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고개/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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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전쟁 당시의 미아리고개 상황에 대한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6.25전쟁 당시의 미아리고개는 북한군의 서울 침투 경로이자 후퇴 경로였다. 서울 침투시에는 격전이 벌어졌고, 후퇴시에는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여 끌고 갔다. 그러한 상황에 대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기록들인데, 동아일보는 주로 납북자들의 증언을 특집으로 다룬 것이고, 경향신문의 기사는 전쟁 당시 미아리고개의 상황을 다룬 특집 기사이다.
길음동
  • 성북구 주민 이강한 3 : 6.25 한국전쟁 발발 무렵 성북구 마을의 분위기
  • 재개발 전 미아리고개 일대
  • 역사적명소 미아리고개 전경
  • 성북구 주민 이강한 3 : 6.25 한국전쟁 발발 무렵 성북구 마을의 분위기
  • 죽음의 세월(歲月) (5)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 시대: 미상
  • 시기: ?
  • 비고: 6.25전쟁 발발 당시의 상황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길음동 일대

근거자료 원문

  • (6.25 당시) 북으로 끌려가던 도중 기적적으로 탈출한 몇몇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대략이나마 그 때의 비극적인 풍경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밧줄로 꽁꽁 묶인 죄없는 죄수들이 서대문형무소를 나선 것은 낮 12시 쯤이었다. 그 때 서대문형무소는 주위에 건축물이 별로 없어서 꽤 높은 언덕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형무소를 나서며 시가지를 바라보니 온통 불바다였다. 곳곳에 부서진 가재도구가 널려 있고 건물들은 부서져 있었다. 서울은 두 달 사이에 폐허가 되어 있었다. 종로를 지나올 때까지만 해도 정말 뚝섬 쪽으로 가나보다 했는데 종로4가에서 행렬은 미아리쪽으로 꺾어졌다. 북으로 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고 온몸의 힘이 쭉빠졌다. 2개월동안 밥도 제대로 못먹었으니 나의 몸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한여름에 잡혀왔으니 옷도 반소매 옷이라서 벌써 한기마저 들기 시작했다. 삼선교 못미쳐서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이 어린 인민군이 달려와 구둣발로 걷어차며 일어나라고 했다. 이를 악물고 다시 걸었으나 미아리고개를 넘지 못하고 나는 다시 쓰러졌다. 같이가던 남자에게 나를 업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도 몇 발자국 못가 쓰러졌다. 영락없는 지옥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만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자리에서 숨진다면 지나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남편에게 알려주겠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의 의식은 점점 몽롱해져가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아마 인민군이었겠지만) 나를 질질 끌고가더니 길옆에 모래주머니로 만든 벙커속으로 처박았다. 그리고 개머리판으로 나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으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다시 의식이 들어 눈을 떴을 때는 무언가 얼굴을 갑갑하게 내리덮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거적이었다. 젖먹던 힘을 다해 그것을 밀치고 나니 밤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아, 내가 살아있었구나. 그들은 내가 죽은줄로 알고 거적까지 덮어두고 갔지만 나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끌려가던 사람들이 하도 많아 어림잡아 헤아릴 수도 없었지요. 손목을 묶은 쇠사슬이 모자라 소끌던 밧줄로 엮어 끌고 갔고 뒤처진 사람들은 포탄이 떨어진 구덩이에 집단으로 몰아 넣고 학살해 부근의 산마다 시체들이 즐비했었지요. 이들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미아리고개를 거쳐 북으로 끌려가던 사람들은 탈진해서 쓰러져 죽거나, 뒤쳐질 경우 북한군의 총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군이 철수하고 난 후 미아리고개에는 북송 중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즐비했는데, 가족을 납치당한 사람들이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세 겹 네 겹으로 포개져있는 시신들을 들춰보았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65-67쪽
  • 납북인사들의 행렬<죽음의歲月(세월) 拉北人士北韓生活記(납북인사 북한생활기)(5)> 드디어 9월 12일부터 서해안 일대에 UN군에 의한 대대적인 폭격이 감행되고 15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의 전초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이에 당황한 괴뢰군들은 이날밤부터 각 형무소, 비밀 감금소에 수감 중인 인사들을 모두 줄줄이 묶어 미아리고개와 영천고개 두갈래로 갈라서 납북해가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 1962. 4. 3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86
