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동/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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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인문지리
성북구 보문동의 주거와 관련된 내용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서울의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주거문제가 심각해졌고, 도시빈민이 도심으로부터 밀려나면서 보문동(신설동) 지역에도 ‘토막’이라 불리는 빈민들의 주거가 밀집되었다. 1930년대 돈암지구 재개발로 이들은 다시 더 외곽으로 쫓겨났고, 그 자리에는 근대적인 도시형 한옥이 들어섰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다시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1970년대의 도시 정비로 양옥이 들어서며 빈민들은 밀려났다. 보문동에 살았던 소설가 박완서의 글에서는 산동네 판자집과 양옥이 교차되는 당시의 모습이 잘 묘사되었다. 이후 노후된 주거시설들은 다세대주택과 빌라, 아파트로 다시 대체되어, 2000년대 이후에는 아파트를 비롯한 공동주택의 비중이 높아졌다.
보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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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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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근거자료 원문

  • 보문동 지역은 근대화되면서 반듯하고 넓은 골목과 깔끔한 도시형 한옥으로 채워졌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슬픈 일들도 벌어졌다. 사람들이 쫓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토막민으로 대표되는 도시 빈민은 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토막이 국유지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경성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20년에 25만 명이었던 경성부의 인구는 1926년에는 33만 6천명으로 34.43%라는 엄청난 증가율을 보였다. 인구는 급격히 늘었지만, 경성에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주택이 없었고 그들을 위한 제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당시 경성부로 몰려든 사람들은 국유지를 불법으로 점유하고 그곳에 아주 기초적인 주거시설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토막’이라고 불렀다. 안암정과 신설정(현재 보문동을 포함)에는 토막이 많이 존재했다. 경성부내에는 삼천여 호 토막이 산재하였고 세궁민의 증가에 따라 연년 증가의 상태로 경성부 당국에서는 토지구획정리와 병행하여 이의 영구적 방책으로 세민지구(細民地區) 설정을 계획하고 있다함은 기보한 바있거니와 (중략) 돈암지구 내에 신설정, 안암정에는 현재의 하천부지(河川敷地) 등에 칠백 호의 토막이 산재하여 있으므로 이에 해당할 면적부조 공유지 오천이백 평을 그들에게 제공하기로 되었는데 (후략) ― 『동아일보』, 1938년 10월 28일 이 기사에 따르면 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1938년 당시 경성부 내의 토막은 총 3,000여 호였는데 이중 1/4에 가까운 700여 호가 안암천을 중심으로 현재의 안암동과 보문동 지역(나아가 신설동까지)에 산재해 있었다. 이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경성제국대학 위생조사부 보고서에서는 토막을 ‘하룻밤 사이에 가마니, 나무판자 조각 등을 대충 모아 재생한 정도’라고 묘사하고 있다. 물론 온돌 등이 갖춰진 곳이 많아 위의 묘사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허름한 것은 사실이었다. 우선 토막은 매우 협소했다. 좁은 곳은 1평~1.5평 내외의 1실(단칸 방) 구조가 대부분이었으며, 방이 두 개 이상인 경우는 하나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1인당 평균 평수는 0.6평 이하가 전체의 79.4%에 달했다. 기본적인 온돌 시설마저 없는 곳도 6%나 됐다. 한 세대에 4~6인이 사는 경우가 전체에57.9%에 달했고, 한 세대의 평균 인원수는 4.8명이었다. 이태준 소설 「달밤」 속 황수건은 일곱 식구가 한 집에 산다고 하였는데, 당시 그의 집이 토막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토막민 평균보다 더 많은 식구가 한 집에서 사는 셈이었다. 자연히 위생 문제도 심각했다. 전체의 51.8%는 전용 화장실을 사용했지만 나머지는 공동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화장실이 없는 곳도 있었다. 목욕은 한 달에 한 번 하는 경우가 22.6%, 두 달에 한 번하는 경우가 29.1%였고, 단 한 번도 목욕탕에 가보지 않은 경우도 11.5%에 달했다. 