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사
비지정 문화재
장소 종교시설
유물 건축물
성북구 보문사길 6-16(보문동 3가 3-51)에 위치한 사찰이다. 미타사는 여승을 지칭하는 비구니의 수양 도량인데, 고려 초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창건하고 미타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승된다. 이후 몇 차례의 중수 사실이 전해지지만 의미있는 것은 1457년(세조 3)에 단종비였던 정순왕후 송씨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미타사 서쪽, 숭인동의 정업원·동망봉·자지동천(紫芝洞泉·자줏빛 물이 흘러나오던 샘) 등에 정순왕후와 관련된 사실이 있음으로 보아 이 절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곳 보문동 일대는 ‘탑골’이라 불리고, 이 절은 ‘탑골승방’이라 불리는데, 미타사 대웅전 뒤 단하각(丹霞閣) 왼쪽 언덕 위에 있는 석탑으로 인해 그렇게 불리게 된 듯하다.
보문동
  • 천년고찰 미타사
  • 미타사(1)
  • 미타사(2)
  • 미타사(3)
  • 미타사 입구
  • 미타사 석탑 (1)
  •  《대동여지도》 중 <도성도>, 1861
  • 미타사 석탑 (2)
  • 천년고찰 미타사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74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3가 3-51 미타사 (보문사길 6-16)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보문사를 나와 조금만 걸으면 미타사가 나온다. 고려 광종대에 조성되었다는 이 사찰은 크진 않지만 단정하다. 무엇보다 경내에 있는 작은 탑이 흥미롭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고졸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물론 단지 천년의 세월을 머금었을지 몰라 흥미롭다고 한 것이 아니다. 미타사는 보문사와 함께 탑골승방이라고 불린다. 여기에 ‘탑골’, 즉 탑이 있는 골짜기라는 이름이 어쩌면 이 탑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1쪽
  • ▫ 비지정 미타사 彌陀寺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미타사 소재지 : 서울 성북구 보문동 3가 3-51 탑골 승방(僧坊)이라고 불리는 이 절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비구니들이 수행하는 도량(道場)답게 단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로 보문사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은 고려초 광종 원년(950)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처음 창건하고, 충숙왕 원년(1314)에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주도로 중건했다고 하는데 고려 때 고승인 혜거국사와 혜감국사의 비문(碑文)에는 이 절을 개창, 중창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고려시대에 관한 부분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한편 고려초 문종 원년(1047)에 이 절에 석탑을 쌓자 이 근처를 탑골[塔洞]이라고 부르면서 미타사를 탑골승방[塔洞僧房]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탑골승방은 인근의 보문사보다 미타사를 지칭한다고 본다. 조선시대에 탑골 승방은 옥수동의 두뭇개 승방,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 숭인동의 새절 승방(청룡사)과 함께 여승들이 거처하는 성 밖의 네 이사(尼舍) 중 하나로 꼽았다. 이어서 조선초 세조 3년(1457)에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에 의해 중수(重修)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미타사 서쪽, 숭인동의 정업원・동망봉・자지동천 등에 정순왕후와 관련된 사실이 있음으로 보아 이 절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말 순조와 헌종 때 각각 이 절을 중수한 데에 이어 1969년에 송계주(宋季珠) 주지스님이 중수했다. 이 절 대웅전 뒤의 단하각(丹霞閣) 왼쪽 언덕 위에는 오래된 석탑 하나가 서 있는데 조성시기가 확실하지 않다. 5층까지는 석재가 같은데 6층과 상륜부는 석재와 조각이 다르다. 6층은 그 조성시대를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아울러 기단에는 일부 석재를 보강한 흔적이 있다. 이 석탑이 있었으므로 얼마 전까지 보문동 일대 ‘탑골’, 이 절을 ‘탑골승방’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절의 대웅전은 지하와 지상 1・2층의 목조 기와로 지어져 2층을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며, 법당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상과 5종의 탱화(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그중에는 1863년에 제작된 신중탱화도 있다. * 참고자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 박경룡, ≪서울문화유적≫, 1997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사 –서울-≫ 4, 1994.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67-168쪽
