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단지
1965
장소 거주지
성북구 아리랑로 19다길 일대(정릉동 559)에 조성된 마을 이름이다. 원래 이 일대는 정릉의 능역으로 문화재보호지역이었다. 그런데 1965년 서울대 교수들의 주거 확보라는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서울대 주택조합에 택지로 불하되었다. 1970년대 단지 조성 당시 교수단지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2백여 세대가 살았는데, 민간 주택조합이 결성되어 개발된 첫 사례였다. 당시에 비해 영역이 확장된 현재는 4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실제 주민 중 서울대 교직원은 거의 없다. 교수단지의 매력은 마을이 조성될 당시 주택들마다 아름다운 정원을 함께 조성하여 주변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인데, 2014년부터는 정원을 개방하는 등 마을 축제를 이어오고 있다.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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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貞陵 敎授團地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거주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559, 18통~20통 (아리랑로19다길)
  • 비고: 아리랑로19다길 일대

근거자료 원문

  •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는 여러 역사적인 장소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의 '정릉', 그녀를 기리는 원찰 ‘흥천사’도 이곳에 있다. 그리고 정릉과 흥천사를 잇는 중간에 마을이름 '정릉교수단지'가 있다. 이름부터 생소한 ‘교수단지’는 독특한 유래를 가진 마을이름이다. 숲이 우거지고 ‘여우소리’가 들려왔던 정릉 주변의 임야가 1965년 무렵 불하되면서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릉동 559번지 일대의 땅을 당시 서울대 교직원들이 조합을 결성해 가옥을 설계·건축하여 살면서 조성된 주택단지이다. 민간에서 주택조합이 결성되어 개발된 것으로는 첫 사례인 셈이다. ‘교수단지’의 독특한 매력은 마을이 조성될 당시 주택들마다 아름다운 정원을 함께 조성하여 주변의 경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다. 1970년대 초까지 마을에서 사용하던 공동우물인 ‘어수정’과 마을보호수가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원 길을 거닐어 보는 것도 역사와 도시가 공존하는 성북동에서만 누리를 수 있는 문화적 혜택일 것이다.
  •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62번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가면 교수단지를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정릉 교수단지를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정릉 교수단지를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가 있다.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교수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교수단지’라 불리고 있다. 교수단지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서울대학교 교수들을 위해 단지를 조성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들은 자기집을 소유한 경우가 많지 않았다. “교수들이 안정된 생활을 해야 한국에 인재를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단지조성 사업이 시작되었다. 단지 조성을 위해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 토지매입이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소유한 땅의 일부를 불하 받아 집을 지을 수 있는 터를 조성, 서울대학교 교수가 직접 토목과 건축설계를 하여 마을을 조성하게 되었다. 현재 교수단지는 1960년대 토지불하를 할 당시에 비해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현재 정릉 2동 18~20통 지역에 교수단지 영역이 포함되어 있으며 1970년대 단지 조성 당시 교수단지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2백여 세대가 살고 있다. 조성 당시에 비해 영역이 확장된 현재는 단독주택과 일부 다가구주택(연립주택, 빌라) 등을 포함한 4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1960년대 정릉동을 비롯해 돈암동, 길음동 등에서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기록하고 있을 때에도 정릉고개와 정릉 입구 사이의 산비탈은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임야지대로 남아 있었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정릉 능역에 포함되어 있어서 해방 후에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동안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다. 1965년 무렵 정릉 주변의 임야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주택이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서울대 교직원들은 1963년에 사단법인 ‘서울대학교주택조합’을 결성하여 1965년 11월 1일에 성북구 쌍문동 산261의 1, 262·256의 1에(현재 정릉동 599번지 일대) 있는 2만 3백여 평의 국유림을 불하받아 이를 ‘교수단지(대학교 교직원 주택단지)’로 개발했다. 