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단지 백세며느리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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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거주지
정릉 교수단지(성북구 아리랑로 19다길 일대)에 위치한 주택이다. 현재 지은지 약 40년이 된 집으로, 정릉 앞 돌산에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렸을 때도 건재할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마을사람들은 이 집을 ‘장로님댁’, ‘임 장로님댁’이라고 불렀고, 현재는 며느리 김효순씨가 거주하고 있다. 시아버지가 백 세까지 사셨기 때문에 집의 애칭도 ‘백세며느리댁’이라 짓게 되었다. 시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고 시부모님과 함께 한 추억이 가득한 정릉 교수단지와 백세며느리댁은 김효순씨에게 오래 살고 싶고, 자손 대대로 이어서 살게끔 하고픈 추억의 공간이다.
정릉동
  • 정릉 교수단지 백세며느리댁(1)
  • 정릉 교수단지 백세며느리댁(2)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임 장로님댁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거주지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
  • 비고: 1970년대 건축된 것으로 추정.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 비고: 정릉동 교수단지 내

근거자료 원문

  • 시부모님과의 추억이 담긴, 백세며느리댁 널리 퍼지는 향이 너무 좋아 백합을 가장 좋아한다는 백세며느리댁 김효순씨. 시부모님이 사시던 집을 물려받아 현재까지 살고 있다. 삼십 년 전 교수단지로 시집 와서 지금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지은 지 40년이 된 집으로, 정릉 앞 돌산에 아파트(대주 피오레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렸을 때도 건재할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다.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마을사람들은 김효순씨 집을 ‘장로님댁’, ‘임 장로님댁’이라고 부르고, 김효순씨는 자연스럽게 ‘장로님댁 며느리’로 불리게 되었다. 100세까지 사셨던 시아버지는 정릉 입구 길목에서 전도지와 사탕을 나눠주며 전도를 하셨다. 교수단지에서 시아버지의 사탕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였는데, 마을 주민들도 임 장로님이 나누어준 사탕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마을에서도 인품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5남매를 키우면서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 없이 베푸는 삶을 사셨던 시아버지 덕에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인자하셨던 시아버지 덕에 자신도 마을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고 했다. 시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던 백세며느리 김효순씨는 시부모께 물려받은 재산을 잘 간직하여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며 현재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시아버지가 100세가 넘도록 사셨는데, 100세 기념으로 나라에서 받은 명아주 지팡이 청려장이 있다. 청려장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장수한 노인들에게 왕이 직접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시아버지가 백 세까지 사셨기 때문에 집의 애칭도 ‘백세며느리댁’이라 짓게 되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정원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김효순씨는 정원에 아침에 나가면 “아침밥을 점심에 먹었을 정도”로 정원에 정성을 쏟는 시간이 많아졌다. 