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1905
장소 교육
성북구 안암로145(안암동5가 1~2)에 위치한 사립 종합대학교이다. 1905년 이용익이 교육구국의 이념하에 설립한 보성전문학교로 출발하였다. 1921년 민간독지가 58명의 공동명의로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여, 1922년 「조선교육령」에 의해 정식으로 전문학교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32년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재단법인 중앙학원으로 인수하고 교장으로 취임했고, 1934년에 안암동 현 위치에 교사를 신축·이전하였다. 1944년 4월 총독부에 의해 학교명이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변경되고 경제과·척식과만을 두게 하는 등의 시련을 겪었다. 광복과 함께 재단이사회가 개최되어 교명과 학사규정을 보성전문학교 당시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에 종합대학으로 승격, 개편하여 고려대학교를 창립하게 되었다.
안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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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高麗大學校
  • 이명칭: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교육

시기

  • 시대: 일제강점기
  • 시기: 1905
  • 비고: 1934년 안암동으로 이전 / 1946년 8월 고려대로 발족

주소

  • 주소: 02841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 (안암로 145)

근거자료 원문

  • 보성전문학교로 시작한 고려대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온 것은 1934년의 일이다.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만든 사립학교였다. 학생들이 모여들자,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식당, 술집, 하숙집 등 주변에 캠퍼스 타운이 형성된 것이다. 고려대학교 주변 ‘캠퍼스 타운’의 역사도 학교만큼 유서 깊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3쪽
  • #고려대학교 고해를 마치고 죄를 씻어냈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 목적지는 안암동하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고려대학교다. 사실 안암동에 들어선 순간 이미 고려대 내부에 들어와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방팔방 어디를 봐도 온통 고려대 건물들이 있고, 고려대 단체복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갑자기 묘한 압박감이 밀려온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랫소리를 밤새 견뎌냈던 항우의 심정이 이러할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민족의 힘으로 민족의 꿈을 가꾸어온~ 민족의 보람찬 대학이 있어~ …”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00쪽
  • 안암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려대학교일 것이다. 고려대학교의 주소지는 안암동5가 1번지로 되어 있지만 캠퍼스 면적은 안암동 전체 면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17년 현재 안암동의 면적이 1.32㎢인데 고려대 캠퍼스와 고려대 부속병원의 부지를 합쳐 총 0.91㎢이므로 안암동 면적의 약 69%가 고려대학교 부지 안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안암골 호랑이’라는 말이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까닭에 ‘안암동’하면 바로 고려대학교가 있는 대학촌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고려대학교가-보성전문학교 시절인-1934년 9월, 안암동으로 옮겨왔을 때만 해도 학교 울타리는 지금의 인문계 캠퍼스에 국한되었다. 이때의 부지만 놓고 보아도 광대한 면적이었지만 해방 이후 고려대학교는 꾸준히 학교 건물과 캠퍼스를 확충해 나갔다. 1946년 옛 인명원 터를 포함한 너른 부지를 사들인 고려대학교는 1964년 이곳에 자연계 캠퍼스를 준공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는 개운사 위쪽 부지를 기숙사와 녹지 캠퍼스로 조성하였고, 1991년에는 현 부지에 고려대 부속병원을 신축 · 이전하였다. 그리하여개운사와 개운사길 주변 상가와 주택가를 제외한 안암동5가 전역이 고려대학교 캠퍼스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캠퍼스의 꾸준한 확장과 더불어 학생 수 또한 계속 늘었다. 신문에서 연도별 고려대 학부 입학정원 수를 찾아보면 1958년 830명이던 것이 1963년 990명, 1970년 1,665명, 1977년에는 2,055명으로 꾸준히 늘어났다. 입학정원만 놓고 보면 전국 사립대학 중에서 언제나 1~3위에 들었을 정도로 많은 학생들은 모집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학과 수와 입학정원은 계속 늘어나 2017년 현재 고려대학교 재학생 현황을 보면 서울 캠퍼스에만 총 29,859명(학부 21,110명, 대학원 8,749명)이 재학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휴학생 등을 제외한다면 학기 중에는 매일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안암동 캠퍼스를 드나들고 있는 것이다.96 2017년 현재 안암동 거주 인구가 1만 5천여 명임을 감안하면 안암동 안에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작은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려대학교의 공간적, 인적 확장과 더불어 학교 주변 대학촌의 범위도 점차 넓어졌다. 