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역학촌/인터뷰
1966
서울미래유산
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의 점집 밀집 지역에서 오랫동안 역술업에 종사했던 역학사들의 인터뷰를 모은 것이다. 현대 역술업이 주로 맹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심남용(청산철학관)의 인터뷰를 비롯하여 8명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미아리 역학촌의 출발과 전성기, 쇠락의 시기와 사회분위기 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동선동
  • 돈암동 예언가골목(1)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미아리 점성촌/인터뷰
  • 오브젝트 생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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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송오순 역학사(매화부인예언가) 인터뷰 ­ 이 점집을 언제 차리셨어요? 이 집은 1988년에 차렸어요 ­ 그때 여기서 처음 영업을 시작하셨습니까? 그런 건 아니죠. 저는 열여섯 살부터 역술업을 했어요. 경기도 연천이 고향인데 부모님 슬하에서 있다가, 스무 살 때 서울로 나와서 여러 군데 다니다가, 여기서 오래 정착했어요. 역술은 열세 살 때 처음 배웠어요. 마침 고향에 역술하시는 분이 마침 계셔서 거기서 3년을 공부했죠. (중략) ­ 오실 때 자리를 금방 잡을 수 있었습니까? 그때만 해도 여기에 자리가 많았어요. 지금도 여기 물론 맹인들만 살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기 맹인들이 집 얻기가 상당히 힘들었거든요. 잘 안주고 근데 여기만은 안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사오기가 쉬웠죠. ­ 가장 손님이 많이 올 때, 말하자면 언제가 가장 전성기였습니까? 잘 될 때는 1, 2월도 되고. 또 학생들 수능시험 볼 때 손님이 많이 찾죠. ­ 손님들이 어떤 것을 자주 물어보나요? 사주를 많이 봐요 ­ 손님들이 주로 어떤 분들이죠? 젊은 층은 주로 학생들이 진로를 묻기 위해서 오고. 입학할 땐 또 어느 학교가 좋은 가 그거 때문에 오고, 그 다음에는 이제 학교 다니면서 졸업하고 자기가 사주를 봐가지고 진로를 문의하려고 많이 오고 그렇죠. 또 사업하려는 사람은 어떤 사업을 하는게 좋은가 문의하러도 오고. 또 정치하려는 사람은 정치하면 자기가 출세를 하겠나 이걸 물어보러도 오고 그렇죠. ­ 다들 만족해서 가시나요? 그래도 제가 사주는 잘 본다고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많이 와요. 우리 집에서 사주보고 간 사람이 아 거기 아무 댁 가면 사주 잘 본다고 이렇게 해서 보내는 손님이 오고. 또 그러기 때문에 와서 보면 과연 사주를 잘 본다고. 그런 손님들이 단골이죠. ­ 미아리점성촌만의 특색이 있다면 뭘까요? 여기만의 자랑은 다른 거 아니에요. 요즘은 강남이고 홍대입구고 가면 사주카페 이런 것도 많이 생기고, 인터넷으로도 금방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못 보니까 보지 않고도 그 사람 사주를 맞춰주는 거, 그것이 우리 실력이고 자랑이죠. 사주 보면 그 사람 성품, 직업 이런 거를 거의 파악을 하니까…… 그런 걸 자랑할 수가 있죠. 눈으로도 못 보고도 알 수 있다는거. 눈뜬 사람은 눈으로 그 사람 차림새 같은 것을 보고 어느 정도 때리고 하잖아요. 우리는 못 보고도 맞추니까. 우리 미아리의 자랑은 그렇죠. ­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오나요? 예. 일본인들이 가이드 데리고 많이 옵니다. 관광 왔다가 찾아와요. 미아리 가자 이런데요. 가이드가 여기 데려다주고 자기 들어가고 싶은데 들어가게 하는데, 주로 우리집은 일본 손님들이 와요. 많은 편이에요. 나는 뭐 어디 광고도 안했지만 여기가 길에서 잘 보이니까 일본인들이 간판을 보고 간판이 아주 맘에 든다고 들어가자고 한 대요. 그렇게 와서 보고 또 아주 정말 흐뭇해 해요. (중략) ­ 앞으로 점성촌이 어떤 식으로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십니까? 우리 점은 미신이 아니고 철학이고, 이거는 심리학,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공부를 여러 가지로 다양하고 크게 해야 돼요. 역학은 정말 다른 학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그런 학문이죠. 이런 사실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3
