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고개/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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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에 대한 여러 이름과 유래이다. 현재의 강북구 미아동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어서 미아리라는 이름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미아리고개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였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 길로 왕래하였고, 그래서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되너미고개’,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 혹은 호유현(胡踰峴)이라고 불렸다.
길음동
  • 미아리고개(1996)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길음동 일대

근거자료 원문

  • 미아리고개의 옛 이름인 되너미 고개는 되놈, 즉 야인들이 넘어오던 고개라는 뜻이다. 한자로도 오랑캐狄가 넘어오던踰 고개峴라고 해서 적유현이라고 쓴다. 어떤 곳에서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이 이 고개를 넘어 쳐들어 왔기 때문에 되너미 고개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하기도 한다. 과연 되너미 고개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조정에 시위(侍衛)하는 야인(野人)들에게 명하여 술과 고기를 가지고 가서 동소문밖에서 전별(餞別)하게 하였다.(『세조실록』 6년 2월 갑인) 야인은 늘 동소문으로 왕래하거니와, 왜인(倭人)은 이제 비로소 보건대 여염 사이의 작은 길로 데리고 다녀서는 안 되겠으니, 홍화문(弘化門) 앞의 큰길로 내보내야 하겠다.(『중종실록』 63권, 23년 9월 경인) 첫 번째 기사는 세조 6년(1460)의 기사인데 야인, 즉 여진인들이 돌아갈 때 동소문 밖에서 송별하고 있다. 두 번째 기사는 중종 23년 (1528)의 기록으로 이를 보면 여진 은 동소문을 통해 한양을 출입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16-17쪽
  • 이 미아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옛 문헌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1984년에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동명연혁고IX(도봉구편)』에서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는 미아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8세기경 겸제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에는 적유현狄踰峴 북쪽 바로 아래에 사아리沙阿里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미아리彌阿里란 동명은 사아리에서 전음된 것 같다. 즉 전에는 정릉동貞陵洞 지역을 사을한리沙乙閑里라고 칭하였으므로 사아리는 사을한리의 약칭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사아리가 미아리로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기록을 의지하여 미아리라는 지명의 유래를 추측해 본다면 본래 미아리라는 곳은 적유현狄踰峴, 즉 ‘되넘이고개’의 북쪽 지방을 뜻한 곳으로 추정된다. ‘되넘이고개’라는 의미는 병자호란 당시 ‘되놈’, 즉 오랑캐가 넘어온 곳이라는 의미로서 돈암동 일대에 자리잡은 아리랑고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현재 행정구역상의 미아리 이름을 딴 곳은 강북구 미아동이 유일하지만 역사적으로 미아리를 지칭하는 공간은 앞서 이야기 하였듯 성북구 길음동, 하월곡동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192-193쪽
  • 특히 미아리고개는 청나라 사람들이 쳐들어 온 고개라고 해서 적유현狄逾峴, 혹은 되넘이고개로도 불렸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시키기 위해 이용한 길도 바로 이 길이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15쪽
  • 조선시대 문헌에 돈암동 지역은 적유령狄踰嶺·적유현狄踰峴·호유현胡踰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은 되너미고개, 되너미마을, 되너미골이라고 불렀다. 만주 지방 사람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되넘[뒈놈,떼놈]’의 한자어‘호인胡人, 적인狄人’이 넘어간 고개 또는 마을이라는 뜻이다.이러한 지명 유래가 생긴 역사는 병자호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조 14년(1636) 중국 북쪽 지방에 있던 후금後金은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에게 신하의 나라로서 예를 갖추라고 요구하였다.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에서는 후금과 화친을 반대하는 척화배금斥和排金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하였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40여 일 만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한겨울에 먼 길을 걸어 삼전도까지 간 인조는 청 태종 앞에서 한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3배 9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식을 치러야 했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어야 했고, 소현세자와 봉림 대군, 척화파와 여인들이 청나라의 인질로 잡혀가는 아픔을 겪었다. 청나라 군대가 침입하는 주요 길목이었던 이 지역은 병자호란 이후 적유현(또는 호유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1756년 제작된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는 호유현, 18세기 중반 겸재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와 김정호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적유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되넘이’라는 지명은 떼놈이 넘어간 고개라는 뜻 외에도 힘들다는 뜻의 접두어‘되’에 넘어가다는 뜻의‘넘이’를 붙여‘힘들게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도 있다. 험준한 산세가 이어지고 가파른 바위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지형에서 나온 말이다. 또, 되넘이고개를 시작으로 산 넘고 고개 넘어 양주와 포천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갯마루에서 다시 밥을 먹었다고 하여 밥을‘되[다시] 먹는 고개’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되넘이’라는 지명은 떼놈이 넘어간 고개라는 뜻 외에도 힘들다는 뜻의 접두어‘되’에 넘어가다는 뜻의‘넘이’를 붙여‘힘들게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도 있다. 험준한 산세가 이어지고 가파른 바위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지형에서 나온 말이다. 또, 되넘이고개를 시작으로 산넘고 고개 넘어 양주와 포천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갯마루에서 다시 밥을 먹었다고 하여 밥을‘되[다시] 먹는 고개’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엉뚱한 지명유래 소개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역 구내 벽에는 돈암동이란 지명은 6.25 당시 중공군이 서울에 침입할 때 <되놈>이 온다하여 이들이 넘어오던 현재의 미아리 고개를 <되너미>고개라고 불려지던 것을 한자로 돈암현이라 한 데서 유래됐다는 엉뚱한 지명유래 안내문을 붙여놓았다. 그러나 이곳은 일제 때도 돈암리 혹은 돈암정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었던데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동명 연혁고는 돈암동의 유래를 병자호란때 오랑캐 즉 되놈이 서울을 침입할 때 이 고개를 넘어왔으므로 <되너미> 재 적유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경향신문 1985. 6. 25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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