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공동묘지
1913.04.01 - 1958
장소 공공시설
일제강점기 미아리 일대(현 길음동)에 설치된 공동묘지이다. 1912년 「묘지규칙」이 발표되면서 묘지로 설정된 지역은 19곳이었다. 그중 1번은 미아리 오패산 일대, 2번 묘지는 숭인면 미아리 일대였다. 국가기록원 소장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미아리 산25번지와 산34번지 일대가 경성부와 숭인면 공동묘지로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길음동에 위치한 2번 미아리 묘지는 약 69,000평 정도로 추정된다. 이후 공동묘지가 기피시설로 인식되면서 1958년대 후반에 이전이 완료되었고, 그 자리는 무허가 건물 철거민 이주단지 등으로 이용되었다.
길음동
  • 성북구 주민 이강한 2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성북의 풍경과 조소앙에 대한 기억①
  • 성북구 주민 이강한 13 : 1970-80년대 성북구 풍경
  • 길음2동 일대의 주요 지명들
  • 성북구 주민 이강한 2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성북의 풍경과 조소앙에 대한 기억①
  • 사라질 미아리공동묘지(彌阿里共同墓地)
  • 공동묘지이장(共同墓地移葬) 미아리(彌阿里) 삼만분묘(三萬墳墓) 연고자(緣故者) 신고요망(申告要望)
  • 정성(精誠)드려 손질  한식(寒食)날 모두 성묘(省墓)
  • 희생(犧生)된 학병(學兵)들
  • 위생문제로(衛生問題)로 대설전(大舌戰) 부회예산심의(府會豫算審議) 제육일경과(第六日經過)
  • 추석점경(秋夕點景) 성묘하는 부녀들[寫 : 금일 미아리에서]
  • 지하(地下)에도 주택난(住宅難)! 경성부의 육(六)개처가 부족해서 공동묘지택필경확장(共同墓地畢竟擴張)/육개묘지(六個墓地)에 십만명돌파(十萬名突破)
  • 사자(死者)에게도 주택난(住宅難)! 문제(問題)되는 『청산일배토(靑山一坏土)』
  • 경성(京城)의 매장지 선정
  • 총탄(銃彈)에 쓸어진 정군(鄭君) 구일(九日) 애국단체연합장(愛國團體聯合葬)
  • 성북구 주민 이강한 13 : 1970-80년대 성북구 풍경
  • 미아리 공동묘지, 국회서 이전 건의 가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彌阿里 共同墓地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공공시설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2동 일대

근거자료 원문

  • 경성부, 공동 매장지 선정 4월 1일부터 ‘공동매장지및화장장규칙’이 시행됨에 따라 경성부는 경성 5부의 매장지를 다음과 같이 선정하다. 동부 숭신면 미아리 51,555평, 서부 연희면 신촌 36,241평, 남부 두모면 수철리 110,126평, 중·북부 은평면 말현산 81,075평. 매일신보 1913. 3. 23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59
  • 죽은 사람의 주택난 아현리, 수철리, 미아리, 이태원, 신사리 등 다섯 군데요 그 면적이 44만504평 중 묘지로 사용한 면적이 9만417평으로 아직 사용할 면적이 35만여 평이나 있어 적어도 30만기는 아직도 수용될 터임으로 지금 경성부의 조선인 부민이 다 죽기까지는 묘지 부족의 위험은 없을 터이며 더욱이나 최근 수년래에는 화장열이 유행하여 묻힐 곳이 없을 걱정은 앞으로 백년까지는 염려 없을 것이다.그러나 당장 문제되는 것은 새로 묻을 묘지가 아니라 이왕 묻은 묘지를 천장할 문제인데 이것은 도시가 해마다 번창하고 또 도시계획, 시․구개정 등으로 이왕사용하든 묘지를 파내어버리게 되는 것인데 방금 박도한 것이 이태원을 비롯하여 공동묘지가 아닌 재래로 유명한 수구문 밖의 삼천장과 용산 도화동의 사천장과 아현리 묘지이다. 수구문 밖의 삼천장은 그 산판이 경성부 학교조합 소유지로 방금 방매 중에 있는 까닭이요, 아현리는 홍제내리로 장소를 옮긴 까닭이요, 도화동은 이촌동의 이주지가 된 까닭이요, 이태원은 남산 국유림이 경성부에 매수됨에 따라 주택지로 결정되기 때문인데 이태원의 3만8766기 중 북부 일대는 대개 옮겨야 하리라 한다. 이밖에 장래 문제될 곳이 또 하나 있으니 이는 동소문 밖 미아리로 이것도 도시계획령이 실시된 후에는 산사람 등살에 완전치 못할 것이다. 하여간 이와 같이 청산의 일배토(一杯土)도 쌓이면 문제가 되어 산 사람의 주택난이 심한 대경성의 일면엔 죽은 사람의 주택난이 바야흐로 심해가는 모양이다. 동아일보 1930. 9. 30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62
