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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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이다.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이후 수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진입로였기 때문에 시기별로 많은 역사상이 녹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였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 길로 왕래하였고, 그래서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되너미고개’,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이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미아리고개 너머 현 길음2동 일대에 총독부에 의해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서울로 침투했던 길이자 후퇴했던 길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던 곳으로 이산의 아픔과 고통이 서린 곳이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에는 역학촌이 성행하였는데, 도로의 확장과 주변 재개발로 옛 모습은 찾기 힘들다.
길음동 돈암동 동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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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彌阿里고개
  • 이명칭: 되너미고개, 되넘이고개, 적유현(狄逾峴), 적유령(狄踰嶺), 호유현(胡踰峴), 되너미마을, 되너미골, 되너미 재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길음동 일대

근거자료 원문

  • 미아리고개는 미아사라는 사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오랑캐들이 넘어오던 고개라고 하여 ‘되너미고개’ 혹은 적유현(狄踰峴)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동북쪽으로 가는 길목의 첫 번째 큰 고개로, 한양으로 오는 마지막 관문이었으며 많은 사람과 물자가 넘어오는 고개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뭇 사람들의 눈물이 어린 고개로 바뀌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미아리고개는 서울의 최후 방어선으로서 인민군과 한국군의 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수많은 지식인, 애국지사들이 줄줄이 묶여 미아리고개를 통해 북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피난민들에게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주었던 역사는 반야월의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에 녹아들어 지금껏 애창되고 있다. 미아리고개는 예전에는 우마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매우 경사지고 험준한 고개였다. 그러다 196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변신을 거듭했다. 1996년부터는 성북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단장되기 시작했다. 고개 정상 양쪽에는 400여평 규모의 가로공원이 조성되었고 성북구의 상징과도 같은 성곽이 둘러졌으며, 안개분수 통일 염원비, 노래비, 미아리고개 유래비 등을 갖춘 소공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도로도 8차선으로 확장되고 육교 대신 구름다리가 들어서 주민의 편의는 물론 미적효과까지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 여진은 조선 초기부터 명나라, 일본과 함께 조선 조정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외교 상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조선이 건국되던 14세기 말~15세기 초는 원 ・명 교체기로 중국의 동북방면이고 한반도의 북쪽인 현재의 만주지역은 명나라와 원나라, 조선 모두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곳을 차지한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 정부 사이에서 비교적 자율성을 갖고 때로는 조공을 바치고, 때로는 약탈하기도 하며 생활했다. 조선 정부의 대책도 크게 다르지 않아 회유와 강경책을 번갈아 사용했다. 대표적인 강경책은 세종 대의 4군 6진 대책이었고, 회유책은 꾸준히 진행되는 귀화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선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은 조선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았으며, 결국 1586년 누루하치가 여진 부족들을 통합하며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고 청나라로 이어진다. 여진족은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압록강・두만강 지역에 고루 존재했다. 