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집터
1961 - ?
장소 유적
「성북동 비둘기」(1969)를 쓴 시인 김광섭[1905-1977]이 1961년부터 1966년까지 5년 간 거주하였던 성북동의 가옥이 있던 자리이다. 가옥 건물은 1990년대 후반까지 약 40년 간 존재했다가 다세대주택이 들어서게 되면서 철거되었다.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했던 건물로, 3미터 가량의 축대를 쌓고 60여 평의 대지에 지은 2층 기와집이었다. 김광섭 시인 이후에는 어느 은행원이 이 집을 소유했다가 1990년대 당시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이 집에서 30년 이상 거주한 적이 있다(『경향신문』 1996.09.08.). 현재 이 자리에는 2003년에 지어진 빌라가 들어서 있다.
성북동
  • 김광섭 집터 표지석
  • 성북로 10길 일대(김광섭 집터로 올라가는 길)
  • 김광섭 집터(원익스카이빌)
  • 김광섭 집터 표지석과 주변 모습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61 - ?
  • 비고: 1990년대 후반 사라짐

주소

  • 주소: 02835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68-34 (성북로10길 30)
  • 비고: 원익스카이빌

근거자료 원문

  •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바로 이 본격적인 회고의 이전 시대를 읊조리는 이야기이다. 김광섭은 1961년 건축가 김중업에게 부탁한 설계대로 집을 짓고 성북동에서 5년을 거처했다. 그리고 이때의 기억을 후일 시집에 실었던 것이 바로 「성북동 비둘기」였던 셈이다. 성북동에 대한 문인들의 정서는 이렇듯 김광섭에 의해 절묘하게 드러났지만, 그것은 또한 당대 문인들이 성북동을 바라보던 시선이기도 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56쪽
  • 1. 성북동 168-34 그리고 160W 73rd St, New York - 빛나는 노년 2015년 8월, 오래된 엽서 한 장이 신문에 소개되었다. 화가 김환기(1913~1974)가 시인 김광섭(1905~1977)에게 보낸 엽서가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신문에는 엽서의 앞, 뒷면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앞면, 보내는 사람 김환기의 주소는 160W 73rd St, New York. 미국 뉴욕이었다. 받는 사람 김광섭의 주소는 서울 성북동 168-34. 1966년 1월, 뉴욕 맨해튼에 가 있는 김환기가 성북동의 김광섭에게 보낸 엽서였다. 뒷면의 편지글은 김광섭에게 부디 서러워 말고 빨리 건강을 찾아 환희에 찬 싱싱한 시를 써달라는 김환기의 당부였다. 익히 알려진 다른 김환기의 엽서와 달리 아무런 그림이나 장식이 없는데, 이는 얼마 전 김광섭의 모친이 별세한 것을 의식한 까닭이다. 1965년 4월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 같은 해 10월 노모까지 여의는 변고를 당한 시인을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외로우시겠지. 할 말이 없어요. 빨리 일어나셔요. 빨리 건강을 되찾으세요. 그래서 겨울산에도 가고 술집도 찾고 하게요. 나는 기타 하나와 스케이트 한 벌을 사고 싶어 벼르고 있어요. 이런 것으로 무심 해지는 취향을 갖고 싶어요. 나도 빨리 일어나서 허드슨 강가에나 부지런히 나가고 건강해지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참신한 일을 시작하고 싶어요. 부디 서러워 마시고 빨리 건강해지셔서 환희에 찬 싱싱한 시를 써 주십시오. 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왜 돌아가지 못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럼 부디 안녕― 또 쓸게요. 수화(樹話) 배(拜) 1963년 10월, 김환기는 브라질에서 열리는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후 귀국하는 대신 뉴욕행을 선택했다.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예술을 평가 받기 위하여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어나가기 위한 결정이었다. 유학 시절 일본을 오갔던 것을 제외한다면 파리에 이어 두 번째 외국 생활이었다. (뉴욕에서의 생활 이 그의 인생의 종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홍익대 미대 학장이라는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된 지위도 과감히 예술을 위해 포기했다. 경제적 고려는 뒷전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순우(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장)가 미국 록펠러재단에 창작지원금을 알아봐 주었고, 한국에 있던 아내 김향안이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원금을 신청하였다. 