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역학촌
1966
서울미래유산
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에 점집들이 밀집하면서 형성된 지역을 지칭한다. 1966년 미아리고개의 도로를 확장하면서 고개의 경사를 낮추었고 야트막한 고가도로도 놓였다. 고가도로 밑에는 도로 양쪽 동네를 연결하는 길이 생겼고 행인들이 오갔는데, 이곳에 노점 점집이 들어서고 장사가 잘 되면서 주변에 많은 점집이 모여 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점성촌은 1970~80년대에 호황을 누렸는데, 1998년 IMF 사태 이후 손님이 줄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주변 재개발과 점을 보는 문화가 바뀌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는 일부만 남았는데, 이 역시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이었으므로 2014년 서울시의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동선동
  • 돈암동 예언가골목(1)
  • 홍수성 작명소
  • 철원철학관
  • 은하수여성작명사주역술원
  • 청산철학관
  • 돈암동 예언가골목(2)
  • 미아리 점성촌 안내판
  • 동양철학관
  • 개나리 여성 역학사
  • 늘푸른 철학원
  • 대한시각장애인역리학회 간판
  • 매화부인예언가
  • 1999년 미아리 점성촌(1)
  • 1999년 미아리 점성촌(2)
  • 동선동4가 미아리 역학촌
  • 미아리 점집골목
  • 지적도 : 동선동1·3·4가 일대, 1968년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彌阿里占星村
  • 이명칭: 미아리 점집, 미아리 점성촌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미아리 점성촌의 형성 철원철학관의 이도병 역학사가 남산 기슭을 떠나 동선동 미아리고개 아래의 마을로 들어온 것은 1966년 말이었다. 그해 10월 15일 돈암동과 미아리를 잇는 도로의 확장공사가 끝나면서, 미아리고갯길 폭도 8m 2차선에서 25m 4차선으로 넓혀졌다. 고개의 경사를 낮추기 위해 고갯마루를 깎아내렸고 야트막한 고가도로도 놓았다. 그리하여 고가도로 밑에는 도로 양쪽 동네를 연결하는 굴이 생겨서 행인들이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이도병역학사는 이 굴다리 밑에 노점을 차리고 영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찾아오는 손님이 제법 많았다. 소문을 듣고 다른 역학사들도 하나 둘 이곳으로 들어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도병 역학사는 손님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자신이 용해서라기보다도 미아리고개 아래가 행인들이 자주 오가는 장소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가 전차종점이거든. 지하철 다니기 전에는 을지로부터 여기까지 오는 전차 노선이 있었어요. 청계천 건너 을지로4가에서 타면 여기까지 오는 거죠. 전차가 여기까지 오니까 정릉, 삼양동, 우이동 이런 데 사람들이 여기까지 버스타고 와서 전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거야. 전차가 더 싸니까. 그때 전차 요금이 5원인가 10원인가 했거든. 그거 타고 을지로 가서을지로에서 영등포나 서대문으로 갔었죠.” ― 이도병 역학사(철원철학관) 1988년 미아리고개 점성촌의 한 역학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같은 점집은 시골사람,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 세상살이 힘겨운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길목이어야 합니다. 과거 남산 언덕배기에 점집이 많았던 것은 그곳이 어렵고 힘없는 변두리 서울 사람들의 휴식처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돼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사람들한테 신통하단 소릴 들어야 잘사는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겁니다.” ― 『한겨레신문』1988. 9. 28. 1970-80년대만 해도 미아리고개 아래 지금의 성신여대입구역 교차로 부근은 미아리고개 너머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 도심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길목이었다. 아침이면 시내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저녁이면 미아리, 아리랑고개 너머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고 그 인구가 시 외곽으로 흘러넘치던 시기, 미아리고개는 외곽과 중심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점집이 들어서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미아리고개 아래 점집을 차리기 좋았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한 방세 덕분이었다. 