물론 목욕탕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이 씻지도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름 이외에 전신을 다 씻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중략) 위의 신문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들을 그냥 쫓아내려 한 것이 아니라 세민지구, 즉 이들을 수용할 빈민지구를 따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경성부는 이들을 위해 5,200평의 부지를 내어주겠다고 하고 있었다. 일견 제국주의 권력인 경성부가 도시구획정리사업에서 소외될 도시 빈민을 위해 ‘합리적’인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쉽게 얻어진 결과가 아니었다. 경성부에서는 지난 2일 부내 373번지의 수필의 국유지에 거주한 토막민 400여 호에 대하야 돌연 철거명령을 내리게 되어 청천의 벽력을 만난 듯한 동 주민 일동은 크게 낭패하여 한문희(韓文熙) 외 전 주민 400여 명이 연서하야 지난 8일부로 당해 부당국과 도당국에 대하야 진정서를 제출하고 선처하여 달라는 요망을 하였다는데 부에서는 신년도 계획으로 신설정 관통도로를 신설하게 되면서 동 국유지 2,343평을 부내 안암정(安岩町) 함학운(咸學震)에게 대하여 지난 3월 15일부로 공동주택건축을 조건으로 대부허가를 하고 십수 년간 거주하는 연고자에게 대하여 그와 같이 돌연 철거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라는데 전기 함학진은 재작년 중에 동정 369번지에 200여 간의 공동주택을 건축하였는바 전기한 바 도로계획으로 인하야 그 일부의 철훼를 당하게 되고 그 댓가로서 전기 국유지를 빈민구제의 명분하에 공동주택을 건축하겠다는 조건으로 전기 국유지 대부를 받은 것 이라는데 전기 한씨는 기왕 건축한 주택에서 매간에 대하야 3원 30전 내지 3원 60전의 월세를 증수하고 있는 터인데 과연 그의 사업이 명실공히 빈민구제의 사업이 될지도 의문일 뿐더러 400여 호의 토막을 철훼하고서까지 강행하려는 그의 사업전도에는 문제가 횡재하여 있을뿐더러 문제가 문제인만큼 그 진행여하는 실로 주목되고 있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38년 4월 19일 다소 장황하게 인용한 위의 기사는 앞선 기사보다 6개월 이상 앞선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4월 2일 경성부는 전격적으로 신설정 지역에 있는 토막 4백여 호에 대한 철거 명령을 내린다. 이에 반발하여 전주민은 경성부와 경기도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경성부가 이들 토막의 철거를 결정한 것은 신설정을 관통하는 도로를 놓기 위해서였다. 더 주목되는 것은 토막민들에게 함학진이라는 개인이 이미 지어놓은 주택으로 들어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사에도 적혀 있듯, 그는 한 칸마다 3원 30전에서 3원 60전까지의 월세를 받는 일종의 임대사업자였다. 기사에서도 이런 정책이 빈민구제 사업으로 적당하지 않음을 꼬집고 있다. 당연히 주민들을 이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끊임없이 저항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78-83쪽
  • 조선총독부와 경성부도 손 놓고 지켜 볼 수는 없었다. 토막민은 계속 늘어났기 때문에 대책을 세워야 했다. 거기에 더해 토막민들은 도시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주요한 공급원이었다. 이전의 대책은 이들을 마냥 외곽으로 내모는 것이었지만, 더 이상 그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저항도 계속 되었다. ‘세민지구’ 설립계획은 이런 여러 상황이 고려되어 나온 계획이었다. 토막민을 쫓아낼 대상에서 수용의 대상으로 정책을 수정한 당국의 인식 전환은 획기적인 것이었으나 이것은 계획으로만 끝날 수밖에 없었다. 세민지구 정책을 가장 먼저 시범실시하기로 한 곳이 바로 돈암지구였는데, 돈암지구의 토지구획정리사업도 일제강점기 말에 간신히 끝날 정도로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세민지구 계획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그래서 기획 단계부터 책정됐던 국가보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은 군비 지출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다. 세민지구 조성계획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좌절됐다. 토막민을 필두로 하는 도시빈민 대책에 대한 당국의 인식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작년부터 착공하여 3개년 계속 공사로 목하 진행되고 있는 돈암지구 정리구역 내에 있는 700호의 토막이 또 문제가 되어있으니 돈암정 신설정 안암정 등지에서 공사개시 이래 벌써부터 토막촌 때문에 여러 가지 곤란을 거듭해왔던 바 이제는 거기서 물러나 종암정 모래강변에다 130여 호나 모여들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성부 토목과에서는 다시금 이들을 철퇴하고자 이 삭풍한설 혹한 중에 강제철훼를 시작하여 그네들 중에는 정신상실자까지 있었고 호소애원하는 소리는 일장의 참경이었다고 하니 (후략) ― 『동아일보』, 1938년 12월 23일 위의 기사는 강제철거를 다루고 있다. 10월에 세민지구 이야기가 나오고 겨우 두 달이 지난 시점이다. 12월은 한 겨울이었다. 