승인 절차는 순조로워 김환기는 이듬해 9월부터 1년 간 록펠러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뉴욕에서 방을 얻어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달 뒤 아내가 합류했으나 곧 1년간의 지원금도 끊기게 되자 부부는 경제난에 시달렸다. 김환기는 미국의 화상들에게 그림을 팔기도 했지만 아직 미국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때라 큰 수입을 바랄 순 없었다.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내 김향안이 글쓰기를 비롯해 이일저일을 해가며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나갔다. 캔버스도 구하기 어려워서 신문지와 전화번호부 종이에다 유화를 그린 적도 많았다. 스스로 선택한 고난이었기에 원망도 있을리 없었다. 오직 그는 예술의 부름에 충실했을 뿐이다. 길은 이미 자신의 그림에 맡겨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과 세계 미술계의 흐름을 눈앞에서 감지할 수 있게 된 첨단의 환경에서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주제와 기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랜 고투와 모색이 필요했다. 김환기는 이전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든 구상을 일체 포기하고 전면적인 추상화로 전환했다. 명징하고 세련된 색감은 여전했지만 화가는 그 위에 단순한 점, 선, 면과 같은 추상적인 형태만 그렸다. 김환기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점화點畵’ 들이 뉴욕에 있는 그의 화실을 채워나갔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김광섭 시인이 새로운 모색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김광섭과 김환기, 둘의 인연은 멀리 193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환기가 서울의 문인들과 교분을 트게 된 것은 1938년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있던 문학평론가 이헌구(1905~1982)의 부탁을 받고 함대훈(1906~1949)의 소설집 『폭풍전야』의 표지화를 그려주면서부터다. 김환기는 이헌구를 통해서 서울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게 되었다. 그런데 이헌구의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광섭이었다. 둘은 동갑에 같은 함경북도 출신인데다 김환기도 잠시 다닌 적이 있는 중동학교를 나란히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이헌구는 불문학, 김광섭은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렇게 이헌구라는 다리를 통해 김광섭과 김환기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8년의 나이차를 뛰어넘은 둘의 우정이 평생토록 이어졌음은 앞서 소개한 엽서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1939년 6월에 발행된 김광섭의 대표 시 「마음」이 함께 실렸다. 그림과 시가 하나의 주제 아래 묶인 것은 아니지만 훗날 「저녁에」라는 시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에서 보이는 시인과 화가의 예술적 교류의 싹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광섭과 김환기 둘 다 성북동에 거주한 때가 있긴 했지만 같은 시기 성북동에서 지낸 적은 없다. 김환기가 성북동에 주소지를 둔 것은 1944년부터 1956년까지, 김광섭은 1961년부터 1966 년까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30년을 훌쩍 넘게 이어온 인연이니 만큼 서로 주고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 감상과 격정을 분방하게 표출 하지 않고 논리와 지성의 토대 위에서 절제를 미덕으로 알고 창작활동 을 해나갔다는 점에서 장르는 다르지만 둘의 예술적 지향은 통하는 점이 많았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서로의 작품을 가지고 논한 글이 없어 어떤 근거를 대면서 논할 여지는 없다. 다만 두 사람의 작품과 생활 태도를 접하면서 어렴풋한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광섭의 시와 김환기의 그림은 하나의 숙제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작품은 우리 시대 문학과 미술을 아우르는 미학적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1965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김광섭의 투병 생활은 그의 시작詩作 활동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김광섭이 1956년 6월에 동료 문인들과 힘을 모아 창간한 월간 문학잡지 『자유문학』이 1964년 여름,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76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부족한 재정 때문에 매 호 동분서주, 피눈물을 흘려가며 발간해 온 잡지였다. 