  • 이 절은 고려 초 광종 원년(950)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처음 창건하고, 충숙왕 원년(1314)에 혜감국사(慧鑑國師)에 의하여 중건되었다고 하는데, 고려 때 고승(高僧)인 혜거국사와 혜감국사의 비문(碑文)에는 이 절을 개창, 중창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고려시대에 관한 부분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한편 고려 초 문종 원년(1047)에 이 절에 석탑을 쌓고난 뒤 이 부근을 탑골[塔洞]이라 부르면서 미타사 또한 탑골 승방[塔洞僧房]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탑골 승방은 인근의 보문사보다 미타사를 지칭한다고 본다. 조선시대에 탑골 승방은 옥수동의 두뭇개 승방,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 숭인동의 새절 승방(청룡사)과 함께 여승들이 거처하는 성 밖 네개의 사찰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조선 초 세조 3년(1457)에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에 의하여 중수(重修)되었다고 한다. 이는 미타사 서쪽, 숭인동의 정업원ㆍ동망봉ㆍ자지동천 등에는 정순왕후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조선 말 순조와 헌종 때 각각 이 절을 중수한 데 에 이어 1969년에 송계주(宋季珠) 주지스님이 중수하였다. 이 절 대웅전 뒤의 단하각(丹霞閣) 왼쪽 언덕 위에는 오래된 석탑 하나가 서 있는데 조성시기가 확실하지 않다. 5층까지는 석재가 같은데 6층과 상륜부는 석재와 조각이 다르다. 6층은 그 조성시대를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지 만 확실하지 않으며, 기단에는 일부 석재를 보강한 흔적이 있다. 이 석탑이 있었으므로 얼마 전까지 보문동 일대를 ‘탑골’, 이 절을 ‘탑골승방’이라고 불렀다. 이 절의 대웅전은 지하와 지상 1ㆍ2층의 목조 기와로 지어져 2층을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법당 내부에는 아미타 삼존불상과 5종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그 중에는 1963년에 제작된 신중 탱화도 있다.
  • #미타사 30분 정도 보문사 경내를 둘러보다가 일주문을 나와 바로 옆의 미타사로 발길을 돌렸다. 미타사는 보문사와는 엄연히 다른 절이지만 별칭은 같다. 뭔고 하니, ‘탑골승방’.미타사 일주문 옆에 세워둔 안내판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950년에 혜거국사가 미타사를 창건하고 1047년에 석탑을 세우는데 이 때 세운 탑이 이 근처의 상징이 되어 조선시대에 이곳을 탑골〔塔洞〕이라고 부르면서 미타사를 보문사와 함께 탑골승방이라고 일컫게 된다. 이로 인해 미타사는 옥수동의 두뭇개승방, 석관동의 돌곶이승방, 숭인동의 새절승방(청룡사)과 함께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성 밖의 4대 승방 중의 하나로 꼽히게 된다. (중략) 억불抑佛의 나라 조선의 서울에서 몇 안 남은 불탑들은 아들 많은 집의 고명딸마냥 귀한 대접을 받았으리라. 그래서 탑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동네면 ‘탑골’ 혹은 ‘탑동’이라 부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럼 탑골승방의 탑은 어디에 있을까? 수수께끼의 답을 나와 M은 미타사 대웅전 뒤편 언덕 높다란 계단을 올라가서 찾았다. 귀퉁이가 여기 저기 깨어진 아담한 돌탑.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탑들처럼 높고 균형 있는 탑은 아니다. 그러나 작다고는 할 수 없다. 다른 훌륭한 탑들보다야 작지만 엄연히 나와 M의 키보다도 큰, 아니 나와 M의 키를 합해도 미칠 수 없는 높이에 탑의 상부가 있다. 하지만 그 높이와 생김새보다는 탑이 품은 시간의 깊이에 더 매력을 느낀다. 탑의 모양새를 보니 탑신과 지붕의 비례가 약간 허술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호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탑은 거의 천 년 동안이나 이 자리에서 온갖 눈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는 것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3-25쪽
  • 미타사彌陀寺 미타사는 탑골승방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절이다. 탑골승방의 두 절인 보문사와 미타사 중 규모 면에서는 보문사가 압도적이지만, 미타사 대웅전 뒤편 언덕 위에는 ‘탑골’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석탑 1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타사에 있는 「미타사기彌陀寺記」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950년(광종1)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창건하여 ‘미타사’라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047년(문종 1) 석탑을 조성하여 탑골승방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1314년(충숙왕 1)에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중수重修했다. 이어 조선시대에는 1459년(세조 5) 단종端宗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중수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미타사 서쪽의 정업원 · 동망봉 · 자지동천 등에 정순왕후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 1801년(순조 1)과 1836년(헌종 2)에거듭 중수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현재의 「미타사기」는 훗날인 1992년, 주지 자원慈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탑골’의 유래가 된 육층석탑의 아래 3단이 고려시대의 양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 긴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현재 미타사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 총 다섯 점이 봉안되어있다. 