하숙집과 자취방은 기존 개운사와 정문 앞뿐아니라 자연계 캠퍼스 앞과 안암동 1~4가 지역과 보문동, 삼선동, 동선동, 종암동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학생들은 교정과 이들 대학촌을 오가며 학교 밖 현실을 접했고 학교 생활의 활력을 얻었다. 특히 고려대학교는 지방 출신의 비율이 높았는데 고려대학교 주변 하숙집들은 이들 지방 출신 학생들에게 고향집 같은 푸근함을 주는 공간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숙집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학생 커뮤니티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남학생들은 독방의 경우가 많지만 여대생은 끼리끼리 짝지어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시골집에서 돈이라도 올라오면 건넌방, 이웃 하숙 생을 불러 밤을 익힌다. 여대생은 호콩 「파티」에 「비스킷」 대접, 남학생은 소주를 즐겨 마신다. 근처 중국 요리집의 외상도 갚을겸 몇가지 성찬도 주문하고…. 그래야 서로 의지가 되는 친분도 맺어지는 것이다. ……어쩌다 하숙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은 여간 눈치를 살펴야 하지않는다. 그러기에 하숙생은 10원 어치쯤 사과를 사들고 들어가서 인심을 쓰는 방법도 궁리했다. …… 남학생은 일부러 짝을 찾아 함께 하숙을 드는 수도 있다. 면학파끼리, 혹은 기분파끼리. …… 고려대 근처의 한 하숙집 주인아저씨는 약주를 외상으로 사다주는 마음씨에서 인기. 여자 하숙생은 주인집 꼬마의 털옷을 짜주는 ‘서비스’로 인심을 사기도 한다는 것. 하숙은 그렇게 우울한 곳만은 아니다. 제2의 가정다운 아름다운 마음씨도 이따금 오고가는 것이다. ― 『경향신문』, 1962.11.24. 「춥지만 낭만 깃든 하숙방」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춥지만 낭만 깃든’ 하숙집의 풍경들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전반적으로 가계 사정이 나아지고 대학생들의 개인주의적 취향이 강해짐에 따라 대학생들은 온정이 깃든 고향집 같은 하숙집보다 ‘나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조용한 하숙집, 자취방을 선호하게 되었다. 게다가 1990년대 다세대 주택 건설 붐으로 인한 주택형태의 변화도 하숙집의 풍속도를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4층 건물 전체가 하숙집인 기업형, 빌딩형 대형 하숙이 생겨났고 ‘자취 전용’ 원룸들도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들 학생 주거는 깨끗하고 편리한 시설이 장점으로 대개 신축 건물인 데다 아파트처럼 화장실과 온수 등의 이용에 불편함이 없어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새로 생긴 대형 하숙집들은 주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식사와 출입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개인주의적 취향을 만족시켜 주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런 하숙집들도 많이 사라졌고 그 자리를 자취 전용 원룸들이 대체해 가고 있다. 하지만 학생들의 주거 안정 면에서는 아무래도 하숙의 장점이 크기 때문에 하숙이라는 주거 양식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커뮤니티 형성을 통한 학생들의 정서적 안정에 기여하는 하숙만의 장점을 살린 새로운 학생 주거 양식이 나타날 가망도 있어 보인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78-282쪽
  • 안암동과 고려대학교를 연결해 주는 또 하나의 고리가 있다면 학생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의 역사는 멀리 보성문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단연 주목할 만한 시기는 1960년 4 · 19혁명부터 1987년 6월항쟁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는데, 그 중요한 장면마다에는 안암동의 고려대학교가 빠지지 않았다. 2005년 펴낸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의 서문에서는 그 투쟁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았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재권력에 저항하고 사회 모순을 고발하는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는 언제나 고려대생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독재정권을 구축해 가던 엄혹한 시절에 고려대생은 최초로 반정부시위를 이끌어 민주화운동의 단초를 마련했고 결국 4 · 18 시위를 통해 독재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이끌었다. 5 · 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하에서도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감을 강하게 인식한 고려대생은 타협하지 않았다. 