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사
1325
비지정 문화재
장소 종교시설
성북구 보국문로 113-10(정릉3동 753)에 자리한 사찰이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 율사 정자(淨慈)가 청암사(靑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공민왕 때에 지공(指空)선사가 머물면서 고승대덕의 수도처로 알려졌다. 17세기 초 조선 현종 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고, 몇 차례의 보수와 증축을 거쳐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16세기 중반 문정왕후의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1921년 승려 보경(寶鏡)이 주지로 부임하였는데, 현재의 봉안된 탱화, 벽화 등의 대부분이 이 보경의 작품이다. 한편 경국사 주변은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휴식처로서 예로부터 사대부들이 많이 찾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 방문했었고, 1953년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닉슨이 방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릉동
  • 북한산 경국사 탐방기
  • [다큐사랑방] 경국사의 여름(홍종열 감독)
  • 경국사 일주문
  • 경국사(1)
  • 경국사 관음성전 정면(2)
  • 경국사 관음성전 측면
  • 경국사 관음성전 후면
  • 경국사 관음성전 후면 현판(2)
  • 경국사 관음성전 후면 현판(1)
  • 경국사 극락보전
  • 경국사 안내판
  • 경국사 관음성전 정면(1)
  • 경국사(2)
  • 경국사 내부(2)
  • 경국사 극락보전
  • 위에서 본 경국사
  • 경국사 관음성전 외관
  • 경국사 정문 풍경
  • 경국사 내부(1)
  • 경국사 범종각
  • 경국사 정문 가는 길
  • 북한산 경국사 탐방기
  • 경국사 내부(2)
  • 경국사 내부(1)
  • 경국사 입구
  • [다큐사랑방] 경국사의 여름(홍종열 감독)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慶國寺
  • 이명칭: 청암사(靑巖寺)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종교시설

시기

주소

  • 주소: 02705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753 (보국문로 113-10 경국사(조계종))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성 안 사대부의 유람처 또는 별서지로서의 정릉동의 공간적 성격은 우리나라 근대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성 밖으로 나들이 나오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향유계층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산 유람길에 한 숨 쉬어 가는 장소였던 흥천사는 집회나 연회의 장소로 대여되었고, 경국사는 고관대작들이 기생, 창부倡夫들을 대동하고 와서 한 판 잔치를 벌이는 장소로 쓰였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97쪽
  • 흔히 ‘청암사’로 부르던 경국사는 정릉동 안쪽에 자리한 유서 깊은 고찰로서, 지금도 그렇지만 북한산의 맑은 바람과 정릉계곡의 물소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천혜의 장소였다. 더구나 도성과는 앞쪽의 북악산 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도성과 반나절 거리에 있는 흥천사에 비해 사람들의 발길도 뜸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경국사에는 장안의 돈 있고, 지위 있는 사람들이 와서 며칠이고 머물면서 유흥이나 피서를 즐기곤 하였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98쪽
  • 대한제국기 신문 기사들 가운데 경국사와 관련하여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909년 8월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1858-1926)이 피서차 약 일주일 동안이나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사이다. 당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1849-1910)가 이완용을 박대하자 이완용은 잠시 정릉동 경국사로 물러나 대신 몇 명을 불러서 자신의 향후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비밀협의를 했다. 그 후 8월 16일 일주일간의 피서를 마치고 입성한 이완용은 그 즉시로 통감부를 찾아갔다. 경국사에서 구상한 복안을 가지고 소네 통감과 모종의 협상을 시도함으로써 소네 통감 부임 이후 불안해진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완용은 다시 통감부 문전에서 보기 좋게 박대당하고 하릴없이 자택으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98쪽
  • 1) 大韓佛敎曹溪宗 ⋅ 경국사 보문사 고려말기에 삼각산 푸른 봉우리 밑에 청암사라는 이름으로 자정국존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 현종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면서 현재의 사원규모를 갖추었다. 영조 13년에 洛菴義訥선사가 절을 보전하였고, 정조 17년에 天峯泰屹선사가 주석하였으며 고종 5년에 금고를 조성하며 삼성전과 칠성전, 산신각을 창건하였다. 1915년 극락전을 중수하고 1921년 불교예식에 정통하고 화승이자 선지식이었던 寶鏡普賢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극락전, 명부전, 관음전, 영산전에 봉안된 탱화, 벽화 등의 대부분이 이 보경화상의 작품이다. 현재는 지관선사가 보경화상을 이어 1979년부터 경국사를 맡아보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02-603쪽
