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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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자연지리
성북구 보문동과 종로구 숭인동 사이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조선 6대 왕인 단종이 어린 나이로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멀리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 있을 때,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정업원(淨業院, 현재의 청룡사로 추정)에 머물며 매일 봉우리에 올라 단종이 머물던 영월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유래되어 영월이 있던 동쪽(東)을 바라보던(望) 봉우리(峯), 즉 동망봉(東望峯)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보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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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東望峰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자연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근거자료 원문

  • 보문동6가와 종로구 숭인동 사이 청룡사 앞에 우뚝 솟은 큰 봉우리가 있다. 조선시대 단종端宗이 어린 나이로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멀리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 있을 때,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정업원淨業院(현재의 청룡사로 추정)에 머물며 매일 봉우리에 올라단종이 머물던 영월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에 영월이 있던 동쪽東을 바라보던望 봉우리峯, 즉 동망봉東望峯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의 제6대 왕 단종은 세종世宗의 손자이자 문종文宗의 아들로, 1452년(문종 2) 문종이 사망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고, 당시 정치적 영향력이 큰 대신들과 능력 있는 숙부들이 많아 단종의 왕위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위협하는 자들을 처치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고, 2년 뒤인 1455년(단종 3) 왕위를 빼앗기에 이른다.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숙부 수양대군이 바로 조선의 제7대 왕인 세조世祖이다. 정순왕후 송씨가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단종과 혼인한 것은 계유정난이 일어난 뒤인 1454년(단종 2)이다. 정순왕후의 나이는 15살이었다.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처음엔 상왕上王의 지위를 유지했으나, 그의 존재가 반란의 단초가 될 것을 염려한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당했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길을 떠났다. 그리고 단종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다. 단종의 정비였던 정순왕후 역시 왕비의 지위를 잃고 일반 부인으로 강등당했다. 정순왕후는 신분이 강등된 후에도 정업원에 머물면서 매일 청룡사 앞의 봉우리에 올라 단종이 유배 간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순왕후는 1521년(중종 16)까지 생존하여 비교적 장수하였기에 정순왕후에 관하여 구전되는 이야기가 여럿 남아 있다. 특히 정순왕후가 강등된 이후 생활이 매우 곤궁했고, 염색업과 채소 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65-66쪽
  • ④ 東望峰 城北區 普門洞과 鐘路區 崇仁洞 사이에 東望峰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다. 조선초에 端宗王妃 貞純王后 宋氏는 端宗이 어린 나이로 숙부인 世祖에게 쫓겨 강원도 영월로 귀양갈 때 동대문 밖에서 눈물로 생이별을 하고 영월쪽을 바라볼 수 있는 靑龍寺 정문 옆에 작은 초가를 지어 淨業院이라 하고 희안·지심·계지의 세 시녀를 데리고 거처하였다. 왕비는 날마다 이 봉우리에 올라가서 동쪽의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벌였으므로 이곳을 東望峰이라 하였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 정경을 가엾게 여기고 근처에 영빈정을 지어 주었으나 왕비 송씨는 그 집에는 한번도 들어가지 않고 오직 이 초가 암자에서 18세부터 80세까지 한결같이 지냈다. 그후 英祖 47년에 왕이 이곳에 거동하여 「淨業院 舊基」라는 비를 세우고 이 봉우리의 바위에「東望峰」이라는 석자를 친필로 새겼다고 한다. 일설에는 왕비 宋氏가 귀양길에 오른 魯山君과 함께 靑龍寺에 들려 청룡사 안에 있는 雨花樓에 잠시 머물면서 宋紀와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을 하였다. 이 우화루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은 우화루를 永離亭이라 불렀는데 와전되어 영미정이 되었다고 한다. 宋妃는 단종의 뒤를 따라 영리다리까지 나가서 마지막 작별을 하였으며 이 뒤부터 永離橋라 하였는데 와전되어 「영미다리」라 불리워 오고 있다고 한다. 송비가 靑龍寺로 올 때 함께 나온 일행 5명은 모두 스님이었는데 그 가운데 시녀 세사람은 法名을 각각 希安, 智心, 戒智라고 하여 송씨의 상좌가 되었으며 후궁 김씨는 법명을 圓鏡이라 하였고 후궁 권씨는 慧鏡이라 하였고 송비는 虛鏡이라고 하여 靑龍寺에서 나이 높은 智直비구니를 스님으로 정하고 원경, 혜경 두 비구니는 상제로 삼았다. 宋妃는 청룡사에서 나온 이후 바깥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일념으로 단종을 위해 기도하고 사중의 어려운 일을 돕기 위해 자주물을 들여서 댕기, 저고리, 고름, 끝동 등을 만들었다. 이렇게 자주물을 들여서 바위위에 널어 말리곤 하였으므로 이 바위를 「자주바위」라 하고 바위 밑에 있는 샘물을 「자주우물」이라 하며 마을이름을 자주동이라 부르게까지 하였다. 송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청룡사 앞에 있는 산봉에 올라가서 동쪽을 바라보고 단종의 귀양살이를 비통해 하였으므로 그 산봉 이름을 東望峰이라 이름지었으며 후일 英祖는 「東望峰」이라는 細筆을 하사하여 標石에 새겨 세우게 하고 그 애달픈 사연을 길이 위로하게 하였다. 野史에 의하면 宋妃가 날마다 오르던 동망봉의 풀들은 5백여년이 지나도록 宋妃의 한이 맺혀 모두 동쪽으로만 고개 숙였는데 이것은 송비가 단종을 그리던 애달픈 한이 동망봉 기숨에 뻗쳐 남아 동쪽으로만 고개 숙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28-630쪽
  • ⑦ 東望峯과 산신각 성북구 보문동 6가와 종로구 숭인동 사이 靑龍寺 앞에 우뚝 솟은 큰 봉우리를 「東望峰」이라 부른다. 朝鮮時代 端宗이 어린 나이로 숙부인 世祖에게 몰려 江原道 寧越로 귀양가 있을 때, 端宗王妃 宋氏가 그 서쪽 山麓 靑龍寺(淨業院)에 萬居하면서 매일 이 봉우리에 올라 동쪽으로 단종이 있는 영월을 바라다보았다 하여 峯이름을 東望峰이라 하였다. 英祖 47년(1771) 6월에 왕이 이곳에 거동하여 親筆로 쓴 「淨業院舊基」라는 碑를 세우고 이 東望峰上의 바위에도 「東望峰」3자를 친필로 써서 새기게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23쪽
  • 보문동 6가와 종로구 숭인동 사이 靑龍寺 앞에 우뚝 솟은 큰 봉우리가 있는데 이름하여 「東望峰」이라 한다. 조선시대 端宗이 어린 나이로 숙부인 世祖에게 몰려 멀리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 있을 때, 端宗王妃 宋氏가 그 서쪽 山麓 청룡사(淨業院)에 萬居하면서 매일 이 봉우리에 올라 동쪽으로 단종이 계신 영월을 바라보았다 하여 봉우리 이름을 東望峰이라 하였다. 英祖 47년(1771) 6월에 왕이 이곳에 거동하여 친필로 쓴 「淨業院 舊基」라는 비를 세우고 바위에도 「東望峰」이란 3字를 친필로 써서 새기게 하였다고 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87-788쪽
  • 그녀는 남편이 그리울 때마다 낙산 봉우리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동쪽을東 바라보던望 봉우리峰를 동망봉이라고 불렀으며, 훗날 영조는 친히 동망봉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이 바위는 일제 강점기 동망봉 지역이 채석장이 되면서 사라졌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54쪽
    정순왕후와 관련된 동망봉의 유래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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