당시 미아리고개를 넘는 만원버스들은 가파른 경사 때문에 엔진에 무리를 일으켜 시커면 연기와 배기가스를 마구 뿜어댔다. 매연으로 도로 양옆의 집들에서는 마당에 빨래도 내어 널지 못할 지경이었다. 소음도 대단했다. 살림집을 차리기에 부적당한 이곳의 방세가 싼 건 당연했다. 많은 행인과 저렴한 방세. 미아리고개 밑 동선동은 역학사들이 입주하기에 안성맞춤의 공간이었다. 더구나 이미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널리 알려져 미아리고개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도 높았기 때문에 ‘미아리 점성촌’이라는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잘 잊어버릴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이런 좋은 영업조건때문에 미아리고개 아래 점집 수는 계속 늘어나 1980년대 중반에는 70여 호의 점집이 모인 전국 최대의 점성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35
  • 미아리고개 점성촌의 전성기, 그리고 IMF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경제가 유례 없는 호황을 누리자 미아리고개 점집들도 이에 힘입어 전성기를 누렸다. 용하다는 입소문과 미아리의 유명세를 듣고 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택시를 타고 ‘미아리 가주세요’하면 으레 동선동 미아리 점성촌으로 데려다 주던 시절이었다. 연초나 입시철, 선거철과 같은 대목에는 한 집에 30~40명이 찾아와 쉴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고객은 주로 30~50대 주부들로 그중에는 단골이 꽤 있어서 한 달이 멀다하고 찾아와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인 관광객도 여행사의 소개로 자주 찾았다. 가끔은 젊은 사람들도 끼리끼리 어울려 점성촌을 찾았다. 대학생들, 결혼을 앞둔 연인들, 가끔은 술 한 잔 걸친 친구들끼리 와서 막연한 호기심에 점집 문을 두드리곤 했다. 윤대녕의 단편소설 「January 9,1993. 미아리통신」에는 그렇게 무심코 점집을 찾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 시절 간혹 신문에서는 선거철을 앞두고 점집을 찾는 정치인들을 비꼬는 기사가 오르기도 했다. 정치에 막 입문한 정치 초년생부터 정당의 중진 의원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점성촌을 찾았다. 당사자가 직접 점집을 찾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들의 부인들이 와서 점을 보고 갔다. 정치 초년생들의 경우에는 공천이나 선거에서의 당락 여부, 선거운동 방법 등을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고, 권력 중심부 있는 사람들이나 당내의 중진들은 차기 대권주자로 누가 떠오를지 물어보는 수가 많았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복채는 일반인에 비해 훨씬 비쌌다. 1996년에 끝난 미아로 확장공사는 점성촌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도로폭을 기존 5차선 25m에서 8차선 35m로 넓히면서 도로 남쪽의 건물들을 철거했다. 이 과정에서 점집들도 많이 헐렸다. 현재 도로 남쪽의 점집 간판들의 수가 북쪽보다 유난히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듬해인 1997년 말에 터진 IMF 외환위기 사태는 점성촌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흔히 경제가 어려우면 괴로운 일도 많으니까 그럴 때 오히려 점집이 잘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막상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 점집을 찾고 싶은 마음의 여유조차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극심한 불황 속에서 점성촌을 찾는 발길이 하나 둘 끊기자, 문을 닫거나 이사하는 점집이 늘어났다. 손님이 준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IMF가 터지자 실직자가 급증했고, 그들 가운데는 역학을 배워 점집을 차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시각장애인 역학사들과 미아리고개 점성촌의 입지도 줄어갔다. “어느날 IMF가 터진 거야. 그러니까 실업자가 대량 생산이 되었잖아. 돈 버는 게 귀천이 없어졌어. 대학 교수, 회사 사장도 점쟁이 일을 하게 되었어. 점쟁이는 맹인들이나 정신적으로 특수한 만신 무당이나 하는 직업이었는데, 엘리트들이 점 세계에 들어오게 된 거야. 역학은 하이클래스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책 몇 번 보면 쉽게 접근할 수 있거든. 역서가 어려운 학문이긴 하지만 말이지. 그래서 맹인 역학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이 줄었지. 게다가 인터넷이 발달해서 컴퓨터만 다다닥 두드리면 가만히 앉아서 점 보잖아. 손님이 이래저래 계속 준단 말이지…….” ― 심남용 역학사(청산철학관)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36