따라서 이들이 한양으로 올 때 사용할 수 있는 길은 평안도를 통해 돈의문쪽으로 오는 – 중국 사신들이 주로 사용하는 길 – 길과 함경도를 거쳐 혜화문으로 오는 두 가지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이들에게 함경도길을 주로 사용하게 하였다. - 이경동이 말했다. “대저 조종(祖宗)의 법은 가볍게 바꿀 수 없습니다. 건주(建州)의 야인(野人)은 본래 영안도의 후문(後門)을 경유하여 내조(來朝)하였는데, 근래에 비로소 평안도를 경유하여 오도록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로 하여금 우리나라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과 도로의 구부러지고 곧은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니, 이는 나라를 위한 계책이 아닙니다.” - 임금이 대답했다. “경의 말이 옳다. 다만 이만주(李滿住)의 자손들이 항상 원한을 품고 변경을 침범하였었는데, 평안도의 길을 열어주고부터는 다시 와서 침범하지 않았다…” (『성종실록』188권, 17년 2월 丙戌, 밑줄은 필자) 위의 기록을 보면 여진 사람들은 연안도(지금의 함경도)를 거쳐 한양으로 왔지만, 성종 17년(1486)에 이르러는 평안도를 거쳐 오기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을 이경동은 ‘군사적 기밀’이 누설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성종은 이경동의 건의를 옳게 여기면서도 ‘평안도 길을 열어 준 이후 여진인들이 다시 쳐들어오지 않음’을 이유로 한동안 더 길을 열어준다. 이를 보면 여진인들이 주로 사용한 길은 함경도를 따라 혜화문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여진인들이 혜화문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지금의 미아리고개를 넘어야 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7-19쪽
  • 우리가 아는 되넘이고개의 이름은 흔히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쳐들어 온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13일 :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치계에 적병이 이미 안주(安州)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14일 :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치계하여 적병이 이미 송도(松都)를 지났다고 알려왔다. 14일 :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인조실록』 33권, 12월) 위의 기록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실록』의 기사이다. 이를 보면 청나라 군대는 평안도의 안주, 경기도 개성을 지나 양철평(지금의 불광동 부근)으로 남하하고 있다. 이때 사용한 길은 의주-정주-안주-평양-개성-서울로 이어지는 ‘의주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나라 군이 사용한 의주로는 중국과 조선의 사신들이 오가던 길이었는데, 이 길을 따라 내려오면 파주를 지나 돈의문에 이르게 된다. 청나라 군대가 이 길을 이용한 것은 두 가지 이유로 보인다. 첫째는 조선의 왕(인조)이 강화도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이 길이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 개성을 거쳐, 파주-양주-의정부를 지나 미아리고개를 넘어 내려오는 교통로도 청나라 군대가 이용 가능했다. 다만 이 길을 이용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현재로는 남아 있지 않다. 과연 청나라 군대는 병자호란 당시에 되너미고개를 넘었을까? 혹 기록대로 넘지 않았다면 왜 미아리고개는 되놈들이 넘어오던 고개가 되었을까? 앞서도 이야기 했듯 미아리고개는 조선 초기 여진인들이 드나드는 길목에 있었다. 그런데 그 여진인들이 청나라를 세우고 두 차례나 전쟁(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일으켜 한양을 공격했다. 조선 사람들이 보기에 예전에 여진인들과 당시 청나라 사람들은 모두 같은 ‘오랑캐’, 즉 되놈에 불과했다. 더 이상 여진인들(청나라인)은 미아리고개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기억에는 예전 여진인들이 넘어오던 길, 즉 되넘이 고개로 계속 기억되었을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이 길을 넘어 쳐들어 왔다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보인다. 의주로를 이용하여 돈의문으로 가는 길과 미아리고개를 넘는 길 사이에는 북한산이 자리 잡고 있다. 청나라 군대가 미아리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의주로가 아닌 완전히 다른 길, 즉 함경도 가는 길(경흥로)을 이용해야 했는데 이 길을 이용했다는 것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또한 굳이 군사를 나누어 경흥로를 통해 미아리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향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미아리고개가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 온 고개로 기억되는 것은 청나라 사람들과 여진인들이 조선 사람들이 보기에는 같은 ‘오랑캐’였고 과거에 이들이 오던 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9-21쪽
