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사
1115
비지정 문화재
장소 종교시설
유물 건축물
성북구 보문사길 20(보문동 3가 168)에 위치한 사찰이다. 보문사는 고려 때 승려 담진(혜조국사)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옛 건물로는 영조 때 건축된 대웅전이 있다. 이 절은 원래 조계종 소속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普門宗)을 창시하여 그 본산이 되었다. 이 절의 대웅전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보문사 석가불도>, <보문사 대웅전 신중도>, <보문사 지장보살도> 등 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들이 있다. 한편 석굴암 앞 팔각 9층 석탑은 1978년에 오대산 월정사의 탑을 본떠 조성하고,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내부에 봉안했다. 보문사 스님의 범패(梵唄)는 잘 알려진 무형자산이다.
보문동
  • 대한뉴스 제886호 '이런일 저런일'
  • 20210616 보문사 석굴암 기도회 바라춤 의식
  • [다큐사랑방] 아름다운 성북(김영식 감독)
  • [여기는 성북] 명상길 따라 보문사
  • 보문사 대웅전
  • 보문사 묘승전
  • 보문사 삼성각
  • 보문사 전경(1)
  • 대한뉴스 제886호 '이런일 저런일'
  • 보문사 입구
  • 보문사 호지문 현판
  • 보문사 범종루
  • 보문사 내 석굴암으로 통하는 문
  • 보문사 전경(2)
  • 20210616 보문사 석굴암 기도회 바라춤 의식
  • [다큐사랑방] 아름다운 성북(김영식 감독)
  • 보문사 공사현장과 은영유치원
  • 보문사 공사현장(3)
  • 보문사 공사현장(2)
  • 보문사 공사현장(1)
  • 보문사 공사현장 전경
  • [여기는 성북] 명상길 따라 보문사
  • 보문사 석굴암 (3)
  • 보문사 석굴암 (2)
  •  《대동여지도》 중 <도성도>, 1861
  • 보문사 공사현장 옆 도로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74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3가 168 보문사 (보문사길 20)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인근 미타사와 같이 탑골(塔洞)에 있어 <탑골 승방>이라고 잘 알려진 이 절은 전에 조계종 소속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普門宗)이 이곳에서 창시되면서 그 본산이 되었다.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몸 전체의 온갖 덕(德)을 보(普)라 하고, 쓰임을 나타내는 곳을 문(門)이라고 하므로, 『보문(普門)』이란 보살이 일체 성덕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기회와 시기에 따라 그 효용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만여 평의 대지 위에 대가람의 규모를 갖추고 있는 보문사는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조용한 암자이다. 보문사는 처음 고려 예종 10년(1115)에 담진(曇眞) 스님, 즉 혜조국사(慧照國師)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조선 후기 숙종 18년 (1692)에 묘첨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영조 33년(1757)에 보찬, 유봉 스님이 대웅전을 수축하였다. 순조 26년(1826)에 정운(正雲)스님이 좌우승당(左右僧堂)을 개축하였으며, 헌종 8년(1842)에 영전 스님이 또 다시 대웅전을 수축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절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광복과 함께 주지 송은영(宋恩榮)이 취임하면서 30여 년간을 불사(佛事)의 중흥과 건물 중창에 전심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송은영 주지는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을 새롭게 짓고, 보문종이라는 독립된 종단을 설립함으로써 비구니들만의 고유한 수행 풍토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 절은 1972년 대한불교 보문종으로 등록한 후 이 해 6월 16일, 경주의 신라 석굴암을 본 따 사찰 뒤쪽의 보문산 돌산에 석굴암을 조성하였다. 1970년 8월부터 23개월간 진행된 이 불사는 이절의 대표적인 불사(佛事)로서 약 4,500명의 조각가와 석공이 참여하였으며, 2,400톤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이 절의 대웅전 영산회상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8호, 대웅전 신중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9호, 지장보살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1996년에 각각 지정되어 있다. 한편 석굴암 앞의 팔각 9층 석탑은 1978년에 오대산 월정사의 탑을 본따 조성하고,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내부에 봉안하였다. 보문사 스님의 범패(梵唄)는 잘 알려진 무형자산이다
