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장
1939
국가등록문화재
장소 유적
유물 건축물
성북구 동소문로3길 84(동소문동4가 103-3)에 위치한 주택의 옛 이름이다. 원래 조선시대 의료기관인 동활인서가 있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송성진의 의뢰로 대목장(大木匠) 배희한이 돈암장을 지었다. 쇠못을 전혀 쓰지 않고 나무를 짜서 지었으며 3채의 건물과 700평에 이르는 정원이 조화를 이룬 빼어난 주택이다. 해방 후에는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었던 장진영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에게 2채를 빌려주어 2년간 거주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의 거처로 널리 알려졌다. 돈암장은 주인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증축과 개축으로 원형을 잃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역사적 현장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목조 팔작지붕의 한옥 본채 한 동은 2004년 등록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되었다.
성북동
  • 돈암장(1)
  • 돈암장 측면
  • 돈암장 출구
  • 돈암장 좌전경
  • 돈암장 정원(1)
  • 돈암장 입구2
  • 돈암장 입구1
  • 돈암장 우전경
  • 돈암장 뒷편
  • 돈암장 대문 측면
  • 돈암장 대문
  • 돈암장/대청
  • 돈암장/배면
  • 돈암장/정면
  • 돈암장/전경
  • 돈암장(3)
  • 돈암장(2)
  • 돈암장(4)
  • 돈암장(5)
  • 돈암장 정원(2)
  • 돈암장 회의(敦岩莊會議)
  • 돈암장(敦岩莊) 경비대 해산
  • 공위(共委) 재개(再開)와 보선(普選) 앞두고 돈암(敦岩), 죽첨장(竹添莊) 긴장(緊張)
  • 이박사숙소(李博士宿所), 돈암정(敦岩町)으로 이거(移居)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敦岩莊
  • 이명칭: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   유물 건축물