쿠데타 정권의 반민족적 · 반민주적 행위에 온몸으로 저항한 안암골 호랑이들의 포효는 우리 사회에 직접적인 충격과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고려대생들은 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1969년 3선개헌 반대투쟁, 1970년대의 반유신투쟁, 1980년대에는 ‘삼민투’, ‘전학련’, ‘전대협’ 등 학생운동 전국조직을 이끌며 1987년 6월항쟁을 선도했고 1990년대에는 통일운동의 선봉으로 그 역할을 이어 갔다. ― 정태헌, 「고난 속에서 희망의 한국 사회를 연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학생운동 100년」중에서 고려대 학생 시위의 출발점은 대체로 인문계 캠퍼스였다. 본관 앞이나 대강당 또는 학생회관 앞 민주광장에 모여 출발한 학생들은 대운동장을 중심으로 캠퍼스를 크게 한 바퀴 돌며 시위 인원을 모집했다. 교정의 잔디밭과 강의실, 도서관에서 나온 학생들이 합류하여 큰 무리를 이루면 시위대열은 곧이어 정문 앞 진출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정문 앞은 가두로 나가려는 학생들과 이를 막는 전경 혹은 무장군인들로 구성된 진압 부대 사이의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그럴 때면 진압 부대가 발포한 최루탄 때문에 안암동과 제기동 일대가 매캐한 연기로 자욱해졌다. 1980년대에는 학생들이 보도블록을 깨서 던지거나 화염병을 투척하며 저항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럴 때는 안암로가 온통 보도블록 조각과 유리 파편으로 뒤덮였다. 학교 앞 상점 입구가 불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불심검문도 자주 보는 풍경이었다. 학교 앞을 지나는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까지도 경찰이나 무장군인의 손짓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정문 앞과 함께 안암동 로터리(지금의 안암오거리) 또한 중요한 시위 거점 중 하나였다. 정문을 빠져나온 학생들의 다음 목적지는 주로 서울 시내 한복판이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학생들은 시청 앞 광장(1970년대 초까지는 국회의사당 앞 태평로)이나 광화문 앞 세종로, 명동 등지로 나가자신들의 의사를 밝히려고 했다. 이를 위해 시위 행렬은 우선 안암로와 대광고 앞을 거쳐 신설동 로터리까지 행진할 수밖에 없었는데 경찰 진압 부대는 한사코 안암동 로터리 또는 대광고 앞을 마지노선으로 삼아 행진을 막아섰던 것이다. 진압 부대에 막혀 갈 길을 잃은 시위 행렬은 진압 부대와 충돌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고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경찰은 대체로 정문 앞과 안암동 로터리까지 700여 미터에 이르는 짧은 구간만을 고려대학생들 의 해방구로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2년 유신 체제가 시작되고 ‘긴급조치’가 일상화되면서부터는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사복경찰과 정보기관 요원들이 공공연히 교정을 활보했고 ‘긴급조치’라는 미명 하에 군부대 가 교내까지 진입하여 학생들의 교내 출입을 막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런 억압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도 학생들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사그라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안암동과 제기동의 하숙집과 자취방에 비밀리에 모여 또 다른 시위를 계획하고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나눠줄 유인물을 만들었다. 그 유인물 속에는 신문이나 방송으로 알려지지 않은 독재정권의 적나라한 실상들과 당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들이 낱낱이 담겨 있었다. 만약 누군가 그 시기 안암동의 낮은 지붕들을 살짝 벗겨냈다면 그 안에는 민주화의 그날을 준비하는 앳된 청년들의 비좁은 방들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 고초를 겪은 사람들은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안암동과 제기동의 하숙집 아주머니들, 주점의 이모들 역시 학생들만큼이나 고생이 심했다. 그네들은 매운 최루탄 연기를 맡으며 반찬거리를 사러 제기시장과 경동시장에 가야 했고 때로는 감시의 눈을 피해 자신의 집으로 숨어든 학생들을 떨리는 마음으로 숨겨 주어야 했다. 학교 앞 상인들 역시 시위가 있는 날이면 문을 걸어 닫아야 했고, 건물과 기물이 파손되는 손해를 감수하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학생들의 시위를 말리기도 했었으나 대개는 묵묵히 참아내며 학생들의 민주화를 위한 순수한 뜻을 응원해 주었다. 2017년에도 고려대학생들의 현실 사회를 향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비록 지난날 민주화운동처럼 눈에 띄거나 격렬하지는 않지만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고 있고 있다. 권력의 비민주적 행태를 향해 일침을 날림은 물론 올해 초 열린 촛불 시위에도 적극 참여하여 목소리를 보태고 있다. 이밖에도 환경운동 · 문화운동 ·여성운동 · 성정치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조직하여 발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진행 중인 ‘안암동 캠퍼스타운 사업’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자 한다. 이 사업은 고려대학생들과 안암동이라는 지역사회를 연결하여 학생들과 주민들의 상생과 발전을 목표로 서울시와 고려대, 성북구가 뜻을 모아 2016년 6월에 착수한 사업이다. 창업환경 조성, 참살이길 문화가로街路 조성, 하숙 및 홈스테이 환경 개선, 지역과 대학의 상생. 이 네 가지가 구체적으로 설정한 목표이다. 2020년까지 추진되는 이 사업이 안암동 주민들과 고려대학생들의 형편과 생활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지난날 안암동과 고려대학교가 ‘안암골 호랑이’라는 깃발 아래 어느 지역보다도 폭 넓고 끈끈하게 교류해왔음을 상기하면서, 지금의 문제점을 찾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면 분명 안암골에 좋은 변화를 가져오리라 믿는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83-290쪽