더구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들은 돈암, 신설, 안암동 지역에서 이미 쫓겨나 종암동에 다시 자리잡은 상황이었다. 갈 곳이 없는 것은 당연했고, 추운 겨울은 얼어 죽는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는 시점도 아니었다. 호소하고 애원하다, 그것도 안 되니 정신을 잃은 사람도 생겼다. 상상만 해도 잔인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일제 당국의 인식 변화는 서류상의 것으로 그쳤다. 해방 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심해졌다. 독립이 되자 해외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분단의 전조 속에 38선을 넘어온 사람들이 서울에 자리잡았다. 해방 직후 겨우 90만 명을 웃돌던 서울의 인구는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약 142만 명 정도로 늘어났다.36 이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번듯한 집을 마련할 리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서울의 주택난은 더욱 심각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83-86쪽
  • 위의 표를 보면 삼선, 보문, 삼선, 동소문, 돈암, 종암, 성북동 등이 서울시의 무허가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무허가 정착지는 주인이 번듯하여 관리가 비교적 잘 되는 사유지였을 가능성보다, 관리가 소홀한 국유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면 일제강점기의 토막촌은 해방 후 서울의 무허가 정착지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해방은 되었지만, 가난과 전쟁으로 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부와 서울시도 손을 놓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1950년대에서 60년대 중반까지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는 것과, 이재민과 전쟁 난민들에게 정착할 시유지(혹은 국유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히려 무허가촌을 증가시켰다. 무허가촌 정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1960년대 중반이었다. 서울시는 김현옥 시장의 주도하에 ‘무허가건물 연차별 정리계획(1965~1970)’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1967년에는 근본적인 해결을 위하여 ‘불량건물 정리계획(1967~1969)’을 새롭게 마련했다. 이 계획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① 시 외곽에 대단위 정착촌 건설 및 무허가 건물 거주자 집단 이동 ② 불량주택 및 무허가 건축물을 자력으로 개량하는 주민에게 지원 ③ 시민아파트의 건립이다. 하지만 모두 너무 급하게 추진되어 부작용을 낳았다. ①의 경우 상하수도, 도로 등 기본적인 제반시설도 갖추지 않고 추진되었으며, 그것은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③의 부작용을 보여준 것은 와우아파트의 붕괴였다. 빠른 시일 내에 성과를 내려했던 사업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그래도 계획은 계속되었다. 목동, 상계동, 중계동, 사당동, 천호동 등 도시 외곽에 대규모 집단이주 정착지가 조성되었다. ②번의 계량 및 양성화 사업도 진행되었다. 1982년까지 성북구의 많은 무허가건축물이 이때 양성화되었다. 이제 보문동 지역에서 토막을 찾을 수 없다. 무허가건물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천변은 잘 정리되어 있어 주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 북적이는 시장, 높이 솟은 아파트는 삶에 편리함을 제공한다. 하지만, 한때 이곳이 그 누군가의 힘겨운 삶의 터전이었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변화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중요한 방편일 것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86-87쪽
