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공동묘지/야화
1913.04.01 - 1958
장소 공공시설
성북구 길음동 일대에 있었던 미아리 공동묘지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1958년 공동묘지의 이전이 있기 전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입소문을 타고 전해졌는데, 매일 찾던 외동딸의 묘지에서 의문의 모래를 맞은 젊은 아빠의 이야기, 먼저 죽은 애인의 관을 파내려 했던 남자의 이야기, 장묘 풍습이 달라 밤에만 이장하려는 중국인들의 이야기, 묘지 인부들이 드나들던 선술집의 작부가 겪은 괴노인 이야기 등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길음동
  • 미아리(彌阿里) 야화(夜話) (1) 모래세례(洗禮)에 기겁
  • 미아리(彌阿里) 야화(夜話) (2) 달려드는 괴노인(怪老人)
  • 미아리(彌阿里) 야화(夜話) (3)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소동(騷動)
  • 미아리(彌阿里) 야화(夜話) (4) 밤사이에만 이장(移葬)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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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 장소 공공시설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동 일대

근거자료 원문

  • 딸 묘지에서 의문의 모래 세례를 받은 남자 삼십 대를 갓 넘은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딸을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다. 자신의 첫 딸이자, 외동딸이었다. 부모를 잃은 사람, 배우자를 잃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있어도 자식을 잃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없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슬픔이 커서라고 한다. 서른 초반에 딸을 잃은 남자의 슬픔 역시 그러했다. 그는 틈만 나면 딸의 무덤을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삼 개월이 흘렀다. 그는 딸이 그리워 미아리 공동묘지를 찾았을 뿐이지만, 어느새 공동묘지의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설마 따라 죽지는 않았겠지?’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딸이 좋아하던 인형과 과자를 가득 안고 다시 묘지에 타나났다. 사람들은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여전히 딸을 잊지 못하는 그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딸의 묘지에 가져온 선물을 내려놓고는 앉아서 중얼거렸다.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죽은 딸과 이야기하는 듯싶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무엇인가에 놀라 새파랗게 질려 살려달라고 외치며 관리 사무실로 달려왔다. 관리소 사람들은 그를 안심시켰다. 물도 한 잔 주고, 진정시키고 나니 그는 지난날을 이야기 했다. 그의 이름은 권표옥이었다. 청진동에 사는 그는 딸을 자주 보고 싶어 멀지 않은 이곳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고 매일 같이 찾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일이 바빴던 그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딸의 무덤을 찾아 왔다. 그리고 평소처럼 둘러보며 말했다고 한다. “혼자 있으려니 쓸쓸하지?”, “내가 왔으니 안심하고 놀렴”, “어머니는 바빠서 못오신단다”. 자식 잃은 부모가 무덤에 찾아와 흔히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아빠”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내 귀가 잘못 됐나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차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아버지” 분명히 살아 있을 때 자신에게 응석을 부리던 딸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바로 딸의 묘지에서 흘러나왔다. 저녁 무렵 공동묘지에서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는 반갑기 보다는 두려웠다. 그는 빠르게 묘지를 내려왔다. 그 다음날은 무서워 딸의 무덤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찾아간 딸의 무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다시 딸의 무덤을 매일 같이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딸 무덤에 제초를 끝내고 쉬고 있었다. 