그의 50대 정열을 이 잡지에 다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대문학』, 『사상계』 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후배 문인들에게 활동할 공간을 주고, 전후 황폐한 문화 풍토 속에서 우리 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자유문학』. 김광섭에게 ‘한국 현대문학의 건설자’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안겨주기까지 했던 이 잡지의 폐간으로 한동안 그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든 재간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 무렵 김광섭의 유일한 낙은 야구 구경이었다. 술 한 잔 걸치고 동대문야구장을 찾아 야구를 보다 보면 잠깐이나마 시름을 덜 수 있었다. 1965년 4월 22일 그날도 그는 동료 문인과 함께 동대문야구장에 야구 경기를 보러 갔더랬다. 낮부터 마신 술로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타자가 친 공이 높이 뜬 것을 지켜보는 순간이었는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이었다. 메디컬센터(지금의 국립의료원) 의 병상에 있은 지 근 한 달 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차렸다. 죽을 고비는 넘겼으나 집에 돌아온 그는 반신불수의 상태였다. 하지만 아내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움직이고 걷기 연습을 되풀이한 결과, 몸 상태는 점점 호전되어 갔다. 그렇게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던 때 밤마다 떠오른 시상이 있었는데 마침 한국일보의 청탁을 받게 되자 원고지 에 옮겨 쓴 게 바로 「봄」이라는 시다. 꽃은 지난 가을 짧은 해에 어디쯤 갔다가 노루 꼬리만큼씩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은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화원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 뭉치를 풀어서 봄빛을 따라 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고 시냇가로 간다. ― 김광섭, 「봄」 중에서 아마도 그의 집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성북천과 그 너머 산등 성이를 보면서 떠오른 시였을 것이다. 이후 김광섭은 병상에서 하나둘 떠오른 시상을 옮겨 적어 베개맡에 던져두었는데 3년 만에 도합 34편 의 시가 쌓이게 되었다. 새로운 시를 발표할 때마다 동료 문인들의 거짓 없는 칭찬과 격려의 말이 답지했다. 뉴욕에서 보내온 김환기의 응원 엽서에 답하기라도 하듯 이 시기 김광섭은 ‘싱싱한 시’를 쓰고 있었다. 「봄」을 필두로 「생의 감각」, 「산」, 「황혼이 울고 있다」, 「성북동 비둘기」, 「저녁에」 등이 바로 이 시기에 쓴 시들로 모두 1969년에 발간한 네 번째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 실려 있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그의 네 번째 시집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서 시인은 이상과 허무의 고독한 사유자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목소리 드높은 계관시인도 아니다. 그는 자연과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진실에 있으면서 또 가장 일상적인 삶을 사는 평상인 사이에 있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사람과 산과 비둘기가 날로 번창하는 인조물에 밀려 헐벗은 고지대로 쫓겨 가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원 초적인 모습의 인간의 삶이 고귀한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김광섭 씨의 근년의 시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것은 인간이 하나 의 공간적 · 시간적 공동체를 이루며 대지에 산다는 인간의 운명의 고귀함과 신비함에 대한 감각이다. ― 김우창, 「이 달의 시」 중에서 (『동아일보』1974. 12. 18)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다시 대지에 선 시인에 게 이 삶을 이루는 시공간은 전과는 다른 빛으로 다가왔다. 새벽마다 새롭게 시작되는 삶은 신비 그 자체였으며 아무리 흔하고 평범한 사물일지라도 다른 모든 것들과의 깊은 연관 속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회복기의 시인은 온몸으로 느꼈다. 고통 속에서 태어난 시어는 쉽고 차분하면서도 삶과 세계의 진실을 말했으므로 함께 고통 받는 1960년대 모든 한국인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고국에서 병을 이겨내며 ‘싱싱한 시’를 써 나가는 김광섭의 모습 은 뉴욕의 김환기에게 큰 힘이 되었을 법하다. 