  • 미아리고개는 옛날에는 되너미고개라고 했어요. 여기 위에 올라가면 그 전에 서낭당이 있었어요. 한 5년 전쯤인가 성북구에서 서낭당 없애고 아파트를 지었죠. 되놈들이 여기 넘어올 때 서낭당에서 말발굽이 붙어서 못 넘어오고 저 종암동으로 돌아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되너미고개라고 해요. (철원철학관, 이도병)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7
  • 미아리고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세대마다 다르다. 2014년 현재 젊은이들에게 미아리고개는 별다른 이미지가 없다. 혹 풍문을 통해 들어본 미아리 집창촌 정도를 떠올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보다 나이가 윗세대에게 미아리 고개는 점성촌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70년대~80년대후반은 미아리고개에 있던 점성촌의 전성기였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서민들은 물론, 정·재계 인사와 외국인까지 미아리고개 초입의 점성촌에 찾아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 미아리고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와 공동묘지로 기억된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은 미아리고개를 넘어 서울로 들어왔고, 미아리고개를 넘어 많은 사람들을 북으로 데려갔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미아리 공동묘지는 60년대 초반 개발과 함께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미아리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고개를 되너미고개로 불렀다. 되놈, 즉 오랑캐들이 넘어오던 고개라는 의미였다. 지금은 수많은 자동차들이 넘나들고, 밑으로는 지하철이 다니는 그리 높지 않은 미아리고개에는 그렇게 고개 높이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현재의 미아리고개는 해발 약52m로 높지 않다. 미아리고개가 시작되는 성신여대입구역이 해발 약38m인 것을 감안하면 고개라고 하기 보다 ‘언덕’에 가깝다. 하지만 개발 전 미아리고개는 지금보다 10m이상 높고, 폭은 8m에 이를 정도로 좁았다(현재는 25~35m). 지금도 언덕 높이라고는 하지만 걸어서 꼭대기까지 오르려면 약간 숨이 차는데, 공사 이전의 미아리고개는 마냥 편하게 다닐 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힘든 길은 동북방면으로 가는 가장 효율적인 길이었다. 동북쪽으로 가는 또 다른 길은 동대문으로 나아가서 제기동을 거쳐 종암동 방면으로 가는 길과 제기동-이문동-석관동을 거쳐 가는 길인데, 길은 조금 평탄할 했을지 몰라도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선시대, 동북면에서 한양을 찾아오는 사람이나 한양에서 동북면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아리 고개를 넘어야했다. 조선 초기,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던 가장 인상 깊은 방문객은 여진인들이었다. 주로 함경도 쪽에 거주했던 여진인들은 미아리고개를 넘어 한양과 함경도 지역을 넘나들었다. 그들의 인상은 조선인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알려진 바로는 미아리고개의 첫 이름인 ‘되너미고개’는 ‘되놈들이 넘는 고개’라는 의미였다.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되너미고개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미아리고개는 죽은 자의 안식처였다. 조선총독부는 교통이 편리하고, 아직 사람이 많이 살지 않던 서울 근교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미아리고개도 그 중 한 곳이었다. 이때 설치된 많은 곳이 사라졌지만, 미아리 공동묘지는 60년대 초반까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공동묘지로 남았다. 이상, 이육사 등 유명인들도 미아리 공동묘지가사라질 때까지 이곳에서 묻혀있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0-12쪽
  • 한국전쟁 당시 미아리고개는 북한군이 서울로 쳐들어오던 길이었다. 조선시대부터 효율적인 길은 현대에 들어서도 효율적이었다. 한국군은 창동에서 미아리를 거치는 주요 교통로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북한군은 전쟁 개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후퇴할 때도 북한군은 미아리고개를 넘었다. 그들은 미아리고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북으로 압송했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이 급격하게 확장되면서 미아리고개는 서울도심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됐다. 김소진이 쓴 소설 『장석조네 사람들』은 당시 미아리고개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그들의 삶은 사소하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었지만, 서로 부딪쳐가며 살아가는 사람 냄새 나는 삶이기도 했다. 당시 미아리 고개에는 이런 ‘보통의 서민’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 시내에서 설 자리를 잃은 맹인 역술가들, 종로 3가에서 쫓겨난 집창촌도 미아리고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 두 집단은 모두 70~8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한다. 경제는 급격히 발전했지만 마음은 공허했고 사람들은 그 공허함을 한 편으로는 점술로, 한편으로는 쾌락으로 채우려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3쪽
