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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지구는 삼선교에서 미아리고개 어귀, 돈암네거리에서 보문동에 이르는 광범위한 일대를 모두 일컬었다. 이전까지 마을 밖으로 공동묘지가 있는 시 외곽의 한촌寒村이었던 이 지역은 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며 주택지대가 조성되었고, 주택경영회사들은 대량으로 토지를 매입하여 개량한옥을 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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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 지역은 단순히 서울로 편입된 것에 그치지 않았다. 돈암동, 성북동, 동선동, 삼선동, 안암동 일부 지역과 함께 ‘돈암지구’로 명명되어 제1차 토지구획정리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것이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일정한 지구 내 토지의 불규칙한 구획을 정리하고 공공시설물을 축조하여 토지의 효용성을 증진시키는 사업이다. 공사는 1937년부터 진행되었다. ‘경성시가지계획’과 ‘토지구획정리사업’은 같은 해 시작된 중일전쟁과, 이어지는 태평양 전쟁 등으로 계획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돈암지구는 같이 1차 토지구획 정리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영등포지구(공업지구)와 함께 사업이 완료되었다. 지금 보문동의 길이 곧게 뻗은 것은 이때의 결과물이다. 부지 조성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도시형 한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업은 원활히 이루어졌다. 1939년 8월 현재 동대문경찰서 건축계에는 매일 40여 건의 주택 신축원이 접수되었으며, 이런 추세는 1940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1940년 조선총독부가 〈택지건물등가격통제령〉을 발표하기 전까지 약 1,000호의 도시형 한옥이 들어섰다. 도시형 ‘한옥’이 건축된 것이 보여주듯 주민들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본래 총독부는 돈암지구를 ‘근린주구’이면서 ‘내선인’ 혼주 지구로 계획했다. 하지만 내선인 혼주 지구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택지는 일본식 주거에 맞춰 장방형으로 설계되었지만, 실제로 들어선 건물들은 조선식의 도시형 한옥이었다. 자연히 새로 유입된 사람들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곳에 필지를 분양받고 한옥을 건축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942년 7월, 돈암, 안암, 신설정의 전체 인구는 6만 9,904명이었는데 이중 일본인은 1,001명(1.43%)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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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2월 경성시가지계획 구획정리사업의 첫 사업지구로 공업지역인 영등포와 대현지구, 삼선평이 속한 돈암지구가 선정되었다. 1941년 11월에 완공된 돈암지구는 오늘날 보문동, 안암동, 동소문동, 동선동, 삼선동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집장사’라 불리던 주택건설업자들이 지은 도시한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비 된 삼선동 일대 거리에는 2층 한옥상가가 생겨났다. 도로와 접하는 면에 상가를 열었고 뒤쪽으로 살림채를 둔 구조였다. 주로 목재를 사용하여 지은 집으로 지붕에는 기와를 얹고, 유리, 벽돌 등 새로운 자재를 사용했다. 도시 한옥과 2층 한옥상가는 근대 도시에 적응해 가는 주거 형태의 변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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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지역에 공업기반관련 산업을 유치하는 대신 돈암지구에는 주거기능과 상업시설을 갖춘 도시를 염두에 두었다. 당시 신문은 돈암동이 주택지역으로써 적합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돈암지구는 경성부의 도심으로부터 동북 4km인 동소문 밖을 흐르는 성북천 양안의 지대로 북쪽은 경성-원산 1등도로가 통과하며 남쪽은 신설정의 춘천가도에 연하고 동서쪽은 산악으로 경계한 약 220정보의 산간지대이다. 이 지구는 사위가 산지로 공기가 맑아 주택지대로 가장 양호한 지위에 있어 장래 이상적 주택지로 발전이 기대되며 장래 지구의 중앙을 관통할 간선도로의 양측지대는 상점가로 발전할 것이 예상된다.(『매일신보』 1937.3.31.)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70-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