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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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의 이름이다.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여진인이 한양으로 들어올 때 이용했던 길이어서 ‘되너미고개’라고 불렸는데, 순우리말인 '되너미'를 한자 소리를 따서 표기한 것이 돈암(敦岩)이었고, 돈암현으로 불리다가 동네 이름이 돈암동이 되었다고 전한다. 돈암동은 일제강점기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1930년대부터 도시계획 아래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인구가 유입되고 정비되었다. 해방 후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편입되었는데, 돈암동 지역이 넓어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돈암동으로 분리되었다. 현재 미아리고개와 아리랑고개 주변 지역이 돈암 1․2동을 이루고 있다.
돈암동
  • 돈암육교(미아리고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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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암육교(미아리고개)(3)
  • 돈암육교(미아리고개)(2)
  • 돈암동 현대아파트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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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음동, 돈암동 전경
  • 길음동, 돈암동 모습
  • 돈암동, 미아리 간 도로확장공사 기공식(8)
  • 길음, 돈암, 정릉동 야경
  • 흥천사 내부 경관(4)
  • 흥천사 경관
  • 미아리고개 미아리하늘다리
  • 미아리고개 풍경(6)
  • 미아리고개 풍경(5)
  • 돈암정릉 주택재개발정비구역(2)
  • 돈암정릉 주택재개발정비구역(1)
  • 혜화문 밖 삼선동, 돈암동 모습(1884)
  • 1930년대 말 삼선교와 돈암리 일대 모습
  • 4월 1일부터 개경성될 신구역 타진순례(2), 청량리 왕십리의 연락도로, 도로개수가 급선무
  • 돈암동 일대(현 길음역 건너편)
  • 돈암1동 현대아파트 앞 청소
  • 태풍피해를 입은 신흥사(현 흥천사) 입구 언덕길
  • 돈암정릉 주택재개발정비구역(3)
  • 돈암육교(미아리고개)(1)
  • 길음교 보수공사 현장(7)
  • 길음교 보수공사 현장(6)
  • 길음교 보수공사 현장(5)
  • 길음교 보수공사 현장(4)
  • 길음교 보수공사 현장(3)
  • 길음교 보수공사 현장(2)
  • 길음교 보수공사 현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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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월곡동, 돈암동 일대(2)
  • 하월곡동, 돈암동 일대(1)
  • 돈암육교(미아리고개)(4)
  • 돈암육교(미아리고개)(3)
  • 돈암육교(미아리고개)(2)
  • 현 돈암초 앞(1979)
  • 1980년대 돈암1동 재개발 전후 모습
  • 내부순환로와 길음동, 돈암동 일대
  • 고명정보상업고등학교(현 고명경영고등학교)에서 본 개운산
  • 돈암동 설경
  • 동소문재개발 수해예방대책(3)
  • 동소문재개발 수해예방대책(2)
  • 동소문동 주택 철거후 전경
  • 아리랑시네센터 주변 돈암2동 모습
  • 돈암사거리 모습
  • 동선, 돈암동의 전경
  • 돈암사거리 주변 야경
  • 돈암2-2지구 전경(2)
  • 돈암사거리
  • 월곡.미아 균형발전촉진지구1
  • 돈암삼성아파트 건설 현장(1)
  • 돈암삼성아파트 건설 현장(2)
  • 돈암삼성아파트 건설 현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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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음동 기린빌딩에서 본 길음역 일대
  • 돈암동 재개발지구 건설 현장
  • 돈암동 재개발지구 아파트 준공
  • 돈암동 재개발지구(1996)
  • 돈암현대아파트와 재개발 현장(2)