  • 2014년 미아리 점성촌 지도 *박수진 외 4인, 2020,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성북문화원, 220쪽 참고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2
  • 성신여대입구역 사거리에서 미아리고개 쪽으로 이어진 고가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길 양옆으로 커다랗고 선명한 간판을 단 낮은 단층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역학사 마을, 미아리 점성촌이다. 앞에 ‘미아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해서 이 마을이 강북구의 미아동에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행정구역상으로 이곳은 강북구가 아니라 성북구의 동선동 3가와 4가에 속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아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순전히 마을 동북쪽에 버티고 있는 미아리고개 때문이다. 6.25전쟁 이후 미아리고개라는 지명이 전국적으로 워낙 많이 알려진 탓에 고개 근처와 그 너머의 지역까지 모두 미아리라고 통칭하였던 그 시절, 고개 초입에 생겨났던 역학사들의 마을에도 사람들은 미아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점성촌의 탄생은 오늘날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왕복 8차선 고가도로와 관련이 깊다. 이 도로가 처음 만들어진 때는 1966년 10월이다. 고가도로는 비좁은 고갯길을 넓히고 가파른 경사를 낮추어 고개 양편의 교통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고갯마루의 암석을 5m가량 깎고 고개 초입에 옹벽을 쌓아 지대를 높여 고개를 오르내리는 버스와 우마차의 부담의 덜어주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고가도로의 건설과 동시에 그 밑에는 도로 양편을 연결하는 굴다리가 하나 생겼는데, 바로 이 굴다리가 미아리 점성촌이 탄생한 장소이다. 굴다리가 생기고 몇 달 안된 어느 날, 지금은 철원철학관을 운영하고 있는 시각장애인 역학사 이도병 씨가 이 굴다리로 들어와 노점을 차리고 손님을 받았다. 미아리고개 아래에 문을 연 첫 점집이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30-131쪽
  • ­ 미아리 점성촌만의 특색이 있다면 뭘까요? 여기만의 자랑은 다른 거 아니예요. 요즘은 강남이고 홍대입구고 가면 사주카페 이런 것도 많이 생기고, 인터넷으로도 금방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못 보니까 보지 않고도 그 사람 사주를 맞춰주는 거, 그것이 우리 실력이고 자랑이죠. 사주보면 그 사람 성품, 직업 이런 거를 거의 파악을 하니까…… 그런 걸 자랑할 수가 있죠. 눈으로 못 보고도 알 수 있다는거. 눈뜬 사람은 눈으로 그 사람 차림새 같은 것을 보고 어느 정도 때리고 하잖아요. 우리는 못 보고도 맞추니까. 우리 미아리의 자랑은 그렇죠.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91쪽
  • 집값이 싸고 목이 좋은 미아리고개 아래 동선동으로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점집을 차렸다. 그리하여 1978년 무렵에는 약 40여 개의 점집이 밀집한 전국 최대의 점성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경제가 호황을 맞은 1980년대에는 미아리 점성촌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이미 7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선 점성촌에는 주 고객인 30~40대의 주부들뿐 아니라 고급관료, 정치인, 재벌급 사장, 연예인 들도 은밀히 찾아왔다. 일본인 관광객도 심심찮게 방문했다. 택시를 타고 ‘미아리 가 주세요’하면 으레 미아리 점성촌에 내려다 주던 시절이었다. 하루 평균 한 가게에 30여 명의 손님이 들어왔고, 입시철이나 신년에는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그러던 미아리 점성촌의 기세가 한풀 수그러진 것은 1997년 IMF 외환 위기가 오면서부터이다.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미아리 점성촌을 찾는 발길도 뜸해졌다. 더구나 젊은이들에게는 90년대 신촌이나 강남 등지에 새로 들어선 타로점, 사주카페 등의 인기가 높아 갔다. 미아리 점성촌은 매년 손님 수와 수입이 줄어들었다. 노환으로 그만 세상을 뜬 역학사들도 있었다. 해가 갈수록 점집 수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점집이 80년대의 절반에 불과한 36개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옛날의 화려한 영화는 빛이 바랬을지라도 아직까지 전국에서 가장 큰 역학사 마을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32-134쪽