주위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고 멀리 일하는 인부 모습이 간혹 보일 정도였다. 이때 그의 귀에 여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자기 딸의 울음소리였다. 무서웠지만 그는 그 울음소리의 출처를 알아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묘 뒤에서 소리가 나서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고 울음소리도 그쳤다. 한참 그곳을 지키고 있으려니까 이번에는 묘 앞쪽에서 모기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났다. 그래서 다시 앞으로 돌아와 봤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든 그는 지난 날 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와 같이 급히 묘지를 내려왔다. 그가 한동안 딸의 묘지를 찾지 않은 것은 그날 이후였다. 그리고 오늘 그동안 못 찾아 온 것이 미안했던 그는 딸이 좋아하던 물건들을 잔뜩 갖고 묘지를 찾았다. 딸의 무덤 앞에 가져온 물건들을 놓고 명복을 빌던 참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모래가 쏟아졌다. 머리에 모래를 뒤집어쓴 그는 당황하여 주위를 살피는데 다시 한 번 모래가 날라 와서 양복에 뿌려졌다. 갑자기 지난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새파랗게 질려 뛰어 내려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일 년 넘게 딸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그가 정말 ‘아빠, 아빠’하는 딸의 목소리와, 흐느끼는 딸의 울음소리를 들었을까? 또 모래 세례를 맞았을까? 지금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것이 정말이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첫 번째는 아빠를 그리워했던 딸의 목소리였고, 두 번째는 오랜만에 온 아빠를 보고 반가워 울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마지막은 너무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아빠를 약올리기 위한 장난은 아니었을까?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46-48쪽
  • 못 이룬 사랑 해방 직후의 일이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누구인가 공동묘지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만 사무실에서 숙직하는 사람들은 잠에 취해 듣지 못했다. 가까스로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묘지 바로 아랫동네에 사는 부락민들이었다. 이들의 표정을 보아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였다. 성급한 한 부락민이 말했다. ‘저기 시체가 나와있어요.’ 그는 산아래쪽을 가리켜 손가락질을 했다. 그들은 어젯밤, 삼일 전에 쓴 어떤 처녀의 묘가 파헤쳐져있으며 그 묘에서 약 5m 떨어진 곳에 관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사무소 사람과 인부들은 한걸음에 그 현장으로 달려갔다. 과연 산소는 파헤쳐져 있었고 그 바로 앞에는 괭이와 부삽이 그리고 약 5m 떨어진 곳에는 관이 놓여있었다. 누가 관을 파내서 메고 가려다가 내려 놓은 것임이 분명했다. 사무소 사람들은 그것들을 그대로 둔채 인근 파출소 경찰관에게 알렸다. 그 파헤쳐진 산소의 주인공은 서울시내 영등포에 살던 21세 김모양이었다. 이 사건으로 미아리 공동묘지에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경찰서 형사들이 나오는가 하면 검찰에서 검사가 나와 현장 검증을 하고, 신문기자들이 몰려나왔다. 다음날, 신문에는 그 산소를 파헤쳐서 시체를 훔쳐가려던 범인을 잡았다고 보도되었고 신원과 범행동기, 그리고 사건 경위 등도 상세히 밝혀졌다. 오랜 신병으로 죽은 김모양과 한 동네에 살던 김씨라는 남자가 범인이었다. 김씨는 김양과 한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김양을 자주 보았고 언제부터 연정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김씨는 김양에게 이야기를 건네는데 성공했고 그 후부터는 자주 만나기까지 했다. 사랑이 한참 무르익어갈 때 김양은 가슴(폐병)을 앓기 시작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다. 김씨는 더 늦기 전에 김양과 결혼하려 했고, 가족을 통해 김양 부모에게 청혼을 하였다. 그러나 김양 부모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혼기도 차지 않았고, 병이 있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그날 이후 김씨는 김양을 볼 수 없었다. 