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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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보문동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이다. 보문동 지역은 원래 조선시대 이래 일제강점기까지도 신설동에 속했는데, 해방 이후 1949년 동대문구가 너무 넓어 분할하여 성북구를 만들 때 신설동의 일부지역을 나누어 새롭게 동을 만들고 성북구에 편입시킨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서울의 인구 증가에 따른 도시확장으로 돈암지구에 대한 개발사업이 진행되었고, 보문동 지역도 일부 포함되며 근대식 한옥들이 만들어지고 교통 등의 기반시설도 확충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서울의 인구 증가로 보문동 일대에 주거지역이 늘어났고, 신설동과 돈암동을 잇는 보문로가 정비되며 활기를 띠었다.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전설이 깃든 동망봉 아래로 2002년 동망봉터널이 개통되며 종로구와 연결되고 일대가 정비되었다.
보문동
  • 보문동전경
  • 각동(各洞)의 명칭(名稱)과 구획변경(區劃變更,) 돈암동등일부(敦岩洞等一部)를 보문동(普門洞)으로
  • 성북천 기념벽화(8)
  • 성북천 기념벽화(7)
  • 성북천 기념벽화(6)
  • 성북천 기념벽화(5)
  • 성북천 기념벽화(4)
  • 성북천 기념벽화(3)
  • 성북천 기념벽화(2)
  • 성북천 기념벽화(1)
  • 임흥순 서울시장, 보문동 시찰(4)
  • 임흥순 서울시장, 보문동 시찰(3)
  • 임흥순 서울시장, 보문동 시찰(2)
  • 임흥순 서울시장, 보문동 시찰(1)
  • 서울시(市)구획정리진보(區劃整理進捗), 영등포(永登浦), 돈암지구일부(敦岩地區一部)는 완료(完了)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普門洞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근거자료 원문

  • 행정구역의 변천 조선시대 보문동 지역이 속한 행정구역은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영조 27년에 발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과 고종 4년(1867)에 반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보문동 지역이 한성부 동부 숭신방 신설계에 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5년 제도개혁 당시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 동문외계 신설동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는데, 이때 신설동은 지금의 신설동과 보문동을 포함한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보문동 지역의 행정구역은 많은 변화를 맞이한다. 1911년에 일제는 5부 8면제를 실시한다. 이때 한성부를 축소하여 경기도에 예속시켰다. 보문동 지역은 여전히 한성부에 속하였으나 행정구역은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신설계 탑동 우선리로 바뀐다. 1914년에는 경성부 자체를 축소시켰다. 이때 신설동이 속한 숭인면은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된다. 보문동 지역은 경기도 숭인면 신설리로 이름이 바뀐다. 보문동 지역이 다시 경성부로 편입된 것은 1936년 대경성계획大京城計劃의 일환이었다. 이때 경성부는 기존 면적의 3.5배가 확대되는데, 보문동 지역이 속한 신설동은 다시 경성부로 편입되었으며 일본식 이름은 신설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시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구제도區制度를 실시할 때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해방 후에도 행정구역 변동은 계속되었다. 먼저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신설동으로 이름을 바꿨다. 1947년 6월 서울시령 제2호로 동회洞會제도가 시작될 때 고사남부동, 고사북부동, 신설동이 설치되어 신설동 지역을 관할하였는데, 이때 고사남부동과 고사북부동이 관장하던 곳이 지금의 보문동 지역이다. 고사동高沙洞이라는 동명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보문시장 부근에 있는 마을을 모래가 많아 ‘모래말’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로 행정동제를 실시할 때 신설동에서 보문동이 분리되었다. 이때 보문동의 법정동은 난계로(지금의 보문로)를 중심으로 그 지리적 조건에 의해 1 · 2 · 3 · 4 · 5 · 6 · 7가로 나뉘었으며, 행정동이었던 고사남부동과 고사북부동은 보문 제1동과 보문 제2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보문동이 다시 변화를 겪은 것은 1975년이다. 10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979호에 의해 법정동으로서 보문동1가~보문동7가 일원이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동시에 같은 날 제정된 서울특별시조례 제981호에 의해 행정동인 보문 제1동과 보문 제2동도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문동이 성북동으로 들어온 순간이다. 이어 1980년 7월 1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413호에 의해 행정동인 보문 제1동과 보문 제2동이 통폐합되며 보문동으로 조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47-49쪽
