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활인서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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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정 문화재
장소 유적
조선시대 동활인서가 있었던 현재 성북구 동소문로 3길 84(동소문동4가 103-3) 일대를 가리킨다. 조선에서는 빈민 환자와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동소문 밖에 동활인서, 서소문 밖에 서활인서를 두었다. 의료 활동 외에도 활인서에는 무당을 두어 환자들의 정서적 심리적 안정에 도움을 주도록 하였으며,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에 신당동 쪽으로 옮겼다가 1882년(고종 19)에 결국 폐지되었고, 활인서의 사업은 혜민서의 업무와 통합되어 제중원·대한적십자병원으로 이어져 갔다. 활인서가 옮겨간 뒤 그 자리에는 일제강점기에 송성진의 가옥이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이 머무르면서 돈암장으로 불려졌다.
성북동
  • 동활인서 터 표지석
  • 4월 1일부터 개경성될 신구역 타진순례(2), 청량리 왕십리의 연락도로, 도로개수가 급선무
  • 동활인서 터 표지석(1)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東活人署址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시기

주소

  • 주소: 02832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4가 103-3 (동소문로3길 84)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① 東活人署址 東活人署는 東小門밖 燕喜坊. 현재 성북구 東小門洞 4가 103번지(전일의 敦岩莊자리)에 있었다. 東國輿地勝寶에 “東署在東小門外燕喜坊 西署在龍山”이라 하였고 漢京識略에는 “活人署 有兩署 東署在東小門外燕喜坊 今盡類廢 西署在南大門外龍山江 掌救活都民病 國初因麗制 置東西大悲院 後改稱東西活人署 城中患疫者 改就治療”라고 되어 었다. 英祖와 正祖年間에 그려진 「都城大地圖」에 보면 東活人署위치가 현재의 동소문동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高宗 초에 된 것으로 여겨지는 「首善全圖」에는 東活人署가 지금 城東區 新堂洞에 표기되어 있음으로 보아 本署가 東小門洞에서 新堂洞쪽으로 이전된 것으로 보여진다. 活人署는 都城內의 疾患, 특히 전염성 질환을 주로 救治하였던 의료기관으로 東西두 곳에 설치하였다. 朝鮮太祖는 高麗時代의 제도를 따라서 그 원년(1392)에 東·西大悲院을 두었었고, 그 후 제3대 太宗 14년(1414) 9월에 排佛政策에 따라 佛敎의 大慈大悲란 이름에서 나온 大悲院이란 명칭을 活人院으로 고치고, 世祖 12년(1466)에 活人署로 개칭했는데 王辰倭亂 때 폐지되었다. 光海君 4년(1662) 禮曹의 건의로 다시 부활했고 仁祖 22년(1644)과 24년에 전염병이 크게 만연하였을 때 그 활동이 눈부셔 인조 24년에는 活人署에 수용된 환자가 699명에 이르렀다. 그 뒤 活人署는 유명무실하다가 英祖 때 다시 그 역할이 증대되었으나 高宗 19년(1882)에 결국 폐지되었고 活人署의 사업은 惠民署의 업무와 통합되어 濟衆院·大韓赤十字病院으로 이어져 갔다. 활인서의 기능을 보면 병을 치료하는 것 외에 미음을 급식하기도 하고 무당을 배치해서 환자들중 의지할 곳이 없는 환자들을 약과 정신적으로 구휼·보호하게 하였다. 世宗은 그 11년(1429) 에 환자들이 정신적인 안정을 요구하는 심리와 또 그 때만 해도 무당에게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상이 깊었던 실정 등을 참작해서 활인서에 무당을 분속시키고, 병자에게 봉사를 잘해서 효과를 많이 거두는 무당에게는 바치는 세금을 감면하여 주기까지 하였다. 또 世祖는 5년 6월에 전염병이 심하였을 때 병자들을 활인서에 수용하고 무당을 동원시켜서 치료케 하였다. 즉 활인서는 상당한 의료시설을 갖춘 公共醫療機關이었으며 貧民들을 돕는 救恤기관이기도 했고, 무당 등을 단속하는 기관으로도 되어 무당들을 관리하고 이들에게서 세금을 거두기도 했다. 活人署의 역할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世宗 18년(1436) 8월에 王이 漢城府에 傳旨한 기록을 보면 京中 및 城底의 飢民을 모두 活人院으로 보내 구호하고, 또 流離飢民이 너무 많아서 수용할 수가 없으면 普濟院과 梨泰院에 별도의 賑濟場을 설치, 운영하되 漢城府와 五部의 관원이 함께 檢祭하라. 고 하였다. 이렇게 활인서는 驛·院 등과 함께 국가에서 직영하는 사회복지기관으로서 굶주린 사람들의 구호에 큰 역할을 하였다. 活人署의 관원은 別提(從6品)·參奉(從9品) 등이 있었으며 東活人署는 濟生院, 西活人署는 惠民署가 나누어 救療케 했다. 東活人署가 었던 곳에 지금은 다음과 같은 석조표석이 있다. 동활인서(東活人署)터 전염병자를 격리 치료하던 의료 기관이 있었던 곳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17-718쪽
