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말 이야기
안암동에는 일찍이 조선의 제4대 왕 세종世宗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및 그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가 대를 이어 살고 있던 마을,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묘소 인명원仁明園이 있던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우리말로 ‘궁말’로 부르며, 광평대군 일가의 사당이 있어서 ‘사당말’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궁말’이라 부르는 궁리(또는 중리)는 광평대군의 세거지였을 뿐 아니라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무안군撫安君과 그 부인 왕씨, 광평대군과 그 부인 신씨,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과 그 부인 최씨 등 3세대를 봉사하는 사당이 있어 유명하다.
무안군의 이름은 방번方蕃으로, 태조의 일곱째 아들이자 세자 방석方碩의 형이다. 태조는 여덟 아들을 두었는데 방과芳果(훗날 정종定宗) · 방원芳遠(훗날 태종太宗)을 위시한 여섯 아들은 첫째 왕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소생이고, 방번 · 방석과 경순공주慶順公主의 3남매는 제2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소생이었다. 그런데 태조가 조선왕조를 개창할 때 신의왕후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신덕왕후는 개국에 내조의 공이 있었기에 태조의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태조는 신덕왕후의 소생으로 세자를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형 무안군 방번은 성정이 거칠어 대신들의 건의로 동생 의안군 방석을 세자에 책봉하였다. 이에 정안군靖安君 방원 등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은 조선조 개국에 공이 컸음에도 홀대를 당하니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따라서 1398년(태조 7) 8월, 방원을 중심으로 하는 왕자들과 하륜河崙 · 이숙번李叔蕃 등의 일파가, 세자 의안군을 옹호하는 정도전鄭道傳 · 남은南誾 등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주장하며 군병을 동원, 대궐문을 부수고 들어가 대신들을 살해하고 세자를 내쫓아버렸다. 이를 ‘무인정사戊寅定社’ 또는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이때 세자 방석은 물론 세자의 형 무안군 방번과 경순공주의 부마도 살해당했다.
이때 희생된 무안군 방번이나 세자 방석은 아무런 죄도 없는 원통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항상 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절에서 명복을 구하기도 하였으며, 1406년(태종 6)에는 태종도 무안군에게 공순恭順이라는 시호를, 의안군에게 소도昭悼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세종은 1437년(세종 19)에 하교하여 후사가 없는 이들을 위해 그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을 공순공 방번의 후사로,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소도공 방석의 후사로 정하여 각기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게 했다.
무안군의 후사를 이은 광평대군은 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으로 부왕인 세종의 많은 사랑을 받은 인물이었다. 1437년(세종 19) 7월, 왕이 동교로 나가 농사 현황을 구경하고 수레를 보제원 북쪽 안암동에 있는 광평대군의 새 집에 멈추었다고 한다. 이는 광평대군이 무안군의 후사가 된 해인데, 후사를 잇게끔 하였음에도 왕이 친히 새 집을 찾아보는 것에서 세종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광평대군은 이곳 안암동 ‘궁말’에서 양부養父 무안군의 사당을 짓고 그 후 7년간을 거처하며 부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영순군 부溥를 두었다. 그러나 1444년(세종 26) 12월, 불행히도 20세의 약관으로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아들 영순군 이후로 자손이 번창하여 왕족 중에서도 후손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이들 후손들은 대대로 무안군을 봉사하며 살았다. 지금도 안암동에서는 광평대군 일가의 주택과 사당이 있던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그 위쪽의 마을을 웃말, 아래쪽의 마을을 아랫말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