  • ▫ 비지정 보문사 普門寺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보문사 소재지 : 서울 성북구 보문동 3가 168 인근의 미타사와 같이 탑골[塔洞]에 있었으므로 ‘탑골승방’이라고 잘 알려진 이 절은 전에 조계종 소속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普門宗)을 창시하여 그 본산이 되었다. ‘보문(普門)’이란 뜻은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몸 전체의 온갖 덕(德)을 보(普)라 하고, 쓰임을 나타내는 곳을 문(門)이라고 하므로 보문은 보살이 일체 성덕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기회와 시기를 따라 그 효용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만여 평의 대지 위에 대가람의 규모를 갖추고 있는 보문사는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조용한 암자이다. 보문사는 처음 고려 예종 10년(1115)에 담진(曇眞) 스님, 즉 혜조국사(慧照國師)의 주도 아래 창건된 것으로 전승되어 오는데 조선후기 숙종 18년(1692)에 묘첨(妙僉)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했고, 영조 33년(1757)에 보찬, 유봉 스님이 대웅전을 수축했다. 순조 26년(1826)에 정운(正雲) 스님이 좌우승당(左右僧堂)을 개축했으며 헌종 8년(1842)에 영전스님이 또 다시 대웅전을 수축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절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광복과 함께 주지 송은영(宋恩榮)이 취임하면서 30여 년 간을 불사(佛事) 중흥과 건물 중창에 전심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송은영 주지는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을 새롭게 짓고 보문종이라는 독립된 종단을 설립함으로써 비구니들만의 고유한 수행 풍토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 절은 1972년 대한불교 보문종으로 등록한 후 이 해 6월 16일, 경주의 신라 석굴암을 본 따 사찰 뒤쪽의 보문산 돌산에 석굴암을 조성했다. 1970년 8월부터 23개월 간 진행된 이 불사에는 약 4,500여 명에 이르는 조각가・석공이 종사했고, 2,400톤의 화강석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절의 대표적인 불사(佛事)로 알려져 있다. 이 절의 대웅전 영산회상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8호, 대웅전 신중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9호, 지장보살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1996년에 각각 지정되어 있다. 한편 석굴암 앞의 팔각 9층 석탑은 1978년에 오대산 월정사의 탑을 본떠서 조성하고,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내부에 봉안했다. 보문사 스님들의 범패(梵唄)는 잘 알려진 중요한 무형자산이며, 이 절의 청정도량의 분위기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더 없는 청량감을 느끼게 한다. * 참고자료 : 문화재관리국, ≪문화유적총람≫, 1997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 박경룡, ≪서울문화유적≫, 1997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사 –서울-≫ 4, 1994.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69-170쪽
  • 골목의 한옥들을 구경하며 북쪽으로 향하면 보문역이 나온다. 여기서 다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고풍스러운 문이 보인다. 보문사 일주문이다. 아파트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아파트가 이 사찰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하는 것이 맞다. 보문동이라는 마을의 이름이 바로 이 사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또 다른 왕실 여성, 바로 궁녀들이 살았던 곳이다. 왕실의 궁녀들은 궁에서 나와서도 여염집의 사람들처럼 살 수 없었다. 왕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구니가 되어 말년을 보내야했다. 그런 그들이 말년을 보내던 곳 가운데 한 곳이 바로 보문사이다. 보문동은 세계 유일의,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종단, 보문종의 본산이다. 보문사의 사연도 그러하지만, 경주의 그것을 모방한 석굴암과 월정사의 것을 재현한 팔각구층탑도 제법 볼 만하다. 경내에 조성된 산책로는 서울의 번잡함을 잊을 수 있는 명상의 장소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0쪽