애인을 만나볼 수 없게 되자 그는 앞이 캄캄해지고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김양의 집 근처를 매일같이 둘러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양 집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김양이 죽은 것이다. 김씨는 문상을 가서 시체가 놓인 방에 들어가 나오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례는 치러야 했다. 김양은 미아리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조용히 묻혔다. 김씨는 남들이 보지 않게 자기 방에 들어가서는 한없이 울었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도 김양이 다시 살아날리 없었고, 슬픔은 더 해졌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산소에 가서 죽은 시체나마 파오는 것이었다. 김양이 묻히고 사흘 째 되던 날 밤 김씨는 땅을 파는 연장을 가지고 애인 김양의 묘를 찾았다. 덮어 놓고 파기 시작하였지만 위의 흙이 무너지고 또 무너져서 그렇게 쉽게 관을 팔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팠을까? 괭이가 나무 관에 닿는 소리가 났다. 관을 파낸 김씨는 관을 등에 매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멀리 가져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김씨는 관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쉽게 애인을 메고 갈 수 있을까?’ 그러나 궁리를 해봤으나 해결의 방도가 나오지 않았다. 주위는 캄캄하고 먼 곳에는 무슨 짐승 우는 소리도 들렸다. 김군은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 들고, 그 관 옆에 서있기가 싫어져 나중에는 관을 버려둔 채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48-50쪽
  • 미아리 공동묘지의 외국인 미아리 공동묘지에는 외국 사람의 무덤이 삼백여개 있었다. 모두 중국인들의 무덤이었다. 1958년 무렵 서울시 당국에 의해 연고가 있는 무덤의 이장지시가 내려졌다. 자연히 한국 사람들의 무덤과 함께, 중국 사람들의 무덤도 전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장을 하는 인부들은 대목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들도 중국인 무덤의 이장은 꺼려했다. 바로 밤에만 이장하는 중국인들의 특이한 관습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인들인 해뜨기 전 이른 아침이나 저녁 늦게만 이장을 하러 왔다. 인부들이 한창 잘 시간이었다. 중국인들은 그 시간에 사무실에 찾아와 인부들을 깨우고 미리 준비한 횃불로 길을 밝혀가며 자신들이 이장할 무덤을 찾아가 작업을 했다. 잠을 못자 힘들기도 했지만 이유가 궁금해 인부 한명이 중국인에게 물으니 ‘시체가 태양을 보면 그 후손이 멸망까지는 모르지만 못살게 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대낮에 이장을 하겠다고 나타난 중국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가짜 중국인이라고 의심했다. 하지만 곧 의심을 거뒀다. 그는 무덤 위에 넓게 장막을 치고 그림자를 만들어 햇볕이 들지 않게 하고야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시체를 꺼내서 새로운 관에 담을 때도 햇볕을 쪼이지 않게 조심하라고 인부들에게 귀가 아프도록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장 하는 시간 말고도 중국과 한국의 장례 문화에는 차이가 많았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소위 ‘손 없는 날’이나 ‘아흐레나 열흘날(음력)’을 택해 이장을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특별히 가리는 날이 없다. 또 중국인들은 한국과 다르게 사람이 죽기 전에 몸을 깨끗이 닦아주고 수의를 입혔는데, 그 수의는 흰색이 아니라 일곱 빛깔을 띤 것이었다. 상주들이 검은 옷을 입는 것, 상주가 들었던 지팡이를 관 옆에 세운 채로 흙을 덮는 것, 장례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상복을 모두 벗는 것도 한국문화와는 달랐다. 문화가 달라 일어난 에피소드도 있었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처음중국 사람들이 묘를 쓸 때 일이다. 그들은 관 위에 돌을 집처럼 쌓아올려 관만 가리겠다고 했다. 관리 사무소 사람들은 그것이 묘지규칙 위반이라고 거절했다. 양측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 매장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이것을 선례로 이후의 중국인들도 모두 매장하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중국 사람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죽은 시체나마 고향에 가져가기 위해 타지에서 죽으면 땅에 묻지 않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51-53쪽