  • 공동묘지 초만원 경기도는 경성부의 6개 공동묘지(미아리 제1, 제2묘지 신사리·수철리·홍제내리 이태원)가 초만원을 이루어 새로이 고양군 도면 목산리·양주군 구리면 망우리·구리면 교문리의 총 면적 519,060평에 공동묘지를 설립허가하다 동아일보 1933. 9. 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65
  • 6개 묘지에 10만명 돌파 수많은 장안사람들의 시체로 대만원을 이룬 사용금지의 공동묘지는 별항과 같이 이태원 등의 6개소인데 그중 미아리의 제1, 제2공동묘지를 제하고는 모두가 오래 전부터실전된 구 묘지이었다 한다. 대정2년9월 매장 개시이래 작년말까지 각 공동묘지에 묻힌 시체는 다음과 같다. 이태원묘지 41,321 수철리묘지 41,554 신사리묘지 12,054 홍제내리묘지 202 미아리 제1묘지 6,986 미아리 제2묘지 1,224 그 중에 제일 적은 미아리 제 2묘지만이 아직까지 약간의 매장지가 남아있을 뿐이라한다. 동아일보 1933. 9. 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66
  • 미아리 공동묘지 추석 성묘 동아일보 1933. 10. 5 *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성북문화원, 83쪽 그림 참고.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67
  • 미아리 공동묘지에 고별식장을 경성부회는 17일 오후 2시반부터 위생비 심의에 들어가 여러 의원들의 질문전이 전개되었다. 홍필구 의원이 “홍제리 화장장같은 곳은 고별식장이 있으나 조선인이 많이 이용하는 미아리 등 공동묘지에는 고별식장이 없으니 이것은 부 당국이 조선인측의 편의를 위하는 점에 너무나 태만한 것이 아니냐 위생과장이 전일 위생주사로 있을 때부터 이 문제는 알고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용이 얼마들지 않을 그러한 설비를 어째 착수하지 않는가? 어물어물하지 말고 확실한 답변을 하라”고 육박하자 위생과장은 거북한 태도로 “공동묘지는 공지도 많으므로 그대로 두었는데 금후 상의하여 만들도록 하겠다.” 고 답변하였다. 동아일보 1936. 3. 1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68
  • 희생된 학병들의 단체식 학병동맹사건으로 애석하게도 희생을 당한 학회들의 장례식은 사회단체연합장으로 28일 상오 11시에 미아리 묘지에서 거행하기로 되었다. 동아일보 1946. 1. 2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69
  • 성묘로 인파 이룬 미아리 고개 경향신문 1954. 9. 12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성북문화원, 87쪽 그림 참고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71
  • 한식 날 미아리 공동묘지 풍경 6일의 한식 날 서울교의 미아리나 망우리 같은 묘지에는 성묘꾼들로 흰 꽃을 이루었는데 날씨마저 청명한지라 제각기 조상의 묘소에 손질하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예로부터 이날은 조상의 묘소에 돋아나는 잡초를 뽑고 녹아진 떼를 다시 입혀 곱게 손질하는 풍습이 있는 날이기에 이날따라 그러한 풍경이 눈에 뜨이기 마련이다. 이날은 때마침 공휴일이 겹쳐 놀게 되는 첫날이라 모두가 휴일 아닌 휴일 기분으로 모처럼의 봄풍경을 찾아 산놀이 들놀이로 하루를 보내는 젊은 남녀들도 많이 볼수 있었다. 사진은 미아리 묘지에서 동아일보 1959. 4. 6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성북문화원, 102쪽 사진 참고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82
  • 그렇다면 미아리 공동묘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1912년 「묘지규칙」이 발표되면서 묘지로 설정된 지역은 19곳이었다. 그중 1번은 미아리 오패산 일대, 2번 묘지는 숭인면 미아리(길음동) 일대였다. 특히 2번 길음동 일대는 교통이 용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1922년 당시 경성부에서 공동묘지에 매장되는 사람은 매년 5,000명~6,000명에 이르러 이미 ‘만원이 된 공동묘지’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특히 2번 미아리 묘지로 불리게 되는 길음동 일대는 조선인 전용 공동묘지로 1929년부터 2년 동안 공사를 하여 시설이 정비되었다. 그리하여 1937년에는 16,000기의 무덤이 있는 대형 공동묘지로 ‘성장’하였다. 미아리 공동묘지는 경성부민의 사死의 안식처의 하나로 금빛으로 단장한 영구차가 하나의 인생의 최종열차로써 몇 번이고 와 닫는 ‘사의 都’이다. 벌써 돈암리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만도 이 인생의 최종열차는 늦가을 햇볕에 금빛을 번뜩이면서 되네미 고개를 구비 돌아 도보로 가는 기자에게 한바탕 먼지를 끼얹고 달아나고 있었다. 