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부터 1960년대까지 성북동 지역 주민들이 생업으로 삼았던 일이다. 영조 때 지금의 성북동에 어영청의 둔진을 설치하여 사람들을 거주하게 하였는데, 이 지역이 산세가 험해 농사를 짓기 어려워 다른 생업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 수공업 협동단체인 포백훈조계를 설치하여 둔전민의 생계와 부대의 재정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중 포백은 마전이라고도 하는데 옷감을 삶거나 빨고 표백하는 일을 말하며, 도성 안의 무명, 베, 모시 점포의 물건을 맡아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성북동 지역의 포백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져 1902년에는 성북동에 표백회사가 들어서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직조 과정이 점차 기계화되면서 사람의 힘으로 마전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1970년대 성북천 복개공사로 빨래터도 사라졌다.
영조시대에 지금의 성북동에 성곽 지역을 지키는 어영청의 둔진을 설치하여 사람들을 거주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성북동의 첫 주민이다. 그러나 이 지역이 산세가 험해 농사를 짓기 어렵고 과실나무가 많아 열매가 많이 났지만 열매만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매우 어려워 사람들이 떠나거나 도망쳐버렸다. 나라에서는 주민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책을 세워야 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지역 주민에게 각 시장에서 파는 포목을 포백(마전, 옷감을 쪄서 햇볕에 말리는 일)하는 것을 업으로 삼도록 하였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세탁업과 메주를 쑤는 일을 나라에서 독과점 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1960년까지만 해도 성북동 주민들이 성북천을 따라서 나란히 앉아 빨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성북초등학교 앞쪽에 마전터라는 이름의 음식점으로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