서 운동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경기 종목은 깃발뺏기 경주, 이인삼각 달리기, 계산경주(달음질 도중에 계산 문제를 풀어 결승점에 이르는 경주), 높이뛰기, 멀리뛰기, 씨름 등이었다. 이런 점을 살펴보면 대한제국기 동소문 밖은 우리나라 근대 체육의 출발 장소이기도 하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109-110쪽
  • 성북천을 건너면 야트막한 언덕을 만난다. 개운산 자락이다. 언덕을 넘어 나오는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향하면 커다란 사찰이 하나 보인다. 개운사開運寺다. 무학대사가 창건했다는 이 사찰의 원래 이름은 영도사永導寺였으며, 본래 위치는 현재의 고려대 자연계캠퍼스 부근이었다고 한다.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무덤 인명원仁明園이 그곳으로 위치를 정하자, 영도사는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옮긴 곳이 지금의 자리였고, 이름도 그 즈음에 개운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개운사는 근대에 그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근대 불교의 대표 석학 박한영 스님이 이곳에서 머물며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다. 승려는 아니지만 서정주, 조지훈, 김동리, 신석정 등이 모두 그의 문하생이었으니 그 공력을 알 만하다. 탄허呑虛 스님은 개운사의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경을 번역하였고, 1981년에는 중앙승가대학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근·현대 불교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2-13쪽
  • 개운사길의 큰 줄기를 따라 걷다보니 거대한 문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용이 하늘을 향해 휘돌아치고 있는 거대한 기둥 두 개와 그 위에 얹혀진 웅장한 지붕이 만들어낸 일주문. 그리고 한가운데 현판에 새겨진 글씨, 개운사. 여기가 바로 개운사길의 주인공인 개운사로구나. 그런데 문을 지나고나니 거대한 경고문이 붙어 비계만 설치한 채 공사를 멈춘 두 동의 건물이 의아함과 함께 을씨년스러움을 안겨주었다. 의아함은 어째서 사찰 속에 저런 것이 있는 걸까라는 질문에서 나온 것이고, 을씨년스러움은 폐건물 특유의 스산함과 ‘부동산 붐’이라는 현대사회의 싸늘함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분도 잠시, 색색의 연등으로 장식된 언덕길을 오르니 진정한 개운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개운사는 조선이 건국된 지 5년이 흐른 1396년, 왕사인 무학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영도사였으나 조선 중기 개운사로 이름을 바꿨다. 개운사는 조선 초기부터 이어져 온 찬란한 역사도 품고있지만, 근대 불교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 무척 중요하게 느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불교의 대석학인 석전박한영 스님이 머무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90년대까지는 지금은 김포로 이전한 중앙승가대학이 있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93-196쪽
  • 개운사는 원래 태조 5년(1396) 왕사 무학이 영도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으며, 개운산 끝자락인 현재의 고려대 자연계캠퍼스 자리에 있었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정조 때 일이다. 정조 3년(1779) 원빈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묘소를 당시의 개운사 자리로 정했던 것이다. 이때 위치를 옮기며 이름도 개운사로 바뀌었다. 개운사에서 유래된 지명도 많다. 현재 개운산 동쪽자락에 위치한 고려대학교 자리에는 북 모양의 돌鼓巖 혹은 종모양의 돌鐘巖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종암동의 동명유래가 되기도 했다. 또 돌이 많아 채석장도 생겼다. 자연히 ‘돌을 뜬다’는 뜻의 ‘돌뜨기’라는 지명이 생겼다. 이것을 한자로 옮기면 부석浮石이 된다. 여러모로 개운산은 돌과 관련이 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11-212쪽
  • 개운사開運寺 남쪽으로 안암동, 동쪽으로 종암동, 서쪽으로 동선동, 북쪽으로 돈암동으로 둘러 싸여 있는 개운산. 그 남쪽 산자락에 개운사開運寺가 자리하고있다. 이 절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국 불교 개혁의 근원지이고, 현재는 김포로 이전한 불교 교육의 근본도량인 중앙승가대학이 있던 곳이다. 개운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의 개운사 현판이 걸린 큰방과 대현루大賢樓를 위시하여 응진전 · 산령각 · 종각 등의 많은 건물들이 있어 총총히 들어선 소나무와 두 그루의 향나무 또한 속세의 것을 모두 차단하는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주차장 한편에 위치한 재건축 중인 양식의 건물 두 동은 불교의 현대화를 말해주는 듯하다. 개운사는 1396년(태조 5) 왕사王師인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안암산 기슭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779년(정조 3) 5월 정조의 후궁 원빈元嬪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도사 자리에 묘소를 정하고, 인명원仁明園을 세웠다. 이에 인파당人波堂 축홍竺洪 스님이 동쪽으로 몇 리 떨어진 현재의 자리에 영도사를 옮겨지었다고 하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1730년(영조 6)에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현재 무학대사가 영도사를 창건했던 자리에는 고려대학교 자연계캠퍼스가 자리 잡고 있다. 