  • 토지구획정리사업 – 반듯한 골목 속 도시형 한옥 보문동의 골목으로 들어서면 다소 생소한 풍경이 펼쳐진다. 곳곳에 보이는 한옥과 30년은 훌쩍 넘겼을 것 같은 ‘양옥’과 곧고 넓게 뻗은 ‘골목’이 보여주는 묘한 이질감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시장 바로 옆에 위치한 거대한 주상 복합 건물, 거대한 아파트 단지 끝자락에 위치한 전통사당(동망각)은 이곳이 과거와 현재가 여전히 공존하는 곳임을 보여준다. 여러 시대가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곳,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것이 볼거리가 되는 이 마을의 현재 모습은 일제강점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몇 년 지나지 않은 1914년 총독부는 한양을 경기도에 속한 하나의 부府로 격하시키고, 영역도 줄였다. 조선시대 한성부에 속해 있던 보문동 지역은 이때 경기도 숭인면 신설리에 속하게 된다. 보문동이 다시 경성에 속하게 된 것은 22년이 지난 후였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71-72쪽
  • 동대문구 고사남 ・ 북부동(1946~1955) : 모래벌판 신흥주택지 일제에 의해 신도시, 당시 말로는 신흥주택지로 조성된 보문동이었지만 1950년 무렵 이 지역은 오늘날처럼 조밀한 주택지대가 아니었다. 그 무렵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는 이곳에 ‘아무것도 없고 모래벌판이 펼쳐져 있는’ 허허벌판과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도그럴 것이 1946년부터 1955년까지는 이 지역에 설치한 동회(지금의 행정동)를 고사남부동高砂南部洞과 고사북부동高砂北部洞 등 ‘모래 사砂’자가 들어간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는 지금의 보문시장 부근을 ‘모래말’이라 불렀던데서 제정한 동회명이었다. 보문동 경로당 박신원 어르신의 증언에 따르면 보문동 일대는 조금만 파면 모래가 많이 나왔고 그 모래의 질이 아주 좋았으므로 건설 자재로도 나갔다고 한다. ‘질 좋은 모래가 나는 땅’이란 뜻에서 ‘고사高砂’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었을까? 1946년 서울시의 통학구역표를 보면 창신국민학교(현 창신초등학교)의 통학구역이 ‘숭인, 창신동부, 창신북부, 창신서부, 신설정고사남부, 고사북부’라고 되어 있는데 이로 보건대 고사남부와 고사북부는 아직 독립된 동회로 분화되지 않은 채 신설정(동)에 속한 작은 마을 정도로 분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통학권과 생활권이 어느 정도 일치함을 감안한다면 고사남 ・ 북부는 신설 ・ 숭인 ・ 창신 지역과 연결된 생활권 안에 있었음도 알 수 있다. 1958년에 발행된 서울 지도 역시 1950년대 보문시장 부근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려 준다. 지도를 보면 보문동을 북쪽에서 남쪽까지 1~7가로 나누었을 때 주로 신설동 로터리와 숭인동과 가까운 6~7가에 지번들이 밀집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보문동 가운데서도 신설동에 가까운 쪽에 주택들이 먼저 들어서고 이후 ‘모래말’이라 부르던 보문시장 근방까지 주거지역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주거지역이 확대되고 1940년대 조성한 택지가 주택들로 어느 정도 채워졌을 때인 1955년 무렵에 와서야 오늘날과 같은 보문동(행정동)의 경계와 동명이 새로 제정되었던 것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90-91쪽