집안의 꽃과 나무와 대화를 하게 될 정도로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백세며느리 김효순씨에게 정원은 친구이자 휴식공간이 되었다. 시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고 시부모님과 함께 한 추억이 가득한 정릉 교수단지와 백세며느리댁은 김효순씨에게 오래 살고 싶고, 자손 대대로 이어서 살게끔 하고픈 추억의 공간이다. 김효순씨 구술 내가 생각하기로는 시집왔을 때쯤이니까 내가 시집온 지 삼십 년 됐어. 시부모님인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원래 사셨던 곳이지. 시부모님이 사셨던 집을 내가 물려받은 거지. 그 당시부터 해서 지금까지 이 집이 한 40년 정도 됐다고 들었어. 아직까지도 이 집이 건재하는 걸 보면 옛날 사람들이 집 짓고 살았던 게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어. 왜 그걸 느꼈냐하면 우리 집 앞에 아파트가 생겼잖아. 원래는 그 아파트 땅이 다 돌이었어. 돌산이었는데 다이너마이트로 돌들을 다 부수고 건축한 거지. 그때 바위 찢어지는 소리가 어떤 건지 태어나서 처음 알았어. 너무 시끄러워서 내가 화가 나서 아파트 건축하는 곳에 가보니까 땅에 구덩이를 파서 그곳에 다이너마이트 선 같은 것을 넣고 폭파시키더라고. 바위가 대부분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러면서 쫙쫙 갈라지는 소리가 나더라구. 지금 상상만 해도 소름끼쳐. 너무 시끄러웠거든. 그래서 집 바로 앞에서 다이너마이트 쓰고 했는데도 예전에 지은 우리 집이 몇 십 년 동안 건재하는 게 너무 신기한 거야. 집이 튼튼하다는 거지. 어쨌든 보존할 수 있다면 보존하는 게 가장 좋지. 내가 죽어도 할아버지(시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재산이기에 잘 간직했다가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나도 영원히 살진 않을 거 아니야. 나도 언젠가는 죽는데 죽고 나서야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죽고 나서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물려주신 재산 그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왔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지키고 싶은 거지. 시어머니가 먼저 85세 때 별세하셨지. 할머니(시어머니)도 호상이지. 할머니 먼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시아버지)가 그 뒤에 돌아가셨는데 사시는 동안 다투기도 많이 다퉜지. 우리는 자식의 입장이니까. 서로 성격이 정확하기도 했고.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님이 이해를 많이 해주셨어. 나는 성격이 불같아서 바로 화가 났다가 얼른 식는 성격이라 그리고 얼른 깨우칠 수 있는 게 감사했어. 하나님 믿음으로. 우리 아버님이 장로님이셨어. 그래서 이해를 많이 해주셨지. 당신이 만약 잘못하셨어도 먼저 용서해 달라고 말씀하셨어. 용서해야지 나도 기도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셨어. 그렇게 살아왔는데 내가 제일 뿌듯한 건 우리 어머니가 5월 8일 날 돌아가셨는데 시어머니가 게 찌개를 좋아하셨는데 저녁에 게 찌개를 다 드시고 저녁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너무 행복했어. 그런데 우리 아버님은 주일날 돌아가셨어. 11월 8일 날. 시어머님과 똑같은 8일 날 돌아가신 거지. 우리가족은 아침마다 식기도를 하거든. 식기도를 하고 점심을 차려놓고 교회를 다녀와서 점심 잡수셨으면 설거지하고 잠시 쉬었다가 저녁 하러 내려오는데 식탁에 그냥 그대로 상이 차려져 있는 거야. 그래서 왜 안 잡수셨냐고 물으니까 속이 안 좋아서 안 드셨다고 했어. 날 기다리신 거지. 그러고는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아주버님(큰아들)한테 오라고 전화하라고 그러시더라고. 연락해서 오셔가지고 아버님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니까 땀이 많이 나더라고. 땀 닦아드리고 있는데 그 다음 날이 마침 우리 아들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손자를 위해 기도해 주시더라고. 그렇게 기도하시다가 침을 흘리시더라고. 그래서 형님네가 서울대병원에 전화해서 사람들 와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응급실로 갔는데 20분 뒤에 돌아가셨어. 