  • 돈암현대아파트와 재개발 현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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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아리고개 (2010)
  • 돈암삼성아파트 건설 현장(8)
  • 돈암삼성아파트 건설 현장(7)
  • 돈암삼성아파트 건설 현장(6)
  • 돈암삼성아파트 건설 현장(5)
  • 월곡. 미아 균형발전촉진지구2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敦岩洞
  • 이명칭: 되너미고개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
  • 비고: 1946.10.01 이후 돈암동으로 명칭 변경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근거자료 원문

  • 동소문 밖은 조선시대 이래 도성 외의 구역으로 성저십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도성 인근지역으로 도성에서 필요한 채소와 쌀 등 생필품을 공급하던 곳이었다. 1910년대 이전의 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913년에 ‘돈암리 주재소(신설)’이라는 기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14년 부제 실시로 인해 동소문 밖 지역은 새로 신설된 고양군 숭인면에 속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경성부는 식민통치기관을 건설하기 위해 건축자재가 필요했다. 건축자재를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 전국에 채석장을 운영하게 되는데, 개인이 운영하는 채석장과 경성부에서 운영하는 채석장이 있었다. 동대문구의 창신동 채석장은 경성부에서 운영하는 채석장이 있었고, 숭인동 채석장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채석장이 있었다. 이에 못지않게 돈암리 부근에 네 개의 채석장이 있었다. 지리적으로 도성과 가까운 곳에 질이 좋은 화강암을 얻을 수 있는 이곳을 경성부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여기에서 캐낸 돌들은 조선총독부 공사와 조선신사건설, 경성토목출장소 그리고 기타 필요한곳에 사용되어져 왔다. 지금의 정덕초등학교 근처인 일명 ‘돈암채석장’, 미아동 산75(인수동 633)번지 ‘국도채석장’이 있었다. 채석장 인근을 제외하고는 자연촌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큰 촌락보다는 작은 단위의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무엇보다 돈암리 인근 4개, 종암리 1개의 채석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주거지로서의 기능은 미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본격적인 인구증가는 1930년대 후반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동대문 밖 돈암리 부근에는 네 군데의 채석장이 있어 날마다 폭발약으로 경찰서에서 말리기전에 스스로 그 부근에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더라. 바위를 깨뜨리는 중 요사이 버섯을 따러 오는 사람이 부근으로 모여들어 매우 위험한 때가 많으므로 소관 동대문서에서는 부근을 경계하는 중인데 일반도경 (『동아일보』 1923.9.26.) 1920년대에 사대문 안의 경성부민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자 땅값과 집세가 오르게 되었고 사람들은 교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1920년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문화주택 건설의 붐도 한 몫 하였다. 동대문이나 서대문 밖으로 주택이 새로 지어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교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교외 지역의 주택수요 증가는 곧 경성부 밖으로 진출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집이 비어있는 이른바 ‘공가현상空家現狀’이 뚜렷해지기도 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68-69쪽