  • 흔히들 ‘점’이나 ‘점집’이라고 하면 매서운 얼굴로 손님을 노려보는 무당, 또 무당 뒤에 모셔놓은 신상이나 금박으로 장식한 화려한 불화 등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아니면 들어오는 손님에게 막무가내로 반말을 내뱉거나, 보는 즉시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술술 읊어대는 신통력 있는 점쟁이를 떠올린다. ‘처녀보살’, ‘애기무당’, ‘○○장군’등도 점집 대문 앞에 붙여진 꽤 익숙한 ‘홍보 문구’이다. 그러나 미아리 점성촌에서는 이와 같은 ‘영험한’점집의 흔한 이미지를 찾기 어렵다. 미아리 점성촌의 역학사들 대부분은 신점神占이나 영점靈占이 아니라 『주역周易』을 위주로 한 역학易學을 배워 점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보살이니, 무당이니, 장군이니 하는 신적 존재를 표현하는 화려한 그림과 문구로 입구를 장식할 필요가 없다. 대신 ‘○○철학관’이라는 간판이 가장 많고 들어가는 문 옆에 사주, 작명, 신수, 택일 등 점보는 종목만을 적어두었을 뿐이다. 미아리 점성촌에 자리잡은 역학사들은 어렸을 때 또는 시력을 잃었을 때부터 전문적으로 역학을 배우고 익혀서 점을 친다.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자녀가 시각장애인이 되면 그 부모는 아이가 역학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서 점복을 업으로 삼아 생계를 잇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이러한 풍속을 적극 권장하고 제도적으로도 지원해 주었다. 이 때문에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최근에는 안마를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점치는 일은 시각장애인들이 도맡아서 하는 직업으로 여기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34-137쪽
  • 2014년 12월 31일 미아리 점성촌은 서울시가 선정하는 ‘미래유산’에 꼽혔다. 미래유산이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미래 세대에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미래 세대에 전달될 미아리 점성촌은 가치는 무엇일까? 한마디 말로 정의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점집 대문을 슬그머니 여는 마음의 방향이 제각기이듯 미아리 점성촌에 대한 기억도 저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41쪽
  • 1970~80년대만 해도 미아리고개 아래 지금의 성신여대입구역 교차로 부근은 미아리고개 너머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 도심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길목이었다. 아침이면 시내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저녁이면 미아리, 아리랑고개 너머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고 그 인구가 시 외곽으로 흘러넘치던 시기, 미아리고개는 외곽과 중심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점집이 들어서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미아리고개 아래 점집을 차리기 좋았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한 방세 덕분이었다. 당시 미아리고개를 넘는 만원버스들은 가파른 경사 때문에 엔진에 무리를 일으켜 시커먼 연기와 배기가스를 마구 뿜어댔다.12 매연으로 도로 양옆의 집들에서는 마당에 빨래도 내어 널지 못할 지경이었다. 소음도 대단했다. 살림집을 차리기에 부적당한 이곳의 방세가 싼 건 당연했다. 많은 행인과 저렴한 방세. 미아리고개 밑 동선동은 역학사들이 입주하기에 안성맞춤의 공간이었다. 더구나 이미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널리 알려져 미아리고개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도 높았기 때문에 ‘미아리 점성촌’이라는 이름은 한 번 들으면 잘 잊어버릴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이런 좋은 영업 조건 때문에 미아리고개 아래 점집 수는 계속 늘어나 1980년대 중반에는 70여 호의 점집이 모인 전국 최대의 점성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79-180쪽
