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본관
1934
사적
장소 유적
장소 교육
유물 건축물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에 위치한 근대식 학교 건축물이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완공된 건물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주재료는 화강석이며, 중앙부의 탑 모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대체로 평면 H자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중앙에는 넓은 홀이 있고, 앞면 현관의 돌기둥에는 호랑이상이 조각되어 있고, 뒷면의 돌기둥에는 무궁화가 조각되어 있다. 한편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건축가인 박동진[1899-1981]이 설계하였고, 일본인 후지타 고지로[藤田幸二郎]가 시공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최신식 내부시설은 물론 외관도 유례없이 화려하고 웅장하다고 알려졌다.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안암동
  • 고려대학교 본관
  • 고려대학교 본관 - 서울 성북구 안암동
  • 고려대학교 본관 외관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41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 (안암로 145)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사적
  • 지정일: 1981.09.25

근거자료 원문

  • 고려대학교 내에 있는 근대식 학교 건축물이다. 이 건물의 규모는 연건평 3,263㎡(975평), 지상3층(중앙탑 6층)이며 화강암을 주재료로 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이 학교의 행정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의 본관이다. 1932년 당시 경성부 교외인 안암리에 터를 잡고 1933년 9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는데 당시 금액으로 19만원이 들었다. 본래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4월 당시 내장원경(內臟院卿)이었던 이용익(李容翊)이 지금의 수송동에 있던 노어학교(露語學校)자리에 법률과 실업교육을 목적으로 개교하였으나, 그 후 1910년에 천도교에서 인수하여 안국동에서 목조 2층 교사 두 채로 법과와 상과 전문 과정을 교육하였 다. 그 후 1932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주(校主)였던 김성수(金性洙)선생이 인수, 현 안암동의 교지를 사들여 본관과 중앙도서관을 새로 짓고 오늘의 고려대학교 기틀을 마련하였다.
  • 조지훈의 호상비문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덧 정문이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눈 앞에 넓게 펼쳐진 중앙광장과 그 끝에 보이는 본관이 고려대의 웅대함을 대변하는 듯하다. 물론 그 사이 위치한 누군가의 동상이 경관을 해치긴 하지만, 중요한 인물이겠거니 하고 만다. 중앙광장을 지나 찾아간 본관은 1934년 세워진 건물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본관으로 쓰이던 것이다. 현재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내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인데, 그래서인지 새로 지어지는 고려대 건물들도 모두 고딕 양식을 본따 비슷하게 짓고 있다. 특히 중세 성관의 성가퀴는 고려대 건물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인 듯하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99-201쪽
