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역학촌/기사
1966
서울미래유산
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의 점집 밀집 지역에 관한 신문기사의 모음이다. 기사에서 다룬 내용들을 보면, 점성촌이 활황을 누린 1970년대 기사부터 수록되었는데, 특히 80년대엔 점집들에 손님이 넘쳤고 선거, 입시, 당선, 합격 등에 관한 다양한 관심과 기원이 소개되었다. 1998년 IMF 직후에는 개인적인 관심 외에도 위기에 놓인 나라의 운세까지 점 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인터넷으로 점을 치고, 점집의 형태나 운영도 다양해지는 등 새로운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점시장’이 조용히 늙어가고 있다는 기사까지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동선동
  • 미아리 점성촌 안내판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미아리 점성촌/기사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1978년 2월 미아리 점성촌 취재기<占(점) 성행> 서울 성북구 동선동, 중구 남대문로 남산 기슭, 서대문구 충정로 ․ 의주로, 종로구, 통인동 ․ 내자동 등 어느 곳에나 즐비한 운명철학원, 예언의 집, 작명소마다 줄을 잇는다. 적게는 1천원부터 최고 3~4만원씩에 앞날을 물어보는 손님들은 잘보는 운명철학가를 만나기 위해 5시간이나 기다려야 되는 경우도 있고 자가용을 타고와 만날 시간을 예약하거나 초대해 가기도 한다. 성북구 돈암동 로터리에서 미아리고개로 오르는 고가도로 양옆에 늘어선 40여개의 운명철학관, 천도화운명원, 봉선화처녀철학관, 처녀학사운명감정원, 현대 예언 인생 컴퓨터 등 내건 간판도 요란스럽다. 집집마다 두 평 남짓한 방안에 10여명의 손님이 꽉들어차 점술가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고 방밖 마루턱에도 5,6명의 대기자들이 진을 치고 앉아 순서를 기다리기도 한다. 동아일보 1978. 2. 4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38
  • 1978년 4월 미아리 점성촌 취재기 <서울凹凸(요철) (18) 東仙洞(동선동) 運命哲學街(운명철학가)> 한 많은 미아리고개를 마악 넘기 직전에 나는 택시에서 내렸다. “저길 보세요. 간판들이 붙어있지요. 취재 나왔다고 얘기하면 아마 돌아앉을지도 몰라요.” 자신있다는 택시운전사의 말에 나는 겁을 먹는다. 나름대로 궁리해 보았던 내 취재방법도 터무니 없음을 느낀다. 에라, 모르겠다. 복채를 각오하고 딱한 손님으로 가장해 쳐들어가자. 내 정체를 알아낸다면 그들은 귀신(?)이어서 진짜 운명판단가일테고, 모른다면 나중에 슬슬 구슬려서 이곳 반문명의 신비한 권위의 정체를 벗겨낼 터이고. 어느 집으로 먼저 들어갈까. 「계룡산」,「백일홍」,「거북집」,「개성」,「봉선화」 아크릴 간판이 즐비한 20여 채의 맹인복술가 중에서 무턱대고 한 집을 택했다. (중략) 30년을 이 동네에서 대표자 격으로 군림하고 있는 K운명판단소 조태혁씨(52)는 서울의 유명동인 동선동4가 맹인촌의 점술이 컴퓨터보다 정확하다며 자신만만하다. “우리는 이제 복술을 신비의 철학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과학 그 자체거든요. 미신이라니요. 천만에. 어디, 나한테서 틀린 점괘 받았다는 서울사람 나서봐요.” 90%의 적중율을 자랑한단다. 그리고 서울의 유명한 모모 인사들이 이 곳의 단골손님이란다. 그렇지만 내가 그의 말을 모두 믿고 확인할 길은 없다. 정작 과학적인 프로테이지를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또한 그들 맹인들의 편리를 위해 음양오행 원형이정 고리해석들이 적힌 맹인용 점선문자판을 만들고 있더라. 이곳의 복술소는 20여개소. 작명 하나 하는데 5천원. 매 복술가를 찾는 손님의 숫자는 하루 30명꼴. 그러니가 6백명의 서울시민이 매일 바뀌어 점치러오는 셈이다. 서울은 답답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인가. 남녀 비율은 반반이며, 계절을 타는 기업(?)은 아니란다. 굳이 시기적 특색을 들자면 정초의 재수점, 신학기의 학생과 선택점, 부동산 투기바람을 탄 복부인들의 재수점, 봄철의 궁합점, 입후보자들의 당락예언점 등이 있으며 신생아의 작명이나 새 기업체의 상호를 짓는 일 등 이곳의 문턱은 닳기가 급하다. 제 앞은 못보지만 남의 앞날은 예견한다는 동선동4가 맹인 복술촌. 문명이 발달할수록 복술업이 더욱 성행하는 이 요상한 세계적 추세는 어인 일인가. 동아일보 1978. 4. 6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39