  • 심남용 역학사(청산철학관) 인터뷰 ­ 미아리고개 점성촌의 유래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미아리고개 점성촌의 역사에 대해 알려면, 먼저 우리나라 맹인 역술업의 역사에 대해 아셔야 합니다. (중략) 이승만 대통령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말했는데 우리 맹인들은 어디든지 뭉쳐 다닙니다. 뭉쳐 다니는데 6․25사변 나고는 부산 영도다리 밑에 뭉쳐 있다가, 서울 수복 이후에는 남산 도쿄호텔에서 야외음악당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양동,도동이 있어요. 야한 말로 하면 똥치굴이야 창녀촌이란 말이지. 거기가 방값이 쌌어요. 그래서 거기가 쭉 점집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 때 양동, 도동을 다 철거했거든요. 그래서 여기 돈암동으로 오게 된겁니다. 원래 이 미아리고개는 2차선 도로였어요. 원래 높이도 저 육교 높이까지 있었어요. 박정희 때 미아리고개를 깎아내린 거지요. 지금은 고개 오른쪽에 성신여대가 있는데 원래 거기도 다닥다닥 공동묘지 자리입니다. 그때만해도 왼쪽 오른쪽 다 공동묘지였어요. 그래서 옛날 귀신나오는 영화보면 다 미아리고개에요. 그래서 여기가 집값이 싸고, 고갯마루 밑이고, 시내도 가까워서 우리 시각장애인들이 모이기에 좋은 조건들을 갖추었습니다. 비용 저렴해, 귀신이 나오니까 점하고 약간 관련이 있어, 이런 환경이니까 점집들이 들어서기에 좋았단 말이지요. 그런데 마침 그 깃발을 들게 된 게…… 우리 회원 중에 한 분이 여기 먼저 와서 영업을 했는데 잘 되는 겁니다. 한 회원이 들어와 영업이 잘 되니까 너도 나도 들어와서 영업을 하게 돼서 여기가 집성촌이 된 겁니다. 6․25 또 이후의 개발, 4․19혁명 등 민족적인 변화 과정을 통해서 남산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요. 많은 때는 200집까지 되었어요. 미아리고개 주변에 다닥다닥 모여 시각 장애인들이 모여 점을 쳤는데. 1994년 도로확장 때 저쪽을 다 철거해 버린 거에요. 문화라는 건 각주구검 식으로 한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항상 바뀐단 말이지요. 옛날 제일 좋은 것은 벼슬이고 제일 낮은 것은 장사꾼, 공돌이, 상놈이었지. 쟁이 붙은 것은 다 천민들 아니우. 그래서 왠만한 사람들은 점을 안 쳤단 말이에요. 그러나 맹인들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점을 쳤고 일부 무당이나 간섭했는데. 어느날 IMF가 터진 겁니다. IMF가 터지니까 실업자가 대량 생산이 되었잖아요. 그렇게 되니까 돈 버는 게 귀천이 없어졌어요. 대학 교수, 회사 사장도 점쟁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 점쟁이는 맹인들이나 정신적으로 특수한 만신 무당이나 하는 직업이었는데, 엘리트들이 점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다 1998년 IMF 때문입니다. 역학은 하이클라스에 있는 사람들이 책 몇 번 보면 쉽게 접근할 수 있거든요. 역서가 어려운 학문이긴하지만. 그래서 맹인들이 직업을 많이 빼앗기고 이렇다보니 영업이 잘 안될 거 아니우. 인터넷도 발달해서 컴퓨터만 다다닥 두드리면 가만히 앉아서 점 볼 수 있잖아요. 손님이 이래저래 계속 줄어든단 말이지요. 그래서 자꾸 쪼그라들어 옛날 200집까지 했었는데 이제는 40∼50집 될까 말까 합니다. 이게 돈암동의 변천사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시각장애인들은 상대방 얼굴을 전혀 몰라요. 우리는 오로지 점을 봐서 점괘 나오는 대로밖에 이야기를 못해요. 근데 내가 눈을 본다고 하면 얼굴에 개기름이 끼고 옷을 보니까 명품만 입었어. 그럼 부자에요? 아니에요? 그렇게 알고 점치는사람과 모르고 점치는 사람 중에 누가 정확할까요? 이것을 점치러 오는 사람들이 모릅니다. 앞 못보는 사람한테 가면 점괘 나오는 대로만 이야기해줘요. 그런데 보는 사람들은 눈치가 90%에요. 근데 이걸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답답하지. 근데 앞 못보니까 에이! 답답해 하고 그냥 가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게 옛날이랑 달라요. 옛날에는 우리 선배들한테 이야기 들어보면 말이죠. 으레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점치는 사람이 머리에 비듬이 버글버글하고 이가 기어다녀도 ‘아’하면 ‘아’인가 보다 ‘어’하면 ‘어’인가 보다 했었대요. 옛날에는 그랬었대요. ­ 점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운명을 감정하는 법은 세 가지 접근법이 있어요. 이치(理致)로서 접근하는 법, 수(數)로 접근하는 법, 상(相)으로 접근하는 법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상은 관상이라든가 이렇게 생각하면 되고, 수의 개념은 숫자. 그러니까 1, 2, 3, 4 같은 산수로 보면 안되요. 1은 동그라미, 2는 세모, 3은 네모 이런 개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일원이 양이가 되고 양이가 사상이 되고 사상이 팔괘가 되고 팔괘가 64괘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다수의 개념입니다. 산통에서 점괘를 뽑아서 보는 것도 다 수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각장애인들은 산통에서 점괘를 뽑아서 보는 것에 월등해요. 이 방면에서는 우리 시각장애인들을 따라올 사람이 없지요.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4