위의 기사는 1937년 『조광朝光』에 실린 「세색歲色도 장춘將暮!」라는 기사의 일부분이다. 기자는 미아리 공동묘지를 ‘죽은 자의 수도’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미아리 공동묘지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 더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경성부에서 미아리 공동묘지를 가려면 되너미고개, 즉 미아리고개를 넘어야 했으며,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먼지가 많이 날렸다는 것이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 미아리 공동묘지는 경성부 부근에서 가장 큰 규모는 아니었다. 1922년 당시 경성부 공동묘지의 총 면적은 511,830평이었는데 가장 넓은 공동묘지는 이태원 공동묘지로 119,328평이었고, 다음은 신당리의 118,023평이었다. 길음동에 위치한 2번 미아리 묘지는 약 69,000평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미아리 묘지는 도심과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였으며, 1940년을 거치며 이태원 ・신당리 묘지가 망우리 ・신사리 묘지로 통폐합되면서 중요성도 커졌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묘지 터가 부족해졌고, ‘공동묘지’에도 빈부의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도 등수가 있습니까?” 죽어 묻히면서도 빈부차가 있는가 하고 물으니 “네, 2등지는 제일 좋은 땅이고요, 3등지는 자연 그보다 떨어집니다.” “그럼 2등지는 한 평 얼마나 합니까?” “7전 50전입니다. 그리고 3등지는 4원, 4등은 2원, 5등은 1원이고 6등은 50전입니다. 그리고 가족 공동묘가 있는데 이건 한 평에 2등지는 4원, 3등지는 2원, 4등지는 1원인데 가족만 따로 모시게 되죠…” (1937년 『조광(朝光)』 「歲色도 將暮!」) 위의 기록을 보면 죽은 자의 수도에도 빈부격차가 존재했다. 이것도 공동묘지 탄생 이전에는 없던 현상이었다. 미아리 공동묘지는 이렇게 ‘죽은 자의 수도’로써, ‘경성부민 죽음의 안식처’로 기능했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 죽어서도 빈부의 격차가 있는 기피시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1941년부터 미아리 공동묘지 주변 사람들은 ‘공동묘지 이전’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미아리 공동묘지의 이전이 실현 된 것은 1958년에 이르러서였다. 서울 각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미아리로 모여들어 판자촌을 형성했다. 정부는 판자촌의 철거를 반복하였지만 실패하고 결국 이곳에 정착촌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택지로 결정된 것이 제2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당시 미아리 공동묘지에 있던 19,700기의 묘지는 1958년 후반에 이전이 완료되고, 1959년에는 그곳에 80,500평의 택지조성 사업이 시작되었다. 1962년에는 공동묘지 위에 첫 번째 마을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후 택지 개발은 부침을 겪어가며 진행되지만, 미아리 공동묘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27-30쪽
  • 1950년 국회에서는 미아리 공동묘지 이전 건의안이 가결되기도 했다. 미아리 공동묘지 이전 건의 운동은 1941년부터 시작되어 무려 9년 동안 진행된 노력의 결과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추진 동력을 잃어갔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79쪽
  • ­ 공동묘지, 60년대 초반이 많이 없어졌기는 했지만 무섭거나 그렇지 않았어요? (고순심) 집 지으려고 땅 파면 뼈가 나와. 그럼 절을 하고 뭐 차려놓고 그랬어요. 호박밭이고 그랬어요. 뼈다구 밭이고 그래. (지막례) 방구들 놓으려고 파면 뼈가 나와. ­ ‘귀신 나온다’ 그런 이야기는? (지) 그런 얘기는 못 듣고, 새벽에 1시, 2시쯤 물 길러 가면 누가 시커멓게 오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어. 무서우니까 물통을 서로 부딪쳐서 소리 내고 다녔어요.
