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입구 삼거리에서 북악터널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국민대학교 조금 못 미처 왼편으로 시선을 옮기면 널따란 소쿠리 속에 집들을 빼곡히 담은 듯한 마을 하나가 보인다. 정릉3동을 가로 지르는 큰 도로 건너편의 남쪽 아랫마을, 바로 정릉3동 배밭골이다.
정릉로와 내부순환로가 지나는 북쪽을 제외하면 동서남쪽이 모두 북악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 가수 조동익은 배밭골의 풍경을 그린 노래를 만들어 불렀는데, 서울 안의 시골마을과 같았던 배밭골의 풍경을 잘 전해주고 있다.
조동익의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맑은 개울이 흐르고 소를 이용해 밭을 일구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배밭골은 원래 이름 없는 동네였다. 일제강점기 도시에서 밀려난 빈민들은 이곳에 토막집이나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당시 마을은 들로 가득했고, 배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마을에 있었던 배나무 덕에 ‘배밭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전한다.
맑은 개울을 거슬러 오르다 조그만 다리를 건너
동산을 오를 때면 저만치 소를 앞세우고
땀 흘려 밭을 일구시는 칠성이네 엄마 집에 도착하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노란대문 생각만해도
내 입가에 웃음짓게 하는 그 문을 두드리면
제일 먼저 날 반기던 강아지 마당엔 커다란 버찌나무
그 아랜 하얀 안개꽃 해질 무렵 분꽃이 활짝 피면
저녁 준비에 바쁘신 우리 할머니
저만치 담밑엔 누군가 살고 있을 것 같은
깊고 차가운 우물 두레박 하나 가득 물을 담아 올리면
그 속엔 파란하늘 난 행복했었지 하얗게 춤추던 안개꽃
난 사랑했었지 그곳을 떠다니던 먼지까지도
노란대문 생각만해도 내 입가에 웃음짓게 하는
그 문을 두드리면……
-조동익 「노란대문(정릉배밭골)」
‘김신조 사건’이 마을을 변화시키다
196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배밭골은 농사를 짓는 땅이었다. 1959년 정원주택 설립 이후 배밭골 일대에 주거단지 건설이 가속되었다. 1967년부터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주택건설계획이 수렴되어 불량주택을 철거하고, 대도시의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도록 했다.
그러나 1968년 ‘1.21사태(김신조 사건)’로 주택 건설에서 수도방비로 도시계획 방향이 수정되면서 배밭골의 주거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서울 시내와 외곽에는 고가도로와 순환도로를 대거 건설해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원 모양의 도로가 감싸게 하는 계획이 발표되고 10여 일만에 착공에 들어갔다. 연이어 도로가 들어설 주변의 무허가 주택의 철거계획이 발표되었다. 공사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신설도로 예정지 일대의 판자촌이었다. 선거 때 구로부터 양성화 확약을 받고 당시 30원의 용지대도 냈던 주민들은 철거에 맞서 항의했다. 공사 당시 배밭골의 불량건물 360여 채가 철거되었고 “주민의 적극적인 협조만 있다면 같은 지역 내에 주민 공동으로 영구적이고 현대적인 연립주택 또는 아파트를 건립하여 입주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당시 서울 곳곳에는 불량주택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시민아파트’를 짓고 있었는데, 성북구에서는 월곡지구와 정릉지구에 시민아파트가 지어졌다. 스카이아파트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69년 배밭골에 세워지게 되었다. 스카이아파트가 세워지게 되면서 배밭골 일대에 거주민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규모 있는 동네로 발전하였다.
배밭골은 1973년 자연경관지구로 지정되었다가 2004년 6월 정비예정구역으로 지정, 2016년 정비예정구역 해제 등 재개발과 보존 사이에 혼란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배밭골과 함께 했던 스카이아파트는 철거가 되었고 그 자리에는 SH공사가 공공주택지구로 지정해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마을과 대학이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 마을
배밭골은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도시가스조차 공급되지 않을 정도로 개발에서 비켜나 있었던 마을이다. 하지만 개발이 더딘 만큼 청정자연을 자랑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 뒷산으로 오르면 마치 시골에 온 듯한 자연환경과 쾌적한 공기, 계절마다 특색 있는 들꽃들을 만날 수 있다.
배밭골은 2015년 상인과 주민들을 중심으로 배밭골번영위원회가 발족, 마을 주변의 대학들과 함께 지역문화발전과 공동체발전에 힘쓰고 있다. 2017년 2월 정릉3동 주민센터와 주민자치위원회, 배밭골마을협의회는 국민대학교협력단과 함께 ‘지역과 대학의 경제·문화발전과 상생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 따라 산학협력 선도모델을 만들고, 지역사회 맞춤형 인재를 양성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협력한다’는 취지이다.
또 국민대 학생을 명예동장, 명예주민자치위원장으로 위촉해 지역사회에 관심을 높이고 학교에서 배운 행정이론을 현장에서 접목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마을이 당면한 시급한 현안을 함께 해결해 가려는 노력을 기울일 계획으로 학생들이 애용하는 음식점, 버스 종점 등에 화장실이 없는 불편사항에서부터 맞벌이 부부 자녀를 위한 지역공부방, 작은 도서관 등 문화공간 조성 등 주민 숙원사업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마을에는 차와 디저트, 음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과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 생겼다. 이곳에서는 매주 토요일 저녁 신청자에 한해 본인이 직접 음악공연이나 전시, 연극 등을 할 수도 있다. 서민들의 주거공간에서 인근 대학생과 청년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마을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정릉3동, 그리고 정릉3동의 대표적 마을 배밭골에서는 주민과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다양한 시도들로 활력이 되살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