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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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삼선동에서 원산까지 연결되었던 옛 도로 이름이다. 경원가도는 경(京)과 원(元), 즉 조선시대의 서울인 한양과 강원도 원산을 잇는 도로였다. 원산에서 출발하여 안변-고산-세포-평강-철원-연천-동두천-양주-의정부를 거쳐 서울의 수유동과 돈암동을 지나 동소문(혜화문) 밖 삼선동까지 이어지는데, 이 지역은 이른바 넓은 협곡 형태의 지형인 추가령구조곡이 있는 곳으로 예부터 동북방면의 교통로로 많이 이용되었던 곳이다. 성북구 돈암동과 삼선동 일대는 동해안의 토산품과 북방의 교역품이 들어오는 상업로이자 사신의 왕래길이기도 하였다.
돈암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京元街道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근거자료 원문

  • 동쪽 성저십리에 속한 돈암동은 미아리고개와 아리랑고개를 경계로 한 마을로 한양과 함경도 원산 등 북쪽 지역과 직결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였다. 경기-원산을 잇는 길이라는 뜻의 경원가도는 동해안의 해산물과 북방의 토산품, 만주의 교역품이 들어오는 상업로이자 만주지역에서 한강유역으로 가장 쉽게 들어 올 수 있는 군사로였다.
  • 혜화문은 한양과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가도와 이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보통 도성의 대문을 지키는 병사가 30명이고, 소문은 20명이었는데, 혜화문을 지키는 병사의 수는 예외적으로 30명이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69쪽
  • 조선후기에는 어물, 특히 북어의 수요가 증대하였는데, 그 공급로는 경원가도였다. 함경도 元山場에서 수합된 북어는 말 잔동에 바리바리로 실려 철령을 넘어 서남쪽으로 길을 재촉하다가 서울 가까이에 위치한 樓院에 이른다. 이에 사상인들은 누원으로 모여들어 이를 매점하니, 누원은 장사치들과 이에 어울려 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칠패·이현 뿐 아니라 송파의 상인들도 이곳으로 모여 들었다. 누원이 이렇게 성시를 이룬 것은 교통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누원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오면 미아리 삼거리에 이르고, 여기에서 돈암동이나 종암동 두 갈래로 나뉘어 도성에 들어가는데, 상인들은 시전의 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종암동 쪽으로 가서 동대문의 梨峴 상인과 접촉하거나, 계속 남으로 향하여 뚝섬·송파 상인과 연결하기도 하고, 한강을 경유하여 용산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4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23

관련 마을아카이브

  • 혜화문
    이야깃거리
    혜화문
    분류: 장소, 유물
    시기: 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