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고개/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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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1960년 4.19혁명 시기 미아리고개와 관련한 신문 기록들의 모음이다. 동아일보의 기사들인데, 4.19 직후인 4월 20일자 「데모대원을 실은 트럭, 미아리고개를 넘어 창동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부터 시작하여, 미아리에서 있었던 총성과 군중의 집결 등을 다루었고, 5월 17일자 「4.19 당시 미아리의 총성/한양대학 공과대학 정현식의 수기」라는 제목의 4.19 당시 총격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한 기사까지 수록하고 있다.
길음동
  • 미아리고개(길음동 방면)
  • <일부(一部) 데모대원(隊員)>30대(臺)의 『추럭』에 분승(分乘)
  • 계엄(戒嚴) 제이일(第二日)을 맞아 □□□□□□□
  • 서울을 뒤덮은 데모 군중(群衆) 공포불구(空砲不拘)코 수십만돌진(數十萬突進)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 시대: 미상
  • 시기: ?
  • 비고: 4.19혁명~5.16군사정변 전후 미아리고개의 상황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길음동 일대

근거자료 원문

  • 데모대원을 실은 트럭, 미아리고개를 넘어 창동으로 한편 이날 밤 일부 데모대원들은 시내에서 탈취한 트럭들에 분승하여 행동하였는데 밤 11시 2분 현재 1대의 트럭에 분승한 데모대원들이 성북경찰서서 창동지서에 대하여 총격을 가하고 있고, 또 다른 데모대원들이 약 2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미아리고개를 넘어 창동으로 향하고 있다. 이에 앞서 약 2천 명의 데모대원들이 을지로6가 서울운동장 근처에서 장시간에 걸친 사격전이 벌어졌었는데 이중 7명이 경찰에 체포 연행되고 밤 11시경 해산되었다. 그밖의 지역은 대체로 밤 12시 현재 평온한 상태로 돌아갔다. 동아일보 1960. 4. 20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09
  • 미아리, 안암동의 총성 19일 서울시내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데모 소동도 이 밤을 지내고 난 20일에는 계엄령 공포와 더불어 밤새에 진주한 군인들이 시내 요소 요소를 경비하는 가운데 일단 그 소동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날 새벽의 서울 거리 거리 골목 골목에는 돌멩이, 벽돌, 유리 파편 등이 깔려 있어 무시무시하였던 전날의 모습을 그대로 엿보이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있다. 중무장을 한 군인들과 군복을 입은 경찰관들은 MI소총과 칼빈 소총을 손에 들고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있는가 하면 이른 아침에는 미아리와 안암동 쪽에서 산발적인 총성이 들려오고 있었으나 8시 경에 이르러 일단 잠잠해졌다. 종로, 동대문, 성북경찰서 관내의 파출소는 거의 남김없이 불태워지거나 파괴되었고 경찰관은 완전 철수. 이날 아침 9시 현재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속을 어린 아동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며 넝마주이들은 산산히 흩어진 서류들을 주워가기에 바빴다. 정릉 버스 시발점에는 버려진 시발택시 속에 총에 맞아 유혈이 낭자한 대학생 시체가 그대로 방치되어 행인들의 표정을 어둡게 하였다. 피에 젖은 신분 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중앙대학교 정치외교과 방규석(23)군이었다. 인근 주민들은 간밤 11시 경 학생 서너 명이 시체를 실은 이 차를 몰고 이곳까지 왔다가 성한 사람만 경관에게 붙들려간 것이라 한다. 동아일보 1960. 4. 21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10
  • 미아리 방면 8백여 군중 상오 5시 반, 데모의 기운은 이미 아침 5시 반 경부터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25일 밤에 이어 26일 새벽까지 단행된 1만여 군중의 데모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이미 세종로 주변에 7,8백 명의 군중이 종로4가 주변에 1천여 군중, 미아리 방면에 8백여 군중, 을지로2가, 4가에 7백여 군중이 길가에 늘어선 사병들의 경비태세도 아랑곳없는 듯 웅성대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어느 틈에 탈취했는지 6여 명의 학생들은 버스 1대와 시발택시, 합승택시 등에 각기 분승하여 거리를 질주하면서 만세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는데 보는 군중마다 박수를 보냈고 경비사병들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동아일보 1960. 4. 27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11
  • 4.19 당시 미아리의 총성 한양대학 공과대학 정현식의 수기 정녕 이밤이 새기전 우리도 기어이 경찰이란 가면 앞에 이슬처럼 사라져야 하는가 보다. 너와 나를 의식못한채 허황한 공간만을 주시하는 공포의 밤이었다. 아직껏 이따금 미아리 쪽에서 울리는 가냘픈 총성을 들을 때마다 서로의 눈을 마주 쳐다보며 공포와 분노가 휘감긴 싸늘한 전율마저 느끼게 되었다. 몇 시간 전 민족의 염원을 이루다 못해 쓰러져간 형제들의 붉은 피에 손을 적시웠고 이젠 나마져 붉은 피를 뿜어 형제의 고운 손길에 엎드리운 채 떠나려 함이 아닌가? 시커먼 공간속에서 너무나도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운 이성 없는 총탄 앞에 무참히 떠나버린 고고한 생명 앞에 내 자신을 맞대보기도 하였다. 지금의 나는 분명 존재의 가치다. 하지만 쓰러져 간 형제는 나를 불렀고 조국을 맡겼다. 조금 전 경찰의 추격을 받으며 이곳 정릉의 산속까지 오게된 여덟의 생명 스스로가 민주주의 사수에의 용감한 선구자가 되어 총탄을 무릅쓰고 불의 앞에 반항해온 참된 생명들이 이제는 포수의 총부리를 피해 쫓겨야 하는 생명이 되어 좁은 찦차 안의 희미한 내등을 켜고 이곳 낯설은 산속의 밤을 새우려 했다. 영혼이 승천하는 시간까지 민주대한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굳은 침묵의 단결이 얽혀 있었다. 끝없이 흐르는 한류처럼 무언의 침묵과 다가만 오는 시간에 저항할 따름이었다. 