  • 1978년 10월 미아리 점성촌 취재기<占(점) 혹시나…의女性心理(여성심리) (1) 서울의 占術街(점술가)> 미아리고개 아래, 30여명의 맹인 점집이 낮은 지붕을 맞대고 있고 관상사주집이더러 섞여 있는 점복가. 이곳의 특색은 판수가 산통에서 산가지를 뽑아 점치는 육효점, 육문점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이다. 한 골목에 깊숙이 자리잡은 Y관상집. 맹인집이 아님을 확인하고 점방으로 들어가니 세 여인이 점을 보고 있다. (중략) 서울에서 비교적 많이 몰려 잇는 점동네로는 적선동, 통의동, 체부동, 내자동일대를 들수 있는데 이곳의 특징은 이름을 풀어 운명을 점치는 방법이다. 이곳 외에 미아리 동선동4가 종로5,6가, 광희동, 신당동, 숭인동 일대 창신동, 인형동, 초동, 남대문 회현동 일대 정릉, 불광동 등에 점복가들이 비교적 몰려있다. 동아일보 1978. 10. 19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40
  • 점에 약한 여심 생계에 자신이 없는 영세민이나 병약자 혹은 일부 유한부인들이 고객의 대종이지만 요즘은 여대생들에게도 크게 번지고 있다. “한다는 점장이를 찾아 미아리, 의정부, 개봉동 등 안 가본 데가 없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이 모 여대생의 얘기. 동아일보 1978. 6. 10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41
  • 1984년 6월 미아리 점성촌 취재기<서울25時(시) <12> 「運勢(운세)」알아보는成市(성시)「占術(점술)거리」> 수도 서울, 인구 9백50만의 거대도시 서울에서 ‘전조 탁선 예언 관상 등으로 초인적인 인간과 접촉하여 미지의 미래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는 점이 성행한다. 길흉 화복을 점을 통해 알아보려는 사람이 줄지 않고 있다. 성북구 동선동에서 미아리고개로 넘어가는 길 왼쪽, 빨간 기와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선 점치는 동네의 최역학관. 40대 부인이 택시에서 내려 이집으로 들어섰다. 3평 정도의 방안에는 남자 맹인 최씨(58)가 검은 안경을 끼고 책상 앞에 앉았고 책상 위에는 대여섯권의 점자책과 10cm정도 크기의 나무거북, 5cm정도의 은색 쇠통이 놓여있다. 벽에는 청룡을 탄 관음보살과 언월도를 들고 그를 호위하는 관운장이 그려진 폭 1.5m, 길이 2m 가량의 탱화가 걸려있다. (중략) 미아리고개에는 철학관, 예언점성가, 역학관 등의 이름으로 개업하고 있는 복사, 복인, 복자, 일자, 점자가 50여명이나 몰려있다. 대부분 맹인들이다. 이중 10여명은 괜찮은 수입을 올리나 20여명은 생활보호대상자로 힘들게 살아가기도 한다. 한국맹인역리학회 서울지부장 송춘식씨(48)는 “미아리 점성촌은 60년대 말에 형성됐다”면서 “흩어져 있으면 손님들이 찾기 힘들고 맹인 점성가들의 활동이 불편해 모여살게 된 것” 이라고 말했다. 서울에는 현재 213명(전국 6백여명)의 맹인점술인이 있다. 맹인 아닌 역학인들도 7백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자기집이나 여관 등을 근거로 영업하고 있는데 일부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수입이 괜찮다. 유명점성가와 비슷한 이름을 쓰는 사람도 있다. 보통사람의 신수보기나 작명에는 잘 응해주지 않고 제왕이나 된 듯 손님에게 반말에 욕설 섞인 고함을 질러대는 역학인도 있다. 동아일보 1984. 6. 19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42
  • 1985년 1월 미아리 점성촌 취재기<애간장타는 선거·入試(입시)철 占(점)집마다 成市(성시) 當選運(당선운) 合格運(합격운)보려 巨額(거액)복채 선뜻>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점술가촌에 모여 있는 50여 군데의 역학관에도 요즈음 대입 합격과 총선 당선운을 점치려는 부인들이 많이 찾고 있는데 고객이 많은 집은 하루 10~30명씩이 몰리고 있다는 것. 미아리에서는 정치점보다는 합격점을 보는 사람이 많이 찾고 있다. 이곳 B역학관 점술가 송씨는 “지난 연말까지는 합격운을 보려는 사람들은 하루 한두명씩 밖에 찾아오질 않았으나 새해들어 갑자기 늘어 매일 7~8명씩 찾아 오고 있어 대학 입시가 끝날 때 까지는 지난 해 보다 많은 수가 찾아올 것 같다” 고 말했다. 동아일보 1985. 1. 7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43