  • 미아리 야화 1 - 모래 세례에 기겁 서울의 미아리 하면 공동묘지를 연상하게 마련이다. 미아리 공동묘지 이 공동묘지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멀리 경기도 광주군언주면 반포리로 옮겨지고 그곳은 새로운 주택가가 되려고 하고 있다 한창 묘지 이장 작업이 진행 중인 미아리 공동 묘지에서 감독으로서 혹은 인부로서 마지막일을 하고 있는 묘지전속 인부들은 일하다가 쉬는 동안 이제 아주없어지는 그 묘지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슬펐던 이야기 괴상한 이야기 그리고 무서운 이야기 등으로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다. 여기 그 묘지인부 들의 잡담을 엮어본 공동묘지의 이야기. 일컬어 미아리 야화. 제일 먼저 김이라는 인부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약 일오육년전의 일이다. 삼대를 넘었을까 말까하는 어느 청년이 자기 딸의 주검을 공동묘지에 파묻었다. 청년은 죽은 딸이 첫아이이자 외딸이기 때문에 몹시도 귀여워하다가 그만 죽게되니까 거의 매일같이 틈만 있으면 자기딸 산소에 나와 눈물을 흘리고 돌아가곤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삼 사개월, 그래서 미아리 공동묘지에서는 그 사람이 화제의 인물이 되어 버렸고 또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정성껏 딸의 묘에 나와보던 그 청년이 그해 가을부터는 나오는 게 좀 뜸해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던 중 어느날 그 청년은 딸의 묘를 또 찾아왔다. 어린애가 좋아할 과자 인형 등을 잔뜩 가져왔다. 공동묘지 사람들은 저렇게 까지 딸을 사랑하나 하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날씨는 잔뜩 흐렸고 그 위에 가을비마저 보슬보슬 내릴 때 그사람은 딸의 묘앞에 가져온 물건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무엇이라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뒤 얼마나 되었을까? 그 사람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묘지사무실로 달려오더니 날좀 살려달라 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연거푸 외쳤다. 한참 후 제정신에 돌아선 듯 그 청년은 덜덜떨리는 목소리로 이날 있었던 일과 전날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권표옥씨 서울시내 청진동에 살던 사람이다. 매일같이 딸의 묘를 찾던 권씨는 어느 이른가을날 회사의 일이 바빴기 때문에 저녁나절에 딸을 찾았다. 어느 때와도 같이 딸의 묘 둘레를 한바퀴 돌고 생시의 대화처럼 혼자 있으니까 쓸쓸하지? 내가 왔으니 안심하고 놀라 너희어머니는 오늘도 바빠서 못오신단다 고 그 묘안에 있는 딸에게 말을 붙였다. 그랬더니 어디선가 아빠아빠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자기 딸의 목소리로서 들릴까 말까하는 가느다란 목소리다. 권씨는 내 귀가 잘못된게지 하고 그 목소리를 믿지 않았다. 조금 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 아버지 하고 생시엉석을 부리던 딸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바로 그 묘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같았다. 권씨는 두 번째 딸의 목소리를 듣고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딸의 묘를 남겨둔 채 권씨는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는데 이 때 무엇인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다음날은 공연한 두려운 생각에 공동묘지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딸의 산소 제초를 하여 주러 나왔을 때다. 그동안 몇 번 그곳에 나왔으나 별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권씨는 이즈음 자주 딸의 묘를 찾았었다. 제초를 끝내고 한동안 그 묘앞에 앉아 담배도 피울겸 쉬었다. 주위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고 멀리 일하는 인부 모습이 뜸뜸이 보일 정도였다. 이때 권씨 귀에는 여자 울음소리가 들렸다가 자세히 들어보니 자기딸의 울음 소리 같았다 기분이 언짢으면서도 권씨는 그 울음 소리가 어디서 들리나를 알아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묘 뒤에서 분명소리가 나기에 돌아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고 울음소리도 그치고 말았다. 