  • 慶國寺는 정릉3동에 위치해 있는데 애초 忠肅王 12년(1325)에 律師 淨慈가 창건하여 靑巖寺라 하였던 사찰로 1330년경에 無奇가 머물면서 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쳤으며, 1331년에 居士 蔡洪哲이 禪房을 증축하여 禪僧들의 수도를 적극 후원하였다. 1352년 금강산 法起道場을 참배하고 남하한 印度僧 指空이 住錫한 뒤로 고승대덕의 수도처이자 호국안민을 위한 기도도량으로써 전승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2-73쪽
  • 경국사는 청수장 올라가는 중간에 잇는데 이 절은 高麗 때 창건한 절로 원래는 靑岩寺였다. 역시 이 절도 현종 때 貞陵을 修封하면서 願刹로 삼게 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90쪽
  • ○ 삶을 일깨우는 인생 교과서 사찰 사찰 40 경국사 정토사상에 기반을 둔 고려시대 사찰 - 북한산 동쪽에 자리한 고려시대 사찰로, 옛날부터 정토사상에 기반을 둔 기도 도량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부터 단청과 탱화 조성에 일가를 이루었던 보경스님이 60년 간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새롭게 변모시켜 나갔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보경 스님의 인격에 감화되어 몇 차례나 찾아왔고, 1953년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였을 때도 이 절을 방문했다. 삼각산의 맑은 물이 여러 계곡을 이루고 흐르다 한 갈래가 정릉천으로 뻗어 수림과 만나 절경을 이루는 곳에 경국사가 있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다. 경국사 극락전에는 중앙의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모두 13구의 불상과 보살이 있다. 아미타여래는 커다란 광배를 배경으로 여러 층으로 된 대좌위에 있는 것이 특징. 넓적한 얼굴은 형식화가 정착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존 좌우에 아미타 8대 보살이 있고, 그 밑 좌우에 사천왕 중 증장천과 지국천이 있다. 8대 보살은 지장보살을 제외하고 모두 머리에 관을 쓰고 있으며, 두꺼운 옷을 입고 연꽃을 든 채 활짝 핀 연꽃 위에서 있다. 본존과 같은 높이에 보살이 서 있고 바깥 좌우에는 나한상이 1구씩 서 있다. 이 작품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조선 후기 목각탱화 가운데 하나로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74-75쪽
  • ▫ 비지정 경국사 慶國寺 시대 : 고려시대 소유자 : 경국사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정릉(3)동 753 경국사는 북한산 동쪽에 자리한 고려시대의 사찰이다. ‘경국사 사적기’에 의하면 670년 전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하여 청암사(靑巖寺)라 했다. 절이 위치한 곳이 청봉(靑峰) 아래였으므로 청암사라고 붙인 것이다. 자정율사는 충숙왕으로부터 국존(國尊)으로 존경받았던 고려후기의 스님이다. 창건 이후 1330년경에 무기(無奇) 스님이 머물면서 천태종의 교풍을 크게 떨쳤으며, 충혜왕 원년(1331)에는 부정축재로 거금을 모은 권신 채홍철(蔡洪哲)이 선방(禪房)을 증축하여 선승(禪僧)들의 수도를 적극 후원했다. 고려말인 1352년에는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을 참배하고 남하한 인도승 지공(指空)이 이 절에 머물렀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누르고 유학을 장려하는 정책으로 이 절은 퇴락했다. 인종 원년(1545)에 왕실의 도움으로 중건되고 이듬해에는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다. 절이 중수되자 성대한 낙성식과 함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발원하는 호국대법회를 열었다. ‘경국사 사적기’에는 문정왕후의 중창 이후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청암사를 경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현종 10년(1669)에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면서 부근의 약사사를 봉국사로 중창・개칭하고, 흥천사와 함께 정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때 이 청암사도 원찰로 지정되어 경국사로 바뀌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절은 숙종 때 연화 승성스님, 영조 때 난암 의눌스님이 중수(重修)했으며, 철종 때는 예봉 평신스님이 법당을 다시 세우고 고종 원년(1864)에는 고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재를 열기도 했다. 고종 5년(1868)에는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왕실에서 범종을 보시(布施)했다. 일제 때인 1921년부터는 단청(丹靑)과 탱화(幀畵) 조성에 일가를 이루었던 보경(寶慶: 1890-1979) 스님이 60년간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새롭게 변모시켰다. 보경스님은 교학과 선지(禪智)를 두루 익히고 계율에도 철저하여 승가의 귀감이 되었고,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서 민족의 정기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민족문화의 전승에 있다고 생각하여 전통 불상조각과 불화화법을 익혀 대가를 이루었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보경스님의 인격과 태도에 감화되어 몇 차례나 찾아왔고, 1953년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했을 때도 이 절을 찾아왔다. 그 후 지관(智冠) 스님이 1979년에 주지를 맡아 활발한 포교활동과 절의 내실을 다졌다. 따라서 이 절은 고승대덕의 수도처이자 호국안민을 위한 기도 도량(道場)으로 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참고자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서울-≫ 4, 1994.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64-165쪽