영도사에서 개운사로 이름을 바꾼 시기도 확실하지 않은데,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개운사의 전신인 영도사의 벽담스님에 의해 자랐는데, 왕위에 오른 후 ‘운명을 여는 사찰’이라는 의미인 개운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 있다. 개운사는 조계종 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로 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불교개혁과 진보의 흐름을 주도해 온 종단개혁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독립과 불교혁신을 위한 승려 단체인 만당이 이곳에 자리 잡고 불교 내 독립운동과 혁신운동을 주도했다. 1911년 한국 불교를 일본의 조동종에 합류시키려는 시도를 오월성 · 한용운과 함께 저지한 근대의 고승이자 석학인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스님이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불교 내의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통일민주국가 건설을 꿈꾸던 불교혁신동맹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이 흐름이 이어져 1950~1960년대에는 불교계 일제 잔재 청산에 앞장섰고, 1980년대에는 사회 민주화 운동을 불교계에 접목시키기도 했다. 종단개혁운동의 보루인 개운사에 젊고 패기 넘치는 젊은 승려들의 교육장인 중앙승가대학이 위치했던 것도 이러한 절의 기개와 관련이 깊다. 중앙승가대학은 불교개혁과 발전을 위해 승려들의 전문 교육장의 필요성을 느낀 젊은 승려 5명이 주체가 되어 1979년 보현사에 세운 뒤 1981년 개운사로 옮겼다. 1991년 교육부로부터 4년제 정식 대학으로 인정받았고, 2001년에는 개운사를 떠나 김포시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절 뒤쪽만 남기고 모두 인가가 들어섰지만 옛날에는 길이 산 속으로 깊이 이어졌고 주위에 송림이 무성하여 경내가 그윽하고 아늑하여수도승은 물론 세속의 티끌을 잊으려는 시인들이 찾아와 정적 · 평온의 경내를 마음껏 즐겼다고 한다. 조선 말기 고종대의 문호로 유명한 황오黃五의 개운사 시 또한 그러한 경내의 한 면을 말해준다. 희미한 등불 뜰 앞을 비치는데 종경(鐘磬) 소리 들려오니 일만(一萬) 시름 부서진다. 먼 길손 졸음 없으니 밤새소리 들려오고 작은 중은 말 없이 봄 하늘의 별만 쳐다본다. 한편 개운사 동쪽 골짜기에는 이 절의 암자인 대원암大圓庵과 보타사普陀寺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현재 개운사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 1점과 서울특별시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 5점이 보관되어 있다. 서울 개운사開運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발원문發願文(보물 제1649호), 개운사 감로도甘露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2호), 개운사 신중도 神衆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3호), 개운사 팔상도八相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4호), 개운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5호), 개운사 목木 아미타불좌상阿彌陀佛坐像 복장일괄腹藏一括(서울특별히 유형문화재 제291호) 등이 그것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29-233쪽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보물 제1650호)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 그렇다면 학교 운동회는 어디에서 주로 개최됐을까? 운동회는 대체로 많은 인원이 참가할 수 있는 공터가 있는 곳이어야 했다. 이런 조건에 따라 운동회는 대체로 궁궐 · 유적지, 사찰 주변, 산 · 바닷가 혹은 군대 훈련장에서 개최됐다. 대체로 1900년대 초 운동회는 넓은 공터가 있는 경치가 좋은 명승지나 혹은 군 훈련장에서 주로 개최된 것으로 보인다. 한성으로 좁혀보면 운동회가 가장 많이 열린 곳은 동소문 밖 삼선평이다. 동소문 밖에서는 총 29번의 운동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이유는 동소문 밖에는 사찰이 많이 있었고 넓은 공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소문 밖에서 운동회가 많이 열리던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개운사開運寺 주변이었다. 개운사는 현재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 안암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1396년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 영도사永導寺라고 불렀다. 1779년에 사찰 이름을 현재 이름은 개운사로 개칭했다. 동소문 밖의 대표적인 사찰로 이 일대를 중심으로 많은 운동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개운사에서 개최된 운동회의 기록을 많이 살펴볼 수 있다. “광성학교운동. 일전에 남문안 양골 광성학교에서 영도사에 가서 춘기운동을 하였는데 산술 경주와 기취경주와 고조 광조에 입격한 자를 공책, 연필, 양목, 철필, 등속으로 시상하고 교사 일인은 공책 십삼권과 연필 삼속이오 손님 최문현씨는 지화 이원을 상품으로 주었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23일. “동창학교운동. 지난달 22일 사립동창학교에서 춘기운동을 영도사 근처에서 거행할 때에 모든 임원과 학도의 부형이 와서 참여하였다가 의연금을 많이 내고 내빈 중 장현식 등 제씨가 차례대로 권면한 후 각각 의연금을 내어 운동비에 보용케 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1일. 