  • 미아리고개를 통해 서울로 들어온 북한군<흘러간12년 6.25앨범 (2) 미아리 고개> 6.25와 미아리고개는 인연이 깊다.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두천 의정부 방면 주민들이 궂은 비를 맞으며 서울로 찾아든 관문이 바로 이 미아리고개였고 또 9.26 수복 당시 패전한 공산군이 황망히 도망쳤던 길이 바로 이 미아리고개였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에서 서울 시민들은 미아리고개하면 6.25를 생각하게 된다. 미아리 고개를 보고 연상되는 12년전 6.25의 회억 그것은 너무도 잊기 어려운 일들 뿐이었다. 38선 전역에 걸쳐 11개처로 공격을 해왔던 6월 25일의 적의 병력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여단, 1개 독립보병연대, 1개 모터사이클연대, 1개 국경비여단을 망라한 연병력 8만과 소제형 탱크 150대라는 엄청난 세력이었다. 변변한 중화기 하나없이 보병 4개 사단과 제1개 연대의 병력밖에 갖지 못했던 당시의 국군이 일요일을 틈타 기습해 온 이 공산군을 즉각 격퇴시킨다는 것은 뭐래도 무리한 일이었다. 전투가 붙은 지 수 시간 후인 25일 상오 9시 벌써 개성과 동해안의 주문진이 적중에 떨어졌고 이날 하오에는 서울 상공에 적기 5대가 나타났다. 당시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미 군사고문단장 라이타 대령과 중요작전회의를 열었는가하면 유엔에서는 북한 공산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미국 그로스 대표의 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한국을 싸고 국내외의 정세는 빙점 이하의 싸늘한 긴장에 싸여들었다. 27일이 되자 북한괴뢰는 소위 국민총동원령을 포고하여 자유진영의 정당한 의사를 정면으로 짓밟고 광란된 침략으로 나왔다. 이런 속에서 28일 수도 서울이 적군에게 들어갔다. 미아리고개를 통해 넘어온 공산군은 9월 28일까지 서울에서 마의 불장난을 계속했다. 무수한 사람을 도륙하고 수많은 재화를 약탈하면서. 그러나 오늘의 미아리고개는 지긋지긋했던 악몽을 잊은 듯 훌륭한 도로로 자꾸자꾸 발전해 가고 있다. 길 위에는 아스팔트가 깔리고 노변에는 주택이 들어서고 경향신문 1962. 6. 22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87
  • 황의순 주부가 기억하는 6.25와 미아리고개 6.25를 想起(상기)한다 황의순 주부(서울 성북구 미아동) 스물 전의 소녀가 바로 그 또래의 딸을 갖는 세월이 흐르도록 가슴에 새겨진 아픈추억이 바로 6.25다. 여름비가 부슬거리던 밤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의정부를 지났다고하고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안국동까지 왔다고도 했다. 재빠른 사람들, 또 고관의 가솔들은 벌써 남쪽을 향해 한강을 건넜다고도 떠들었다. 분노와 두려움과 흥분과 초조가 격류되어서 가슴을 팽배하던 그 밤. 동이 튼 아침 하늘은 구름을 헤집고 맑게 갰으나 땅위엔 온통 붉은색이 넘쳤다. 그 후 숱한 날들을 생사의 분간조차 어려운 고비 고비를 겪고 견디면서 그래도 살았노라고 호흡을 가늠하던 쓰라린 기억들이 생생하다. 경향신문 1973. 6. 2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90
  • 납북될 뻔했던 가수, 신카나리아<나의 交遊錄(교유록) 元老女流(원로여류)가 엮는 回顧(회고) <148> 拉北(납북)모면> 밧줄로 꽁꽁 묶인 죄없는 죄수들이 서대문형무소를 나선 것은 낮 12시쯤이었다. 그때 서대문형무소는 주위에 건축물이 별로 없어서 꽤높은 언덕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형무소를 나서며 시가지를 바라보니 온통 불바다였다. 곳곳에 부서진 가재도구가 널려있고 건물들은 부서져 있었다. 서울은 두 달 사이에 폐허가 되어 있었다. 종로를 지나올 때까지만 해도 정말 뚝섬 쪽으로 가나보다 했는데 종로4가에서 행렬은 미아리 쪽으로 꺾어졌다. 북으로 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고 온몸의 힘이 쭉빠졌다. 2개월 동안 밥도 제대로 못먹었으니 나의 몸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져있었다. 한여름에 잡혀왔으니 옷도 반소매 옷이라서 벌써 한기마저 들기시작했다. 삼선교 못미쳐서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이 어린 인민군이 달려와 구둣발로 걷어차며 일어나라고 했다. 이를 악물고 다시 걸었으나 미아리고개를 넘지 못하고 나는 다시 쓰러졌다. 같이가던 남자에게 나를 업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도 몇 발자국 못가 쓰러졌다. 영락없는 지옥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만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자리에서 숨진다면 지나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남편에게 알려주겠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의 의식은 점점 몽롱해져가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아마 인민군이었겠지만) 나를 질질 끌고가더니 길 옆에 모래주머니로 만든 벙커속으로 처박았다. 그리고 개머리판으로 나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하는 소리를 마지막 들으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동아일보 1981. 8. 6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91