  • 위에서 든 사례들이 보문동 주민 가운데서도 중산층, 그러니까 주택한 채 정도는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라면 그보다 생활 여건이 더 열악한 주민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바로 판잣집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1960년대 초반 보문동의 판잣집들이 모여 있는 곳은 주로 성북천변이었다. 이들 판잣집들은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지은 무허가 건물로서 당시 서울에는 홍은동, 보문동, 동부이촌동 등지에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대부분 농촌에서 상경하여 도시 노동자로 살아가는, 기댈 데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국유지로 되어 있는 천변 토지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군사정부 하의 서울시는 1962년 초겨울, 이들 서울의 판자촌들을 철거하겠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보문동 성북천변의 판잣집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울시는 약간의 보상금을 주거나 구로동의 난민주택 입주를 알선해 준다는 보상책을 내걸긴 했지만, 하루벌이로 생활하는 대다수 판자촌 사람들에게는 당장의 생활 터전을 잃게 되면 살 길이 막막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집이 없어질 위기에 처한 보문동 판자촌 주민들은 할 수 없이 당시 최고 권력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좀 더 너그러운 조치를 기대하고 갔던 것이다. 26일 밤 서울 동대문서는 박의장 공관 앞에서 판잣집 철거 보류 데모를 하려고 한 이인수(23=보문동 204)씨 등 5명을 연행했다가 밤늦게 돌려보냈다. 이들은 보문동 개천 옆에 있는 무허가 판잣집 77가구(약 350명) 주민들로 주민 30명이 함께 이날 밤 8시 반쯤 박의장 공관 앞에 몰려가 데모를 하려다 경찰제지로 해산되었다. 동대문구청은 27일 보문동의 판잣집 철거에 착수했다. ― 『동아일보』 1962년 11월 27일 「판잣집 철거 반대 진정 소동」 그러나 이와 같은 보문동 판자촌 주민들의 철거 보류 호소에도 불구하고 동대문구청은 그해 11월 27일 성북천변의 판자촌 철거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이들 보문동 판자촌 주민들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이후 1960년대 후반의 기록들을 보면 보문동에는 성북천변뿐 아니라 숭인 ・ 창신동과 연접한 산비탈 지대에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계속 서울로 꾸역꾸역 모여들고 낙산이나 동망봉 같은 서울의 야산이란 야산은 판잣집들로 덮여가고 있었는데 보문동 역시 예외일 리 없었다. 그리고 정부는 이 산비탈 지대의 판잣집들, 다시 말해 무허가 불량주택에 대해서도 결코 온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다만 ‘철거’라는 무시무시한 용어 대신 ‘양성화’라는 좀 더 부드러우면서도 애매한 용어를 들고 나왔다. 1966년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된 후의 일이었다. 1967년 서울시는 시내의 무허가 주택 13만 6,650동 가운데 4만여 동을 보수 ・ 양성화하고 나머지 9만여 동의 주민들은 새로 건립할 시민아파트와 경기도 광주대단지로 이주시키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는 보문동 산비탈 지대의 판잣집들도 포함되었다. 서울시는 66년말까지 등록된 무허가불량주택중 일부를 개량하는 것을 조건으로 양성화해 주기로 했다. 대상지역과 동수 및 양성화 기준을 확정, 각 구청에 29일 시달한 서울시는 제1차로 제방 도로부지 공사용지 고지대 및 도시계획에 저촉되지 않는 105개 지역의 35,260동의 무허가 불량주택을 헐고 새로 건축하는 것을 원칙으로 양성화해 주기로 했다. 양성화 기준을 보면 ①새로 짓는 건축물의 건평은 15평을 최저로 할 것 ② 지붕은 기와나 슬레이트로 하되 반드시 유색으로 할 것 ③벽체는 시멘트 블록 또는 시멘트벽돌로 할 것 ④굴뚝은 네모지게 쌓아올리도록 되어 있다. 구역별 양성화 지역은 다음과 같다. (중략) ◇ 동대문구 : ▲숭인동 산1, 56(650동) ▲보문동6가 209(150동) ▲보문동 산7(218동) ▲청량리동 9(255동) ▲청량리동 2, 195(285동) ▲용두동 625(200동) ▲전농동 493(84동) ▲전농동605(80동) ▲회기동 산4(126동) ▲답십리동 372, 222(268동) ▲답십리동 산12, 13, 40(340동) ▲휘경동 263(121동) ▲면목동 산53(173동) (이하 생략) ― 『경향신문』 1968년 4월 29일 「3만5천동 양성화」(※밑줄은 필자) 1968년 4월, 보문동 산비탈 지대의 무허가 불량주택 368동이 양성화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기사에서도 보다시피 양성화의 기준이란 게 까다로웠다. 새로 짓는 건축물은 15평 이상, 지붕은 반드시 기와나 슬레이트, 벽체는 시멘트 블록이나 벽돌, 네모진 굴뚝. 당시 무허가 주택 거주자 가운데 15평 이상 되는 게 어디 흔할 것이며 또 있다 해도 이를 부수고 번듯한 새 집을 지을 만한 여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철거’라는 말만 안 했을 뿐이지 그냥 살던 집을 버리고 나가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보문동 산비탈 지대 판자촌 사람들은 다시 변두리로 흩어졌다. 1971년 6월에도 서울시는 그런 양성화 대책을 발표하였는데 이때도 역시 보문동6가 198, 209번지 일대의 무허가 주택들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적인 양성화 사업이 오래 지속될 리는 만무했다. 1970년 시범아파트인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거주민의 이주를 강제하는 양성화 사업은 노동자와 빈민들의 반발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정부와 서울시가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울시는 1972년 3월부터 기존 무허가 건물 양성화 계획을 대폭 수정 · 확대하여 ‘현지개량 사업’으로 전환했다. 