  • 『경국사 사적기』에 의하면 경국사는 670년 전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하여 청암사(靑巖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절이 위치한 곳이 청봉(靑峰)아래 있었으므로 청암사라 붙인 것이다. 자정율사는 충숙왕으로부터 국존(國尊)으로 존경받았던 고려 후기의 스님이다. 창건 이후 1330년경에 무기(無奇)스님이 머물면서 천태종의 교풍을 크게 떨쳤고, 충혜왕 1년(1331)에는 부정축재로 거금을 모은 권신 채홍철(蔡洪哲)이 선방(禪房)을 증축하여 선승(禪僧)들의 수도를 적극 후원하였다. 고려 말인 1352년에는 금강산 법기도장(法紀道場)을 참배하고 남하한 인도승 지공(指空)이 절에 머물렀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누르고 유학을 장려하는 정책으로 인해 퇴락하였다. 그러다가 인종 1년(1545)에 왕실의 도움으로 중건되고 이듬해에는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다. 절이 중수되자 성대한 낙성식과 함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발원하는 호국대법회를 열었다. 『경국사 사적기』에는 문정왕후의 중창 이후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청암사를 경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현종 10년(1669)에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면서 부근의 약사사를 봉국사로 중창ㆍ개칭하고, 흥천사와 함께 정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때, 이 청암사도 원찰로 지정되어 경국사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절은 숙종 때 연화 승성스님, 영조 때 난암·의눌스님이 중수(重修)하였으며, 철종 때는 예봉·평신스님이 법당을 다시 세웠다. 고종 1년(1864)에는 고종의 등극을 축하하는 재를 열기도 하였다. 고종 5년(1868)에는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왕실에서 범종을 보시(布施)하였다. 일제 때인 1921년부터는 단청(丹靑)과 탱화 조성에 일가를 이루었던 보경(寶慶:1890~1979)스님이 60년간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새롭게 변모시켜 나갔다. 보경스님은 교학과 선지(禪智)를 두루 익히고 계율에도 철저하여 승가의 귀감이 되었고,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서 민족의 정기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민족문화의 전승에 있다고 생각하여 전통 불상조각과 불화화법을 익혀 대가를 이루었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대통령이 보경스님의 인격과 태도에 감화되어 몇 차례나 찾아왔고, 1953년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였을 때도 이 절을 찾아왔다. 그 후 지관(智冠)스님이 1979년에 주지를 맡아 활발한 포교활동과 절의 내실을 다졌다. 이처럼 경국사는 고승대덕의 수도처이자 호국안민을 위한 기도 도량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 북한산 동쪽, 정릉천이 흐르는 맑은 골에 자리 잡은 경국사는 주변 경관이 좋고 약수가 있어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사찰이다. 깊은 산 속에 자리한 경국사는 그 규모에서도 범상치 않은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충숙왕(1325)에 세워진 경국사는 푸른 봉우리 아래에 위치해 있어 창건 당시 청암사(靑巖寺)라 이름을 붙였다. 고려 공민왕 1년(352)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을 참배하고 남하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주석(住錫)한 뒤부터 고승대덕의 수도처이자 호국안민을 위한 기도도량으로서 전승되었다. 조선 중종 2년(1507) 억불정책으로 법당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퇴락된 채 빈 절로 남아 있었다. 명종 1년(1546) 문정왕후가 섭정하게 되자, 왕실의 시주로 건물을 전면 중수하고 낙성식과 함께 국태민안을 위한 호국대법회를 열었다. 이 때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라 개칭하였다. 조선 현종 10년(1669)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 묘소인 정릉이 복원되면서 근처에 있던 약사사(봉국사), 흥천사와 함께 정릉의 원찰로 지정되었다. 이후 경국사는 많은 승려들이 머물면서 가람수호와 수행에 진력해 왔다. 1921년부터 단청과 탱화 조성에 일가를 이루었던 보경스님이 60년간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새롭게 변모시켰다. 보경스님은 자비로 사찰을 중수, 영산전과 산신각을 단장하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극락전과 명부전, 관음전, 영산전에 봉안된 대부분의 탱화와 벽화가 보경스님의 솜씨로 이루어진 것이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절에 들렀다가 보경스님의 인격에 감화되어 몇 차례나 찾아왔고 “참다운 승가의 모범이 이곳에 있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1953년에는 닉슨 미국 부통령 방한 당시, 한국 문화의 참모습이 이곳에 있다고 하여 그를 절에 안내하기도 했다. 후일 닉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경국사에서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 방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52-53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10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