  • 1955년부터 미아리고개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도로포장을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아리고개는 경사가 가파르고 험하기로 유명한 비포장 흙길로, 고개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러한 지형으로 인해 고개를 오르며 발생하는 차들의 매연과 흙먼지는 미아리고개 주민들이 빨래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명절이면 어김없이 발생하는 성묘행렬로 인해 미아리고개는 1년 내내 병목현상이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의 포장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한식날과 명절이면 어김없이 성묘행렬로 인해 미아리고개는 1년 내내 병목현상이 발생하는 지역이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80-81쪽
  • 우리 어려서 다닐 땐 미아리고개가 지금보다 엄청 높았지요. 66년도에 깎았어요. 전차가 그때 없어졌으니까. 깎고 고가를 놨지. 미아리 막바지 올라가면 미아리당하고 고개하고 똑같았었는데 그걸 깎고 보니까 우리 길로 두 길이 되도록 깎았더라고.(동양철학관, 이회택)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60
  • ○ 현대인들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사랑방 휴식처 62 눈물의 역사를 넘어 문화의 장으로 탈바꿈 - 미아리고개라 불리게 된 연유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미아동의 동명이 생겨났고, 이 고개가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였기 때문이다. 혹은 일제 때 미아동에 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미아리고개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에 미아리고개는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목의 첫 번째 큰 고개였고,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문턱이 되는 고개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눈물 고개로 바뀌었다. 한국 전쟁 당시 서울의 최후 방어선으로 인민군과 한국군의 교전이 벌어졌으며 수많은 지식인, 애국지사들이 줄줄이 묶여 이 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려갔다. 가족들에게 있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주었던 역사는 반야월의 노래‘단장의 미아리고개’로 탄생되어 지금껏 애창되고 있다. 미아리고개의 어두운 역사는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되놈이 넘어온 고개라고 하여 되너미고개(돈암현)로도 불렸고, 병자호란 때는 오랑캐가 이곳으로 넘어왔다고 해서 적유령이란 명칭이 사용되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여진족이 한성의 부녀자를 붙잡아 이곳을 통해 끌고 갔다는 것도 슬픈 역사의 단면이다. 미아리고개는 예전에 우마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매우 경사지고 험준한 고개였다. 그러다 196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변신을 거듭했다. 더욱이 1996년부터는 성북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단장되기 시작했다. 고개 정상 양쪽에 는 400여 평 규모의 가로공원이 조성되었고 성북구의 상징과도 같은 성곽이 둘러졌으며, 안개분수, 통일염원비, 노래비, 미아리고개 유래비 등을 갖춘 소공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 한 도로도 8차선으로 확장되고 육교 대신 구름다리가 들어서 주민편의는 물론 미적 효과까지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13-114쪽
  • ○ tour tip >> 반야월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가사를 쓴 박창오는 반야월이라는 예명으로 잘 알려져있는데, 그에게도 한국전쟁과 얽힌 애끓는 사연이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내와 딸을 수유리 집에 나눈 채 처가가 있는 김천으로 홀로 피난을 갔다. 아내와 딸이 미처 피난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다 전쟁이 금방 끝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천에 도착한지 얼마 안돼 아내가 내려와 한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동안 굶주림과 공포에 떨었던 어린 딸이 미아리 고개를 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고 했다. 반야월은 그때의 비통한 심정을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 속에 담았던 것이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15쪽
