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1950.06.25 - 1953.07.27
사건 정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휴전할 때까지 약 3년간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던 전쟁이다. 북한은 성북구 미아리고개를 통해 서울로 들어왔고 후퇴할 때에도 그곳을 통해 많은 사람을 납치해 갔다. 북한은 전쟁 중에 서울을 점령했다가 후퇴하면서 남한의 많은 사람을 미아리고개를 통해 북으로 강제납치하였고, 그중에는 성북구에 살던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조소앙, 안재홍, 조헌영 등은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인물로 납북 당시 성북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이산의 아픔과 고통은 반야월이 작사하고 이재호가 작곡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통해 대중가요로도 널리 알려졌다.
성북구
  • 성북구 주민 이강한 3 : 6.25 한국전쟁 발발 무렵 성북구 마을의 분위기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9 : 정릉 사람들의 한국전쟁 경험
  • 죽음의 세월(歲月) (5)
  • 성북구 주민 이강한 3 : 6.25 한국전쟁 발발 무렵 성북구 마을의 분위기
  • 장남용 자택 참전국가유공자 문패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미아리에서 월곡까지>,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절규하는 남녀 >,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국군전투기의 폭격>,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30일 소달구지에 올라탄 북조선군>,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다락방에서의 은신>,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0일 인천상륙작전 5일후>,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5일  화염에 휩싸인 서울>,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6일 북으로 가는 부역자>,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6일 붉게 물든 북쪽하늘>,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7일 도망치는 북한군>,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8일 철모 쓴 국군병사들>,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8일  시체 위를 자동차가 통과하다>,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8일 시가전>, 1953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돈암동 종점의 국군병사의 사체>,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정릉부근에서 들리는 총성소리>, 1950
  • 손가정마을 토박이 손명옥 9 : 정릉 사람들의 한국전쟁 경험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돈암동 종점>,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반격을 준비하는 국군>,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돈암교 부근>,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낙산위에서 청량리쪽>,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부상당한 국군병사>,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낙산산정의 패잔병들>,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국군과 인민군 >,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돈암동 종점 공산군의 서울 입성>,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9일  서울 탈환>, 1950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사건 정치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50.06.25 - 1953.07.27

근거자료 원문

  • ○ 6·25전쟁의 발발과 납북된 독립운동가들 제2대 국회의원선거 이후 정부의 체계가 잡히면서 정국은 안정이 되어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간의 대립은 결국 6·25전쟁의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38도선을 사이에 둔 3년 간의 전쟁은 1953년 휴전협정으로 일단락됩니다. 일제강점기, 엄청난 고초를 겪으며 나라를 되찾으려고 했던 노력은 이제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으로 바뀝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곧 국민의 분단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위험 때문에 혹은 이념 때문에 남한과 북한 중 한 곳을 택해야 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력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거나 어이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지요.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조헌영 등 독립운동가로, 건국 요인으로 활동했던 성북인들 또한 전쟁 중 납북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 납북 후 그들의 삶은 물론 지난 일제강점기 당시의 업적들까지도 자세하게 알 수 없게 됩니다. 기록의 단절은 곧 후세의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공백이 되는 것과도 같지요. 전쟁 이후의 정세는 매우 어수선했고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까지 숱한 사건과 혁명, 희생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랬으므로 납북된 인사들은 물론 대한민국에 생존하고 있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과 조사,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때문에 나라를 위해 한평생을 살고도 궁핍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5·10 단독선거를 반대했던 많은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이 이승만 정권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 감옥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던 장건상은 정릉의 작고 남루한 오두막집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유가족들은 시신을 모실 관을 살 돈조차 마련하지 못했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친일파 색출 또한 이행되지 못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9-130쪽
  • 저널리스트 김을한의 수기- 서울이 함락되던 날 아침<나는 自由(자유)를 選擇(선택)하였다 (4) 김을한> 나는 사무소 문을 잠그고 청년회에서 나오니 저물어가는 거리의 공기는 일층 침울하고 살기가 가득하였다. 그때에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사람이 있어 돌아다보니 청년회 아래층에서 삼일서점을 경영하는 김덕은 씨였다. 그는 나를 보자 울듯한 표정으로 김선생 어떻게 되는 거야요? 포성이 여기까지 들리고 미아리 방면에서는 피난민이 자꾸 시내로 들어오는데요. 암만해도 오늘밤이 위험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별수 있소? 하여간 오늘 저녁만 기다려봅시다 경향신문 1956. 2. 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85
  • 자주적인 발전과 사회 안정에 대한 기대도 잠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탱크와 마차, 보병들이 수없이 미아리고개를 넘어 혜화문으로 밀려왔다. 하늘 위로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멀리서 대포소리가 쾅쾅 울리면 온 도시가 불바다가 되었다. 동족간의 이념 다툼에서 시작된 전쟁은 UN군과 중공군이 가세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북한군은 서울 탈환을 위해 전쟁 막바지까지 남침경로이자 시내 중심부와 가까운 돈암동과 성북동에 주둔하였다. 북한군과 국군은 미아리고개에서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다. 1953년 7월 27일, 끝이 보이지 않던 전쟁이 중단되었고, 북한군은 후퇴하며 많은 사람들을 납치해 갔다. 미아리고개에는 퇴각하는 군인들과 줄에 묶여 북쪽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 한국전쟁 때 성북동의 상황은 삼선교에 살던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성칠(金聖七, 1913∼1951)이 남긴 일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1950년 6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의 기록에서는 서울의 전황戰況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김성칠은 『조선역사』(1946)를 펴내며 우리 민족사의 복원에 힘썼고, 1950년에는 ‘지명조사연구회’를 만들어 우리 고유의 지명을 조사하였다. 1950년 6월 28일 멀리 미아리고개로 자동차보다도 크고 육중해 보이는 것이 이곳을 향하여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것이 대포알을 맞아도 움쩍하지 않는다는 이북의 탱크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 내려다보이는 돈암동 거리엔 이미 사람의 나다니는 양이 보이고 전찻길엔 이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떼지어 행진하고 있다. 1950년 9월 23일 밤이면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자동차와 화물자동차가 쉴새 없이 북으로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다. 그도 벌써 여러 날 밤 째인데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과 화물이 흘러나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슴 아픈 이야기는 밤마다 수없이 많은 죄수들을 걸려서 끌고 가는데, 보아하매 상당한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으나 꼬지 꿰듯 줄에 엮어서 강행군을 시키고,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지체하는 일이 있으면 욕설을 퍼붓고 채찍으로 갈기며, 무넘이고개(지금의 수유리)를 넘어서는 정 말을 듣지 아니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해 버리고 간다는 것이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지』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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