  •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경제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자 미아리고개 점집들도 이에 힘입어 전성기를 누렸다. 용하다는 입소문과 미아리의 유명세를 듣고 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택시를 타고 ‘미아리 가 주세요’하면 으레 동선동 미아리 점성촌으로 데려다 주던 시절이었다. 연초나 입시철, 선거철과 같은 대목에는 한 집에 30~40명이 찾아와 쉴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고객은 주로 30~50대 주부들로 그 중에는 단골이 꽤 있어서 한 달이 멀다하고 찾아와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인 관광객도 여행사의 소개로 자주 찾았다. 가끔은 젊은 사람들도 끼리끼리 어울려 점성촌을 찾았다. 대학생들, 결혼을 앞둔 연인들, 가끔은 술 한 잔 걸친 친구들끼리 와서 막연한 호기심에 점집 문을 두드리곤 했다. 윤대녕의 단편소설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에는 그렇게 무심코 점집을 찾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중략) 1996년에 끝난 미아로 확장공사는 점성촌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도로 폭을 기존 5차선 25m에서 8차선 35m로 넓히면서 도로 남쪽의 건물들을 철거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점집이 헐렸다. 현재 도로 남쪽의 점집 간판들의 수가 북쪽보다 유난히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듬해인 1997년 말에 터진 IMF 외환위기 사태는 점성촌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흔히 경제가 어려우면 괴로운 일도 많으니까 그럴 때 오히려 점집이 잘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막상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 점집을 찾고 싶은 마음의 여유조차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극심한 불황 속에서 점성촌을 찾는 발길이 하나 둘 끊기자, 문을 닫거나 이사하는 점집이 늘어났다. 손님이 준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IMF가 터지자 실직자가 급증했고, 그들 가운데는 역학을 배워 점집을 차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시각장애인 역학사들과 미아리고개 점성촌의 입지도 줄어갔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80-182쪽
  • 그러나 ‘역학易學’이 무엇이던가? 인간사의 변화를 예측하고 그에 대비하자는 학문이 아니던가? 미아리고개의 역학사들은 그들답게 갑자기 들이닥친 경제 불황이란 캄캄한 터널에 적응하면서 하나하나 자구책을 마련해갔다. 첫 번째, 공부를 했다. 어떤 손님이 오든지 그들의 고민과 의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효과적인 상담을 위해 역학사들은 다시 세상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역학사들은 책과 잡지를 읽고, TV와 라디오를 들었다. 최근 점복업에 막 진출한 젊은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은 심리상담사 자격증까지도 취득해서 더 가까이 손님의 입장에 다가서려고 한다. 요즈음의 점은 사주풀이나 점괘가 20%라고 하면 그 후 손님과 대화를 나누며 이뤄지는 상담은 80%정도 된다고 한다. 그만큼 점 자체보다 상담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갈수록 손님들의 고민거리가 다양해지는 세태를 따라잡기 위해 점성촌의 역학사들 또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점성촌 한켠에 자리한 성북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는 점자도서관과 심리상담사 직업교육과정을 두어 역학사들의 자기계발 노력을 돕고 있다. 두 번째, 인터넷을 이용했다. 인터넷은 열린 도구인지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새로운 용도가 발견되는 법. 처음 등장한 인터넷 운세는 오프라인 점 시장을 나눠먹는 주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은 인터넷의 새로운 용도를 발견했다. 막 역학을 배워점복업에 진출하려는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의 창업을 돕기 위한 인터넷 웹사이트를 개설한 것이다. 이름하여 ‘소리사주(www.sorisaju.com)’.이 웹사이트는 일반인들이 점성촌에 직접 가지 않고도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에게 전화로 사주 상담을 받을 수 있게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아직 점집을 개업하지 못한 역학사들에게 창업 전까지 꾸준히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세 번째, 맹인 독경의 전통을 되살렸다. 맹인 독경은 서울 지역에 남아 있는 시각장애인 특유의 전통 의식이다. 