한참 그곳을 지키고 있으려니까 이번에는 묘 앞쪽에서 모기 소리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봤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이날 권씨는 귀신에 홀린 사람모양되어 산을 내려왔던 것이다. 이윽고 그날이 왔다 권씨는 오랜만에 다시 딸의 산소를찾았다. 이날은 비가내리는 음산한 가을날씨였다. 권씨는 귀신에 홀린 사람모양되어 산을 내려왔던 것이다. 권씨는 가져온 제물(과자와 장난감등)을 산소앞에 내려놓았다 무릎을 꿇고 딸의 명복을 빌기시작했다. 이 순간 권씨 머리위에 모래가 끼얹어졌다. 또 모래가 날아와서는 권씨의 양 복위에까지 뿌려졌다. 권씨는 그렇지 않아도 전번일로 두려운 생각이 가시지 않고 있었는데 모래 세례까지 받고 보니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식으로 산아래 사무소 까지 도망쳐 왔다는 것이다. 그 후 권씨는 아주 정이 떨어지고 말았는지? 일여년동안 한번도 딸의 묘를 찾아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동아일보 1958. 11. 20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78
  • 미아리 야화 2 - 달려드는 괴노인 다음은 전이란 인부의 이야기다. 37년(일력 소화 12년) 소위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해 미아리 공동묘지 근처에는 지금처럼 집이 좀좀이 들어서지는 않고 군데군데 집이 한 채씩 떨어져 있었다. 이즈음 공동묘지 사무실 바로 밑에 있던 외딴 선술집(주로 묘지인부들이 자주 드나드는)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선술집에는 강원도에서 약 일 주일 전에 온 작부 오양이 있었다. 동료 작부들은 허구한 날 보는 것이 상여고 듣는 것이 곡소리이기 때문에 거의 만성이 되어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 새로운 작부 오만은 달랐다. 처음에 상여가 지나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언짢았고 다음에 봤을 때는 왜 그런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마치 황천에 가는 길목에 자기가 있는 것 같았으며 밤에는 귀신 도깨비 등이 나올 것 같은 공포에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동료 작부들을 꼭 껴안고 자야만 했다. 이러던 어느날 다른 작부들이 출타하였기 때문에 오양은 부득이 혼자 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양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을 들여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정신은 더욱 또렷해질 뿐이었다. 부스럭하는 소리만 나도 불을 켜고 주위를 살폈다. 자정쯤 되었을 때 어 여 어 여 하고 상여 지나가는 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렀다. 오양은 찬물을 끼얹은 듯 등골이 오싹하여졌다. 불을 켜지 않고는 도저히 무서워서 견딜수가 없어 등잔에 다시 성냥불을 켜대었다. 그랬더니 웬일이냐?! 문앞에 수의를 입은 노인이 하나 서있지 않은가? 기겁을 하게 놀란 오양은 악하고 소리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노인은 차츰 오양 앞으로 다가오면서 무어라 중얼댔다. 사람살류 사람살류 연거푸 소리를 쳤으나 누구 하나 와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노인은 자꾸 다가서고 오양은 뒤로 피하고 이렇게 하기를 새벽 동이 틀때까지 했다. 어디선가 닭우는 소리가 들리자 그 노인은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그 선술집 사람들은 옷에 땀이 베이고 정신이 나가 멍하니 앉아있는 오양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오양은 그 귀신을 피해 밤새도록 방안을 헤매면서 소리를 쳤건만 그 소리는 자기 혼자만이 들을 수 있던 소리로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양은 이런 일이 있은 후 병이 났고 삼일 뒤에는 다시 강원도로 가버렸다. 이 소문이 퍼지자 그 선술집에는 새로 들어오는 작부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전씨의 도깨비얘기가 끝나자 인부들은 정말 도깨비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난 공동묘지에서 2년 넘게 일했지만 도깨비 한 번 못보았네. 한 인부가 이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한 친구는 사실야 도깨비가 나오구 무섭다면 우리가 어떻게 일한단 말 야?