우리 아버님이 항상 100세까지 사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같이 사는 며느리 고생하지 않게 도와 달라고 항상 기도하셨어. 항상 기도하셨다고 하더라고. 살아가면서 때에 따라서는 힘든 일이 있었지만 너무 뿌듯해. 요즘에 신문에도 많이 나오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이 요양원이나 시설에서 생애를 마감한다는데 이런 뉴스를 보더라도 조금만 힘들어도 요양시설 보내고 하는데. 그래도 우리 시아버님은 건강하셨기 때문에 내 체면을 살려주셨던 것 같아. 만약에 아프셨더라면 나 같았더라도 내가 끝까지 모셨을까 싶어. 그래서 참 감사한 생각이 들어. 이 동네가 사실은 장수마을이야. 왜냐하면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이 꽤 많아. 우리 아버님은 뭐랄까 참 멋있게 사신 분이야. 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왜 그러냐면 교회의 장로님으로 계시고 남을 위해서 좋은 뜻으로 항상 말씀하고 다니시고 우리 자식들이 5남매인데 자식들에게 바라시는 거 하나 없이 베푸는 삶으로 사셨어. 서울대학교 백세 세미나 연구소에서 나와서 할아버지가 음식은 뭘 드시고 어떻게 살아오셨고 어떤 마음가짐인가 인터뷰해갔어. 우리 아버님은 자식이건 누구한테든 바라지 않고 당신이 먼저 베푸는 삶으로 살아오셨기 때문에 그래서 더 건강하게 살아오셨던 게 아닐까 싶어. 먼저 베푸는 마음을 가지고 사셨기 때문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친 게 아닌가 싶고 그래서 나도 배울 점이 많았어. 이 동네 살면서 우리 아버님 덕분에 내가 인정받는 사람으로 살아왔던 것 같아. 남들도 봤을 때 할아버지를 다 좋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덕분에 나는 한 것도 없는데 좋게 봐주시고 아버님 덕분에 많은 걸 얻었지. 우리 아버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먼저 가족들에게 베풀라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아버님이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해. 내가 먼저 전화 드리고. 때 되면 내가 먼저 찾아뵙고. 물론 우리 집이 막내니까 그렇게 해야 되지만 요즘 시대에 누가 어디 막내 이런 거 따져? 다 고집대로 살지. 요즘에는 다들 자기주장이 세어 가지고. 근데 내가 먼저 함으로써 나도 행복감을 느꼈어. 내가 잘 해주니까 그쪽에서도 나쁘게 할 필요가 없잖아 나한테. 뭘 사가도 풍족하게 사가고 그러니까 대접을 받고 오더라고. 내가 주는 만큼 나도 대접을 받는다는 걸 깨달았지. 이렇게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때 언젠가 형님네가 이쪽에 오셨을 때도 조카들과 아이스크림 사먹으라고 오천 원을 줬는데 우리 조카며느리가 전화가 왔어. 세상에 우리 아들이 큰아버지 잡수시라고 매실 사가지고 왔다고. 큰아버지도 좋아하시고 다들 좋아하시더라고. 왜 애들은 아이스크림 사먹고 말잖아. 근데 큰아버지 드릴 거 음료 사고 남은 돈으로 조카들이랑 아이스크림 사 먹었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디 갈 때마다 빈손으로 방문하지 않고 뭔가 사갖고 가는 걸 보고 자라서인지 내가 시키지 않아도 큰집에 가면서 큰아버지 드릴 거 사고 남은 돈으로 사촌들이랑 먹을 아이스크림 사가지고 가니까 큰아버지도 놀랜 거야. 초등학생이. 내가 그래서 “산 교육이라고 하는 게 그런 것이었구나”하고 그때 깨달았어. 우리 조카며느리도 놀래서 전화한 거야. 요즘에 핵가족시대라고 많이 그렇게 사는데 아 어른들과 살면서 하나도 헛으로 배운 게 없구나. 이런 면에서는 어디 가서 얘기하고 싶을 만큼 자랑하고 싶지. 어른들과 살면 모시는 입장은 힘들지는 몰라도 자식들은 내가 얘기 안 하고 가르치지도 않은 것까지 알더라는 걸 깨달은 거야. 시어머니, 시아버지께 많은 걸 얻었는데 인성적인 면이 가장 커. 남에게 절대 악하게 해선 안 된다는 걸. 지금은 안 하지만 할아버지 살아 계셨을 적엔 항상 저녁 예배드리고 살았어. 우리는 싫어했어. 할아버지는 기도하신다 그러고 우리는 싫어서 막 싸웠어. 왜 싸웠냐면 애들 어렸을 때 학교 다닐 때는 시험이 많으니까 시험 때에 30분 동안 앉아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할아버지는 기도하시고 우리는 중간에 화내면 기도 마저 하시고 혼내셨어. 그런 것도 교육이야. 기도하다가 중간에 화낼 수는 없잖아(웃음). 그런 거에 감사했어. 할아버지 추도예배 드릴 때는 우리 조카가 프린스톤 대학에서 박사 학위 받아서 목사 된 애가 있어. 