이 사업은 일종의 주거환경개선 사업으로 무허가 주택이 밀집한 지역의 도로와 골목의 확장, 하수도 정비, 축대 쌓기 등 공공시설과 주택개량 사업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사업의 비용은 무허가 주택이 무단 점용하고 있는 토지를 해당 건물주들에게 유상으로 불하하여 그 대금으로 충당한다는 계획이었다. 철거나 양성화 사업보다는 해당 주민들에게 시간적으로나 자금적으로나 얼마간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사업이었다. 1973년 1월 보문동6가 33번지 일대 67동이 이 사업의 시범 지구에 포함되었다.41 이후 보문동의 산동네에서 이러한 현지 개량 사업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고, 그로 인해 비록 많은 주민들이 떠나고 새로 유입되기를 반복했지만 예전 판자촌의 누추한 담장과 지붕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어 갔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94-99쪽
  • 성북구 보문동(1975~1990) : ‘우리 골목의 변모’ 1975년 보문동은 정들었던 동대문구의 울타리를 벗어나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앞선 동대문구 시절이 보문동이 채워져 갔던 시기라고 한다면 성북구 시절은 그전까지 채워졌던 것들이 변모해 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지의 개량 한옥들이 하나 둘 양옥이나 다세대주택으로 바뀌어갔고, 산비탈의 판자촌과 무허가 주택들은 지속적인 개량화 사업으로 정돈된 분위기를 찾아갔다. 이 시기에 박완서가 발표한 수필과 소설 중에는 1970년대 보문동의 주거환경과 주민들의 생활이나 관계들이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당대의 충실한 기록이 되는 작품들이 많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 속에 묘사되어 있는 보문동의 어느 골목, 어느 집, 어느 인물들로 시선을 옮겨 보는 것도 1970년대 보문동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먼저 수필 「노인」(1977)42의 한 대목부터 읽어보자. 벌써 10여 년 전쯤부터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진 한 친구는 늘 우리 동네를 부러워했었다. 아파트가 편하긴 다 편해서 좋은데 이웃끼리 통 사귀지를 않고 산다는 거였다. 그때만 해도 우리 동네는 한옥이 밀집한 고풍스러운 동네였고 이웃 간에 친목이 대단했었다. (중략) 그러나 우리 동네도 이젠 많이 변했다. 골목 안에서 우리가 제일 고참이 되었고, 한옥 사이 드문드문 양옥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웃 간에 왕래가 끊긴 지 오래다. 이제 와서 문득 지난날의 인심에 그리움 같은 걸 느끼며 우리가 제일 고참인 점으로 미루어 우리 골목 안의 아름다운 전통이 우리로부터 끊긴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조차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우리 골목의 변모야말로 근래 10여 년 간의 우리 사회의 급속한 근대화가 가져온 수많은 변모의 한 전형일 따름일 것이다. 우선 집이 팔리면 새로 산 사람이 멀쩡한 한옥을 철거한다. 아직도 몇 십 년을 더 버틸 수 있는 굴도리에 재목이 좋은 한옥이 헐려서 시골로 내려간다. 시골 사람들은 이런 한옥을 사다가 그대로 조립하는 식으로 지으면 건축비가 훨씬 덜 든다는 거였다. 철거가 끝나면 철근에 벽돌에 시멘트가 쌓이고 땅을 판다. 양옥의 기초공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맘때쯤 으레 맞붙은 한옥 주인과 싸움이 붙는다. 지하실을 너무 깊이 파서 집이 기울고 있다든가, 담을 몇 센티쯤 내 쌓았다든가 하는 일로, 집이 완공될 임시도 또 싸운다. 2층에서 남의 집 안방이 들여다보이니 될 말이냐, 보여도 안내다보면 될 게 아니냐 하고 어린애들처럼 싸운다. 그러나 이런 싸움의 결과란 으레 새 양옥집 주인의 승리다. 이렇게 생긴 양옥은 우선 대문이 어마어마하고 담엔 쇠꼬챙이가 솟고, 차는 있건 없건 셔터 내린 차고까지 있어 이웃의 한옥하곤 사뭇 단수가 달라 뵈고 사람까지 달라 뵈서 상종들을 안 하려든다. ― 박완서 수필, 「노인」(1977) 중에서 수필은 한옥을 밀어내고 보문동에 들어서기 시작한 양옥들의 특징이 그 폐쇄성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박완서가 보기에 한옥은 열림과 닫힘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골목에서 대문으로 마당으로 마루로 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이웃끼리 오고 가며 정을 나누는 공간. 