  • 삼선동 동쪽으로 산비탈에 위치한 동리가 敦岩洞인데, 이곳 역시 조선시대 崇信坊에 속한 성저십리 지역이었다. 돈암동 명칭의 유래가 된 미아리 고개는 본래 되너미고개로 불리웠는데, 丙子胡亂때 오랑캐, 즉 되놈이 서울에 침입할 때 이 고개를 넘어왔기 때문이라 한다. 되너미고개 이름을 한자로 敦岩峴 또는 狄踰嶺이라 하였으며, 그리하여 동리 이름도 돈암동이라 하였다. 이 고개는 여러차례 깎여져 낮아지고 그 폭도 넓어졌지만 본래는 몹시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였었다 지형적으로 볼 때 도성의 범위가 이곳까지임을 분명히 느끼게 하는데, 도성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자면 이 고개가 마지막 힘든 장애물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평탄하여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 고개라는 뜻으로 또는 경사가 몹시 심하여 밥을 되먹는 고개라하여 되너미고개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고개를 넘는 길은 도성과 경원가도를 잇는 가까운 길이어서, 사람들은 비교적 평탄한 鍾岩洞 쪽보다는 이 길을 잘 이용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1-392쪽
  • 敦岩洞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에 걸쳐서 高地帶에 위치한 敦岩洞은 되너미고개, 즉 敦岩峴이란 고개이름에서 洞名이 유래되었다. 되너미고개는 병자호란 때 오랑캐, 즉 되놈이 서울에 침입할 때 넘어왔으므로 되너미재 또는 한자로 狄踰峴이라고 칭하였다. 그 외에도 의정부까지 가는데 마지막 고개라는 뜻에서 되너미, 전일에 고개가 높았으므로 이 고개에서 밥을 되먹는 고개라고 하던 것이 敦岩峴이라 하다가 미아리고개로 불리우게 되었다. 돈암동은 조선초부터 한성부에 속하였는데 조선말 甲午改革 때 漢城府 東署 崇信坊(城外) 東門外契 敦岩里 로 호칭했다. 한일합방 후 日帝는 1911년 4월 1일(京畿道令 제3호) 경기도 京城府 崇信面 敦岩里로 하고, 1914년 4월 1일(京畿道令 제1호) 경성부 축소 때 京畿道 高陽郡 崇仁面 敦岩里라 하였다. 그 후 1936년 4월 1일(總督府令 제8호) 京城府 확장 때 편입되어 京城府 敦岩町이라 하였다. 1943년 6월 10일 東大門區에 속했으나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敦岩町은 敦岩洞으로 바뀌고 1949년 8월 15일 城北區에 속하면서 그 지역이 넓었으므로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으로 分洞됨으로써 현재와 같이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에 걸친 山麓의 대부분 지역만 敦岩洞으로 되었다. 돈암동의 史蹟으로는 興天寺, 또는 새절, 新興寺가 있다. 원래 이 절은 조선초에 덕수궁 부근에 세워져 있었던 것을 정조 18년(1794) 9월에 이곳에 이전해 왔다. 興天寺는 太祖紀康氏가 묻힌 貞陵의 願刹로서 170間 규모의 曹溪宗 本山으로 승려 120여명이 거처했다. 貞陵이 정릉동으로 이전된 후에는 관청 건물로 사용되었다가 中宗 5년(1510) 에 中學의 유생들이 放火해서 소실되었다. 조선말 高宗 2년(1865) 에 홍선대원군이 이 절을 重建하고 신홍사라는 이름을 고쳐 興天寺라는 휘호를 써 주었다. 그리고 태조는 신덕왕후 康氏 소생 慶順公主가 王子의 난으로 남편 李濟가 살해되자 공주를 삭발시켜 홍천사의 중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신흥사는 寺刹보다 그 밑의 宴會場이 밀집해 있어 서울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현재 돈암동 지역은 돈암동 제1동사무소, 돈암 제2동사무소 그리고 동소문동사무소가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80-781쪽
  •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며 경성부는 서울시로 개칭되고 경기도 관할에서 벗어나 수도로서 예전 지위를 되찾았다. 돈암정이라는 일본식 동명도 돈암동으로 바뀌었다. 1949년에는 돈암동과 안암동, 숭인면 일부 등을 합쳐 성북구를 신설하면서 행정구역상 성북구 돈암동이 되었다. 이때까지 돈암동은 동소문 밖에서 미아리고개 일대를 일컫던 지명으로 현재의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이 모두 속한 매우 넓은 구역이었다.
  • 1955년에 들어「동洞설치조례」가 발표되며 여러 동이 연합되어 있던 동회 및 동연합체가 해체되고 돈암동에서는 동소문동, 삼선1~3동, 동선동, 남선동, 서선동, 북선동, 정화동이 분리되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구획이 변경되었고 현재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에 걸친 산기슭에 걸쳐 있는 돈암동(1,2동)에 속해 있다.