티브이에도 나오고 장신대 교수님인데 추도예배 드리면서 할아버지 제일 생각나는 것, 할머니 제일 생각나는 것 얘기하면 얘기가 얼마나 긴지 몰라. 할아버지는 이런 면이 좋았다 할머니는 이런 면이 좋았다 얘기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참 좋더라고. 그런 걸 보고 옛 추억에 잠기고 조부모님과 공유하면서 살아온 얘기를 하니까 감사하지. 그리고 제일 기본은 솔직한 얘기로 할아버지가 당신 젊었을 때 쉬지 않고 일하고 벌어서 늙어서도 당신 쓸 거 알아서 다 하시고 베풀 수 있는 능력이 되니까 그렇게 베푸는 삶을 사시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들어. 경제적으로는 그런 면이 있어. 그래서 애들도 다 잘 가르쳐서 각자 분야에서 자식들도 다 잘 크고 그래서 화목한 것 같아. 그래도 옛날 분이신데 5남매를 다 대학 보내고 잘 키우셨다는 게 너무너무 대단하시지. 예전에 감자도 어깨에 짊어지고 갖다가 파셨다고 하시더라고. 그렇게 힘들게 사시면서 자식들 다 대학 보내신 거지. 그렇게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사신 거지. 시부모님 모시다가 나가서 조금 살다가 다시 들어왔어. 왜냐하면 나도 사람인지라 살다보니까 화가 나가지고. 나가서 7, 8년 살다왔지. 내가 삼십 년을 뵈어왔으니까 이십 년 넘게 모신 셈이지. 결혼하고 이 집으로 들어와서 조금 살다가 7, 8년 살다가 다시 들어왔지. 왜 다시 들어왔냐면 시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그렇게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 근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집에 산 지는 한 25년 정도 돼. 7, 8년 합쳐서 삼십 년 되지. 계속해서는 안 살았지. 나도 젊은 시절이 있었던 거니까. 솔직한 얘기로 시부모님 모시고 사니까 힘들더라고. 나가서 살다보니까 솔직한 말로 뭐가 중요한지가 알았지. 애들을 공부시키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 난 그 때는 몰랐어. 그리고 우리가 막내니까 자꾸 들어와서 살라고 하셨지. 시집왔을 적에 형님네들도 다 나가서 사시고 시부모님 두 분이서만 이 집에서 사시니까 내가 이쪽으로 들어와서 살게 된 거지. 와서 살다가 나가서 살다가 다시 들어왔지. 지금 생각하면 젊었을 때 나가서 살다 와봤으니까 나이 들어서도 끝까지 모시고 살았던 거지. 만약에 젊었을 때 그렇게 안 했다면 나이 드셨을 때 내가 나가살지 않았을까. 오히려 잘 했다고 생각이 들어. 나가서 살다보니까 애들 키우면서 금전적인 부분이 힘들고 남들 가르치는 거 다 가르쳐주고 싶고 그러다보니 돈이 소중하다는 걸 알았지. 집을 나한테 준다고 하셨으니까. 젊었을 때는 집도 필요 없다고 하고 나갔는데 말이야. 나가서 살다보니 집이라는 게 참 중요하구나 깨달은 거지. 근데 또 금방 못 들어왔어. 왜냐하면 나가서 살다보니까 아이들 학교 문제도 있고 나갔을 때는 내 마음대로 나갔지만 들어오라고 해도 금방 못 들어오겠더라고. 그래도 우리가 원했기 때문에 빨리 들어왔어. 형제들이 다 좋아했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외로워했으니까. 그렇게 같이 살다가 돌아가시게 된 거지. 시집오기 전에는 후암동에 살았어. 이쪽으로 시집오면서 우리 아버님 다니시던 정릉교회에서 결혼도 하고. 옛날에는 돌로 된 교회였어. 지금은 다시 지은 거지. 옛날에는 돌로 지은 교회였어. 오래됐어. 여기가 지금 72주년 됐어. 우리 아버님이 옛날에 교회가 마룻바닥이었을 때 인민군이 장화 신고 올라와서 지금 어느 안전에 신발 신고 들어오냐고 호통쳤다가 아버님이 인민군한테 죽을 뻔 한 적도 있었어. 하나님 앞에 오는데 왜 그런 걸 신고 오느냐고. 그래서 밤에 인민군이 찾아왔대. 아버님 나오라고. 그렇게 당했는데 가만히 있겠어?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옛날에 있던 쌀뒤주 여는 거 있는데 지금은 여기에 없고 큰집에 가 있는데 그게 진짜 역사가 있는 거야. 쌀뒤주가 뒤로 벽에 붙여져 있던 거를 앞으로 내놓고 싶더래. 순간적으로. 인민군들은 막 문을 두드리면서 나오라고 하고. 죽을 것 같아서. 아버님이 숨어서 올려놨더래. 어머니가 없다고 했는데 신발 신고 들어와서 집을 뒤지더래. 우리 어머니보고 지서로 오라고 하더래. 지서로. 지금의 파출소지. 파출소로 데리고 가는데 겁나서 늦게 가니까 빨리 오라고 하니까 빨리 안 오니까 그 어두운 데서 총을 난사해서 사람들 죽고 산 사람들도 있고 한 거지. 빨리 안 왔다고 총살해서 옆집에 있는 누구는 죽었대.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총소리 나자마자 빨리 납작 엎드려서 살았잖아. 옛날에는 그렇게 무법천지였어. 