김광섭에게 엽서로 보내는 위로와 응원은 어찌 보면 자신에게 향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1960년대 후반, 이 시기에 내놓은 김환기의 그림과 김광섭의 시는 각자의 일생일대에 가장 완성도 있는 작품들로 평가 받기에 이른다. 고통이 어떻게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가를 두 원로 예술가들은 작품으로써 당당히 후배 예술가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어쩌면 이 두 예술가들은 굳이 말년의 걸작들을 내놓지 않았더라도, 이미 이루어놓은 업적으로만 점수를 매겨도 한국 미술사와 문학사에서 충분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역경을 밑거름 삼아 기어이 자신의 전작들을 뛰어 넘는 새롭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성과들은 고스란히 후배 시인, 화가들의 예술적 자양분이자 넘어서야 할 숙제로 남겨졌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46-255쪽
  • 우리 문학유산을 찾아 (20) 김광섭 시인의 서울 성북동 옛집 1920년 서울 중앙고보에 들어간 뒤 그의 생활은 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일본 와세다대(1926~32) 유학시절을 제외하고 평생동안 생활해온 서울은 제 2의 고향을 넘어선 삶의 터전이었다. 건축가 김중업씨가 설계 1946년 식구들과 함께 경성을 떠나 서울 운니동으로 이사 온 이산은 이후 산림동, 주교동, 동소문동, 돈암동, 성북동, 미아동, 중화동 등 서울의 중심지와 변두리를 전전하며 굴곡진 서울에서의 삶을 보낸다. 미군정청 공무국장, 초대대통령 공보비서관, 대한신문 사장, 경희대교수 등 화려한 사회활동과는 달리 온전한 거처를 확보하지 못한 채 서울 곳곳을 거쳐간 이산의 자취는 그가 떠난 지 20년이 된 오늘에는 거의 찾을 길이 없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의 34. 60년대 5년여 동안 살았던 이곳은 이산이 거쳐간 많은 주소지 가운데 유일하게 그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성북동 쪽으로 500여m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우측에 동구여상 입구 팻말이 보인다. 동구여상 길을 따라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빌라, 연립 등이 늘어서 있고 많은 주택들 사이에 숲에 둘러싸여 있는 2층 벽돌집이 올연히 자태를 드러낸다. 이웃의 주택들 사이에 숲에 둘러싸여 있는 2층 벽돌집이 올연히 자태를 드러낸다. 이웃의 주택들과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가정집. 그러나 이 집이 30여 년 전 주옥같은 시들을 토해낸 창작의 산실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2남 2녀를 둔 이산은 커가는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말년 생활을 위해 1961년 성북동 산기슭에 집터를 사들이고 새집을 올린다. 당대의 유명건축가 김중업씨의 설계에 따라 3m 가량의 축대를 쌓고 60여 평의 대지에 지은 2층 기와집은 40년 가까운 세월에도 단아한 건축미를 간직하고 있다. 집주인 허봉희(許鳳姬)씨(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책임연구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이산의 옛집은 정원에 나무와 화초가 가득하다. 향나무, 매와, 모과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개나리 등이 숲을 이루고 그 아래에는 옥잠화, 작약, 수국, 바위취, 맹문동이 등 화초가 각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학관으로 활용했으면… "은행에 다니는 사람으로부터 집을 샀는데 이사오면서 이산선생이 손수지은 집이라고 들었습니다. 존경하는 시인이 살았던 집이라 되도록 그대로 보존하려고 애썼습니다" 30년째 살고 있다는 허씨는 “이산선생께서 생전에 찾아와 정원에서 사진을 찍고 가기도 했다"며 "유족이 이 집을 구입해 문학관 등으로 활용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 집은 「성북동 비둘기」 이외에도 「서울 크리스마스」, 「산」, 「겨울산」, 「우정」, 「병」 등 이산의 대표시들의 산실이 되었다. 당시 「성북동 비둘기」에 나타난 채석장 인근의 산1번지는 이제 주거지로 변해 더 이상 비둘기는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목도했던 서민들의 고달픈 삶은 산동네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경향신문 1996.09.08 기사(기획/연재)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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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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