  • 홍수성 역학사(홍수성작명소) 인터뷰 ­ 예전 미아리점성촌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옛날에는 차만 한 대 지나가도 먼지가 확 일어나서 아주 살기가 불편한 곳이었어요. 그래도 손님들이 그럭저럭 있고 여기 일대가 집 값이 싸니까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예전엔 한 60여 가구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서 30여집 밖에 안남았죠. 예전에 성북구에서 여기 들어오는 입구에 점성촌이라는 간판을 만들어서 달아줬었고, 내가 회장으로 있었을 때에는 진영호 구청장하고 간판사업을 진행했었죠. 철학관간판들이 난잡하게 되어있어서 오방색으로 간판을 통일해서 바꿔 달았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다시 흐지부지 되어서 무질서하게 변했어요. (중략) ­ 언제부터 점을 봐주기 시작했습니까? 열일곱 살 때부터 시작해서 서울에 와서 제대로 간판 달고 한 것은 스물두 살 때부터였어요. 서울에 처음 자리잡은 곳은 청량리 미주아파트 건너편 쪽이었어요. 그 이후에 이사를 여러 번 다녔어요. 답십리 들어가는 입구, 청량리 경찰서 뒤편, 보문동하고 삼양동에서도 살았어요. 여기 점성촌에 들어온 것은 90년도예요.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5
  • 이미경 역학사(은하수여성작명사주역술원) 인터뷰 ­ 여기로 오신건 몇 년도 입니까? 여기에 온건 74년도 였어요. 남산에 있다가 이리로 왔죠. ­ 이리 오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서울에 중심지는 종로지만 그래도 남산만 해도 굉장히 공기도 탁하고 바로 앞 차도에 차도 많이 다녀서 애기들 키울 때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동네로 집을 사가지고 이사를 오게 됐지요. ­ 점집을 차리실때는 어떻게 상호를 내시고 주위에 홍보를 하셨나요? 열일곱 살 무렵 제가 직접 은 은, 물 하, 물 수자를 써서 지었습니다. 옛날에는 물 속이 깨끗하고 하얀 차돌이 물 깊은 곳에도 다 보였어요. 그래서 은처럼 물처럼 깨끗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리라 생각에 지었어요. 그리고 주위에 알리는 것은 가까운 데에만 가족들이 전단지를 돌렸어요. 시골에서 와서 서울 지리는 동네 외에는 잘 모르니까요. 그렇게 시작을 했죠. (중략) ­ 손님 중에 외국인들도 있나요? 외국인들이 온 적도 많죠. 일본인도 오고..중국인이나 미국인도 오고요. 그네들은 1:1로 대화가 안되니까 통역사를 데리고 오죠. 우리 식구들이 옆에서 보면 통역사가 잘 맞는다 하니까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죠. 그렇게 많이들 다녀가셨어요. ­ 요즘은 손님들이 많이 오시나요? 요즘은 제가 직업에 여념을 한다거나 신경을 쓰는게 아니고 성북복지관에서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을 하며 주 5일을 여가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지나가는 손님은 거의 못본다고 보고요. 아는 손님이 추천하는 손님과 예약하고 오시는 단골 손님 위주로 손님을 받고 있어요.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6
  • 이도병 역학사(철원철학감정소) 인터뷰 ­ 당시 서울에 오셔서 처음에 점집을 차린 곳이 어디신가요? 60년대에 처음 차렸는데 여기에서 시작했어요. 남산에도 조금 있었고 굴다리 밑에서도 66년 4월부터 9월까지 있다가 68년도에 이쪽에 조그마한 집을 얻어서 손님을 봤죠. 처음에 한 5년 간 혼자 있었어요. 그러다가 남산이 개발되면서 헐리니까 집 값이 싼 이곳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죠. 이 동네에서 사글세로 살다가 그 다음엔 전세, 그 다음엔 헌 집을 사서 내가 다 고쳤죠. 손님들이 하나둘씩 오니까 이사를 못가고 여기 에서 계속 사는거죠. ­ 그때부터 계속 자리 잡으셨으면 지금까지 오시면서 가장 손님이 많았을때는 어떤 때였나요? 손님 많을때 70년도 쯤에 70~80년도 사이에 좀 괜찮았고, 80~90년도 사이가 제일좋았죠. ­ 60년대 도심이 개발돼서 여기로 오신거잖아요. 다른쪽으로 가신 분들도 계시나요? 다른쪽으로 간 사람도 있죠. 영등포, 보문동, 용두동, 서대문 등등. ­ 그러면 여기가 유명해진 이유가 있을까요? 유명해졌다기보다도 여기가 전차종점이었거든. 전차가 을지로부터 여기까지 오니까 정릉, 삼양동, 우이동 이런데 사람들이 여기까지 버스타고 와서 전차로 갈아타고 을지로로 나갔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니까 간판을 보고 한 두 사람씩 오는거죠. (중략) ­ 여기가 최대 많았을 때는 60~100가구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100가구 못됐고 한 80세대 됐어요. 지금은 서서히 없어지고 한 50세대 될 거예요. ­ 입주를 새로 하시는 분들중에 젊은 사람도 많이 입주를 많이 하나요? 입주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젊은 사람들은 이것보다 안마를 먼저 배우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난 후에 이걸 배워서 하니까 좀 적죠.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7