예전에는 그랬대. 나도 얘기로 들은 거지. 그래서 이게 얘깃거리가 된 거지. 그래서 큰형님네가 아버님 살아생전에 그 쌀뒤주를 갖고 싶다고 달라고 해서 준 거지. 큰아들인데 달라고 하는데 안 주겠어? 내가 언제 한번 큰집 가면 사진 찍어서 보여줄게. 거기가면 쌀뒤주 걸어놓고 그 옆에 아버님 이야기 적혀서 걸려 있어(웃음). 그 뒤주 때문에 우리 할아버지가 살아서 백 살까지 사신 거지. 그게 하나님 은혜라는 거야. 하나님 앞에 어느 안전에 워커 신고 걸어 들어오냐고 신발 벗고 오라고 했다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거지. 갑자기 뒤주를 내놓고 그 위에다가 우리 어머니가 방석을 올려놨는데 그걸 못 본 거지. 그래도 그걸 못 찾은 거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신 거지. 그러니까 더욱더 하나님한테 아버님이 열심히 기도하신 거지. 창립주셔. 우리 세 분이 정릉교회 창립하신 분이야. 근데 다 돌아가셨는데 우리 아버님이 창립주 중에 제일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거지. 우리 아버님 회갑 때나 그런 자리 때 우리 큰 조카가 그런 얘기를 다 해서 하나님 은혜 때문에 그렇다고 한 거지. 우리 조카가 그런 얘기를 다 해서 하나님 은혜 때문에 그렇다고 한 거지. 우리 조카가 외국에 프린스톤 장학생으로 나왔잖아. 지금은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정릉유치원 1회 졸업생으로 정릉교회 와서 설교했어. 참 대단하지 않아? 정릉에 살며, 정릉교회 믿으며, 정릉교회 새싹유치원 다녔던 사람이 박사가 돼서 강연도 하고. 나는 원래 처녀 때부터 친구들과 성당을 다녔어. 명동성당에. 멀어도 거기까지 다녔지. 김수환 추기경님하고 같이 사진 찍은 것도 있고(웃음). 그래도 어려서부터 다른 데로 빠지지 않고 성당 가서 놀고 토요일, 일요일이면 봉사하고 그랬던 게 그것도 하나님이 그래도 나를 사랑해 주셔서 그쪽으로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내 마음이 그쪽으로 이끌렸다는 건 하나님을 사랑한 것도 있지만 친구 따라 갔는데 그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지. 누구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안 될 수도 있는 거고 안 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붙잡아서 할 수밖에 없는 거고. 자식들을 키워도 예수 믿으면 이렇게 좋고 하나님 믿으면 이렇게 좋다 얘기해도 그래도 안 가는 사람들은 안 가. 똑같은 자식인데도. 그래 니 알아서 해라 했는데도 믿음 충만하고 열심히 다니는 거 보면 우리 아들이 자랑스러워. 이 집에서 살면서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정원이 어떻게 되던지 그런 것들이 눈에 안 들어왔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정원을 꾸미니까 정원을 꾸며놓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할아버지 살아계셨을 적엔 정원이 이 상태가 아니었고, 나무로만 만들어져 있었고 꽃은 안 심어져 있었고 잔디밭이었어. 근데 내가 들어오는 입구도 넓히고 큰 나무들을 다 가에로 정리하면서 꽃을 심게 된 거야. 그게 눈에 들어와서 그렇게 하고 싶더라고. 할아버지 계실 때는 아무래도 할아버지 쪽으로 신경을 썼다보니까 눈에 안 들어와서 그런 걸 깨닫지 못했는데 나무들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있고 다니다 보니 불편하고 외관상 보기 안 좋아서 나무들을 싹 다 옮겼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정원에 아침에 나가면 아침밥을 점심에 먹었어. 왜냐하면 정원에서 뭐 하다보면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 있는 거야. 그래서 이제 대화를 하게 되더라고. 너무 조그마한 걸 심게 되면 빨리 자라라, 넌 그렇게 땅에 기대어 있냐는 둥 나무와 꽃과 대화를 하게 되더라고(웃음). 그래서 이렇게 정원을 가꾸게 된 거라니까. 할아버지 계실 때는 잔디였어. 잔디 풀 뽑느라고 고생했어. 그래서 내가 잔디밭을 싫어해(웃음). 그래서 내가 꽃을 심은 거잖아. 다른 사람들이 와보고 여기 할아버지 계실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잖아. 할아버지한테 신경 쓰느라 정원을 가꿀 줄 몰랐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여유가 생겨서 정원도 가꾸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솔직히 그런 면도 있지. 