  • 안암동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고려대학교는 그 규모만큼이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1934년 완공된 고려대학교 본관과 1937년 완공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건물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아 각각 사적 제285호, 사적 제286호로 지정된 바 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91쪽
  • 6.25 전쟁이 지나고 1960년대 이후 고려대학교 캠퍼스의 변화 요인과 계획을 살펴본다. 1971년 고려대학교는 우석학원을 합병하여 의과 대학, 부속병원 등을 흡수함으로써 종합대학체제를 구축하였고, 1973년 한독경제회의 협정에 따라 서독 정부는 농과대학의 장기발전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700만 마르크(당시 환율 11억 4천만 원)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고려대학교의 제2 창건을 목표로 중부권의 교통 요지인 충남 조치원에 서창캠퍼스(현 세종캠퍼스)를 설립하게 된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김병율, 홍기백, 이규용의 설계로 1991년 안암동 산 위에 지상 7층, 지하 2층 규모로 지어졌다. 부지의 효율적 활용 및 증축에 대비한 방향을 설정하고 의과대학 및 부속병원의 유기적인 공간 체계를 수립하며, 교육활동과 유지관리상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계획이 되도록하였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303-304쪽
  • 고려대학교는 이정덕 교수가 1960년대 말 입안한 마스터플랜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이 마스터플랜의 기준은 대략 여섯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본관-인촌동상-대운동장-정문이 중심축을 이뤄야 한다는 점과 건물 외장 재료는 몇 가지로 제한하며 동질성을 유지한다는 기준을 중심으로 몇 가지의 변화를 살펴본다. 현재의 주요 건물의 연장선에 놓인 정문은 캠퍼스 초기의 것은 아니다. 해방 이전에는 간소한 형태의 정문을 가졌지만, 1965년 고려대학교 창립 60주년을 기념에 교우회에서 교문을 헌정하기로 하여 현상공모에 의해 당선된 연합건축 김만성의 설계대로 완공되었다. 높이 9.8m, 너비 17.5m의 화강암 외장 문주와 철제문, 차량 및 양쪽 보행자용 출입구가 함께 구성되는 좌우대칭 형태로 지어졌지만, 이 당시의 교문의 위치는 신설동에서 접근하는 남서쪽 위치에 있었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표된 마스터플랜에 의해, 1971년 현재 정문 위치에 1965년 남서 측 교문의 디자인을 적용하고 규모가 커진 형태로 다시 세워졌다. 이렇게 세워진 정문과 운동장, 인촌 동상과 본관은 일직선에 놓이게 된다. 이후 1965년 남서 측에 세워졌던 교문은 1995년 현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로 입구로 옮겨졌다. 또한 현 안암캠퍼스의 1971년 세워진 교문 오른쪽 안으로는 1983년 정문 안내실이 지어졌는데, 설계는 종합건축설계사무소의 이승우가 맡았다. 교문 옆으로 이어진 담장과 수목에 의해 잘 보이지 않지만 현재도 남아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본관을 필두로, 화강석을 사용한 외장 재료의 특성들이 유지되며 교문과 정문 안내실 또한 동일한 재질을 사용하며, 전체적으로 캠퍼스 내의 건조물에서 보이는 특성을 유지하게 된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304-306쪽
  • 성북구 안암동에서 고려대학교가 차지하는 위상뿐 아니라 면적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주요 건축물 외에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고려대학교의 인문사회계 캠퍼스의 건축물을 건립 순서대로 정리해보니, 1930년대 이후 캠퍼스가 조성되어, 1970년대 마스터플랜의 입안과 함께 현재의 규모까지 학교 건축이 확장해 온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박동진이 설계한 본관과 중앙도서관(대학원관)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캠퍼스의 건축을 보면 두드러진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박동진, 이정덕, 박윤성. 박동진은 고려대학교의 상징인 문화재 건물 외에 다수의 건축물을 남겨 기틀을 다졌고, 마스터플랜을 입안한 이정덕과 함께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박윤성은 교내에 많은 건축물을 남겨 부흥기를 만들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306-308쪽
