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1944.11.03
장소 종교시설
성북구 길음로9길 74(길음동 537)에 위치한 천주교 성당이다. 길음동성당은 원래 미아동성당이었는데, 1982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 1942년에 미아리공소를 설립하여 60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 지역의 천주교세가 확산되었고, 1944년 혜화동성당을 모본당으로 서울에서 8번째로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후 인구의 증가와 교세의 확장에 따라 수유동성당(1967년), 삼양동성당(1968년, 현 미아동성당), 월곡동성당(1968년), 정릉동성당(1968년)을 분할했다. 길음뉴타운의 재개발과 함께 교육관을 재건축하고 본당을 리모델링하여 2010년 염수정 총대리주교의 집전으로 축하 미사를 하였다.
길음동
  • 길음동 성모칠고 성당(2)
  • 길음동 성모칠고 성당(6)
  • 길음동 성모칠고 성당(5)
  • 길음동 성모칠고 성당(4)
  • 길음동 성모칠고 성당(3)
  • 길음동 성모칠고 성당(1)
  • 길음동 성모칠고 성당(7)
  • 길음동성당과 구민정신병원
  • 길음천주교회 전경(2009)
  • 길음1동 천주교성당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미아리본당, 미아리성당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종교시설

시기

주소

  • 주소: 02721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동 537 (길음로9길 74)

근거자료 원문

  • 2) 미아리본당의 설립 초창기 미아리의 신자들이 모이던 곳은 정금성(암브로시오)의 집(현 길음동 537번지)이었다. 비록 정식 공소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이곳을 신앙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본당의 싱거 신부는 장차 이곳 부근에 하나의 본당을 설립할 생각을 갖고 신자들의 도움을 얻어 기금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소 설립은 이후에도 2, 3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곳 신자들이 스스로 공소 經堂을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여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또 매입하기에 적당한 집도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던 중 1942년에 이르러 공소로 쓰기에 적당한 집(정금성 집의 뒷편)이 매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자 싱거 신부는 우선 이곳에 공소를 두기로 결정하고, 본당설립을 위해 모아 두었던 기금으로 그 집을 매입한 뒤 주보(主保 : 수호 성인)를 ‘聖母七苦’로 정하니, 이것이 곧 미아리 공소의 시작이었다. 공소 설립 당시 이곳에 나오는 신자들은 약 60명 정도였다고 한다. 싱거 신부가 이곳의 건물을 매입하고 공소로 설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곳이 장차 서울 북부의 새 신앙 중심지가 될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었고, 장차 이곳에 성당을 건립하여 성모 순례 성당으로 삼고자 한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선 혜화동에 살던 여성신자 김명환(마리아)을 전교 회장으로 임명하고, 이곳으로 이주토록 하여 공소 건물을 돌보도록 하였다. 미아리의 신자들은 공소 설립 후 본격적으로 신앙을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미아리 일대는 물론 정릉·月谷里·長位里 등과 멀리는 수유리·우이리 등까지 신앙이 전파되어 나갔으며, 공소 설립 후 2년여가 지나면서는 이 일대에 약 200명 정도의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신자 수의 증가는 본당의 싱거 신부로 하여금 새 본당 창설의 결정을 앞당기게 해 주었던 것 같다. 싱거 신부의 건의가 있자, 당시 서울교구의 교구장으로 재임하던 盧基南(바오로) 주교는 1945년 5월에 신학교(정식 명칭은 京城天主公敎神學校) 교장으로 있던 申仁植(바오로) 신부를 미아리 공소로 전임시켜 주었다. 이 사실은 바로 미아리 본당 (지금의 길음동 본당) 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로써 미아리 본당은 서울에서 일곱번째로 설립된 본당이 되었으며, 母本堂인 혜화동 본당의 子本堂으로는 1938년에 설립된 제기동 본당에 이어 두 번째가 되었다. 설립 당시 이 본당의 관할구역은 지금의 성북구 대부분과 도봉구 지역으로, 멀리는 의정부 경계 지역까지를 사목 관할구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당의 敎籍에 나타난 신자 수는 모두 280명 가량이었고, 미사에 참여하는 수는 많을 때가 60∼70명 정도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09-610쪽
  • 3) 본당의 확대와 부할 미아리 본당은 이후 이 지역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설립 초기에는 제대로 된 성당 건물도 없었으므로 신자들은 두 차례나 성당을 옮겨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신자들에게는 새 聖堂건립이 언제나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었다. 이곳 신자들이 새 성당을 건립한 것은 그후 6·25사변을 겪고 난 뒤인 1958년이었다. 1955년에 이미 신자 수 494명을 기록할 정도로 교세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 성당 건립이 급박해졌고, 이에 신자들은 1957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년 만에 성당을 완공하고 그 축성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이 지역 일대는 서울시로 편입되어 신설된 성북구 지역이 되어 있었으며 주민 수가 증가하면서 천주교 신자들도 여기 저기에 산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본당 신설이 요구되고 있었는데,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돈암동본당의 설립이었다. 돈암동 본당은 다른 경우와 달리 1955년 10월 18일 성당의 건립과 동시에 본당이 이루어지고, 아울러 신부가 파견된 특이한 경우였다. 아마도 그 이유는 성골롬바노전교회에서 성당을 건립하고, 그 초대 신부로 동 전교회의 도슨 (Rev. Patrick Dawson, 孫) 신부를 임명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설립 당시 이 본당은 혜화동 본당으로부터 三仙洞·安岩洞·普門洞과 돈암동 일대를 관할구역으로 인계받았으므로 신자 수가 이미 900여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후 성북구 지역에는 오랫동안 새 본당이 설립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60년대에 들어 곳곳에 새 주택 단지가 조성되고 도로가 신설되면서 미아동 본당의 교세는 급격히 확대되어 1967년 말에 이르러 총 2,952세대에 8,333명의 신자 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울대교구에서는 이해 4월에 미아동 본당으로부터 수유동 본당을 분리 독립시켜 지금의 도봉구 일대를 사목하도록 하였고, 이어 다음해에도 다시 여러 본당을 분리하였다. 미아리 본당의 분할 계획에 따라 신설된 본당들은 1968년 10월 18일자로 인가된 성북구의 長位洞本堂, 10월 24일자로 인가된 貞陵本堂, 月谷洞 本堂, 도봉구의 三陽洞 本堂(지금의 미아 3동) 등이었다. 이에 따라 성북구 지역에는 모두 5개의 본당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중 정릉 본당(초대 신부 : 兪鳳俊, 토마스)의 경우는 1968년 2월에 이미 미아동 본당에서 정릉동 378-6번지에 대지를 구입해 놓은 상태였으며, 본당의 보좌로 있던 李鍾煥(미카엘) 신부가 어곳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드려오던 중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반면에 월곡동 본당(초대 신부 : 李思應, 안토니오)은 대지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신자들은 하월곡동 82번지 소재의 가옥을 전세내어 생활하면서 이웃 9번지(현위치)에 새 대지를 마련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성 골롬바노회에서 사목을 맡게 된 장위동 본당은 신자들이 吳錫根(바오로)을 중심으로 대지를 매입한 뒤, 훗날 초대 신부로 부임한 게라티(Brial. Geraghty, 池) 신부와 함께 개인 집에서 미사를 드려 오던 중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10-612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29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