두 가지 신경 쓸 수 없더라고. 그리고 나무가 무성했어. 회양목이 그렇게 많았어. 회양목을 갓길로 몰아넣고 공간을 만든 거지. 회양목이 여기 갓길에 놓여 있는 거야. 나뭇잎이 조그마하고 항상 푸르른 것. 지금 정원에 심어 놓은 거는 달맞이꽃, 백합, 백합이 빨간 거, 하얀 거, 노란 거, 이태리 복숭아, 수국, 작약 …… 목련, 감나무도 있고. 그런데 우리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인가 감이 그때는 한 해는 많이 달리고 그 다음 해엔 많이 안 달려. 그래서 여기 허 사장님이 그러잖아. “이번에는 감이 많이 달렸다?” 하시길래 “그래요 그쪽 거는 사장님 따 드세요” 그랬지. 바로 옆이 허 사장님댁이야. 근데 언제 한 번 감나무에서 익은 걸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더라고. 기대해봐. 이번에 얼마나 달릴 수 있는지 모르지만. 잘 익은 거 큰 거 하나는 내가 자기 줄 테니까(웃음). 진짜야. 대봉이거든. 끝에 뾰족한 감. 백세며느리댁이라고 애칭을 지었지만 원래는 장로님댁. 할아버지가 교회에서 오랫동안 일해 오셨기 때문에 장로님댁, 장로님댁 며느리라고 많이들 부르지. 임 장로님하면 다 알아줬지. 내가 제일 싫어했던 건, 내가 나가서 살게 된 것도 나는 모르는데 남들이 알아보는 게 싫었어. 젊었을 때, 남들이 다 나보고 임 장로댁 며느리라고 하는 게 싫었어. 나쁜 소리는 안 했겠지. 나야 나쁘게 행동을 안 했기 때문에. 근데도 나는 젊었을 때 그게 너무 싫더라고. 2, 3년 전에 나와 같은 또래인데 나를 툭 치면서 자기 결혼식 때 갔더라고 하더라고. 어머, 내 또래인데 왔었다는 거야. 놀라서 어떻게 왔냐고 물으니까 자기네 할머니네 집에 세 살았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얘네 집안도 우리 할아버지가 교회 나가자고 전도해서 다니게 된 거지.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남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알아보던 아니던 간에 행동거지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꽃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건 백합이야. 백합이 피었을 때 냄새가 나는 너무 좋더라고. 대문 열면 냄새가 확 나서 너무 좋아. 백합이 6월 말, 6, 7월에 빨갛게 영글면 쫙 벌어져서 냄새도 너무 좋아. 신기해. 예쁘고 향이 너무 좋아. 교수단지 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너무 살기 좋고, 공기 좋고. 편안하고. 시내에 나가면 공기가 탁한데 동네 들어오면 공기가 맑고 깨끗해서 좋아. 젊었을 땐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고 나니까 신선한 공기가 느껴지더라고. 이런 데서 사는 게 너무 행복하다 생각이 들고. 이곳에서 시내도 가깝고. 162번 버스 한 번만 타면 20분이면 시청이나 명동 롯데백화점에 금방 갈 수 있으니까. 시내 가깝고 공기 좋고 아침이면 새소리, 뻐꾸기 소리 나고 시골 같으면서도 도시니까. 누워서 새소리, 뻐꾸기 소리 들으며 좋은 공기 마시면 어디 공기 좋은 산속 별장에 온 기분도 드는데 내 집이지. 너무 행복하지. 그 이외에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어. 별장이 뭐 따로 있나?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 마시고 볼일 있어 시내로 나가기도 가까워서 좋고. 요즘에는 버스 노선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자가용으로 가나 버스 타고 가나 소요되는 시간은 똑같더라고. 오히려 자가용으로 가면 더 멀어. 대중교통 이용하는 게 더 빠르고 좋아. 그리고 여기 경전철 생기면 얼마나 더 좋아지겠어? 걸어 올라오는 것을 사실은 예전에는 싫어했어. 걸어 올라옴으로써 그것도 건강에 좋은 거야. 너무 행복해. 여기서 오래 살고 싶고. 끝까지 우리 애들한테 물려줘서 대대로 이어서 살게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김효순(여, 60세) 성북구 정릉2동 교수단지, 2014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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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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