  • 납북된 소설가 박영준<文壇裏面史(문단이면사) 逸話(일화)로 엮어본 文人(문인)들의 作品(작품)과 生涯(생애) (8) 소설가 朴榮濬(박영준))> 그는 8월 어느날 박계주 김용호, 유정, 김수영 등과 함께 강제로 북괴군에 지원입대, 북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새벽의 미아리고개를 넘어 평안북도 개천에 있는 북괴군 훈련소까지 걸어갔다. 옷이 헤지고 굶주림과 공포에 질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허기증까지 생겨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밤마다 “유형! 유형!”하고 불렀다. 유정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김수영도, 김용호도 일반이었다. 그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피로와 굶주림에 시달려 몰골이 사나와진 그를 보고 북괴군 훈련사병이 불독같다고 유난스레 미워하고 욕질을 했다. 그는 주저앉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하나 그의 주위를 싸고 있는 문인들의 눈물어린 시선때문에 그는 온힘을 다하여 하루하루 버티어나갔다. 그런 삶이 유엔군이 평양에 들어온 10월 19일가지 계속되었다.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19일 밤 박영준은 김용호, 박계주와 함께 북괴군 부대를 탈출하였고 북행 때와같이 걸어서 서울로 돌아왔다. 경향신문 1983. 3. 26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92
  • 미아리고개와 낙동강<悠悠(유유)히 흐르는江(강)> 6.25 동란은 몇 개 평범한 지명이 우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한다. 그것은 대개 비극적인 것이지만 장엄성을 띈 것도 있다. 가령 북한 땅에 있는 흥남은 철수의 회한을 떠올리게 한다. 중공군의 개입과 군의 철수작전 북한 주민의 자유를 찾는 남하 물결, 그리고 이별과 피난길의 아픔이다. 미아리도 마찬가지다. 북괴가 자유인사들을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간 단장의 미아리고개이다. 납북 망행과 이산의 원통함이 미아리고개에 서려있다. 경향신문 1984. 6. 2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93
  • 미아리전투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된 박원남의 수기<死線(사선)을 넘고넘어 國軍(국군)→괴뢰軍(군)→南派間諜(남파간첩)→自首(자수)한 朴原南(박원남)씨 手記(수기) (1)「惡夢(악몽)의 6.25」22돌> 공방전이 시간을 끌수록 국군의 피해는 막심했다. 여기저기서 전우들이 쓰러져갔으며 워낙 화력이 열세인 국군은 후퇴를 거듭, 우리 1대대 병력도 서울 방면으로 밀려 미아리 일대에 방위선을 새로 구축했다. 그러나 28일 새벽녘엔 벌써 북괴군 탱크 대열이 미아리고개를 넘어섰고 우리 대대병력도 뿔뿔이 흩어졌으며 내가 속해 있던 1중대 3소대 병력은 미아리 서북방 서원내 153고지 전투에서 인민군과의 육박전 끝에 거의 전멸했다. 이 육박전에서 나도 북괴군이 휘둔 총 개머리판에 안면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오른쪽 목은 총창에 찔려 피가 퀄퀄 흘러내렸고 앞니 전체가 뭉땅 부러져 잇몸과 함께 너덜거렸다. “이 간나새끼 정신나니” 하며, 인민군 두 명이 장총과 다발총을 겨눈 채 지켜보고 있었다. 다발총을 겨눈 자는 나를 포로로 데려가려 했으나 다른 한 명은 “분대장 동무! 다 죽어가는걸 무시기 하겠소. 죽여버리지비”하고 제의했다. 그러자 분대장이란 자가 우겨나는 겨우 목숨만은 부지해서 이미 적의 손아귀에 들어간 시가지를 걸어 중앙청 광장까지 연행됐다. 동아일보 1972. 6. 24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89
  • 미아리고개의 유래 「미아리 고개」앞에는 습관처럼 「한많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국민가요가 되다시피한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울고넘던 그 고개요, 한많은 미아리 고개」로 끝나기 때문이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 51 일대의 이 고개는 시내 혜화동에서 현재의 길음동으로 개칭된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636년 병자호란 때 「되놈」으로 통하던 청나라 군사들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쳐들어왔다는 뜻에서 「되너미 재」「되너머고개」「적유령」등으로 불렸다. 이 고개 옆 돈암동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됐다. 1950년 6.25 당시 이곳은 아군의 1차 최후방어선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일만인 28일 인민군 탱크가 이 고개를 넘어오면서 서울이 함락됐다. 그로부터 3개월 뒤 9.28 서울 수복 때 이번에는 북한군이 이 고개를 넘어 퇴각하면서 수많은 애국인사를 북으로 끌고갔다. 끌고가지 못한 시민들은 고개 옆 성신여대 자리에서 무더기로 학살됐다. 5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미아리 고개 도로변에는 점술가들의 간판이 즐비하다. 높고 험준한 편이었던 고개는 여러 차례 공사로 깎여나가 이제는 완만하면서도 시원하게 잘뚫린 왕복 8차로 대로로 탈바꿈했다. 동아일보 1997. 6. 28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02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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