당시 토지를 불하받은 교직원은 77명으로, 평당 4백~8백 원 선이었다. 이것은 민간에서 조합이 결성되어 주택단지를 개발한 첫 사례이다. 그러나 교수단지의 건축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하받은 택지는 부동산 붐으로 주택을 건립하기도 전에 일반에 매각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토지를 불하받은 지 2년째 되는 해인 1967년에 조합원들 간의 명의 문제와 매매문제로 두 파로 나눠지고, 서로 고소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듬해인 1968년 1월 21일에는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노린 이른바 ‘1.21 사건’으로 도시계획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군과 경찰은 무장간첩 김신조를 생포하고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수색전을 전개해 도주한 2명을 제외한 28명을 사살함으로써 동월 31일에 사건을 종결했다. 그러나 수도 서울이 이처럼 쉽게 북한 무장간첩에게 뚫렸다는 소식은 많은 서울시민과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는 이 사건 후 서울의 도시계획을 크게 수정했다. 주택건설에서 수도 방비로 도시계획을 수정한 것이다. 주변의 어수선한 상황으로 교수단지에는 대지만 매입해 놓고 건물을 짓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예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경우가 많아 실제 마을에 입주한 주민 중 서울대 교직원은 많지 않았다. 교수단지 설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마을에 거주하는 박여병씨는 교수단지 조성 당시 주택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사항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조금만 늦었으면 허가받기 어려웠어.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불하한 거니까 허가해주지. 근데 사실 아랫사람들은 안 된대. 청와대 보호 차원에서 안 된대. 근데 관리청 차장인가 하는 사람이 계장하고 과장하고 불러가지고 “개인이 산 것도 아니고 학교 주택조합에서 불하를 받았는데 허가를 안 해주면 어떡하나? 빨리빨리 해줘라” 그래서 허가를 받았어. 근데 그때도 또 ROTC 단장이 빨리 해야 되겠대. 수도경비사령관이 연모씨가 오면 허가 받기 어려울 거다. 그래서 빨리 서둘러서 받았지. -박여병(남 90), 성북구 정릉동 559-70, 2014년 6월 26일 인터뷰-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교수단지 조성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단지 조성에는 서울대 공대 토목학과와 건축학과 교수진이 참여함으로써 산비탈에 층층이 들어선 축대는 어느 곳보다도 튼튼하게 시공되었다. 그로부터 30여년 후, 정릉2동 506~50번지 일대에 재건축바람이 불면서 마을에는 광풍이 불었다. 2008년 10월 재개발 바람을 타고 정릉 제6구역 주택 재건축 정비사업조합이 설립인가가 났다. 재건축 소식을 접한 마을은 찬성과 반대파로 나누어졌다. 재건축을 찬성하는 ‘정릉2동 재건축조합’이 설립되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정릉을 사랑하는 모임(정사모)’을 조직해 재건축을 저지하는 운동을 펼쳤다. 다행히 2010년 9월 문화재청 사적분과와 세계문화유산분과 합동위원회에서는 “정릉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경우에는 현대적이고 획일화된 높은 콘크리트 구조물로 인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정릉의 역사문화적 특성과 경관을 크게 훼손할 우려가 높음”으로 인해 정릉 제6구역 주택 재건축 정비사업조합의 문화재 현상변경 심의 신청을 부결했다. 현재 교수단지는 재개발 부결 이후 마을을 지속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주민들이 힘을 모으고 있다. 기존의 재개발 찬성과 반대라는 대립에서 벗어나 현재의 마을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꽃길 가꾸기, 개인가정의 정원을 개방하는 축제 ‘정원이 들려주는 소리’ 개최, 주민들이 주도가 되어 만든 도자 모임, ‘역사문화 마을 만들기’의 일환인 마을 내 주민 해설사 스터디 등의 활동을 통해 주민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아름다운 마을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2014년 11월에는 ‘2014년 꽃 피는 서울상 콘테스트’에서 대상 수상이라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마을 ‘정릉 교수단지’에서는 지금도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고 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해 주민이 주도가 되어 노력하고 있다.
    본문의 '현재 정릉동 599번지 일대'라고 표기되어 있는 부분은 정릉동 559번지의 오기로 추정된다.