반면에 양옥은 사생활과 사유재산 보호를 최우선 목적으로 만들어진 집이었다. 그런 집의 구조에 적응한 사람들은 자연히 이웃 간의 왕래에 소홀해졌고, 동네마다 형성되었던 이웃끼리의 네트워크에서도 쉽게 배제되기 마련이었다. 주택 양식의 변화는 비단 외형적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 간의 관계, 동네 인심의 변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불쑥 들어서는 양옥들에 이질감을 느꼈던 보문동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내심 저 양옥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부러워했다. 박완서는 한옥에서 살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겪게 되는 무수한 불편들이 실은 한옥의 구조 자체에서 비롯되었다고 어느 소설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부엌에서 안방까지 넘어야 할 높은 턱들, 겨울이면 벽창호와 문틈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외풍과 한기, 지붕과 벽에서 수시로 떨어져 내리는 흙덩이, 끊임없이 수리와 교체를 필요로 하는 질 낮은 자재들, 보장되기 어려운 사생활……. 이 모든 불편을 초래하는 한옥이 주부들에게는 그야말로 몸을 옥죄는 형틀 같은 것이라고 소설가는 말했다. 어떤 주부가 이 형틀을 벗고 싶어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고 보면 그 시대 주부들의 구원은 오직 아파트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1970년대 강남 개발이 시작되면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아파트 분양 소식은 이곳 보문동 사람들의 마음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아파트는 서울의 집집마다 숨어든 신神과 같은 존재였다. 이제 그 신 앞에서 보문동을 신흥주택지라 부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1970년 중반 강남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즈음, 보문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구舊 동네’가 되어 있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99-102쪽
  • 그런데 처음 갖는 집을 아파트로 하느냐 단독주택으로 하느냐엔 올케와 어머니의 의견이 대립했다. 올케는 아파트 편이었다. 첫째 난방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니 구공탄을 가는 구질구질한 일을 면할 수 있고, 부엌 등 모든 시설이 편리하니 식모가 필요 없고, 잠그고 외출할 수 있고, 이웃과 완전히 차단된 독립성이 보장돼 있고 등등이 아파트를 편드는 이유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바로 이 독립성이라는 걸 겁내고 있었다. 아파트에서 가끔 일어나는 살인사건 같은 걸 다 이 냉정하고 철저한 독립성에 그 까닭을 두고 있었다. 어머니의 이론대로라면 이 나라에선 살인사건은 꼭 아파트에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봐야 할 판이었다. 이웃끼리 고사떡 찌는 냄새도 훌훌 넘어오고, 지짐질 하는 소리도 지글지글 넘어가 서로 나누어 먹고 대소사를 서로 의논하고 도와주고 해야 사람 사는 동네라는 거였다.올케와 나는 마주보고 눈을 찡긋했다. 나는 올케 편이었다. 나는 이웃사촌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이 구(舊) 동네가 싫었다. 도대체가 남의 집 일 에 너무 관심들이 많았다. 뉘 집 아들이 일류대학이나 일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하면 서로 제일처럼 신이 나고, 떨어진 집엔 심란한 얼굴로 위로를 하러 몰려가고 노인네들 생일엔 서로 청해서 먹고 노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남의 집 내막을 알아내서 풍기고 흉을 보는 데도 선수들이었다. ― 박완서 소설, 「닮은 방들」(1974) 중에서 구식 집들로 가득 찬 구식 동네이니 집이라도 아파트를 닮은 신식 집을 짓는 게 당연한 듯 보였다. 한옥들 사이로 들어선 양옥들이 차츰차츰 보문동의 조감도를 변모시켜 갔다. 그렇게 바뀌어가는 동네를 어느 날 박완서는 한옥 지구 서쪽에 있는 산동네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변해 가는 동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산동네에 올라서면 이 산동네의 품에 삼태기에 담긴 듯이 안긴 우리 동네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래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의 아름다운 동네였다. 그러나 지금은 우뚝 솟은 양옥 사이에서 이 빠진 자국처럼 밉다. 엉터리 사장님들의 허풍까지를 포함한 이런저런 추함들이 바로 우리 근대화의 한 모습일는지도 모르겠다. ― 박완서 수필, 「우리 동네」(1977) 중에서 산동네에 올랐으니 바로 코앞 산동네 집들이 변해 가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 동네의 서쪽은 산이다. 