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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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종교시설
성북구 성북로 28길 60(성북동 292-1)에 있었던 사찰이다. 미륵당은 작은 절이었는데, 그 옆에는 정자가 있었고, 정자 옆에는 폭포와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미륵당 안에는 1700년대에 왕실에서 봉안한 석조미륵불좌상이 있었다.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인 임규가 말년에 10년간 거주하면서 『북산산고』를 탈고하였다. 미륵당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곳의 주인이 몇 번 바뀌었는데, 1987년 운산스님이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을 유치하면서 태고사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현재는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과 종립기관인 동방대학원이 들어와 있으며, 미륵당 자리에는 현대식 동방대학원 건물이 들어서 있고, 법당에 석조미륵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성북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태고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륵암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종교시설

시기

주소

  • 주소: 02838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92-1 (성북로28길 60)

근거자료 원문

  • 미륵당은 작은 절이었다. 미륵은 미래에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이다. 미륵당 옆에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 옆으로는 폭포가 있고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어 운치가 있었다. 하루는 고종 황제가 미륵당에 몇 몇 시종만 데리고 와서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좁은 길까지 개울물이 넘쳐 건널 수가 없게 되었다. 고종이 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절에서는 미륵당 아래 마을에 살던 구 척 장신에 힘이 센 청년을 불렀고, 이 젊은 청년이 고종을 업고 개울을 건너 고종은 무사히 환궁을 할 수 있었다. 미륵당은 한국전쟁 후에 주인이 몇 번 바뀌었다. 1987년 운산 동욱(雲山東旭) 스님이 서울 봉원사(奉元寺)에 있던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무원을 유치하면서 태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과 종립기관인 동방대학원이 들어와 있다. 미륵당 위쪽으로는 기도바위가 있었다. 기도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제물로 차릴 과일과 돗자리를 가지고 올라갔다. 바위 앞은 사람들이 와서 제물을 차려놓고 기도를 올린 세월의 흔적으로 반들반들해졌다고 한다. 후에 삼청터널이 생기고 주택단지가 되면서 사라졌다.
  • 청룡암에서 삼선교 방향으로 쌍다리에 못 미쳐서 미륵당이 있었다. 미륵신앙은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불이 세상을 구원하길 바라는 신앙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국가에서는 미륵사를 세우고 미륵불을 모셨다.
  • 조선시대 후기 독립운동가인 임규林圭, 1867-1948의 시에 ‘10년의 세월을 성북동 모퉁이에 살고 있으니 청룡암, 미륵당이 바로 골목과 통한다’는 구절이 있고, 1931년 신문에도 ‘시외 성북리 미륵당’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시인이자 불교학자인 이원섭李元燮, 1924~2007은 한 때 미륵당에서 하숙을 하기도 했다. 미륵당에는 1700년대 왕실에서 봉안한 석조미륵불좌상이 있었고,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는 마당 옆으로 폭포가 떨어졌다. 지금은 미륵당 자리에 동방대학원대학교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있다. 법당에는 300년 전에 봉안되었다는 미륵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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