  • 정릉 아리랑시장을 지나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정릉’ 표지판을 따라 언덕을 오르다 보면 아파트 숲 사이에 둥지를 틀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 있다. 조선의 첫 번째 왕비였던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과 그녀의 원찰인 흥천사를 잇는 마을 교수단지! 풍수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정릉을 기준으로 우측, 즉 백호 자리에 해당하는 교수단지는 어떤 마을이고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을까? 지금부터 마을과 주민과 꽃이 함께 하는 교수단지에서 사람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꽃들의 속삭임을 함께 느끼며 마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마을의 역사 1960년대 정릉동을 비롯해 돈암동, 길음동 등지에서 인구가 급증할 때에도 정릉고개와 정릉 입구 사이의 산비탈은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임야지대로 남아있었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정릉 능역에 포함되어 있어서 해방 후에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다. 1963년 서울대 교직원들은 사단법인 ‘서울대학교 주택조합’을 결성, 1965년 정릉동 599번지 주변의 임야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주택이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민간에서 조합이 결성되어 주택단지를 개발한 첫 사례로, 불하 당시 땅값은 평당 400원에서 800원 정도였다. 서울대 공대 토목학과와 건축학과 교수진이 참여함으로써 산비탈에 층층이 들어선 축대는 어느 마을보다도 튼튼히 시공되었다. 교수단지는 초기에 주택건설에 난항을 겪으면서 조성에 어려움도 있었다. 불하받은 택지는 부동산 붐으로 주택을 건립하기도 전에 일반에 매각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 토지를 불하받은 지 2년째 되는 해인 1967년에 조합원들 간의 명의문제와 매매문제로 두 파로 나눠지고, 서로 고소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듬해인 1968년 1월 21일에는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노린 이른바 ‘1.21 사건’으로 도시계획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수도 서울이 북한 무장간첩에게 뚫렸다는 소식은 많은 서울 시민과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사건 후 서울의 도시계획은 주택건설에서 수도 방비로 대폭 수정되었다. 주변의 어수선한 상황으로 교수단지에는 대지만 매입해놓고 건물을 짓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예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경우가 많아 실제 마을에 입주한 주민 중 서울대 교직원은 많지 않았다. 그 때도 조금만 늦었으면 허가받기 어려웠어.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불하한 거니까 허가해주지. 근데 사실 아랫사람들은 안 된대. 청화대 보호 차원에서 안 된대. 관리청 차장인가 하는 사람이 계장하고 과장하고 불러가지고 “개인이 산 것도 아니고 학교 주택조합에서 불하를 받았는데 허가를 안 해주면 어떡하냐? 빨리빨리 해줘라!”. 그래서 허가를 받았어. - 박여병(남, 90), 성북구 정릉동 559-70, 2014년 6월 26일 인터뷰 교수단지 설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마을에 거주하는 주택조합 교직원은 현재 한 명만 남아있다. 새로운 주민들로 채워지고 ‘교수단지’라는 이름을 역사에 담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문이 열리고 마음의 담이 헐리는 정원축제 매년 봄이 되면 교수단지 주민들의 마음에는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교수단지를 한 번이라도 찾았던 시민은 달력을 보며 ‘정원이 들려주는 소리’를 준비하는 주민들의 소식을 기다린다. 2014년부터 시작하여 매년 열린 축제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화해와 소통의 행사이다. 교수단지가 조성되고 그로부터 40여 년 후, 여느 마을이 그렇듯이 재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재건축을 찬성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각자의 입장이 있을 터.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건축에 대한 갈등 속에서도 주민들은 서로를 알아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집을 오가며 각자 개성 넘치는 정원과 그에 얽힌 추억을 공유했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정원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정원을 개방하는 축제를 기획하게 되었다. 집 앞과 골목마다 주민들이 모여 꽃을 심어 꽃길을 가꾸고, 정원에서 전시와 음악, 체험을 통해 주민뿐만 아니라 외부 방문객을 맞이하여 함께 하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2014년 주민들은 ‘서울시 우리마을프로젝트’를 통해 마을의 이야기를 담은 책자를 발간하고, ‘성북구 마을만들기 지원사업’을 통해 정원축제를 개최하였다. 축제기간 동안 정원을 개방하는 가정에는 각자의 사연과 특색을 담아 정원 이름을 짓고 문패를 만들었다. 주민들과 도자모임을 통해 만든 도자기들은 축제에서 전시가 되었다. 축제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하나가 되었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정원 이름을 지으면서 서로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더욱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여사님이라고 부르던 이웃이 언니가 되고 왕언니도 되었어요. 이웃을 오가다 보니 옛날에 살던 고향집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축제를 위해 대문을 열자 주민들의 마음도 열리기 시작했다. 