우리에겐 설움이 없었고 멸시도 없었다. 이제 서로를 우러러보며 회심의 분노에 제가끔 몸을 떨었다. 그와 고 마음한 구석엔 공허가 자리잡고 홀연이 떠너들간 형제의 넋이 우리를 부르지 않는가 우린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요 용기와 저주가 뒤섞여 나를 쳐다보며 나직이 물어보는 여학생이있었다. 여기 이렇게 가만히 앉아 밤을 새우려하는 우리에게 배반이 따르는 것만 같은 두려운 심정에 안타까움 마저 깃들게 되었던 것이었다. 피를 누구보다도 두려워 해야할 나어린 여학생마저 애국심에 불타 자신들을 죽음앞에 내맡긴 갸륵한 현실앞에 이밤이 새기전 정의의 승리로 환호성을 울려야 할 것 아닌가?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않았고, 우리에겐 대진한 기다림이 있었다. 새벽 일시가 지났을 무렵 차창으로 훈훈한 바람이 새어들었고 빗방울마저 떨어졌다. 하느님도 슬퍼하시는가봐 침묵에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음성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모두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고 보니 여학생들에게는 부모님께서 기다리실 집들이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측은한 생각에 무슨 말로 위로 해야할지 망서림이 앞섰다. 나 역시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서 이처럼 위험한 몸이 되었다는걸 알게 되셨다면 얼마나 걱정들을 하실까 하는 생각에 나 또한 집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광주를 떠나오기 전 마산 데모의 신문기사를 읽으시며 너는 행여라도 이처럼 불행한 희생자가 되지말라 하셨건만 오늘 죽는다 해도 결코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다 라는 신념의 무기 하나만을 들고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폭풍우처럼 몰아쳐간 삼일오 선거때 술취하신 아버님께서 우리에겐 선거권마저 박탈당했으니 이젠 국민이 아니고나 하시며 애통해 하시던 아버님의 손안에 빼앗긴 선거권을 기어코 찾아 꼭 쥐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새삼스레 치솟았다. 가끔 차내의 등을 끌 때마다 어슴프레 비치는 달빛에 희미한 밖을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정복을 입은 경찰이 방금 달겨들것만 같은 환상에 얼른 불을 켜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곤 하였다. 우리 아버진 자유당이에요 저의 오빠와 나는 아버지와 함께 밥상머리에 앉기만 하면 아버지를 공격하는 거애요 하며 미소를 지우는 여학생의 말에 모두들 서글피 웃을 수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들만 이렇게 뒤로 뺀 게 아녜요? 라고 말하는 꼬마 운전수. 고등학생인데도 제법 신나게 운전을 잘하는 그가 믿음직스러워보였다 자기 아저씨 자가용차를 끌고 나왔다고 말하였다. 지금 이렇게 앉았느니보다도 더 반항해 보자는 그들의 심정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지금 이 시간부터 이들을 보호해야 할 중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모두가 굶주림에 기운 없는 낯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까 동대문 근처에서 아주머니들의 정성으로 깨소금 묻힌 주먹밥 한 덩이에 지금은 뜨거운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 서로를 위로하고 좁은 좌석에서 남을 편안히 앉히려는 온정에 감격하며 시간은 흐르기만 하였다. 무서운 우수와 불안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실오라기 같은 추억과 승리를 꿈꾸는 아득한 환희에 잠시 현실을 망각할 수 있었다. 길 옆의 개울물 내려가는 소리마저 여느 때처럼 한가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마련하지 못하고 가끔 우리의 귀를 기울이게끔 불규칙한 흐름인 것 같았다. 우리에겐 미래의 시간에 있을 승리를 바라는 것보다 현실의 참된 반항에 휩쓸려 하였고 행동하였다. 시간의 중요성마저 잃었었다. 새벽달이 채높이 뜨기 전 훤히 동이 터오기 시작하였다. 때늦은 졸음에 하품들을 하며 조금만 시간이 더 흘러가길기다렸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산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는 우리에게 평화의아늑함을 맛보였고 개울건너 위쪽에 절간이 있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이제 모두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이 생겨났다. 입은 쓰디씻고 눈이 까실하여 앞을 잘 볼수가 없었다. 시원한 공기는 허기증을 더하였고 까무러칠 것 같은 휘청거림을 느꼈다. 우리는 산을 내려왔다. 아직껏 새벽인데도 골목 골목 그리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근심스러운 빛을 던져주었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대로 내려와 돈암동 전차종점의 길목을 건느려 했을 때 길바른 편쪽에 경찰의 복장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을 붙잡아 세워 무엇인가를 조사하는 모양을 보났을 때 우리에겐 반항력은커녕 적개심마저 이순간의 공포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길목을 못본 듯이 지나치기란 너무나도 괴로웠고 위험했다. 다시 사잇길로 접어들어 차를 세웠다. 이젠 모두가 하나로 바뀌어야 했기에 서로가 이름도 성도 기억 못한채 조심하라는 한 마디씩을 입밖에 내며 하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망설여 걸음을 옮기면서도 등져간 그들에게 조심해 라는 한마디를 덧붙이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꾸겨진 교복들 흩어진 여학생들의 머리칼, 나의 검정 작업복 바지에 묻은 피자국.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 고임을 느끼며 나는 순경을 피하여 골목길을 걸어갔다. 동아일보 1960. 5. 17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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