이외에도 개운사 주변에서 열린 운동회 사례는 상당히 많다. 개운사를 중심으로 한 인근에서 학생들은 땀 흘려 운동을 즐겼고, 학부형들을 열렬하게 그들을 응원했다. 운동회가 끝난 후에는 학생들에게 학용품이 상품으로 지급됐고, 운동회를 구경하던 유지들이 학교에 의연금을 내며 운동 회를 돕기도 했다. 이것은 당시 운동회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중략) 비록 운동회는 일제의 압박에 의해 종료됐지만 개운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었다. 사찰로서 개운사의 역할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특히 개운사에서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추도회가 많이 열렸다. 1907년 7월 14일 개운사에서는 대한자강회 주최로 정재홍의 명복을 비는 추도회가 열렸다. 정재홍은 1907년 이토 히로부미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하자 자결을 한 인물이다. 일제 침략의 원흉을 제거하려던 의사의 의로운 뜻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추도회에 몰려들었다. 참석한 이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지사의 뜻을 기리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흐느끼며 슬퍼했다고 한다. 정재홍의 추도회로부터 2년 뒤 개운사에서는 또 한 명의 특별한 인물의 추도회가 열렸다. 1909년 5월 5일 『대한매일신보』사의 전 사장 베델의 추도회가 열린 것이다. 베델은 영국 출신의 기자로 대한제국 시기 일제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항일 신문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던 사람이다. 1904년 7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은 일제의 끈질긴 탄압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1905년 5월 1일 서울에서 병사했다. 먼 타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베델을 안타깝기 여긴 사람들은 개운사에서 베델을 위한 추도회를 개최했다. 추도식에서는 안창호, 양기탁, 임병항 등이 추도 연서를 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처럼 개운사에서는 정재홍, 베델과 같은 애국지사들의 추도회가 많이 열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개운사에서는 이들과 대립했던 한 인물의 추도회도 열렸다. 바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였던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서울에서도 대대적인 추도회가 열렸는데 그 장소가 바로 개운사였다. 1909년 12월 12일 한자통일회漢子統一會라는 단체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에는 유길준, 지석영, 등이 참석해 그의 명복을 빌었고, 같은 달 27일 각 지방의 위원들도 상경하여 개운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추도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암살자와 암살 대상의 추도회가 한 곳에서 열린 것이다. 냉혹한 역사의 한 흐름 속에 개운사가 존재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45-251쪽
  • 또 성북구 安岩洞5가 157번지에는 開運寺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본래 太祖 5년(1396) 王師인 無學大師가 동대문 밖 5리쯤 되는 安岩山 기슭에 창건한 永導寺였다. 그런데 正祖3년(1779) 元嬪 洪氏의 묘소인 仁明園이 절 옆에 자리하게 됨에 따라 人波竺洪大師가 동쪽으로 몇리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절을 옮겨 짓고 그 이름마저 開運寺라고 바꾸었으며 그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절 뒤에는 큰 바위에 조각된 거대한 大白石佛觀音坐像이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다고 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98쪽
  • 1) 大韓佛敎曹溪宗 ⋅ 開運寺 안암동 소재의 개운사는 1396년(태조 5)에 無學大師가 동대문에서 5리 되는 安岩山 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永導寺라 하였다. 그 뒤 1779년(정조 3)에 洪嬪의 明仁園을 절 곁에 써서, 절을 동쪽으로 2리쯤 되는 곳에 옮겨 짓고 개운사라고 고쳤다. 創建主는 仁城竺洪이며, 여러번 重建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04쪽
  • 城北區 安岩洞 5가 157번지에 太祖 5년(1396) 王師無學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大韓佛敎 曹溪宗의 開運寺가 있다. 大雄殿을 중심으로 앞의 開運寺 현판이 걸린 큰 방과 大賢樓를 위시하여 應眞殿·山靈閣·鍾閣 등의 많은 건물이 있어 앞의 총총히 들어 선 民家와 경계를 連接한 곳에 一境의 佛家道場을 이루었다. 無學은 安岩山 기슭 지금의 高麗大 理工大 부근에 이절을 창건하고 寺號를 永導라 하였는데 正祖 3년(1779) 5월에 元嬪 洪氏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근에 묘소를 정하고 이름을 永明園이라 함에, 절이 園墓에서 가깝다 하여 현재의 곳으로 옮겨 짓고 이름도 開運寺로 바꾸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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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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