주민간의 화합을 넘어 사유지인 정원을 시민들에게 개방함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은 교수단지 정원축제는 ‘2014년 꽃피는 서울상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2016년에는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014년과 2015년 2년 동안 서울시와 성북구로부터 마을만들기 사업보조금으로 시작한 마을축제는 2016년부터는 지자체의 보조금 없이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보조금이 중단될 경우 마을사업의 지속성에 대한 고민과 우려를 잠재우듯, 주민들은 더욱 풍성한 축제를 즐기고 있다. 축제 첫 회에 7곳의 정원이 개방되었고, 그 다음에는 9곳, 12곳, 14곳 ……. 개방되는 정원이 점차 늘어났다. 빌라나 다세대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행사에 함께 참여하여 일손을 보태니, 실제 축제에 참여하는 주민도 늘어난 셈이다. 주민들 스스로가 기획하고 함께 즐기는 축제는 4년간 다섯 번의 축제를 마무리하고, 2018년 5년차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마을에서 준비한 정원결혼식 봄이 되면 교수단지는 꽃과 함께 행복한 사람들이 늘어난다. 정원축제와 함께 마을에서 준비한 또 다른 축제인 ‘작은 결혼식’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정원축제를 열면서 집집마다 주인의 손길을 받은 정원들이 늘어나고, 골목마다 향기가 넘쳤다. 주민들도 마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더욱 커져갔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가진 멋진 자원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정원의 특성을 살린 의미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6년 4월 주민들의 자랑인 정원을 결혼식장으로 제공하고 교수단지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성북구에서 마을활동을 하는 예비부부가 이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함께 준비하는 진짜 마을 결혼식을 진행했다. 2017년 5월에는 성북구에 살고 있는 다문화부부가 정원결혼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주민들은 정원결혼식에서 장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함께 전을 부치고 행사에 일손을 거들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마을결혼식을 진행하면서 “우리가 결혼할 때에는 마을에서 음식을 다 장만했는데, 그 때 기억이 나서 더 즐겁다”고 주민들은 이야기한다. 온 동네가 나서서 치렀던 결혼식의 북적임이 교수단지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다. Ing... 계속되는 주민들의 이야기 교수단지 재건축은 2013년 문화재청에서 부결 판결 후, 2015년 재심의에서 조건부 가결이 된 상황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사는 동안은 예쁜 꽃들과 함께 향기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골목마다 꽃길을 가꾸고 봄에 열릴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오늘도 주민들은 자신들의 정원을 가꾸고, 꽃길을 지나며 재미있는 일상을 기획하고 있다. 2015년 11월에는 ‘걷기 좋은 서울 시민공모전 마을 보행 환경개선 시민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정릉 교수단지 마을길 가꾸기’를 응모해 은상을 수상했다. 골목에서 꽃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1년 365일 계속되고 있다. 교수단지 가는 방법 ........................................................................................ 교수단지를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아리랑 시장을 지나 언덕을 오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쉽게 가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보자.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출발하는 1162번 또는 성북 22번 중 어떤 것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교수단지의 시작이 달라진다. 1162번 버스 이용 교수단지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정릉 교수단지를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가 있다. 마을 언덕을 내려가면서 마을의 꽃길들을 만날 수 있다. 성북 22번 마을버스 이용 마을버스를 타고 아파트단지와 아리랑시장을 지나 종점인 정릉입구에서 내리면 정릉과 함께 이웃하고 있는 교수단지를 만날 수 있다. 1162버스와 달리 마을을 구경하려면 언덕길을 올라 가야해서 숨이 차오르지만, 주민들이 조성한 꽃길과 담장 너머 정원들을 구경하다 보면 고단함도 잊게 된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6-23쪽
    본문의 '599번지 일대'라고 표기되어 있는 부분은 정릉동 559번지의 오기로 추정된다.
  • 교수단지 골목에 조성된 꽃길로 주민들로부터 ‘사랑의 길’로 불리고 있다. 교수단지는 1960년대 서울대 교직원들이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으로부터 불하받아 조성한 마을이다. 주민들이 주도가 되어 꽃길을 조성하고 가꾸면서 성북구의 아름다움 마을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마을에 꽃길을 본격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부터이다. 북악산로 5길에 거주하는 주민이 담장 밖 골목을 6m에 화단을 조성한 것을 시작으로 2013년 본격적으로 꽃길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올해(2014년) ‘성북구 마을만들기 지원사업’을 통해 마을 꽃길을 확장했으며, 지속적으로 꽃길을 만들어 ‘깨끗한 동네, 아름다운 동네’로 만들어갈 예정이다. 올해 4월에는 SBS 「모닝와이드」에서 교수단지 주민들이 꽃길을 조성하는 모습을 촬영하며 방영하기도 했다. 꽃길 조성과 함께 10월 10, 11일에는 ‘정원이 들려주는 소리’를 개최하여 각 가정의 정원을 개방하는 축제를 열기도 했다. 정원축제는 매년 봄, 가을에 개최할 예정이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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