  • 1986년 1월 미아리 점성촌 취재기<"落花無春(낙화무춘)이니 祕方(비방)을…" 大入(대입)지원 學父母(학부모)들 안달 占術家(점술가)대목> 대학입학원서 마감을 이틀 앞둔 7일 오후 <점술가 거리> 로 널리 알려진 서울 미아리고개 일대의 50여 군데의 운명철학원과 역술원에는 학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곳을 찾아와 입시점을 본 학부모들은 점괘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 표정들이었다. 오후 1시경 이곳 C철학관을 찾아온 한 어머니는 이 철학관 주인(47)과 마주앉자마자 딸의 생년월일과 이름 등을 대고 입시운을 물었다. “꼭 합격하려면 어느 대학에 가야 할까요?” “그 정도 점수면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셔도 괜찮을텐데요?” “점괘에 점수도 나오나요?” “대략 230점은 넘을 것 같은 점괜데요?” 딸의 학력고사점수가 233점이라는 이 어머니는 놀랍다는 듯 한결 솔깃한 표정으로 구체적인 질문공세를 폈다. 학생과 학교의 방향으로 봐 A대학이 <연이 맞는다>는 점괘대로 원서를 접수시키기로 작정, 홀가분한 표정으로 복채를 두둑이 내고 돌아갔다. 오후 3시경 한 재수생의 형이 주위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며 Y철학관의 문을 두드렸다. “동생이 지난해 떨어졌는데 올해는 운세가 어떻겠습니까?” 종이에 적힌 재수생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놋쇠 산통을 열심히 흔든 Y철학관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낙화 무춘의 운세니 힘들겠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럼 어떻게하면 좋겠습니까” 초조해진 재수생의 형이 묻자 철학관 주인은 근엄한 표정으로 “비방을 써야한다”며 부적을 몸에 지닐 것을 권유했다. 이에 재수생의 형은 “가족과 상의해본 뒤 다시 찾아뵙겠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철학관을 나섰다. 이날 미아리고개 일대에 입시점을 보러온 학부모들 중에는 입학 원서를 사들고 1,2,3지망을 점지해 달라고 매달리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미달학과를 가르쳐달라”고 단도 직입적으로 말하는 아버지도 있었다. 용하다고 소문이 난 점장이 들에게는 최근 하루평균 30~40여명이 입시점을 보러 오고 있으며 며칠 앞서 예약, 번호표를 받고 대기해야 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런 현상은 입시철마다 계속된 연례 행사다. 원서 마감 직전까지 <운과 요행>을 알아내려고 초조해하는 학부모들의 심경도 이해는 가지만 무언가 잘못된 풍속도를 보는 느낌이다. 서울대 종교학과의 한교수는 “현행 입시제도가 이 같은 현상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동아일보 1986. 1. 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44
  • 정치인과 점 입시철이 되면 애간장이 타는 학부모들로 점보는 집들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대학 입시 경쟁률이 여느 해보다 치열했던 올해는 특히 많은 학부모들이 철학관이 밀집해 있는 미아리를 비롯해 용하다고 소문난 복술가들을 찾았다. 자식의 진학문제로 가슴을 졸이는 학부모 못지않게 국가 대사를 논하는 정치인 가운데 상당수도 점, 사주, 관상, 풍수 등을 애용하고 있다.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정당지도자, 국회의원, 정치지망생에 이르기까지 과학이 아닌 미신으로 분류되는 점복술을 가까이하고 또 실제 정치행위에도 점괘를 대입하고 있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와 총선 등을 비롯한 주요 정치행사의 택일을 복술가에게 물어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 전 대통령은 유신을 단행하면서 그 날짜를 당시 중앙정보부 판단기획실장 김성낙씨 (유정회 1기 의원 역임, 사망)가 용하다고 소문난 세검정 모 점술가로부터 받아온 10월 17일로 정했다는 것. 박 정권 시절 중정에 근무했던 이종찬 의원(민자)은 최근 김씨는 개인사찰을 가지고 있을 정도의 독실한 불교신자로 평소 복술에도 관심이 많았다면서 10월 유신 단행 날짜는 김씨의 건의에 따라 정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동아일보 1990. 12. 21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45