시기

주소

  • 주소: 02832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3 (동소문로3길 84)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삼선중학교 아래에 위치한 이 청기와집은 돈암동에 있다 하여 ‘돈암장’이라 하는데, 광복 직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대통령이 2년 간 머물렀던 곳이다. 2004년 9월 4일자로 등록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되었다. 돈암장 자리에는 원래 조선시대의 빈민 환자, 주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국립의료기관인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었다. 활인서는 고려 때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의 후신이었다. 태종대에는 활인원(活人院)이라 하였고, 세조12년(1466)에 활인서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활인서는 임진왜란 때 폐지되었다가 광해군 4년(1662)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그 사업은 혜민서와 통합되어 이어졌고 다시 제중원, 대한적십자병원에 계승되었다. 동활인서는 조선 전기에 동소문 밖 연희방, 현재 이곳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조선 말 순조 때 저술한 『한경지략』에는 동활인서는 쇠퇴해서 폐지하였다고 하였고, 김정호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중구 신당동으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조선 후기 정조 때에 중구 신당동 236번지, 304번지 일대로 이전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동활인서 터에는 일제강점기 때 평산(平山)목장이 자리 잡아 젖소 등을 길렀는데, 이송래가 이곳에 청기와로 기와집을 짓고 이를 소유하였다. 광복 직후 이승만 박사는 설산 장덕수 선생의 권유로 이곳에 머물렀다. 이승만 박사가 돈암장에 머문 2년 동안은 미군정기의 혼란한 시기여서 각종 사건이 일어났다. 그 중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자 우익 정치인들이 이 집에 모여 좌익계열의 찬탁(贊託)에 맞서 반탁(反託)운동을 전개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돈암장의 모습. 현재는 개인 소유로 들어가 볼 수 없다.
  • 돈암장은 1939년 조선 후기 내시 송성진이 지은 집으로 대목장 배희한(무형문화재 제74호)이 책임목수로 참여하였다. 안채와 행랑채, 양옥 건물 세 채가 있었는데, 마당 안쪽으로 노송老松과 잣나무, 전통 석물이 어우러진 집이었다. 쇠못을 전혀 쓰지 않은 짜임의 목조건물은 서까래와 내실 기둥을 모두 백향목으로 사용하였다. 사대부 집과 궁궐 건축양식에 개화기 양식이 더해져 응접실 등에는 유리문을 달았다. 해방 후에는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었던 장진영이 거주하고 있었다. 세 채 중 한 채는 장진영이 사용하고 안채 건물과 또 다른 건물은 1945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사용하였다. 이승만이 거처하는 동안 돈암장에는 수많은 인사들의 발걸음이 이어졌고 회담과 회의가 연일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이승만 주위에 반대세력이 많아지자 이승만은 마포에 있는 별장을 거쳐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돈암장은 주인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증축과 개축으로 원형을 잃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역사적 현장이자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목조 팔작지붕의 한옥 본채 한 동은 등록문화재 제91호(동소문동4가 103)로 보전되었다.
    현재 주소는 동소문로3길 84(동소문동4가 103-3)이다.
  • 일제강점기, 동활인서가 있던 자리에는 소를 키우는 목장(돈암리 421번지)이 생겼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평산목장平山牧場은 조선왕실과 총독부의원醫院에 우유를 납품하였다. 평산정길[平山政吉]은 일찍이 조선이 목우업에 유리한 장소라 생각하고 1897년 경성에 건너와 목장을 설립하였다. 그의 아들 평산정십[平山政十]이 대를 이어 목장을 운영하였는데, 1912년 세천[細川]목장을 합병한 뒤 젖소 100여 마리에 한 달 착유량만 40여석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천주교 신자였던 평산정십[平山政十]은 목장사업으로 모은 재산으로 집을 구하지 못하는 빈민들이 살 곳을 마련해 주기 위해 동소문 밖에 있는 군용지 삼선평을 빌리고, 기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2대에 걸쳐 운영된 평산목장은 계속 유지되지 못하고, 1939년 목장이 있던 터에 집이 들어섰다. 해방 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이 집을 잠시 거처로 삼았다. 이후 이 집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준비한 장소이자 근대시기 지어진 한옥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91호 ‘돈암장’으로 보전되었다.
  • 돈암장(인근 동소문동) : 이승만 박사가 1945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2년간 거처한 곳으로 근대정치사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현장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47쪽
  • ② 敦岩莊 東活人署가 있었던 동소문 4가 103번지에는 敦岩莊도 함께 있다. 이 집은 초대 대통령이었던 李承晩대통령이 1945년 10월 16일 33년만에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2년간 유숙하던 곳이었다. 돈암동 인근에 있다 하여 ‘돈암장’이라 하였다. 이 집은 당시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었던 張震英으로부터 빌린 집으로써, 장진영은 연건평 약 150평의 3채 중 1채만을 쓰고 안채인 54평과 또다른 1채를 빌려주었다. 약 700평의 정원에 뛰어난 美觀을 지녔다. 당시 이곳은 대소 政客들이 이곳에 운집하여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이곳의 각 방에는 각 당파 인사들이 모여 앉아 政見을 피력해 열기가 가득했다 한다. 이곳에서 尹致映·李起鵬·尹錫五·宋必滿 등이 보필하였고 와병중에는 任永信이 간병하였다.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미군정청으로부터 추대되었던 민주의원 의장직을 버리고, 공산계열의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대결을 하면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열중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하에 혼돈된 정국의 안정을 위해 하루의 일과는 바빴지만 이승만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돈암장 뒷 뜰에서 장작패는 일을 쉬지 않았다 한다. 2년간 이곳에 머물던 이승만은 장진영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고 이화장으로 옮겨 갔다가 그후 얼마 안되어 경무대로 이전하였다. 현재 돈암장은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1호 및 2호로 분할되어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채 3명의 소유자에게 나뉘어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62쪽
    현재 주소는 동소문로3길 84(동소문동4가 103-3)이다.
  • ▫ 비지정 동활인서 터・돈암장 東活人署址・敦岩莊 시대 : 조선시대・일제강점기 소유자 : 사유 소재지 :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 삼선중학교 아래쪽의 청기와집은 전일에 돈암동에 있었다 하여 ‘돈암장’이라 하는데 광복 지후 미국에서 귀환한 이승만(李承晩)이 2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현재 돈암장 자리에는 조선시대에 빈민환자, 주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국립의료기관인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원 외에 무당을 배치했는데, 이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귀(疫鬼)를 퇴치한다고 믿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면제했다. 활인서는 기근이 심할 때 역(驛)・원(院) 등과 함께 구호사업도 병행하는 사회복지기관이자 공공의료기관의 역할을 했다. 인조 24년(1646)에는 전염병이 만연하여 활인서에 수용된 환자가 699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시설이 부족할 때는 활인서 주변에 막사를 만들어 치료한 것이 확실하다. 이곳에는 땀을 내고 찜질하고 목욕하는 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의료시설을 갖춘 공공의료기관으로 추정된다. 활인서는 만일 환자의 집이 가난하여 치료비를 내지 못하면 국고(國庫)에서 미곡을 공급해 주었다. 하루에 주는 쌀은 1되[升] 정도였으며, 매년 환자의 수를 기록하여 감사에 보고해서 회계를 밝히게 했다. 활인서는 고려 때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의 후신이었다. 조선초 태종 때는 활인원(活人院)으로 고치고, 세조 12년(1466)에 활인서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활인서는 임진왜란 때 폐지되었다가 광해군 4년(1612)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그 사업은 혜민서와 통합되어 이어졌고 다시 제중원, 대한적십자병원에 계승되었다. 동활인서는 조선전기에 동소문 밖 연희방, 현재 이곳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조선말 순조 때 저술한 ≪한경지략≫에는 동활인서는 쇠퇴해서 폐지했다고 하고, 김정호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중구 신당동으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조선후기 정조 때 중구 신당동 236번지, 304번지 일대로 이전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동활인서 터는 일제강점기 때 평산(平山) 목장이 자리를 잡아 젖소 등을 길렀는데, 이송래가 이곳에 청기와로 기와집을 짓고 이를 소유했다. 광복이 되자,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고국 땅에 내린 이승만은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자 설산 장덕수는 돈암장이 정원도 넓고 언덕이 있어서 전망이 좋으므로 이곳을 숙소로 정할 것을 권유했다. 이승만이 돈암장으로 옮기자 수많은 정치인들이 매일 이 집에 운집하여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승만이 2년 간 돈암장에 머문 동안은 미군정기의 혼란한 시기여서 각종 사건이 일어났다. 그 중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자 이 집에 모인 우익 정치인들은 좌익계열의 찬탁(贊託)에 맞서 반탁(反託) 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승만은 2년 간 돈암장에 머물다가 마포장으로 이전했다. 이어서 다시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으로 옮긴 후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경무대(景武臺: 현재 청와대)로 입주했다. 현재 돈암장 남쪽 정원의 대부분은 연립주택을 지어 분양한 관계로 대지가 축소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 참고자료 : 손성우, ≪한국지명사전≫, 1977 / 문화재관리국, ≪문화유적총람≫, 1977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 박경룡, ≪서울문화유적≫, 1997.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51-153쪽
    현재 주소는 동소문로3길 84(동소문동4가 103-3)이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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