  • ○ 젊은 인재들의 교육의 산실 대학캠퍼스 대학캠퍼스 54 최초로 민간인이 설립한 민족사학의 자존심 - 1905년 민간인에 의해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건립된 고려대학교의 전신은 ‘교육구국’의 신념을 갖고 있던 이용익 선생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 민족주체라는 건학 이념을 이어 받아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국제적 고대인을 지향하는 교육이념을 실천하고 있다. 1934년 9월에 준공된 고려대 본관은 화강암을 주재료로 한 좌우대칭의 근대식 건축물로서 1981년 사적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행정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고대는 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로 하여금 수강과목에 대해 수강소감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할 수 있게 하는 등 전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하버드대를 벤치마킹한 새로운 교양과정을 선보이는 등 내실있는 강의를 통해 글로벌 리더를 양성하고있다. '조선일보’에서 발표된 국가고객만족도(SCSI) 조사에서 종합대학 부문 2위에 오르는가 하면, 영국일간지 ‘더 타임스’가 발표한 세계 200대 대학에 사립대학으로는 유일하게 184위에 진입했다. '글로벌KU 프로젝트’를 통해 국제경쟁력을 높여 2010년까지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하는 것이 고려대의 목표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00-101쪽
  • 普成專門學校 즉 오늘날 高麗大學校의 前身이 安岩洞 1·2번지 자리에 立地한 것은 1934년의 일이다. 이 학교는 1905년 5월에 당시 大韓帝國 內藏院卿이던 李容翊이 礴洞(현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전 俄語學校 건물을 사용하여 설립한 普成專門學校로 출발하였다. 이용익은 일본에 납치되어 체류하던 중 일본의 근대 교육기관을 두루 살펴보고 귀국하여 敎育救國의 이념 아래 선 교육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설립 당시 기존의 사립학교들은 대부분 외국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반면,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초대교장은 申海永이었으며 초기에는 수업연한 2년제의 法律學專門科와 理財學專門科를 두었는데, 1905년 9월에 漢城法學校 학생을 인수하여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였다. 이어 1907년 1월에 법률학전문과·이재학전문과를 각각 법학과·경제과로 개칭하고 수업연한을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2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용익이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1907년 3월에 憤死하자, 그의 손자 李鍾浩가 학교경영을 인수하였으나, 1909년 이종호가 다시 안중근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됨으로써 학교는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1910년 제 1회 졸업생인 尹益善이 孫秉熙와 의논하여 학교경영을 천도교에 인계하였다. 1915년 4월에는 일제의 「전문학교규칙시행령」에 따라 재단법인을 조직해야만 전문학교의 인가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교명을 사립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 개칭하고 3년제의 법률과와 실업과를 두었다. 3·1 운동 직후 손병희가 일본경찰에 피검되어 다시 학교운영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교장 高元勳은 총독부에 전문학교 승격에 관한 타진을 거듭하는 한편, 金炳魯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사회독지가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민간독지가 58명의 공동명의로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여, 1922년 「조선교육령」에 의해 정식으로 전문학교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총독부의 간섭과 재단 경영의 부진 등으로 학교가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1932년 金性洙가 보성전문학교를 재단법인 중앙학원으로 인수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김성수는 3·1 운동 직후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제의 압력으로 실패하자 자력으로라도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던 뜻을 가지고 있던 차에, 보성전문학교의 경영난을 보고 사재를 기부하여 인수하게 된 것이다. 곧이어 1934년에는 안암동 현 위치에 교사를 신축·이전하였고 1937년에는 도서관을 건립하는 등 제반시설이 갖추어서 민족교육의 대표기관으로서 자리를 굳히는 동시에 본격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여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총독부의 압력은 가중되어 農科의 신설계획을 거부하는 등 각종 탄압을 가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법과 및 문과교육을 전폐하고 실과교육을 강조하여 1944년 4월에는 학교명을 京城拓植經濟專門學校로 변경하여 경제과·척식과만을 두게 하는 등의 시련을 겪었으나 꾸준히 민족교육의 맥을 이어왔다. 광복과 더불어 재단이사회가 개최되어 교병과 학사규정을 보성전문학교 당시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에는 정법·경상·문과의 3개 단과대학 8개 학과로 편성된 종합대학으로 승격, 개편하여 高麗大學校를 창립하게 되었고 초대총장에 玄相允이 취임하였다. 1947년 제 1회 고려대학교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대학원을 개설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31-133쪽