  • ­ 거기서 물 긷거나 하지는 않고 공동수도에서? (지) 막둥이는 시골에 보내놨었는데 미날강에 데려다 달라고 그랬데. 미아리고개만 넘으면 우리집 찾아오니까. ­ 걸어서도 자주 넘어 다니셨어요? (고) 걸어서도 다녔어요. ­ 공사하기 전에 고개 넘어 다니다가 기억에 남는 것이? 사당도 있었다던데? (고) 미아리고개 밑에 장님이 많이 살더라고.
    박수진, 고지수, 이현주, 2015, 문화재의 숲, 사람의 마을 : 성북구 문화재지역 구술자료집, 211-222쪽
  • 3) 斷腸의 彌阿里고개 6.25사변이 일어나서 서울이 적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그 시간이 너무나 짧았기 때문에 대다수 서울市民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그대로 서울에 눌러 앉아있었다. 서울이 人民軍治下에 들어가고 中央廳에 人民委員會, 서울市廳에 서울市 人民委員會가 들어 있었던 敵 治下의 생활이 만 3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초기에는 미처 피난가지 못한 派出所소장이나 洞長같은 인물들을 잡아 이른바 人民裁判이란 이름의 直決 死刑執行을 했으나 그 후 약간 질서가 잡히고 부터는 많은 사람들을 구속 수감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韓寶敎·方台榮·金思演 등 일제하에서 中樞院參議 등을 지낸 親日派도 있었지만 金奎植·趙素昻·安在鴻·白寬洙·吳夏榮·元世勳·金若水 등등 巨物政治人들, 崔奎東(당시 서울大學校 총장)·玄相允(당시 高麗大學校총장) 등과 같은 제 1급 교육자, 白麟濟(당시 白病院원장)와 같은 저명한 의사, 그리고 辯護士등에서부터 區廳長·구청직원·刑務官·洞長·洞직원, 중앙 각 부처 또는 각종 지방청의 간부와 직원, 大韓靑年團員, 韓電이나 일반 기업체의 중역과 회사원, 牧師 등의 宗敎人, 신문기자, 義勇軍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地下에 숨어 있던 대학생들, 심지어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끌려갔었다. 서울市內外에서만 1,500명 가까운 인물들이 이때 구속·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당시의 城北區관내에서만 밝혀진 숫자로 225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는 安在鴻·趙素昻과 같은 거물 政治人, 孫晉泰(歷史學者, 당시 서울大學校 文理科大學學長), T奎행(성균관대학 교수) 등과 같은 學者, 蔡容默 변호사, 洪必求 서울도자기회사 사장 등 비교적 저명인사도 포함되어 있지만 20세도 안되는 중학생도 있었고 女子大學에 다니는 아리따운 처녀도 있었다. 동직원도 청년단원도 노동자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서울市 人民委員會와 人民軍은 이렇게 구속·수감중에 있었던 人士들을 강제로 北送하기 시작한다. UN軍이 仁川에 상륙하고 서울을 향해서 侵功해온 1950년 9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서였다. 그런데 이들을 拉致해 北으로 끌고 가는 主된 行路를 敦岩洞-미아리고개-우이동-議政府로 잡은 것이다. 이들이 어떤 상태로 끌려갔느냐 하는 것은 필자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6.25사변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51∼52년 경에 半夜月에 의해 作詞되고 李在鎬에 의해 作曲되었으며 歌手 이해연이 불러 오늘날에도 모든 국민의 心琴을 울리는 「斷腸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말이 깨끗하게 단장된 현재의 미아리 고개 그 광경을 너무나 잘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노래말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1. 미아리 눈물고개 임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쪽 목 묶인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그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2. 아빠를 기다리다 어린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그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70-172쪽
  • 미아리고개의 옛이름 - 적유현 【산천】한성부의 낭관이 사산(四山)을 나누어 맡아 긴관 금기처(緊關禁忌處)를 검거(檢擧)하며, 성 안의 전수 및 성 밖의 현무(玄武 북방) 주산(主山)에 표(標)를 세운다. 동지긴관(東指緊關)의 외청룡(外靑龍)인 석가호(釋迦岵) 안 사을한(沙乙閑) 남쪽 가에서부터 적˙ 유˙ 현˙ (˙狄˙ 踰˙ 峴˙ )˙을 지나 광평대군(廣平大君) 집 북호(北岵) 선잠제단(先蠶祭壇)에 이르기까지 선제원(善濟院) 서쪽 건너편 가에서 안암동(安岩洞)ㆍ저방동(猪房洞)ㆍ동대문에 이르기까지에는 모두 산 등 안팎에, 서지긴관(西指緊關)의 외백호(外白虎)인 모화관(慕華館) 뒤에서 사현(沙峴) 사축서호(司畜署岵)를 지나 청파(靑坡) 뒤에 이르기까지에는 산 등 내면(內面)에, 주작(朱雀 남방) 안산(案山)인 남산의 외면과 남대문성 밖에서부터 전생서(典牲署) 뒤를 지나 벌아현(伐兒峴)에 이르고, 동쪽으로 두모포(豆毛浦) 후산(後山)ㆍ왕십리(往十里) 후산으로 나가고 돌아서 수구(水口)에 이르기까지는 산 등 내외면에 모두 표를 세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권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01