  • 1995년 10월 미아리 점성촌 취재기<세기말 집단최면인가 시대가 낳은 정신병인가> 주부는 물론 신세대들도 북적거린다. 젊은 층의 점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또한 새로운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다. 「점 카페」가 속속 등장하고 컴퓨터문화에도 점의 열기가 확산되고 있다. 신세대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 급속히 번지고 있는 「점문화」의 현장을 추적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미아리 점집 골목. 행정구역상으로 성북구 동선동인 이곳에는 100여 개의 점집들이 역술원 철학관 운명감정소들의 간판을 내걸고 있다. 남자역술인들은 대개 마니산, 지리산 등의 산 이름이나 지명을, 여자 역술인들은 개나리 천도화 등의 상호를 자주 쓴다. 대부분 영업이 잘 된다. 인근 부동산 주인 이모씨는 “여기는 집주인들이 건설사들의 재개발 요구를 거절하는 특이한 곳입니다. 재개발보다는 낡은 기와집을 역술원으로 운영하는 것이 더 이익이 크거든요” 라며 이곳 풍속도를 전한다. 경향신문 1995. 10. 3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46
  • 1996년 4.11 총선을 앞두고 미아리 점성촌취재기<총선 占(점) 대목> 4.11 총선을 앞두고 서울 미아리, 신촌 등지에 몰려 있는 점집에 후보자나 가족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당락의 결과를 미리 알고 싶은 조바심 때문이다. 미아리 C철학관 심모씨(47)는 “선거결과를 물어보러 오는 정치인들이 5,6명 가량 된다” 면서 “사주만 정확히 알면 공천여부와 당락여부를 80~90%정도는 알 수 있다”고 장담했다.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여야나 노소 구분이 없다. 특히 점을 미신이라고 무시 할 것같은 30대 젊은 후보들도 이들에게 「자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동아일보 1996. 3. 2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48
  • 세계 점술가 대회<세계 점성가 한자리에> 동서양의 점성술사가 한자리에 모이는 「세계 점술가 대회」가 내년 하반기 중 서울에서 열릴 전망이다. 서울 성북구(구청장 진영호)는 12일 점성촌으로 유명한 미아리고개에서 이 대회를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지역은 현재 70여 가구 1백여 명의 맹인이 운명철학관을 운영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점성촌이다. 구는 이를 위해 다음달 준비위원회를 조직, 일정을 잡는 등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미아리고개 점성촌은 60년대말 종로3가와 남산 주변에 집단거주하던 맹인점성가들 이 하나 둘 몰려들면서 형성됐다. 동아일보 1996. 6. 14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49
  • 1999년 1월 미아리 점성촌 취재기<신년 점집의 새풍경 '나라운세가 알고싶다'> 『새해에는 나라 운세가 좀 펼까요』『경제는 언제쯤이나 좋아지고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지 먼저 알려주세요』 IMF가 신년초 점집 풍속도 마저 바꿔 놓았다. 점을 보러온 사람들이 개인 운세 못지 않게 국운이 어떻지 묻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실직이나 부도 같은 개인의 흥망성쇠가 국가의 운명과 직결돼 있음을 지난해에 절감했다는 얘기다. 서울 미아리에서 점집을 하는 김모 씨(48)는 『신정 연휴 동안 찾아온 손님들 대부분이 먼저 올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물은 뒤 자기 운세를 봐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미아리에 있는 또 다른 점집의 조모 씨도 『어떤 사람은 외국 신문기사를 들먹이며 남북관계 위기설까지 묻는 등 나라의 앞날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1999. 1. 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0