  • 보문역 1번출구 앞에서 발을 뗀 지 거의 1분 만에 절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은 이층 누각으로 지어졌는데 편액을 ‘호지문護持門’이라고 하였다. ‘불법을 수호하고 지키는 문’이란 뜻이다. 지방의 여느 산사들처럼 길고 호젓한 진입로가 없는 대신 보문사 경내에는 많은 길들이 이곳저곳으로 잎맥처럼 뻗어 있다. 범종루 아래를 지나 대웅전으로 가는 길, 석굴암과 구층탑으로 가는 길이 나뉘어져 있고, 좀 더 올라가면 숲이 우거진 명상의 숲으로 올라가는 작은 산길이 있다. 먼저 대웅전으로 가 본다. 크지 않은 규모에 단청이 화려한 대웅전 안에는 부처님(불상)이 모셔져 있고, 부처님 뒤로는 색이 바란 탱화 석 점이 걸려 있다. 내부가 어두워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아 신발을 벗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 앞에 서 본다. 집착을 버린 지극히 자유로운 사람의 표정과 자세는 이런 것인가? 이심전심. 깨달음은 말보다 먼저 미소와 몸가짐만으로도 전해진다. 가만 보니 부처님 뒤에 걸려 있는 탱화에도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불상과 다른 점은 부처님 혼자 계신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보살, 제자, 신중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탱화 속 부처님은 깨달음을 미소가 아닌 말, 즉 설법으로 저들에게 전하고 있는 듯한데 부처님을 둘러싼 무리는 각자 다른 자세로 서 있으면서 부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있다. 그렇게 한데 어울려 앉고 선 모습이 퍽 조화롭고 여유롭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탱화에서 원근법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깨달음의 경지가 높을수록 위대한 존재일수록 크게 그려진다. 조선의 화가들에게는 풍경의 원근보다 마음의 원근이 더 중요했나 보다. 대웅전과 그 밖의 부속건물로 둘러싸인 네모난 뜰은 넓지 않다. 어렸을 때 살던 우리 집 마당보다도 좁다. 그러나 답답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부처님의 품? 아니 손바닥이라 생각해 보니 재미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0-22쪽
  • 보문사普門寺 미타사가 탑골승방을 대표할 수 있는 절이라면 보문사는 보문동을 대표하는 절이라 할 수 있다. 보문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보문사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보문사는 고려시대인 1115년(예종 10)에 담진曇眞 스님, 즉 혜조국사慧照國師에 의해 창건 되었다고 전해진다. 1962년 근현대 불교학자인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가 쓴 『퇴경당전서退耕堂全書』의 「보문사일신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 의하면 담진이 창건한 이후부터 비구니들이 머물며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성을 기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창건 당시부터 17세기까지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이에 대한 확인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대웅전이 영조 재위기(1721~1776)에 건축되었다고 전해졌으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려진 바 없었다. 그런데 지난 2017년 9월 지붕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량문上樑文 3종과 주화 100점, 복장다라니 등이 발견되었다. 건물의 공사나 보수 과정을 기록한 글인 상량문 3종은 각각 건륭乾隆12년, 도광道光 4년, 동치同治 4년에 작성된 것으로, 이는 각기 1747년(영조 23), 1824년(순조 24), 1865년(고종 2)에 작성된 것이다. 이를 통해 대웅전이 1747년에 처음 건축되었음이 밝혀졌으며, 1747년 상량문에 작성된 시주자가 모두 여성인 점과 1824년 상량문에 소임자가 모두 비구니로 기록되어 있는 점을 볼 때 보문사가 비구니 승방이었음이 규명된 셈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절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해방 이후 주지 송은영宋恩榮이 취임하면서 불사 중흥과 건물 중창에 노력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1972년에는 비구니의 독립적 권리와 능력을 인정받고자 재단법인 대한불교 보문원을 설립하였고, 이어 비구니와 여성의 위상을 드높이고 사회 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대한불교 보문종을 창종하여, 세계 유일 비구니 종단의 총본산으로 자리 잡았다. 보문사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2년 여에 걸쳐 사찰 뒤쪽 돌산에 조성된 석굴암을 들 수 있다. 이 석굴암은 경주의 신라 석굴암石窟庵을 축소 재현한 것으로 당시 이목을 끌었다. 또한 석굴암 앞에 위치한 팔각구층사리석탑은 1978년 조성된 것으로,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가 내부에 봉안되어 있다. 더불어 송은영 주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은영유치원 건물 5층에는 만 명의 불상을 봉안한 만불전萬佛殿이 있다. 