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 김황용(성북동 주민자치위원장)
1. 인터뷰 개요
○ 피면담자
- 성 명 : 김황용
- 주소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직위(직업) : 성북동 주민자치위원장(식당 운영)
○ 면담자 : 박수진(성북문화원 향토사연구팀장)
○ 면담 일시 : 2016. 6. 16.
○ 면담 장소 : 강촌쌈밥 식당
2. 인터뷰 내용
·김 : 내소사… 자랑스럽죠. 성북동에 오게 된 계기 같은 거는 사실 이 대원각 위에 삼청각이 있었어요. 삼청각에 저의 친척이 근무하게 됐어요. 그 관계 때문에 제가 처음엔 삼청각에 몸을 담게 되었어요. 잘 아시겠지만 삼청각이랑 대원각하고는 경영자들이 서로 자매간이었어요. 그래서 잠시 귀향해서 학교 좀 다니고 있다가 또 어떤 계기로 해서 친척이 이쪽으로 오라 해서 대원각에 오게 되었죠.
·박 : 선생님 처음 삼청각 올라오셨을 때가 연세가 어떻게 되었는지요?
·김 : 제가 한 78년 정도? 그때 올라왔죠. 그래가지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나고 그때 내려갔죠. 원래 대원각은 요정이었는데 80년대 들어서부터 일반 대중음식점으로 전환되었죠.
·박 : 그럼 대원각은 12.12사태 이후에 대중음식점이 되었나요?
·김 : 그렇죠. 저는 거기서 중간 간부로 일을 하다가 지배인을 하고 또 대원각에서 평택에다가 큰 사업체를 운영해서 저는 그쪽에 가서 일도 했었고요. 대원각에는 하루에 보통 한 500명 정도 왔어요.
음… 손님은 그 정도고 정치인들도 꽤 왔었죠.
·박 : 정치인들이요?
·김 : 예 정치인들.
·박 : 요정이 대중음식점으로 바뀌었어도 많이 오셨나요?
·김 : 대원각이 대중음식점으로 바뀐 이후에도 많이 왔죠. 장차관이나 국회의원 이런 분들도 여기서 모임을 많이 가졌습니다. 외국인들이 많이 오셨고요.
·박 : 외국인은 주로 일본 사람들이 많이 왔나요?
·김 : 그렇진 않았어요. 일본 사람들이 온 것은 80년대 이전에 요정할 때에 일본에 ‘기생관광단(?)’ 이런 사람들이 많이 왔었죠. 그리고 대중음식점으로 바뀌고 나서는… 어쩌면 우리 대원 갈비집이 강남에 대원 갈비집의 원조라고 보면 돼요. 삼원가든 데에서는 여기에서 나한테 교육 받은 아이들을 환영했지. 여기 출신이라고 하면….
·박 : 아… 여기서 배우고 나간 사람들이 많나요?
·김 : 여기서 교육을 확실하게 시켰거든. 일본식으로 하는 서비스 그거를. 여기서 제일 크게 했었죠. 그리고 이경자 씨라고 옛날 유명했었죠. 외화밀반출사건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유명했었죠. 그래서 여기 검찰도 들이닥치고 했습니다. 당시 대원각 경영자 이경자 씨는 임차인이었어요. 김영한 여사 그분 소유였고요.
·박 : 아, 소유는 김영한 여사, 운영은 이경자 씨가 하셨군요.
·김 : 그렇죠. 장기 임대로 했죠. 그리고 우리는 소유자 김영한 씨나, 경영자 이경자 씨를 통칭 ‘사모님’이라 했단 말이죠. 이경자 씨 남편은 뭐냐 옛날에 중정 고위 간부였었고.
·박 : 아, 중정간부…
·김 : 그래서 봐 주는 것도 많았죠. 김영한 씨는 생전에 여기서 많이 봤어요. 그분이 처음엔 대원각을 팔려고 했었어요. 그것 때문에 이경자 씨하고 다툼도 많았었고.
·박 : 아, 그것 때문에.
·김 : 그리고 그때 손님들이 유독 많았고 심지어는 그때 당시 저도 북한에서 온 간부급들도 처음 접해 봤어요. 여기 와서 제일 큰 연회장에서 ‘아리랑’을 손잡고 같이 부르고 했어요. 그런 기억이 나네요.
·박 : 그럼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북한 손님들인가요?
·김 : 그렇죠. 저로서는. 그게 아마 88올림픽 이전이었던 것 같아요.
·박 : 그럼 북한 사람들이 몰래 초청되어서 온 건가요?
·김 : 몰래 오진 않았구요. 공식적인 루트로 왔을 거예요. 그리고 길상사에 남아 있는 건물 가운데 소개해주고 싶은 건물은 그 거기 현재 지금 본당. 거기에서 내가 거기서 아이들(종업원들)을 가르쳤어요.
·박 : 아~ 거기서.
·김 : 예. 본당 거기서. 그리고 또 그 앞에 공터가 당시에 주차장이었지만 밖에서 조회 같은 걸 할 때에는 모여서 걷는 연습이라던가 라인 쳐 놓고 하곤 했었죠.
·박 : 운동장 같이 그렇게 활용했었나 보네요.
·김 : 그렇죠. 그렇게 거기서 족구도 하고 배드민턴하고 체육대회도 하고 그랬어죠. 연병장 식으로 활용했었어요. 그리고 들어가다 보면 좌측에 오래된 기와 건물이 있어요. 계곡 옆에. 그게 그때 당시에 ‘난실’이라고 했는데 그때 내가 거기서 잠도 자고 그랬어요. 거기서 몇몇 아이들(종업원들)공부도 가르치고. 그때 그 자리는 주로 당시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이 오면 그 방을 꼭 드렸었지. 또 본당 위에 옛날엔 연못이 있었는데 그게 없어졌을 거에요. 그 위로 올라가면 좌측으로 특실이 있었는데 거의 10여명 정도 들어갈 수 있었어요. VIP들 오면 그 방으로 모시고 했었습니다.
·박 : 그때에도 셔틀버스 같은 게 있었나요?
·김 : 아, 우리 셔틀운행 했었죠. 한동안은 칠순, 팔순 심지어는 회갑잔치까지도 한창 유행 했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그런 연회를 하면 뭐 연예인이 와서 사회도 보고 뭐 우리가 좀 봐 주기도 했었죠. 여기서 가다보면 큰 길이라 해서 무슨 큰 연회장 150명 200명씩 들어가는 거기서 주로 행사가 있었죠.
·박 : 궁금한게 당시 음식값이 뭐 저렴하진 않았을 것 같고, 고급 음식점이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김 :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었어요. 일반보다는 비싼건데, 한정식도 값이 이제 상중 정도라고 할까? 당시에는 두당 3만 5천원에서 2만 5천원정도였고… 이 집안은 갈비, 등심 이런 것도 시중보다는 조금 비싼 편이었죠. 그래도 워낙 운치 있고 이러니까 주로 기업인들이 비즈니스하러 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박 : 아, 접대 같은 거군요.
·김 : 응. 그렇지. 다 그런 거죠 뭐. 무역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엔 외국인들 많이 데려오고. 여기가 최고였지 뭐. 시내 가깝고 특히 여기 현대 같은데 너무 가깝죠. 현대, 삼성이 많이 왔죠. 그리고 그때만 해도 이 성북동은, 지금도 그렇지만 고전적인 분위기가 있고 해서 손님들을 많이 데려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