  • 동대문구 보문동(1955~1975) : 플라타너스, 도시형 한옥, 판자촌 1940년대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가 신흥주택지 보문동의 설계가 이루어지고 바탕이 잡혀가는 시기였다면 이후 1955년부터 1975년까지는 보문동이 점차 채워져 가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보문동을 채워 갔던 것은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녹음과 더불어 평지의 수많은 도시형 한옥들과 천변과 산비탈에 들어선 판잣집, 무허가 주택 들이었다. 이러한 보문동의 변화는 당시 주요 일간지들에 보도된 여러 사실들에 힘입어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채워갈 수 있다. 전쟁 이후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동대문 바깥 보문동 인구도 급증했다. 그리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는 단정한 도시형 한옥들이 미리 구획된 택지 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폭넓은 도로(지금의 보문로)에 심은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이제 제법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보문동은 지난날 모래 휘날리던 신도시의 황량함을 벗고 쾌적한 주택지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곳곳에서 문제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1960년 8월 13일자 『경향신문』에 보문동 주민 최요안崔要安 씨가 투고한 기사를 보자. 돈암교와 신설동 사이를 가로지른 아스팔트 도로에는 플라타너스의 가로수가 우거진 녹음을 짓고 단정히 늘어서 있는데 동편의 안암동과 서편의 보문동은 서로 마주보며 조밀한 주택지를 이루고 있다. 한 5년 전만 하더라도 폭이 넓은 도로에는 교통사고가 드물었는데 근자 1, 2년 사이에 갑자기 사고는 빈번해졌다. 버스, 합승, 택시 등 교통량의 급증과 더불어 인구가 는 탓이리라. (중략) 그러던 하루 도로에서 약 50미터 들어선 필자가 사는 보문동 주택지 일각에 갑자기 버스 시발(始發) 주차장이 생겼다. 버스가 들어설 만한 공지가 본래 있었던 것은 아니고 토건업을 하는 어떤 개인 집의 담과 창고를허물어 그 집 뜨락을 주차장으로 만든 것이었다. 100평 남짓한 좁은 그뜨락에는 겨우 몇 대의 차가 수용되고 십여 대에 달하는 나머지 차들은 골목 연변에 우왕좌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칠팔십 명에 달하는 운전사, 조수, 기타 종업원을 상대하는 노점 음식점이 쇄도하여 일야축성격(一夜築城格)으로 도처에 닥치는 대로 판잣집을 세우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주택가는 하루아침에 장바닥이 되고 말았다. 인근 주민들은 아연실색하여 평소에는 인사도 없던 사람들이 같은 걱정거리를 의논하기 위하여 웅성웅성 모이게 되었다. 소음, 지동(地動), 먼지, 화재의 우려, 풍기문란 등 각기 이야기하였는데 그 모든 것은 차라리 참을 수 있었다. 가장 큰 걱정은 천사와 같이 무심한 어린 아이들이 그 놀음터를 빼앗기고 이삼 분마다 주택가를 꽉 차게 내왕하는 버스의 위험 밑에서 어떻게 견디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하 생략) ― 『경향신문』 1960년 8월 13일 「버스주차장과 천사」 근래 보문동의 인구와 주택이 늘면서 교통량 또한 급증하고 그와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버스 차고까지 불법적으로 주택가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주민들의 생활환경이 급격히 나빠졌다는 하소연이다. 버스의 왕래로 인해 주민들이 소음과 진동과 먼지에 시달리게 되었음은 물론 주변에 판잣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했으니 이로 인해 아이들의 놀 장소마저 빼앗기게 되었으므로 정부는 하루속히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촉구하는 글이다. 신도시 보문동의 쾌적한 주거 환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시내와의 이동 편의를 위해 버스 노선의 연장을 강력히 요구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경향신문』 1961년 1월 31일자의 기사다. 30일 상오 서울시장실 앞 복도에는 약 200명이 밀려들어 많은 경관이 동원되었다. 보문동과 안암동의 주민들이 “글쎄 무슨 놈의 관청일이 6개월 전부터 진정서를 내도 버스를 안 넣어주니!” 분개가 보통이 아니었다. 현재 동대문구청 앞에서 서울역으로 나가는 시내버스를 돈암동 쪽으로 1,200미터 더 들어오게 해 달라는 것이 진정의 골자 “돼먹지 않은 것이 대표가 와서 말하면 업자의 앞잡이처럼 생각하니 오늘은 그게 아니라는 증거로 동민들이 이렇게 나왔다”는 것이 데모의 연유. ― 『경향신문』 1961년 1월 31일 「증거 보이자고 데모」 당시에 서울 도심과 왕래하는 시내버스가 신설동 로터리만 지나기 때문에 신설동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보문동과 안암동 주민들의 불편이 크므로 도심과 보문동, 돈암동까지를 잇는 버스 노선을 신설해 달라는 것이 진정의 골자였다. 돈암동과 신설동 사이 보문동과 안암동의 인구와 주택이 늘어난 결과로 생겨난 주민들의 불만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지금 보문동을 통과하는 버스 노선들은 이때 주민들의 격렬한 항의 덕분에 생겨난 것일는지 모른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91-94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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