  • 1996년 미아리고개 「문화공간」조성 최근 모습을 드러낸 서울 미아리고개 정상의 횡단교량. 이 교량 아랫부분에 시와 문학을 토론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된다. 바로 교량 아랫부분 돌무더기 조형물 안으로 모두 60여평. 성북구 진영호 구청장은 5일 “역사가 배어있는 미아리 고개를 단순한 주민 휴식공간이 아니라 시낭송회, 문학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곳은 원래 「통일 염원의 장」으로 꾸며 6.25의 참상을 재현한 동판부조작품, 「단장의 미아리고개」노래비와 안개분수 등이 전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돌무더기 내부가 굴속 같아 자칫 청소년들의 우범지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나와 이같이 바꿨다. 성북구는 오는 7월까지 이 홀의 내부에 음향, 조명시설을 갖추고 전통차 등 음료를 판매하는 휴식공간으로 조성키로 했다. 또 4월 말 건립되는 성북문화원 주관으로 문학토론회와 시낭송회 그림전시회 등을 열어 명실상부한 도심속의 명소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할 계획. 동아일보 1996. 3. 6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57
  • 미아리고개에 올림픽 상징 대형 벽화 성북구는 공공시설이나 도로변의 낡은 간판을 교체하고 벽면을 새로 도색하는 등 환경을 개선하고, 공릉동~화랑로~미아삼거리~혜화동에이르는 7.4km 구간의 성화 봉송로 주변을 집중적으로 정비한다. 또 영세민복지 증진과 봉사행정을 구현하는 데 역점을 두는 한편 구민회관을 건립, 구민문화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성북구는 올해 모두 53억 1천 2백만원을 들여 34건의 건설사업을 벌이게 된다. 분야별로는 도로포장 및 개설 11건에 30억 8천만원, 상하수도 14건에 16억 3천만원 기타 9건에 5억 9천 7백만원이 투입된다. 고대~북한산 길 개설 도로 고려대 이공대 뒷길에서 북한산길에 이르는 너비 6m의 도로 1.07km를 개설한다. 오는 9월 말 완공예정이며 사업비는 6억 5천만원. 길음교도 현재의 너비 23m길이 35m에서 너비41m 길이 45m로 넓히고 너비 7m의 램프 1백 10m를 신설한다. 19억원의사업비로 연말 완공 예정. 7개동 급수 호전 상하수도 종암동 산 6의1 종암배수지를 현재의 용량 8백t에서 2천 8백t으로 확충하고 직경 1백 50~3백mm의 상수도관 3.5km를 묻는다. 오는 6월 말 완공예정이며 사업비는 4억 8천만원. 이 공사가 마무리되면 동선1,2 돈암 1,2 정릉1 안암 동암1동 등 7개동 3천 9백 50가구의 급수 사정이 한결 나아진다. 성화봉송로 꽃길화 녹지성화봉송로 주변 58곳에 화분 5천 3백 33개를 설치하고 페추니아등 7종 38만본의 꽃으로 꽃길을 조성한다. 북악스카이웨이 노변에 개나리 쥐똥나무등 3천2백 2그루를 심는다. 미아리 고개에는 가로 20m, 세로10m 대형 올림픽상징벽화를 그린다. 돈암동에 구민회관 복지돈암동 606 동소문재개발지구내에 14억 2천만원을 들여 구민회관을 건립한다. 대지 4천 1백 41평에 지상 3층 지하1층 규모로 연내 완공할 예정. 주요시설로는 대강당 회의실 직능단체 사무실 독서실 노인정 유아원 등을 갖춘다. 경향신문 1986. 1. 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53
  • 예전 미아리고개 풍경 생각나는게 있으세요? 미아리고개는 옛날에는 되너미고개라고 했어요. 여기 위에 올라가면 그 전에 서낭당이 있었어. 한 5년 전 쯤인가 성북구에서 서낭당 없애고 아파트를 지었어. 되놈들이 여기 넘어올 때 서낭당에서 말발굽이 붙어서 못 넘어오고 저 종암동으로 돌아왔다는 거야. 그래서 되너미고개라고 해요. -이도병 역학사(철원철학감정소) 인터뷰 中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57
  • 미아리고개, 내 삶의 분수령 저에게 미아리고개는 삶의 분수령 같았어요. 그 고개와 근대사에 얽힌 그런 문제를 떠나서요. 그 고개를 넘기만 하면 황량하면서도 대책 없으면서도 자유라는 게 있었어요. 자유라기보단 방종이었죠. 사실 저는 미아리라는 이름보다도 길음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더 친근해요. 미아리는 굉장히 사회적이고 거창한 이름 같지만, 길음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서울에서 찾은 정신적인 고향이랄까 그런 느낌이 나죠. 같이 예대에 다녔던 친구들이 다 그럴 걸요. 그런데 지금 지나다니다 길음동에 아파트가 들어선 걸 보면 길음동이 아닌 것 같아요. - 북디자이너 정병규 인터뷰 中 (2014. 12. 1. 서교동 투썸플레이스)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04
  • 동소문 밖 북위례성 남위례성을 찾으며 가람 이병기 마한 54국의 하나인 백제국으로서 백제시조 온조왕이 그 형 비류왕과 오간․ 마여 등 열 신하를 데리고 졸본 부여에서 남으로 와 북한산에 이르러 경성 혜화문 밖 십여 리에 있는 미아리라는 곳에 목책을 세우고 도읍을 삼아 북위례성이라 일컬었더니 말갈,낙랑의 침노를 밧고 견디지 못하여 13년만에 한강을 건너와 여기다 또 목책을 세우고 도읍을 정하여 남위례성이라 하였다. 동아일보 1928. 5. 2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13