  • 그맘때 시골에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형님의 처남이 돈암동에 새집을 짓고 살았다. 돈암동은 시골사람 천지였다. 벌판에 자꾸 집이 들어서고 시골의 조그만 부자들이 몰려들었다. 고향에서 일본 사람과 못 사귀어 쫓겨 오는 사람들이다. 최남백,「식민지」동아일보 1971.04.22
  • 되너미골, 되너미재에서 유래된 돈암동 성북구의 중심동이라 하면 돈암동이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로 돈암동은 중심 시가지로서 자리 잡고 있다. 돈암동의 한자명은 도타울 돈(敦) 자와 바위 암(岩) 자이다. 오늘날 돈암동의 잘 정비된 도로와 번화한 거리를 생각해보면 현재의 모습과 상당히 거리가 먼 뜻의 한자임을 알 수 있다. 돈암동은 동쪽의 안암동 산자락과 서쪽의 삼선동 산자락 사이에 위치해있는 긴 골짜기 지형으로 예로부터 절이나 신당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돈암동 명칭의 유래가 된 미아리 고개는 병자호란 당시 오랑캐, 즉 되놈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에 침입해왔기 때문에 되너미고개, 되너미재라고 불렸다고 한다. 한자로는 돈암현(敦岩峴), 적유현(狄踰峴)이라고 칭하였는데 이것이 동리이름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의 미아리 고개는 여러 차례 깎여져 낮아지고 그 폭도 넓어졌지만 본래는 몹시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였다. 도성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갈 경우, 이 고개가 마지막 장애물이었는데,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 고개’로서 경사가 몹시 심하여 밥을 되먹는 고개라 하여 되너미 고개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처럼 험준함에도 불구하고 이 고개를 넘는 길이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 역할을 한 경원가도(京元街道)와 도성을 잇는 가까운 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교적 평탄한 종암동 방면의 길보다 이 길을 선호했다. 조선시대의 서울은 좁은 의미로는 도성 안을 일컫지만, 넓은 의미로는 성 밖 10리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 지역을 성저십리, 성저오리라고 불렀는데, 성북의 다른 동리(洞里)와 마찬가지로 돈암동 또한 성저십리 지역으로서 한성부 성 외곽 지역인 숭신방에 속해 있었다. 이것을 조선 말 갑오개혁 때 한성부 동서숭신방 동문외계 돈암리로 호칭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1911년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돈암리로 하였다가, 1914년 경성부 축소 당시 경기도 고흥군 승인면 돈암리로 바꾸었다. 이후 1936년 경성부 확장 때 편입되어 일본식 동명으로 돈암정이라 칭하였고,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광복 후 1946년에 돈암정은 일본식 동명을 버리고 돈암동으로 바뀌었다. 1949년 8월 15일에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돈암동은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의 돈암동은 지금과 달리 성북구에서 꽤 넓은 지역을 포함한 동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 돈암동의 인구가 급증하여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으로 분동되면서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에 걸친 산록의 지역이 현재와 같이 돈암동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돈암리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새로운 거주지로 부상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인구 증가에는 도시빈민인 토막민의 유입이 크게 작용하였다. 여기서 토막이란 토굴과 더불어 일제하 식민지시대에 형성된 도시 슬럼의 주거형태다. 이는 경술국치 이후에 실시된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시행과정에서 농경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하여 형성된 것이었다. 특히 홍제정, 신당정과 함께 돈암정은 고지대 구릉지에 위치한 전형적인 도시 변두리 빈민주거지로서 경성부의 토막촌이 대규모로 분포했던 지역이었다. 토막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4년 당국은 일본 정토종 개교원이 개설한 사회사업단체인 화광교원에 보조금을 주어 토막민을 수용하려 하였다. 당초에 약 1000호 정도를 수용하려 하였으나 토지가 급경사인 관계로 500호 정도의 토막민밖에 수용하지 못했다. 토막민들은 1942년을 기점으로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치루면서 본토의 노동력이 급속히 감소하였다. 그러자 서울시에 산재하고 있던 토막민들을 강제로 붙잡아서 북해도 등지의 철도, 토목 공사장으로 파송하였다. 당시의 정확한 통계가 없어 그 수를 헤아릴 순 없지만 적지 않은 숫자가 이때 북해도나 사할린 등지로 강제파송되었다고 한다. 강제파송이 시작되자 많은 토막민들은 토막을 부수거나 그대로 남겨둔 채, 가족과 함께 시내의 셋방으로, 고향으로, 만주 등지로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8.15 광복 당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도시에 토막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 〈敦岩第1洞〉 敦岩 第1洞은 高明中·商業高等學校와 「미아로」 서쪽 敦岩洞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명칭이다. 