미타사 아미타후불도彌陀寺 阿彌陀後佛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8호), 미타사 지장시왕도彌陀寺 地藏十王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9호), 미타사 신중도彌陀寺 神衆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0호), 미타사 칠성도彌陀寺 七星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1호), 미타사 백의관음도彌陀寺 白衣觀音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2호)가 그것인데, 모두 19세기 후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시 서울 ·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화풍을 띠고 있어 불교 미술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53-55쪽
  • ○ 삶을 일깨우는 인생 교과서 사찰 사찰 52 중창과 중수를 반복한 부처님의 터전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고려 광종 때 혜거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종이 5층 석탑을 조성한 것을 시작으로, 충숙왕이 혜감 국사 만항에게 중수하도록 했다. 세조 때에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알려진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간 뒤 매일 이 부근에 있는 동망봉에 올라 단종을 그리워하였다는역사적 기록이 남아있다. 왕후의 입장을 떠나 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인으로서 애타는 마음이 절절하게 배어나오는 듯하다. 미타사는 이후 헌종 때 상심스님 이인일 스님의 도움을 받아 또 다시 중창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비구니인 계주스님이 고봉스님과 함께 절을 새롭게 단장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미타사의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관음전, 단하각 등이 있고, 유물로는 5층석탑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대웅전 내에는 철종 때 제작된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으며, 삼성각 내에는 고종 때 만들어진 칠성탱화와 이후 제작된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96-97쪽
  • 그런데 보문사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탑골승방의 역사를 말하는 女僧房으로 彌陀寺가 있다. 이 사찰은 光宗 원년(950)에 惠居國師가 처음 창건하였으며, 文宗 원년(1047) 에는 石搭을 조성하여 탑골승방이라고 불리어졌다. 다시 忠肅王 원년(1314)에 彗鑑國師에 의해 중건되어 전승되고 있다. 그런데 탑골승방은 1927년 獨鵑 崔象德이 중편소설 「僧房悲曲」을 이곳에서 집필하여 그 연고성을 더욱 깊게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3쪽
  • 1) 大韓佛敎曹溪宗 ⋅ 彌陀寺 보문동의 보문사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미타사는 고려 광종 원년(서기 950)에 慧居국사가 본사를 창건하고 미타사라 이름하였다. 그 후 고려 문종 원년(1047) 에 석탑을 조성·봉안 하였는데 이로 인해 일명 탑골增房이라 불리게 되었다. 고려 忠肅王 원년(1315) 慧鑑국사가 제2차 중수하였고 단종대왕 1459)에 왕비송씨와 민씨가 3차 중수하였으며 순조 원년(1801) 에 4차 중수하였다. 헌종 2년 병갑년(1836)에 證師震虛堂인일선사가 주지하였으며 비구니 常心師가 5차 중수하였다. 1969년에는 證師古峰 대선사께서 주지하였으며 비구니 宋季珠師가 6차 중수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04쪽
  • 성북구 普門洞 3-51에 女僧房이 있는데 彌陀寺라고 한다. 彌陀寺記에 의하면 光宗 元年(950) 惠居大師가 창건하여 彌陀寺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후 文宗 원년(1047) 石塔을 造成 奉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탑골승방」이라고도 불리어졌다. 다시 忠蕭王 원년(1314) 에 彗鑑國師에 의해 重建되었다. 朝鮮時代에는 端宗 때 (1459년) 왕비 宋氏에 의해 중수되었고 純祖 원년(1801)과 憲宗 2년(1836)에도 중수하였다. 1969년 古峯禪師가 6차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는 지금의 경동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日帝때에 그 자리가 강제헌납되어 현재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주요건물로서 大雄殿·不二門·三聖聞·丹霞聞·石搭이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29쪽
  • 성북구 보문동 3-51에 위치한 彌陀寺는 1047년 惠居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1314년(충숙왕 원년) 慧鑑國師가 2차로 重修하였다. 이절은 현재 比丘尼들만의 수련도장으로 되어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31쪽
  • 그런데 탑골 승방은 보문사보다 이 절 좌측의 彌陀寺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절 대웅전 뒤에는 6층 石搭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쪽 3층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은 고려 光宗원년(950) 에 惠居國師가 창건하여 미타사라고 명명하고 문종 원년(1047) 에 석탑을 쌓아 탑골 승방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8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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