앞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맹인 독경은 가뭄이나 홍수 때 국가적인 행사로서, 사적으로는 집안에 궂은 일이 있을 때 액을 쫓거나 액을 막기 위해 치러진 의식이다. 그런데 서양 의술이 대중화되면서 독경에 대한 수요도 많이 줄어 2000년대 초반 무렵에는 독경의식의 전통도 점차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2005년 대한맹인역리학회 소속 역학사들과 여러 대학의 민속학자들, 서울시청 관계자들이 힘을 모아 맹인 독경 의식을 ‘사라져가는 전통문화 지원사업’으로 선정해 일반에 공개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후 대한맹인역리학회는 이 행사를 매년 경經의 종류를 달리해 정릉 북악당에서 치러오고 있으며, 현재 서울시지정 무형문화재 등록을 준비 중이다. 예전에는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독경업이 이제는 시각장애인 역학사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되고 있다. 이를 통해 미아리고개 점성촌은 단순히 영리 추구를 위한 점집들의 집합소가 아니라, 한국의 전통 신앙과 민속 문화를 지켜나가는 어엿한 문화 공동체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83-185쪽
  • ­ 여기로 오시게 된 건 어떤 계기가 있어선가요? 아, 계기가 있어서 온 건 아니고, 그래도 여기가 서울이랑 가깝고 해서 온 거죠. 그리고 여기가 지금도 사람이 많이 살지만 그때도 미아리 시장이 되다시피 하니까 여기와서 자리를 잡아봐야겠다 하고 왔죠. ­ 오실 때 자리를 금방 잡을 수 있었습니까? 그때(1988)만 해도 여기에 자리가 많았어요. 지금도 여기 물론 맹인들만 살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기 맹인들이 집 얻기가 상당히 힘들었거든요. 잘 안주고 근데 여기만은 안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사 오기가 쉬웠죠. (매화부인예언가, 송오순)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3
  • ­ 미아리고개 점성촌의 유래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미아리고개 점성촌의 역사에 대해 알려면, 먼저 우리나라 맹인 역술업의 역사에 대해 아셔야 합니다. (중략) 우리 맹인들은 어디든지 뭉쳐 다닙니다. 뭉쳐 다니는데 6 · 25사변 나고는 부산 영도다리 밑에 뭉쳐 있다가, 서울 수복 이후에는 남산 도쿄호텔에서 야외음악당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양동, 도동이 있어요. 야한 말로 하면 똥치굴이야 창녀촌이란 말이지. 거기가 방값이 쌌어요. 그래서 거기가 쭉 점집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 때 양동, 도동을 다 철거했거든요. 그래서 여기 돈암동으로 오게 된 겁니다. 원래 이 미아리고개는 2차선 도로였어요. 원래 높이도 저 육교 높이까지 있었어요. 박정희 때 미아리고개를 깎아 내린 거지요. 지금은 고개 오른쪽에 성신여대가 있는데 원래 거기도 다닥다닥 공동묘지 자리입니다. 그때만 해도 왼쪽 오른쪽 다 공동묘지였어요. 그래서 옛날 귀신 나오는 영화 보면 다 미아리고개예요. 그래서 여기가 집값이 싸고, 고갯마루 밑이고, 시내도 가까워서 우리 시각장애인들이 모이기에 좋은 조건들을 갖추었습니다. 비용 저렴해, 귀신이 나오니까 점하고 약간 관련이 있어, 이런 환경이니까 점집들이 들어서기에 좋았단 말이지요. 그런데 마침 그 깃발을 들게 된 게…… 우리 회원 중에 한 분이 여기 먼저 와서 영업을 했는데 잘 되는 겁니다. 한 회원이 들어와 영업이 잘 되니까 너도 나도 들어와서 영업을 하게 돼서 여기가 집성촌이 된 겁니다. 6 · 25 또 이후의 개발, 4 · 19혁명 등 민족적인 변화 과정을 통해서 남산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요. 많은 때는 200집까지 되었어요. 미아리고개 주변에 다닥다닥 모여 시각장애인들이 모여 점을 쳤는데. 1994년 도로확장 때 저쪽을 다 철거해 버린 거예요. (중략) IMF가 터지니까 실업자가 대량 생산이 되었잖아요. 그렇게 되니까 돈 버는 게 귀천이 없어졌어요. 대학 교수, 회사 사장도 점쟁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 점쟁이는 맹인들이나 정신적으로 특수한 만신 무당이나 하는 직업이었는데, 엘리트들이 점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다 1998년 IMF 때문입니다. 역학은 하이클라스에 있는 사람들이 책 몇 번 보면 쉽게 접근할 수 있거든요. 역서가 어려운 학문이긴 하지만. 그래서맹인들이 직업을 많이 빼앗기고 이렇다보니 영업이 잘 안될거 아니우. 인터넷도 발달해서 컴퓨터만 다다닥 두드리면 가만히 앉아서 점 볼 수 있잖아요. 손님이 이래저래 계속 줄어든단 말이지요. 그래서 자꾸 쪼그라들어 옛날 200집까지 했었는데 이제는 40~50집 될까 말까 합니다. 이게 돈암동의 변천사입니다. (청산철학관, 심남용)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4