돈암제1동사무소 관할구역은 일제때인 1936년 4월 1일 경성부에 편입된 후 東仙北部町會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東仙北部洞會로 바뀌고 이어서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 「洞制」실시 때는 北仙洞事務所관할구역이었다. 이 당시 北仙洞事務所관할구역은 敦岩洞 중 敦岩峴 以東의 지역이었다. 그 뒤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 法定洞과 동사무소 명칭을 일치시키면서 여러개로 분할되었을 때 행정구역 명칭에 1, 2, 3의 숫자를 붙였으므로 北仙洞事務所는 敦岩第1洞, 貞和洞事務所는 敦岩第2洞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이 洞관내에는 남북으로 「미아로」(돈암동∼길음동∼미아삼거리)가 지나고 있고, 북쪽에는 貞陵川을 복개해서 도로로 사용하는 「정릉길」(북악터널∼길음교∼월암교)이 지나고 있다, 미아리고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洞일대는 6·25동란 직후인 6월 27일 오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북한 공산군의 침입으로부터 서울 死守를 위해 한국군이 배치되어 戰線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6월 27일 밤에 폭우를 뚫고 공산군의 탱크 10여대가 넘어오자 한국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포격과 집중사격을 가했지만 6월 28일 새벽 1시에 미아리고개를 돌파당해 서울 死守에 실패했다. 미아리고개 서쪽에는 1950년에 商業高等學校(돈암동 45-88) 가 있고 그 옆에는 이 학원에서 1963년 세운 梅園國民學校가 있으며 「정릉길」 변에는 서라벌중고등학교(돈암동 7번지)가 있다. 이 학교는 1956년에 후암동에서 이전해 왔는데 전일에는 이 곳에 서라별예술대학이 자리했으나 中央大學校에 병합되었다. 현재 「정릉길」 주변은 아파트가 계속 세워지고 있다. 여기서 광복 당시부터 1990년까지의 돈암제1동사무소의 현황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782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81-782쪽
  • 〈敦岩 第2洞〉 敦岩 第2洞은 아리랑고개 동서편 山麓의 敦岩洞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명칭이다. 이 지역은 日帝때인 1936년 4월 1일 京城府에 편입된 후 貞和町會가 설치되었으며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貞和町會로 바뀌고 이어서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 「洞制」실시 때 貞和同會의 관할구역은 돈암동 중 西仙洞 경계선 以北의 지역으로 정해졌다. 그 뒤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 敦岩第2洞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洞관내에는 1965년에 설립된 友村國民學校(돈암동 606-490)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광복 당시부터 1990년까지 돈암제2동사무소의 현황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782쪽 표 참조).
  • 돈암동은 지금의 미아리고개를 조선시대 야인(되놈)들이 동소문을 이용하여 도성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되너미고개(적유현)라 부르고, 이것을 한자로 돈암현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미아리 고개는 본래 몹시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였다. 그래서 도성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자면 이 고개가 마지막 힘든 장애물이었고, 경사가 몹시 심하여 밥을 되먹는 고개라 하여 '되너미고개'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험준한 미아리고개인데도 불구하고 이 고개를 넘는 길이 도성과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 역할을 한 경원가도를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기 매눈에 사람들은 비교적 평탄한 종암동 쪽보다는 이길을 더 잘 이용하였다. 성북의 다른 동리와 마찬가지로 돈암동 또한 조선시대 성저십리 지역으로 한성부 성외곽 지역인 숭신방에 속했다. 돈암동 일대가 서우르이 신시가지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36년 경성부 최초의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영등포와 더불어 돈암동지구가 선정되었던 것에서부터 비롯한다. 1946년에 돈암정은 일본식 동명을 버리고 돈암동으로 바뀌었다. 1949년 8월 15일 성북구를 신설함으로써 돈암동은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돈암동은 지금과 달리 성북구에서 꽤 넓은 지역을 포함한 동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돈암동 안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와 같이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에 걸친 산록의 대부분의 지역이 돈암동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성북문화원, 2016, 성북문화 제4호, 294-295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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