  • 동소문동 4가 103번지(전일 돈암동 421번지)에는 敦岩莊이 있는데 이 곳은 조선시대에 東活人署가 자리했던 곳이다. 활인서는 서울 사람들 중의 질병에 걸린 빈민, 특히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던 국립의료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東, 西 두 곳에 활인서를 두었는데 이곳에 있던 동활인서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성동구 신당동 쪽으로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活人著의 기능을 보면 醫員 외에 巫堂을 배치해서 都城內에 의지할 곳이 없는 환자들을 藥과 미음으로 구휼, 보호하게 했다. 전염병이 크게 돌면 活人署주위에 病幕을 만들어 환자들을 수용했는데 巫堂을 전속으로 배치한 이유는 전염병 유행에 대한 疫鬼의 퇴치술을 강구하게 하고, 때로는 치료 이외의 구호사업도 겸하게 했다. 活人署는 驛, 院 등과 함께 국가에서 直轄하는 사회기관으로서 飢民救護에도 큰 구실을 했다. 이 活人署에는 汗蒸場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世宗 때 기록에 땀내고 찜질하고 목욕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8-769쪽
  • 조선시대 돈암동은 한성부의 동부지역에 위치한 12방坊 중 하나로 한성부의 관할에 속하였다. 한성부는 수도의 행정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이에 필요한 기관들을 각 처에 두고 다스렸는데, 조선시대 초기 동소문 밖 지역에는 백성들의 구휼과 병자치료를 담당한 의료기관인 동활인서를 두었다. 조정에서는 환자와 굶주린 백성들을 수용하기 위해 성 바로 밖의 넓은 평지를 동활인서의 터로 잡은 것이다.
  • 동활인원은 동소문 밖에 있다. 서활인원은 서소문 밖에 있다. 옛 이름은 대비원大悲院이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의원과 무당을 두어서, 서울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곳에 모아 놓고, 죽·밥·국·약을 주며, 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 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 <세종실록지리지-경도한성부조>
  • 삼선평 일대(돈암장 옛터)는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인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던 곳이다. 새롭게 나라를 세운 조선은 고려시대의 구휼과 치료를 담당한 대비원을 계승하여 동서소문東西小門밖에 활인서를 설치했다. 활인서에는 의원과 무당[醫巫]을 함께 두어 병자의 치료를 담당하고, 매골승埋骨僧이 배치되어 한성부와 함께 시체의 매장업무를 담당하였다. 활인서 주변으로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와 굶주린 백성들이 모였다. 그중 전염병 환자를 꺼려 도망가는 이도 많았지만, 지속되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활인서를 찾는 수가 더욱 늘어나 4천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 무당에게 부과되던 무세가 폐지되어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그 기능이 점차 쇠퇴하였다. 1784년(정조 8) 이후에는 동활인서가 신당동 부근이라 기록되어 있다. “근래 전염병이 더욱 치열해지고 장마 또한 지리 하여서, 동활인서에서 병으로 고통 받는 자가 거의 2천여 명에 이르니 진휼하는 방도를 세우는 것이 합당합니다.”하니, 상이 천막, 자리, 식량을 더 주도록 명하였다. 부제학 조복양이 아뢰기를, “그 밖에 사사로이 장막을 나온 사람들도 4천여 명이나 된다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모두 양식을 지급하도록 하라.” -「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기청제와 진휼책, 고과에 대한 의논을 듣다」, 1662. 6. 20 -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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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암장
    이야깃거리
    돈암장
    분류: 장소, 유물
    시기: 일제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