  • 2005년 5월 미아리 점성촌 취재기<“미아리에는 처녀보살 없습니다”> 오손도손 모여 앉은 ‘미아리 점성촌’의 40년 역사… 새로운 역학 트렌드의 파고에 조용히 늙어가나 서울이 급팽창하기 이전 미아리고개는 서울의 관문에 해당했다. 비록 길이 넓지도 포장도 돼 있지 않았지만 1950년대 서울의 유일한 북쪽 외곽도로였던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 때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었다.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과 서울을 지키던 한국군의 교전이 미아리고개에서 벌어졌고, 북으로 끌려가던 가족을 눈물바람으로 배웅해야 했던 곳도 미아리고개였다. 대중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도병씨 성공신화에 하나 둘 몰려 와 동선동·돈암동과 정릉을 잇는 지금의 미아로, 곧 미아리고개는 본래 되너미고개(돈암현)로 불리던 곳이었다. 유래에 대해서는 분분하다.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왔다고 하여 되너미고개가 됐다고도 하고, 서울에서 의정부로 나가는 마지막 고개로서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 고개라는 뜻으로 되너미고개라는 설도 있다. 또는 고개가 몹시 가팔라서 허기가 질 정도이기 때문에 밥을 되먹는 고개라는 말이 변했다고도 한다. 여러 가지 설을 종합해보자면, 미아리고개 곧 되너미고개는 예로부터 경사가 급한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아리에 점성촌이 들어선 것은 1966년 시각장애 역술인 이도병(64)씨가 이곳에서 복술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본래 서울에는 남산 기슭인 중구 양동 판잣집에 맹인 역술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철거를 피할 수 없게 되자 남산에 살던 이도병씨는 집값이 싸고 전차 종점이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미아리로 옮겨왔다. 1960년대 초 서울시는 미아로 확장공사를 벌이며 경사를 완만하게 만들기 위해 길 주변에 옹벽을 세웠다. 남북 방향으로 옹벽을 만들면서 동서 횡단하는 길을 그 밑으로 뚫어 자연스레 굴다리가 생겨났다. 이도병씨도 처음엔 이 굴다리 밑에 작은 의자를 하나 놓고 ‘노점’을 시작했다고 한다. 옹벽과 굴다리로 그늘지고 으슥한 ‘낮은 곳’은 시각장애 역술인들을 보듬는 ‘인공 구조물’이 된 셈이다. 굴다리 밑에서 거리에서 점을 쳤던 이도병씨의 점이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꼬였다. 개업 2년 만에 이씨는 가게를 얻어 손님을 받았고 10년 만에 꿈에 그리던 내 집 한칸을 마련했다. 당시야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이었지만 특히 생계가 막막하던 시각장애인들의 꿈이야말로 자식들 안 굶기고 남들처럼 가르치는 일이었다. 제집 마련하고 4남매 고이 길러낸 이도병씨의 ‘성공신화’에 힘입어 갈 곳 없던 동료 역술인들도 하나둘 옮겨왔다. 밤 12시 통금이 있던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름밤이면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미아리고개 도로에 앞 못 보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올라 한담을 나누는 풍경이 익숙할 정도였다고한다. 고도성장기였던 70~80년대엔 미아리도 함께 호황의 분위기를 나눠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시각장애인 역술원이 100여곳에 이를 정도로 번창했다. 현재는 1km 남짓한 도로 양편에서 70여곳이 영업 중이다. 대부분 점집과 살림집을 겸하고 있으며 역술인의 60% 정도가 자택을 소유하고 있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대한맹인역리학회의 학술이사이자 미아리고개에서 철학관을 운영하고 있는 심남용씨는 미아리고개에 점집이 번성하게 된 이유에 대해 점성학적인 풀이를 내놓았다. “미아리고개 너머엔 일제 때 조성된 한국인 전용 묘지가 있었다. 예로부터 사람의 영혼은 북으로 드나든다고 믿었는데, 서울의 북북동에 해당하는 미아리고개는 영혼이 다니는 길목 이었던 셈이다. 북쪽은 황제의 별인 자미성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북두신앙이 기대는 방위다. 