    박수진, 고지수, 이현주, 2015, 문화재의 숲, 사람의 마을 : 성북구 문화재지역 구술자료집, 210-211쪽
  • 2) 彌阿里·里門里共同墓地설치 崇仁面民들을 위한 공동묘지가 彌阿里와 里門里에 설치된 것은 각각 1913년 6월이었고 그 면적은 각각 19,944평과 35,420평 이었다. 당시는 각 面別로 공동묘지가 있었으며 예컨대 오늘날의 龍山區 普光洞과 漢南洞에는 漢芝面의 공동묘지가, 城東區 廣壯里·九宜里에는 纛島面의 공동묘지가 있었던 것이 그 例이었다. 그런데 미아리에 崇仁面 공동묘지를 설치한 다음해인 1914년 4월에 京城府가 15만 5천평이나 되는 넓은 땅을 구입하여 이곳에 京城府공동묘지를 조성한다. 일제 강점기 京城府공동묘지는 崇仁面 彌阿里, 漢芝面 水鐵里(현 城東區 玉水洞), 恩平面 新寺里(현 恩平區 신사동), 漢芝面 梨泰院里(현 용산구 이태원동), 九里面 忘憂里(현 中浪區 망우리) 등 5개처에 있었는데 마지막의 九里面 忘憂里공동묘지는 1933년 9월에 설치 개시되었고 나머지의 4개소는 모두 1914년 4월에 동시에 설치 개시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묘지는 모두 조선인 전용이었고 일본인들은 火葬을 해서 유골만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 화장장은 恩平面 弘濟內里(현 西大門區 홍제동)에 있었으며 1929년 8월에 설치되었다. 당시의 공동묘지가 이렇게 시가지에 가깝게 입지한 것은 당시의 교통사정과 장례행사 때문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葬儀車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喪輿를 꾸며 步行으로 이른바 行喪을 했기 때문에 너무 거리가 멀면 運柩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미아리에 설치되었던 공동묘지는 1950년대의 중반기에 모두 철거 이장되었고 그 자리는 무허가 건물 철거민 이주단지 등으로 이용되었다. 이 서울시 공동묘지가 있었던 자리는 지금은 거의가 道峰區관내가 되어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25쪽
  • 미아리 공동묘지 이전에 난관 서울시 성북구 내에 자리잡고 있는 미아리 공동묘지의 철거문제는 오래 전부터 관계 당국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되어 왔는데 물색 중인 이장 후보지가 확정되는 대로 불원 실천에 옮겨질 단계에 이르렀다. 한편 이 문제는 27일 박승목 시의원에 의해 건의안이 제안됨으로써 의회측에서도 집행부 계획을 적극 뒷받침할 것으로 보여지고 있는데 현재 미아리 공동묘지에는 약 8만위를 헤아리는 묘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으며 묘지 부근에까지 인가가 날로 늘어가고 있어 도시계획에 따른 미관상 또는 공중위생면으로 보아 조만간 철거되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놓여져 있다. 그런데 동 철거에 있어 가장 난점으로 되고 있는 것은 이장 후보지 선정문제와 묘주 및 이장 지주민들의 반대라고 당국에서는 지적당하고 있다. 현재 미아리 묘지의 팔만위 중 약 삼만위를 무연고 묘로 당국에서는 추산하고 있는데 이장에 따르는 여러 문제점을 해부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장후보지= 서울에서는 1년에 8천여 명의 사망자가 나고 있는데 이를 매장할 후보지로서는 망우리 묘지 옆의 삼십여 만평에 달하는 귀속임야가 있어 시에서는 여기를 앞으로 공동묘지로 사용할 복안을 갖고 있으며 우선 미아리 묘지 중 낮은 지대의 삼만여위를 옮길 후보지로서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을 지목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약 이만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하며 그밖에도 신림, 시흥군 신사, 서대문구 남가좌, 홍은동 등 묘지에도 다소 분산이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소요예산= 이 계획을 위한 예산이 별로 계산되고 있지는 않으나 삼만위를 이전하려면 관 인부비 및 수송비 등을 계산하여 매일 기 5천환으로 잡아도 일위 5천만환에 달하며 신 이장지에 이르는 도로 등을 개설하려면 막대한 경비가 필요할 것이나 이에는 약 2억여 환의 예비비가 있어 이에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묘주 및 주민의 반대= 묘를 옮기는 문제는 연고자의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고유의 숭조 관념으로 보아 여론이 비등할 것이며 특히 연고자들은 이를 맹렬히 반대하고 나설 것인데 이장케 되더라도 대부분 소요경비를 부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새로이 이장될 후보지역의 주민들은 맹렬한 반대와 진정소동을 일으킬 것으로 당국에서는 보고 있다. 기타= 한편 동 철거 이장이 실현을 보게되면 당연히 화장장도 옮겨져야 될것인데 현시영 화장장을 옮기려면 건물시설을 합해 수억 환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관계 법규에 의하면 이장을 하려면 6개월 간의 공고기간을 두어야 하게 되어 있다. 경향신문 1957. 9. 2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72