  • 고려대학교 내에 있는 근대식 학교 건축물이다. 이 건물의 규모는 연건평 3,263㎡(975평), 지상 3층(중앙탑 6층)이며 화강암을 주재료로 한 좌우대칭의 고딕 양식으로 되어 있다. 평면 H자형이며, 중앙에는 넓은 홀이 있다. 건물 현관의 두 돌기둥에는 학교의 기상을 상징하는 호랑이상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 후문의 돌기둥에는 무궁화가 조각되어 있다. 현재는 이 학교의 행정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본관이다. 1932년 당시 경성부 교외인 안암리에 터를 잡고 1933년 9월에 착공하여 1934년 9월에 완공하였는데 당시 금액으로 19만 원이 들었다. 설계는 유명한 근대 건축가 박동진(朴東鎭)이 맡았다. 건축 당시에는 내 · 외부가 호화스럽고 웅장하여, 국내의 학교 건축물로서는 유례가 없는훌륭한 것이었다. 본래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4월 당시 내장원경(內臟院卿)이었던 이용익(李容翊)이 지금의 수송동에 있던 노어학교(露語學校) 자리에 법률과 실업교육을 목적으로 개교하였으나, 그 후 1910년에 천도교에서 인수하여 안국동에서 목조 2층 교사 두 채로 법과와 상과 전문 과정을 교육하였다. 그 후 1932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주(校主)였던 김성수(金性洙)가 이를 인수, 현 안암동의 교지를 사들여 본관과 중앙도서관을 새로 짓고 오늘의 고려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91-292쪽
  • 보성전문학교 본관건물의 설계자는 朴東鎭이었다. 그는 1926년에 京城高等工業學校 건축과를 졸업한 후 곧 바로 조선총독부 건축과에 들어가서 각종 공공건물의 설계에 종사했는데 1933년에 순전히 개인자격으로 그것도 단독으로 普專 本館 건물을 설계하였고 이어 1935년에는 普專 圖書館건물도 설계하였다. 박동진의 설계를 받아 일본인 藤田幸次郞가 施工한 本館건물의 당초의 바닥면적은 3,223㎡(975평)였고 3층 石造및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되어 있다 평면은 H자형으로 중앙에 고딕 성관(Gothic 城館)과 같은 모습의 탑부를 두고 이의 1층을 현관과 현관 홀로 하였다. 북측에 편복도를 두고, 복도의 남측에 큰방들을 배치, 총장실을 비롯한 대학행정부서의 사무실로 사용한다. 또 평면의 좌우 돌출된 곳에는 큰방을 두어 대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중앙탑부의 창호와 현관개구부는 뾰죽아취 (Pointed arch) 로 고덕양식을 취하고 또 2층의 창호를 대부분은 뾰죽아취로 처리하였으나 1층과 3층의 나머지 창호들은 수평아취 (Flat arch) 로 하여 변화를 얻고 있다. 중앙탑부의 네모서리에는 플랫버트레스(Flat buttress) 를 붙여 고덕적인 성격을 더하였다. 지붕은 박공지붕이고 삼각형 도머(Dormer)를 두었고, 스레이트로 마감하였었으나 최근의 보수공사때 동판마감으로 하였다. 당시 19만원의 공사비를 소요하였다고 한다. 1981년 9월 5일에 史蹟 제 285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32-133쪽
  • ▫ 사적 제 285 호 고려대학교 본관 高麗大學校本館 시대 : 근대(1934년) 소유자 : 고려대학교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안암동 5가 1-2(고려대학교 내) 지정연월일 : 1981. 9. 25. 고려대학교 내에 있는 근대식 학교 건축물이다. 이 건물의 규모는 연건평 3,263㎡(975평), 지상 3층(중앙탑 6층)이며 화강암을 주재료로 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이 학교의 행정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본관이다. 1932년 당시 경성부 교외인 안암리에 터를 잡아 1933년 9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는데 당시 금액으로 19만원이 들었다. 본래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4월 당시 내장원경(內臟院卿)이었던 이용익(李容翊)이 지금의 수송동에 있던 노어학교(露語學校) 자리에 법률과 실업교육을 목적으로 개교했으나, 그 후 1910년에 천도교에서 인수하여, 안국동에서 두 채의 목조 2층 교사로 법과와 상과 전문과정을 교육했다. 그 후 1932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주(校主)였던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인수, 현 안암동의 교지를 사들여 본관과 중앙도서관을 새로 짓고 오늘의 고려대학교 기틀을 마련했다. 이 건물 의 설계자는 일제 때 창의적인 작물을 많이 발표한 바 있는 한국인 건축계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박동진(1899~1981)이었고, 시공자는 일본인 후지타(藤田幸二郞)가 맡았다. 평면은 대체로 H자( | - | - | )형으로 중앙에는 넓은 홀이 있다. 