  • 1) 高麗大學校 고려대학교는 성북구 안암동5가 1∼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로서 90년 가까이 우리나라 民族敎育의 빛난 역사를 계승하고 있는 名門이다. 고려대학교는 1905년 5월 당시 大韓帝國 內藏院聊이던 李容翊이 礡洞(현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전 俄語學校건물을 사용하여 설립한 普成專門學校로 출발하였다. 이때 이용익은 일본에 납치되어 체류하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을 두루 살펴보고 귀국하여 敎育救國의 이념 아래 신교육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설립 당시 기존의 사립학교들은 대부분 외국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반면,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초대교장은 申海永이었으며 초기에는 수업연한 2년제의 법률학전문과와 理財學專門科를 두었는데, 1905년 9월에 漢城法學校 학생을 인수하여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였다. 이어 1907년 1월에 법률학전문과·이재학전문과를 각각 법학과·경제과로 개칭하고 수업연한을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2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용익이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1907년 3월에 憤死하자, 그의 손자 李鍾浩가 학교경영을 인수하였으나, 1909년 이종호가 다시 안중근의사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됨으로써 학교는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1910년 제1회 졸업생인 尹益善이 孫秉熙와. 의논하여 학교경영을 천도교에 인계하였다. 1915년 4월에는 일제의 〈전문학교규칙시행령〉에 따라 재단법인을 조직해야만 전문학교의 인가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교명을 사립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 개칭하고 3년제의 법률과와 실업과를 두었다. 3·1운동 직후 손병희가 일본경찰에 피검되어 다시 학교운영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교장 高元勳은 총독부에 전문학교 승격에 관한 타진을 거듭하는 한편, 金炳魯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사회독지가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민간독지가 58명의 공동명의로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여, 1922년 〈조선교육령〉에 의해 정식으로 전문학교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뒤 총독부의 간섭과 재단 경영의 부진 등으로 학교가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1932년 金性洙가 보성전문학교를 재단법인 중앙학원으로 인수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김성수는 3. 1운동 직후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제의 압력으로 실패하자 자력으로라도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던 뜻을 가지고 있던 차에, 보성전문학교의 경영난을 보고 사재를 기부하여 인수하게 된 것이다. 곧이어 1934년에는 안암동 현 위치에 교사를 신축·이전하였고 1937년에는 도서관이 건립되는 등 제반시설이 갖추어져서 민족교육의 대표기관으로서 자리를 굳히는 동시에 본격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여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총독부의 압력은 가중되어 農科의 신설계획을 거부하는 등 각종 탄압을 가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법과 및 문과교육을 전폐하고 실과교육을 강조하여 1944년 4월에는 학교명을 京城拓植經濟專門學校로 변경하여 경제과·척식과만을 두게 하는 등의 시련을 겪었으나 민족교육의 맥을 꾸준히 이어왔다. 광복과 더불어 재단이사회가 개최되어 교명과 학사규정을 보성전문학교 당시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에는 정법·경상·문과의 3개 단과대학 8개 학과로 편성된 종합대학으로 승격, 개편하여 高麗大學校를 창립하게 되었고 초대총장에 玄相允이 취임하였다. 1947년 제1회 고려대학교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대학원을 개설하였다. 곧 이은 6·25동란으로 학교기능을 잠시 잃었으나 1951년 대구에 임시교사를 마련하여 兪鎭午가 총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부총장제도를 신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난중에도 이학계 학과와 농과대학 신설 등 기구를 확장하였고, 환도한 뒤부터는 종합대학으로서의 기구와 내용정비에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학교는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으니 1955년과 1959년 두차례에 걸친 단과대학 및 학과의 개편·신설을 통하여 법과·상과·문리과·농과·정경 등 5개 단과대학을 두게 된데 이어 1961년 서관 준공 및 박물관 등 부속건물의 신축·준공, 1963년 이공대학 신설 및 국내 최초로 경영대학원 창설, 1966년 이후 이공대학·농과대학의학과 증설 및 교육대학원을 개설하였다. 