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김이라는 인부만은 그들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씨의 지론인즉 마음을 약하게 먹었을 때는 도깨비가 나온다는 것으로 자기의 체험담을 실례로 들었다. 김씨는 사실 나도 어지간히 겁이 없어서 무서워 하는게 없지만 이렇게 전제하고 나서 말을 꺼냈다. 김씨는 그렇게 많은 산소를 보아오고 만들었지만 집근처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어떤 산소 하나는 접근하기도 싫다는 것이다. 어느날 밤 술이 취해서 집에 돌아갈 때 그 망우리 묘지가 지름길이라 싫어하는 산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택했다. 차츰 차츰 그 산소가 다가올수록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되돌아 내려오고 말았다. 또 용기를 내어 다시 그 길을 걸어 올라갔으나 그 묘가 가까워질수록 이상스런 압박감을 느껴 결국은 또 넘지를못하고 내려왔다. 그래서 이내 그 산소 앞을 지나지 못하고 말았다는데 김씨는 그 산소에 가면 무엇인가 나타나서 자기를 괴롭힐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1958. 11. 22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79
  • 미아리 야화 3 - 처녀 무덤 파헤친 총각 내가 해괴망측한 이야기 하나 할까? 박이라는 인부가 말을 꺼냈다. 8.15 해방 직후의 일이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누구인가 공동묘지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문 두들기는 소리가 연상 났지만 사무실에서 숙직하는 사람들은 잠에 취해 듣지 못했다. 가까스로 문이 열려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묘지 바로 아랫동네에 사는 부락민들이었다. 이들의 표정을 보아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였다. 성급한 한 부락민은 저기 시체가 나와있어요. 하고 산 아래쪽을 가리켜 손가락질을 한다. 이들의 말인즉 지난밤 사이에 3일 전에 쓴 어떤 처녀의 묘가 파헤쳐져 있으며 그 묘에서 약 5미터 떨어진 곳에 밀빵이 달린 관이 가르놓여져있다는 것이다. 사무소 사람과 인부들은 한걸음에 그 현장으로 달려가 보았다. 과연 산소는 파헤쳐져 있었고 그 바로 앞에는 괭이와 부삽이 그리고 약 5미터 떨어진 곳에는 밀빵이 달린관이 놓여있었다. 누가 관을 파내서 메고 가려다가 내려 놓은 것임이 짐작되었다. 사무소 사람들은 그것들을 그대로 놔둔채 인근 파출소 경찰관에게 알렸다. 그런데 그 파헤쳐진 산소에는 서울시내 영등포에 살던 김 모라는 21세 된 묘령처녀의 시체가 묻혀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미아리 공동묘지는 발끈 뒤집혔다. 경찰서 형사들이 나오는가 하면 검찰에서 검사가 나와 현장 검증을 하고, 또 신문기자 들이 몰려나왔다. 다음날, 신문에는 그 산소를 파헤쳐서 시체를 훔쳐가려던 범인을 잡았다고 보도되었고 그 범인의 신원 그리고 범행 동기와 경위 등도 상세히 밝혀졌다. 그 진상은 이러했다. 오랜 신병으로 죽은 김모양과 한 동리에 살던 역시 김이라는 사나이가 진범이었다. 김은 김양과 한동리에 살았기 때문에 김양을 자주 보았고 언젠가 부터는 연정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김은 김양과 이야기를 건너는데 성공했고 그후부터는 자주 만나기까지 했다. 사랑이 한참 무르익어갈 때 김양은 가슴 (폐병)을 앓기 시작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자 김은 김양과 하루 속히 결혼해야 될 것으로 느꼈다. 가족 을 통해 김양 부모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김양 부모는 아직 혼기도 되지 않았고, 병이 있기 때문에 결혼 같은 건 생각도 않고 있다고 한마디로 거절하고 말았다. 김은 그 말을 전해듣자 앞이 캄캄해지고 미칠 것 같았다. 애인을 만나볼 수 없는 것이 더욱 안타까와 혹시나 하여 김양 집 근처를 매일같이 왔다갔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김양 집에서는 마구 우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김양이 그만 죽은 것이다. 누구보다도 슬퍼해야 할 김군은 조상을 가서 시체가 놓인 방에 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장사를 치르게 되어 김양은 미아리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조용히 묻혔다. 김군은 남들이 보지 않게 자기 방에 들어가서는 한없이 울었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봐도 김양은 다시 되살아 날리 없었고 더욱 슬퍼질 뿐이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산소에 가서 죽은 시체나마 파오는 것이었다. 김양이 묻힌지 사흘 째 되던날 밤 김군은 땅을 파는 연장을 가지고 애인 김양의 묘를 찾았다. 덮어 놓고 파기 시작하였지만 위의 흙이 무너지고 또 무너져서 그렇게 쉽게 관을 팔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팠을까? 