본래는 산이었지만 지금은 빈틈없이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산동네다. 이 산동네가 또 재미있다. 루핑이나 함석을 덮은 판잣집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새는 붉은 벽돌의 2층 연립주택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골목은 미로처럼 좁고 꼬불탕꼬불탕하고 연립주택 그늘엔 판잣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주택은 시에서 시멘트랑 벽돌을 거저 줘서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 혜택이 누구에겐 가고 누구에겐 안 가는지 그것까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아무튼 연립주택 때문에 판잣집들이 한층 초라해 보일 뿐이다. ― 박완서 수필, 「우리 동네」(1977) 중에서 앞서 서울시가 1973년부터 추진한 ‘현지개량 사업’의 실제 결과들이작가의 시야에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박완서가 올라갔던 산동네는 보문동의 서쪽 산비탈, 그러니까 지금 자이 아파트 단지가 있는 지역이었다. 1970년대 중반이면 1960년대 이 산비탈에 게딱지처럼 붙어 있던 널빤지, 루핑, 함석을 잇댄 판잣집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벽돌조 단독주택이나 2층 연립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지은 집들 역시 2013년부터 시작된 재개발로 사라지고 그곳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산 → 판자촌 → 연립주택촌 → 아파트단지. 보문동은 큰 변화들은 단 70년 만에 일어났다. 이와 같이 빠른 변모를 겪은 동네는 서울에서 비단 보문동뿐만이 아니었다. 박완서가 썼듯이 보문동 골목의 변화는 ‘한국 사회의 급속한 근대화가 가져온 수많은 변모의 한 전형일 따름’인 것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02-107쪽
  • 성북구 보문동(1990~현재) : 다세대주택, 아파트 단지, 보문역 1990년대 초만 해도 보문동에는 꽤 많은 한옥들이 남아 있었다. 박완서가 살았던 1970년대 후반에 드문드문 양옥들이 들어서면서 지난날의 경관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한옥 지대와 양옥 지대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룬 경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의 한옥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어서 1990년대의 경관이 유지되었더라면 보문동은 종로구의 북촌이나 가회동 같은 관광명소가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보문동의 경관들이 급속히 바뀌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중반부터다. 정부가 다세대주택 건축 기준을 완화하면서 서울은 물론 전국적으로 다세대, 다가구 주택 건축 붐이 일었는데 보문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점차 전세나 월세를 놓는 것을 목적으로 한 3층 이상 다세대주택과 연립주택들이 야금야금 평지의 한옥들을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그 확산 속도는 1970~80년대에 양옥이 들어섰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2000년대 초반이 되면 보문동과 안암동에서 한옥이 밀집한 경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1994년은 보문동에 처음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해로 기억된다. 이 해 10월 보문동6가에 아남아파트 단지가 선보였다. 15층짜리 아파트 3개 동에 218세대가 들어선 소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이후 2003년에는 보문동3가 탑골승방 앞에 보문 아이파크 아파트(7개 동, 431세대)가 입주를 시작했고, 2011년에는 보문동4가 보문시장 남쪽에 보문하우스토리(2개 동, 162세대), 2013년에는 보문동3가 동신초등학교 뒤편에 e-편한세상 보문 아파트(7개동, 440세대)가 들어섰다. 2017년에는 보문동6가 옛 산동네 연립주택 밀집지대를 재개발한 구역에 보문 파크뷰 자이아파트 단지(17개동1186세대)가 준공되어 입주를 시작했다. 최근에는 보문동1가 보문2구역주택재개발정비사업이 착수에 들어가 곧 기존 주택에 대한 철거공사가 시작된다. 이 재개발정비사업으로 8개 동, 지상 15층 규모로 460여 세대가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07-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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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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