1970년에는 장기발전계획이 시작됨에 따라 1971년 12월에는 학교법인 우석학원을 합병하여 우석대학교 및 부속병설기관을 흡수하였고, 1972년 사범대학 신설, 1973년 농과대학 캠퍼스 준공, 이어 식량개발대학원 개설, 이공대학을 이과대학·공과대학으로 분리, 1975년 중앙도서관 신관 준공, 1979년 병설 의학기술초급대학을 보건전문대학으로 개편, 1980년 충남 조치원에 지방분교 개설, 1991년 仁村紀念館 건립 등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재학생 3만명의 거대한 대학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개교 100주년이 되는 2005년을 목표연도로 삼아 종합적인 발전계획을 수립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미래지향적이고 세계적인 대학으로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부속기관으로는 도서관·박물관·출판부·전자계산소 등 16개 기관이 있고, 의료원 산하에 안암병원·구로병원·여주병원·안산병원 등 4개 부속병원이 있다. 이중 도서관은 1937년에 설립되어 우리나라 사학 도서관의 효시이며 110만여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어 장서량과 시설면에서 국내 최고수준을 갖추고 있고, 이중에는 각종 귀중도서와 희귀본 뿐만 아니라 석학과 저명교수들의 기증본이 가득하여 학교의 자랑이 되고 있다. 또한 박물관은 1934년에 설립되어 대학박물관의 효시가 되었으며, 고고·역사·민속 등에 걸쳐 우리 민족문화유산 10만여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소장품의 질에 있어서 國寶 등 중요한 자료들로서 국내 최고는 물론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의료원은 1941년 9월에 개원한 의과대학 부속혜화병원을 모체로 하여 1983년 9월에 발족한 이래 의과대학과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산하에 안암병원(혜화병원이 1991년 10월 이전·개원)·구로병원·여주병원·안산병원 등 4개 병원 2,000여 병상 규모에 의료진 약 1,100여명을 총괄운영하고 있다. 부설연구소로는 아세아문제연구소·민족문화연구소·기업경영연구소 등 39개소가 상설되어 있다. 또한 1992년에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산하 기초과학지원센터서울분소가 교내에 설치되었다. 학생활동을 살펴보면, 먼저 1919년 3·1운동 때에는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교장 崔麟의 지도 아래 대다수 학생간부들이 이 운동의 주도적 구실을 하였고,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제국주의를 탄핵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등 자주독립을 위한 학생활동을 선두에서 이끌어 왔다. 또한 1960년에는 자유당정권의 독재에 항거하여 4월 18일 고려대학생 3천여명이 시위를 감행하여 4·19혁명의 선봉적 구실을 하는 등 고려대학교의 학생활동은 敎育救國과 자주독립을 위한 우리나라 학생활동의 커다란 맥을 이루면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주요 학교행사를 살펴보면, 매년 5월에 열리는 종합적인 대학축전인 석탑대동제(1985년부터 석탑축전에서 명칭 변경)를 비롯하여 9개 종목에 걸쳐 교내경기를 국내최초로 실시하고 있으며, 매년 4월 18일에는 4·19혁명을 선도한 1960년 4월 18일의 고려대학생들의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 수유리 4·19기념탑까지 달리는 4.18구국대장정도 실시되고 있다. 또한 1946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고·연전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두 명문사학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친선을 촉진하며 대학스포츠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5개 종목에 걸쳐 실시되고 있는데 1985년부터는 체육제의 단일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학술·문화교류와 더불어 대동제도 함께 하는 보다 수준 높은 행사로서 정착되고 있어 양교 학생 뿐만 아니라 교우와 일반 시민들까지 동참하는 행사이다. 학교신문으로 1954년에 창간된 《고대신문》과 영자신문 《The Granite Tower》를 비롯하여 경영전문지 《경영신문》 및 《교육신문》 등이 발간되고 있으며, 또한 체육활동으로는 축구부 동 총 18개 운동부가 각 분야에서 활약이 크다. 1992년 4월 현재 12개 단과대학에 85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대학원은 일반대학원 등 9개 대학원에 120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학생은 1991년 4월 현재학부 18,548명, 대학원 3,920명이 재학중이며, 교원 653명, 직원 458명이 재직중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461-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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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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