  • ­ 예전 미아리점성촌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옛날에는 차만 한 대 지나가도 먼지가 확 일어나서 아주 살기가 불편한 곳이었어요. 그래도 손님들이 그럭저럭 있고 여기 일대가 집 값이 싸니까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예전엔 한 60여 가구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서 30여집 밖에 안남았죠. 예전에 성북구에서 여기 들어오는 입구에 점성촌이라는 간판을 만들어서 달아줬었고, 내가 회장으로 있었을 때에는 진영호 구청장하고 간판사업을 진행했었죠. 철학관간판들이 난잡하게 되어있어서 오방색으로 간판을 통일해서 바꿔 달았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다시 흐지부지 되어서 무질서하게 변했어요. (홍수성작명소, 홍수성)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5
  • ­ 미아리점성촌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같은 역리학회 회원들이기 때문에 서로 대화가 되죠. 토론도 하고. 예를 들어서 이런 손님들이 왔는데 이렇더라, 아니다 그러면서 토론을 하죠.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225쪽
  • 미아리고개에는 점성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남산공원 입구에 자리잡고 있던 ‘점장이촌’이 도시미화사업으로 밀려나면서 이들이 미아리고개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남산공원 입구의 점장이촌이 도시미화에 밀려 없어졌다. 서울시는 지난 14일 남대문에서 남산공원을 올라가는 관광도로변에 늘어섰던 관상소, 작명소, 복술가등 점장이집 정비계획에 따라 모두 철거했다. 1천7천80만원의 예산으로 철거한 이 점장이촌은 6.25동란이후 생겨나 이들의 집결지를 이뤘었다. <보건통계연보>를 살펴보면 국가는 1959년부터 점성가들을 ‘미신업자’라는 이름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1970년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미신’을 배격해야 할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점성가들은 남산의 자연생태계와 도시민의 휴식공간을 오염시키는 근원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남산일대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던 점성가촌을 건전한 도시질서 저해와 관광활성화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철거했다. 이들 ‘점성가’들은 남산을 벗어나 서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가 지금의 성북구 동선2동에 모여들게 되었는데, <서울통계연보>에 따르면 1978년에는 서울 전 지역 중에 가장 많은 점성가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후에 맹인 점복촌이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오늘날의 집단 점성가촌이 되기에 이르렀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88-89쪽
  • ○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성북구의 명소 성북구의 명소 90 외국 관광객도 찾느 국내 최대의 점성촌 - 성북구 동선2동은 점을 치는 업소들이 한데 몰려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점성촌. 이곳은 미아리고개 양 옆에 있어 미아리 점집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전쟁 이전에 종로3가에 집단 거주하던 맹인 점술가들이 남산 주변 정비로 흩어졌다가 미아리고개 주변에 정착하면서 생기게 되었다. 이곳은 시각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이 집단거주지역을 형성, 생활하는 공간으로 많은 내·외국인이 찾아오는 생활 명소로 이름이 높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53쪽
  • 미아리 점집의 경우 앞서 언급했듯 1960년대 서울의 도시화 계획이 추진되면서 서울 곳곳에 위치했던 점집들이 이주해온 경우였다. 미아리는 서울의 도심지역과 변두리를 연결해 주는 주요지역이면서도 집값이나 방값이 그리 비싼 지역이 아니었으며, 비탈진 미아리고개를 오르내리는 버스들의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 찬 공해지역이었기 때문에 주거지역으로는본래부터 적당치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점복과 무속신앙은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 세상살이가 힘겨운 사람들이 쉽게 지나쳐야 하는 길목에 수요가 많았다. 예전에는 주로 서울의 남산에 위치하였던 점집들은 서울시의 미관을 위해 대거 철거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점집은 앞서 말한 지리적 이점에 근거하여 미아리 지역에 밀집하게 되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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