  • 이장으로 법석 미아리 공동묘지 미아리 공동묘지 중 낮은 지대에있는 약 3만기의 분묘지는 시당국의 도시계획에 따라 오는 5월 이후에는 강제 이전될 예정인데 한식 날인 6일 연고자들은 강제 이전되기 전에 자진 이장을 서두르고 있었다. 경향신문 1958. 4. 7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73
  • 공동묘지 이장 미아리 삼만 분묘 연고자 신고 요망 서울시에서는 시내 성북구 미아동에 있는 미아리 공동묘지를 명년 6월 5일까지 경기도 광주군 내 반포리에 이장하고 동 일대를 후생주택지로 만들 계획으로 현재 미아리 제2묘지에 있는 약 3만 기에 달하는 분묘의 연고자들은 조속히 신고하도록 요망하고 있다. 동아일보 1957. 12. 9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74
  • 묘지 3만기 집단이장 강행 서울 시내 성북구 미아동의 제2공동묘지에 매장되어 있는 약 3만위의 무덤은 오는 6월에 당국의 의해 집단이장이 강행될 예정이다. 시당국은 수년전부터 미아리 공동묘지를 교외로 옮길 계획을 추진하여 왔었으나 작년 12월경에야 겨우 이전 후보지로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용지의 선정을 보게 되어 작년 12월 6일 전기 미아리 묘지에 있는 분묘의 연고자들에게 이장할 것을 공고한바 있으며 동 기간 6개월은 오는 6월5일로써 끝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시당국은 전기 3만위의 무덤 중 무연고자분을 약 6할로 추산하고 이전에 소요될 경비로서 1억환의 예산을 계상요구하였던 것인데 동 예산안은 시의회에서 4천만환으로 삭감 통과, 주 구립말일의 예산통과를 합법으로 보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 이장은 소정 이전 기간의 3분의 2가 경과되었으며 특히 요즘 청명, 한식 등 이장의 최적기가 이미 지난 7일 현재까지도 자진이장이 실시되고 있는 것은 도합 7백여위에 지나지 않는 실정으로 무연고 분묘의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보여진다. 동 이장에 따라 시당국은 연고자들이 자진이장을 신청할 경우 홍제동 화장과 이전지인 언주 공동묘지의 용지 사용은 무상으로 편의를 돌보아 준다고 하는데 동 이장에는 시가 지정한 인부들의 발굴료 3천환 외에도 관 마포대와 이장 수송비 영구차로 언주 묘지까지 약 1만5천환 등 최소한 2만환대를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어 동 이장계획은 적지않은 차질이 있을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경향신문 1958. 4. 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75
  • 사라질 미아리 공동묘지 서울시에서는 시내 미아리 공동묘지 이장계획의 마지막 공사로서 16일부터 동 묘지 안의 무연고 묘의 발굴 이장작업을 개시하였다. 이 무연고묘 이장작업으로 근 30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의 미아리 제2공동묘지는 영영 없어지게 된 것이다. 공동묘지는 단기 4261년(일력 소화 3년)에 당시 경성부(지금의 서울시) 직영 공동묘지로 지정되어 그동안 19,700여 주의 영혼이 묻혔던 것인데 작년부터 금년 추석까지 사이의 연고묘 자진이장 기간에 연고자되는 사람들이 6,000여 묘를 이장했고 나머지 무연고 묘 13,215기가 남아 있어 지금 발굴 이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장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에 있는 역시 서울시 지정 공동묘지 인부들은 산소가 하나 하나 없어지는 것을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동아일보 1958. 11. 1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77
  • 1957년 UN군 경제조정관실에서는 미아리에 난민촌을 만들고 난민을 수용하였다. 이듬해 본격적인 난민촌정착 사업을 위해 미아리고개 공동묘지를 이전하고 택지조성사업을 시작하였다. 1912년 경성부 내 조선인의 공동묘지가 부족한 이유로 조선총독부에서 설치한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반세기 동안 죽은 사람의 공간이었던 곳이 다시 산 사람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 성북이 경성부에 속하지 않았던 1914년부터 1929년 사이, 성북에는 공동묘지가 설치되었다. 당시에는 교통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시가지에서 가까운 곳에 묘지를 만들어야만 했다. 또한 과거부터 내려오는 풍습에 따라 상여를 꾸며 관을 넣고 직접 묘지까지 운반하는 장례 절차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도 공동묘지의 입지에 영향을 주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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