괭이가 나무관에 닿는 소리가 났다. 관을 파낸 김은 관을 새끼끈으로 묶었고 그 위에다가 밀빵을 해 달았다 김군은 관을 등에다 들쳐메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기 시작했으나 생각했던것보다 관이 무거워서 멀리가 낼 것 같지 않아 다시 내려놓았다. 어떻게 하면 쉽게 애인을 메고 갈 수 있을까? 궁리를 해봤으나 해결의 방도가 나오지 않았다. 주위는 캄캄하고 먼 곳에는 무슨 짐승 우는 소리도 들리고 김군은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 들어 그 관 옆에서 있기가 싫어졌고 나중에는 관을 버려둔 채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동아일보 1958. 11. 24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80
  • 미아리 야화 4 - 밤 사이에만 이장 화제는 어느 틈에 장사 지내는 이야기로 옮겨져 정이라는 인부가 중국사람들의 장사지내는 풍속에 관해 이야기 했다. 미아리 공동묘지에는 외국 사람의 묘가 3백여 개 있으나 그것은 모두 중국인들의 묘였다. 최근 시당국에서 연고 있는 묘의 이장 지시가 내렸을 때 다른 한국 사람들의 묘와 함께 중국 사람들의 묘도 연고있는 묘는 전부 다른곳으로 옮겨갔다. 이즈음 묘의 인부들은 바쁘기도 하였지만 돈벌이도 잘되었다. 그러나 그 인부들도 한 가지만은 질색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국 사람들의 이장이었다. 뭣 때문인지는 알 수 없어도 아침 일찍이 (그것도 해뜨기 전에) 그리고 저녁늦게라 야만 중국사람들은 이장하러 나왔다. 인부들이 아직 사무실에서 잠들고 있을 때 중국인들은 수왈라 수왈라하며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인부들을 깨운다. 그래서는 미리 준비하였던 횃불로 길을 밝혀 묘로가서 묘를 파기 시작한다. 또는 저녁때 해가 진 다음에 나와서 이장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인부는 중국 사람들이 전부 그러하기에 무슨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중국인의 대답인즉 시체가 태양을 보면 그 후손이 멸망까지는 모르지만 못살게 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은 대낮에 중국인이 이장을 하겠다고 왔다. 묘지사무소 사람들은 이친구는 가짜 중국인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중국인의 이장하는 것을 보려고 따라가 보았더니 역시 한국 사람들의 이장하는 식과는 달랐다. 먼저 묘 위에다가 넓다랍게 포장을 치고 그림자를 만들어 햇볕이 들지 않게 하여 놓고서 작업을 시작했다. 시체를 꺼내서 새로운 관에 담을 때도 햇볕을 쪼이지 않게 조심하라고 인부들에게 귀가 아프도록 부탁하는 것이었다. 더욱 한국사람들은 이장하는 날은 대개 소위 손이 없는 아흐레나 열흘날(음력)을 택하는데 중국사람들은 특별히 가리는 날이 없는 것이 특이하였다. 정씨는 어느 중국 상가집에 갔을 때 중국 사람들의 장사치르는 것을 자세히 보았다. 곡하는 소리, 매장하는 날이 기수일인 것, 그리고 상객들이 밤을 새우는 것 등 한국 풍속과 같은 것도 많았지만 전혀 딴판인것도 많이 있었다. 중국사람들은, 사람이 숨이 끊어지기 전에 몸을 말짱히 닦아주고 수의를 입혔으며 숨이 끊어지자 곧 시체를 부엌에다 내다 놓는다. 수의는 우리처럼 흰 빛이 아니고 모두 빛깔이 있는 것으로 한다. 홍적황남녹백자색 등 일곱 가지 빛깔의 수의를 만들어 입힌다. 즉 죽은 사람에게 좋은 옷을 입혀 호사를 시킨다는 것인데 중국인들은 평생을 통해 결혼할 때와 죽을 때 두 번 호사를 하는 풍습이 있다는 것이다. 상제들은 옷을 검게 입고 상제가 들었던 상장은 시체를 파묻을 때 관 옆에 세운 채로 흙을 덮어 파묻으며 장례를 끝마치고 돌아갈 때는 상복을 모두 벗어버린다는 것이다. 미아리 공동묘지가 생긴지 얼마 안되고 처음으로 중국인 상여가 나왔을 때 그곳 묘지사무소에서는 약간의 언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다름 아니라 중국사람들은 산소를 쓰기는 하겠지만 관을 파묻지는 않고 관 위에다 돌로 집처럼 쌓아올려 관만 보이지 않게 하겠다고 우기고 사무소 사람들은 묘지규칙 위반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중국사람들이 지고 관은 파묻도록 하였으며 그 후 다른 중국사람들도 그곳 묘지규칙을 따라 매장을 했다. 중국인들은 자기 고향이 아닌 다른 객지에 나와서 죽었을 때는 그 죽은 시체나마 고향에 가져가기 위해 결코 땅에 파묻지 않는 습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실제로서 지금도 인천에 가면 중국인들의 돌로싼 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1958. 11. 2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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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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