  • 윤병관 역학사(늘푸른철학원) 인터뷰 ­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하셨습니까? 열여섯 살 때부터 한 1년 배운 뒤에 열아홉 살 때에 개업했어요. 햇수로는 40년, 만으로는 39년 되었네요. 배워가면서 독학을 했어요. 남의 인생을 논할려면 무한정 공부해야죠. 처음 시작한 것은 미아리고개 밑에서 했고 여러 번 옮겨다녔어요. 미아리 ․ 면목동 ․ 무악동 ․ 청량리 ․ 종암동 등지에서 했어요. 종암동에서는 옛날 우신약국 뒷편에서 했지요. 여기에 개업한 것은 2002년 6월 9일입니다. 한창 월드컵할 때였죠. ­ 상호명은 무슨 뜻으로 지으셨어요? ‘늘푸른’이라는 게 의미가 좋잖아요. 사람이 푸르게 산다…… 좋잖아요. 요새는 옛날보다 경기가 못해요. 서민경기가 좋아야 영업이 잘되거든요. 손님은 다양해요. 단골로오는 사람도 있고,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오는 사람도 있어요. (중략) ­ 외국인 손님도 오나요? 일본 사람들도 많이 오고 미국, 캐나다 사람들도 와요. 미국 사람들은 양력을 대면 음력으로 바꾸어서 점을 보지요. 외국인들이 소문 듣고 가보겠다 하면 여행사에서 통역, 가이드 붙여서 데려다주죠. 똑같이 사주 봐요. 맞든 안 맞든 그대로 이야기해주죠. 그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요. 인생 살아가는데 참고해라, 보탬이 될 것이다고 이야기해주죠. ­ 미아리점성촌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같은 역리학회 회원들이기 때문에 서로 대화가 되죠. 토론도 하고. 예를 들어서 이런 손님들이 왔는데 이렇더라, 아니다 그러면서 토론을 하죠. (중략) ­ 미아리점성촌이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한 두 가지로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어요. 첫째는 서민경제가 좋아져야죠. 둘째는 우리 스스로도 공부해서 수준을 높여야 하겠고. 여러 가지가 합쳐져야죠. 공동 토론도 많이 하고 좋은 책이 새로 나오면 같이 보기도 하면서.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8
  • 이수남 역학사(개나리역학사) 인터뷰 ­ 미아리고개에 들어오신 것은 언제입니까? 여기는 76년에 들어왔어요. 지금 한 30년이 넘었죠. 처음부터 집 상호가 개나리였어요. 우리는 두 내외가 다 눈을 못 봐요. 우리 마누라가 올해 예순여덟인데 두 내외가 다 점을 보죠. 우리 마누라는 주로 집에 점을 많이 보고. 제가 없으면 마누라가 보고. 저는 일을 많이 하러 다니죠. 점하는 사람은 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사람 병 낳게 해주는 점도 있고, 재수 없는 사람 재수 좋게 해주는 점도 있고, 횡액이라고 맞은 사람 액을 막아주는 보액(補厄)을 위한 예방도 있고, 살이 많은 사람 살풀이해 주는 예방도 있고, 명이 짧은 사람 무병장수하라는 예방도 있고. 그런 거 하러 많이 다니죠. (중략) ­ 미아리점성촌이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점성촌이 잘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오게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아직 미아리점성촌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어요. 지금 여기가 4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홍보가 잘 되어야 되요. 많이 협조해 주세요. 저희도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9
  • 이회택 역학사(동양철학관) 인터뷰 ­ 선생님은 왜 돈암동으로 오셨나요? 나는 수원 살다가 66년도에 서울에 더 잘 벌려고 왔는데 잘 안돼서 도로 내려갔다가 나중에 71년도에 이쪽으로 올라왔지요.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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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병
    분류: 인물
    시기: 일제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