  • 미아리고개를 걸어서 넘는 맛 여름의 화첩 낙 폭 글 그림 박세원 어느 때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돈암동 종점에서 내리면 으레 미아리고개를 걸어서 넘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나의 건강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갯길 너머로 병풍처럼 벌어지는 정릉․우이동 산의 묘취를 매일 한 번씩 즐기고 마음이 되새겨 보는 한 일과인양되어 있다. 맑고 깨끗이 개인 저녁 자홍으로 물들인 하늘 한 구석에 부조해 놓은 듯한 산의 정경을 고개 멀리 바라보는 맛도 좋지만 요즈음 같은 장림 때 산허리를 뭉게뭉게 싸고도는 안개의 시원한 모습은 더욱 청신해서 멋지다. 고개를 넘어서면 온종일 시달림에서 얻은 피곤이 한결 풀리고 훨씬 정신이 새로워지기도 한다 경향신문 1961. 7. 15 *그림은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성북문화원, 41쪽 참고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32
  • 미아리고개를 관광명소로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꽁꽁 묶인채로 / 뒤돌아보며 또 돌아보며 / 맨발로 절며절며 울고넘던그 고개여> 56년 세상에 첫선을 보인이래 오늘날에도 우리의 마음을 애뜻하게 만드는 유행가 <단장의 미아리 고개> 이 노래의 현장에 6.25 동란을 기리는 전적기념관과 위령탑이 전후 만 40년만인 올해 안으로 세워진다. 서울 성북구청은 6.25와 관련, 많은 사연을 담고있는 미아리 고개 주변에 전적기념관을 세우자는 지역주민들과 재향군인회성북지회등 국가 유공단체의 건의에 따라 미아리고개에 전적기념관과 함께 애국인 사위령탑을 세워 이곳을 관광 명소화 하기로 했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자리잡은 해발 1백 34m의 미아리고개는 해방 전만해도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무악재와 함께 서울에서 북방으로 가는 길의 시발점인 동시에 북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종착점이었다. 조선조 병자호란때 청나라 군대가 이고개를 타고 넘어와 <되너미고개>라 불리기도 했고 이 되너미에서 지금의 돈암동 이름이 유래됐다는 것. 6.25 당시는 서울의 최후방어선으로 50년 6월 28일 이 고개가 적의 손에 넘어가면서 당시 참모총장이던 채병덕 장군이 한강 철교 폭파를 명하게 된 쓰라린 역사도 지니고 있다. 9.28수복으로 쫓겨가던 인민군들이 이 고개를 통해 8만 5천명에 이르는 애국인사 대부분을 철사줄로 두손을 꼭꼭 묶어 맨발로 끌고갔고 끌고가지 못한 시민들은 부근 야산에서 학살해버려 민족의 한과 눈물과 피가 어린 고개였다. 이같은 사연을 안고 있는 미아리 전적 기념관 건립과 관련, 대한 무공 수훈자회 성북지회장은 “6.25사변 당시 최대의 격전지 중 하나인 서울에 변변한 전적기념관 하나 갖추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미아리 토박이> 왕길재씨는 “51년 4월초 인민군들이 서울에서 쫒겨갈 때 수백명의 인사를 5~6명씨 굴비엮듯 묶어 끌고가면서 총개머리판과 채찍으로 마구때리는 모습을 창문틈으로 엿보았다”고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때 끌려간 인사 대부분이 끝내 돌아오지 못한 만큼 위령탑이 세워지는 이들의 혼백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1990. 2. 7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54
  • 성북구 돈암동에서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미아제7동 불당골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어 미아동의 동명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또 일제 때 미아동에 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미아리고개라 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원래 이 고개를 되너미고개라 하였다.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넘어왔다가 넘어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되너미재,적유현,호유현이라고도 했으며 돈암동고개,돈암현이라고도 하였다. 이 고개는 여러 차례 깎여져 낮아지고 폭도 넓어졌지만 옛날에는 몹시 험준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이 고개에서 아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며, 3개월 후 9,28 서울수복 때 쫓겨 가던 북한군이 이 고개를 넘어 퇴각하면서 많은 애국인사들을 북으로 끌고 간 후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으며, 한과 슬픔을 담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가 나와 심금을 울리기도 하였다. 이 고개는 1964~1966년도 시행된 도로 확장공사로 낮추어졌으며, 1964년에 돈암동~미아리간 1300m의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폭 8m를 25m로 확장하였고 나머지 구간 1,786m도 1966년에 폭 8m에서 25~35m로 확장하였다.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지명사전, 명칭 : 미아리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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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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