중앙부에는 5층으로 보이는 고딕(Gothic) 성관(城館)과 같은 모습의 탑부(塔部)를 두고 1층을 현관과 현관홀로 하였다. 이 탑의 전후에는 주 출입구와 후면 출입구를 두었다. 김성수의 착안으로 본관 현관 좌우 문설주에 호랑이의 머리상을, 그 후문 입구 좌우에는 무궁화를 새겨서 민족교육기관으로서의 기상을 은연중에 나타내었다. 북측에 편복도를 두고, 복도의 남측에 큰 방들을 배치했으며 평면의 좌우 돌출된 곳에는 큰 방을 두었다. 복도의 동서 양 끝단에서는 계단과 화장실이 뒤쪽으로 붙어 있다. 중앙 출입구와 중앙탑 최상층의 창문들은 첨두 아치(pointed arch)로 고딕양식을 취하고, 또 이 건물 2층의 창호를 대부분은 첨두 아치로 처리했으나, 나머지 창문들은 수평 아치(flat arch)로 마무리하여 변화를 얻고 있다. 중앙탑 네 모서리는 플랫 버트레스(flat buttress)를 붙여 고딕적인 성격을 더하였고, 탑 꼭대기는 중세 성관(中世城館)의 여장(女墻)과 같이 마무리했다. 지붕은 박공지붕이고 삼각형 도머(dormer)를 두었고, 슬레이트로 마감했으나 최근의 보수공사 때 동판마감으로 했다. 내부시설로 증기난방과 수세식 화장실을 두어 당시로서 최신식 건물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자본의 힘으로, 또한 한국의 기술자의 노력으로 세워진 최초의 교육기관으로서도 의의가 깊은 건물이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 1988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91-92쪽
  • ⑤ 高麗大學校 本館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내에 있는 이 건물의 규모는 연건평 3,223㎡(975坪), 지상 6층 石造 및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되었으며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普成專門學校의 본관으로서 1932년 당시 京城府 境外인 安岩里에 터를 잡아 1933년 9월에 착공하여 1934년 9월에 완공하였는데 당시 금액으로 19만원이 들었다. 본래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光武 9) 4월 당시 內藏院卿이었던 李容翊이 礡洞지금의 수송동에 있던 露語學校자리에 법률과 실업교육을 목적으로 개교하였으나, 그후 1910년 天道敎에서 인수, 안국동에서 두채의 목조 2층교사로 法科와 商科 전문과정을 교육하였다. 1932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주였던 金性洙선생이 인수, 현 안암동의 교지를 사들여 본관과 중앙도서관을 새로 짓고 오늘의 고려대학교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일제시대 창의적인 작품을 많이 발표한 바 있는 한국인 건축계의 개척자의 한 사람인 朴東鎭(1899∼1981)이었고, 시공자는 일본인 후지따고오지로오(顧田幸二郞)가 맡아 하였다. 평면은 H자( |-|-| )형으로 중앙부에는 5층으로 보이는 Gothic 城館과 같은 모습의 탑부를 두고 이의 1층을 현관과 현관홀로 하였으며, 이 탑의 전후로 주 출입구와 후면 출입구를 두었다. 金性洙의 착안으로 본관 현관 좌우 문설주에 호랑이의 頭像을, 그 후문 입구 좌우에는 무궁화를 새겨서 民族敎育機關으로서의 기상을 은연중에 나타내었다. 북측에 편복도를 두고, 복도의 남측에 큰 방들을 배치, 총장실을 비롯한 대학행정부서의 사무실로 사용한다. 또 평면의 좌우 돌출된 곳에는 큰 방을 두어 대회의실로 사용하고 있고, 복도의 동서 양 끝단에서는 계단과 화장실이 뒷쪽으로 붙게 되었다. 중앙 출입구와 중앙탑 최상층의 창문들은첨두아취(Pointed arch)로 고딕양식을 취하고 또 이 건물 2층의 창호를 대부분은 첨두아취로 처리하였으나, 나머지 창문들은 수평아취(Flat arch)로 마무리 하여 변화를 얻고 있다. 중앙탑 네 모서리는 후랫 버트레스(Flat buttress)를 붙여 고딕적인 성격을 더하였고 탑 꼭대기는 中世城館의 女墻과 같이 마무리 하였다. 지붕은 박공지붕이고 삼각형 도머(Dormer)를 두었고, 스레이트로 마감하였었으나 최근의 보수공사때 동판마감으로 하였다. 내부시설로 증기난방과 수세식화장실을 두어 당시로서는 최신식 건물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자본에 의하여, 또한 한국의 기술자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의 교육기관으로서도 의의가 갚은 건물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91-692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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