사람의 영혼과 운세를 다루는 미아리 점성촌이 성행하게 된 데는 이런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결 과시하며 70여곳 영업 중 1984년 의정부에서 미아리로 옮겨온 이래 꾸준히 철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송오순(64)씨는 “점집이 많이 모여 있다 보니 딱히 단골이 없더라도 ‘미아리’만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어서 다른 곳보다 벌이가 낫다. 또한 협회(대한맹인역리학회) 회원들끼리 함께 모여살기 때문에 공부도 함께 할 수 있고 서로의 형편도 걱정해주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협회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보니 점집이 많이 몰려 있는 신촌·압구정 일대와 달리 단결이 잘된다. 나름대로 정한 원칙에 따라 ‘상도’를 준수하는 것도 특징이다. 가령 미아리 점성촌엔 다른 동네 점집 간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사’ ‘처녀보살’ ‘도령’ 등의 문구가 없다. 송오순씨는 “처녀도 아닌데 처녀라고 하거나 영험한 초능력이 있는 도사라고 내세우면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협회 차원에서 그런 표현은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앞 못 보는 사람들이니 손님이 금반지를 꼈는지 비단옷을 입었는지 알 길 없다. 단지 연월일시에 따른 사주풀이를 정직하게 말해줘야 한다. 역서에 나와 있지 않은 실언을 늘어놓는 것은 금기시된다.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부분만 말해야지 허황되게 꾸미면 안 된다.” 이들의 단결력은 이익 보호 차원에선 더욱 철저하다. 미아리 점성촌이 소문이 나면서 몇몇 비장애인들이 점집을 열려고 했지만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역술인 대부분이 집주인이기 때문에 가게를 임대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년 전엔 열혈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찾아와 ‘예수 믿으라’는 피켓 시위를 여러 날 계속하다 역술인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이들을 내쫓았다고도 전한다. 100년 전 개화기때나 지금이나 ‘미신 타파’는 미아리 점성촌에 항상 들러붙는 비판이다. 90년대 말 성북구는 미아리 점성촌을 정비하는 계획을 세웠다. 미술대학에 의뢰해 점성촌 간판을 새로 디자인하고 거리 상징물을 세울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자체가 나서서 미신숭배를 조장한다’는 기독교계 신문의 일갈에 성북구는 꼬리를 내렸다. 사업은 흐지부지됐고 담당 공무원들도 모두 자리를 옮겼다. 성북구의 한 공무원은 “기독교 신자들의 항의가 두려워 미아리 점성촌에 대해선 어떤 정비 계획도 세우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요즘 미아리 점성촌에 가면 들머리에 점성촌의 유래를 알린 간판이 서 있을 뿐이다. 가장자리를 오방색으로 꾸민 비슷한 간판들에서는 당시 중도 하차한 정비사업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정비사업, 기독교에 번번히 막히고 시각장애 안마사들이 ‘아가씨’들을 앞세운 유흥자본의 침식에 설 자리를 잃었듯, 미아리 점성촌 역시 타로카드를 비롯해 인터넷·전화를 이용한 운세풀이 등 나날이 새로워지는 ‘역학 트렌드’의 파고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 사주가 돈 많이 버는 게 아니니 딱히 돈 벌겠다는 소원이 있을 리 있나. 이제 자식들 다 키웠으니 이렇게 미아리에서 살다가 나중에 편하게 죽는 것만이 소원이지.” ‘매화부인 예언가’로 20여년을 살아온 송오순씨는 얘기 끝에 한마디 보탰다. 미아리 점성촌 또한 연 2조~3조원로 추산되는 거대한 ‘점 시장’의 한켠에서 조용히 늙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은 미아리 점성촌의 오늘과 내일을 요약한 듯 보였다. 『한겨레 21』 2005. 2. 22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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