보문사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 1점과 서울특별시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 3점이 보관되어 있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3~4, 권5~7(보물 제1164-2호), 보문사 석가불도普門寺 釋迦佛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8호), 보문사 신중도普門寺 神衆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9호), 보문사 지장시왕도普門寺 地藏十王圖(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0호)가 그것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58-61쪽
  • ○ 삶을 일깨우는 인생 교과서 사찰 사찰 48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문화재 '보물창고' - 비구니 사찰인 보문사는 고려 예종 때 담진 국사가 창건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옛건물로는 영조 때 건축된 대웅전이 남아있다. 보문사가 특히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게 보문사의 문화재이다. 먼저 보문사 석굴암은 1970년 8월에 만들기 시작하여 23개월 동안 진행되었으며, 호남지방의 화강석과 경기석 등 2,400톤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경주 석굴암과 다른 점은 경주 석굴암 정면에는 문이 하나인데 비해 여기는 세 개의 문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불교 그림인 지장보살도. 지장보살은 사람들이 죽은 후의 세계를 주관하는 보살로 윤회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한다. 중앙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그렸는데, 이들 모두 금빛을 발하는 원형의 광배를 표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보문사 대웅전 내에 있는 신중탱화인 대웅전 신중도는 인도의 재래적인 토속신인 신중을 그린 불화이다. 신중은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불교의 호법신들인데, 이처럼 별도로 그림을 그려 신앙의 대상을 삼기도 하였다. 화면을 상하로 구분하여 상단에 제석을 중심으로 천인상을 그려놓고, 하단에는 호법신인 신장을그려넣었다. 보문사 대웅전 내에 있는 영산회상도는 석가여래가 법화경을 설파한 영산회상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비단에 채색하였고, 중앙의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아래쪽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다. 화면 사방에는 4천왕상을 배열하였다. 4대 보살과 4천왕상은 모두 두광을 표현하고 붉은색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불화의 특징이다. 표현 기법이 정교하고 구도에서도 좌우대칭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보문사의 대웅전은 고종대에 중건되었고, 탱화도 당시에 그려 놓은 것이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88-89쪽
  • 그리고 보문동 3가에 위치한 普門寺는 睿宗 10년(1115)에 國師 曇眞이 비구니의 수련장으로 창건하여 전승된 사찰로 창건 당시 조그만 암자로 탑골에 있었으므로 탑골승방이라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3쪽
  • 1) 大韓佛敎曹溪宗 ⋅ 보문사 보문사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연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 16대 예종 10년(1115년) 담진국사 창건 비구니 상주하이 국태민안 성수만세를 기원 염불 독경으로 선업을 행함 조선 19대 숙종 18년(1692년) 비구니 묘첨스님 중건 21대 영조 33년(1757년) 비구니 보찬스님, 유봉스님 대웅전 수축 24대 헌종 3년(1837년) 비구니 정운스님 좌·우승당 개축 헌종 8년(1842년) 비구니 영전스님등 삼인이 만세루 신축 26대 고종 9년(1872년) 비구니 금훈스님이 좌·우승당 수축 1930년 비구니 긍탄스님이 관음전 신축, 대웅전 좌·우승당 수축 1945년 삼성각 대지 매입축장(송은영 주지스님 이후) 1958년 선불장신축 1962년 산령각신축 1969년 범종각 신축, 대종신조 1970년 극락전, 보광전, 호지문, 시왕전 선축 1971년 시자원 신축 1971.8. 5. 재단법인 대한불교 보문원 설립 1972.4.20. 대한불교 보문종 창립 1972.6.16. 석굴암 조성 1978.9.22(음력) 사리탑 건립 1986.9.18. 비구니 황법준 주지 대웅전 좌승당 개축 묘승전으로 명명 1987.5. 7. 비구니 황법준 주지 석굴암 수축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03-604쪽
  • 서울 城北區 普門洞 3-168에 普門寺가 있다. 고려 예종 10년(1115) 에 담진국사가 창건한 比丘尼의 수련도장인 소규모의 암자였다. 이후 여러차례 重築 또는 改修가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가, 朝鮮朝 肅宗 18년(1692)에 묘첨스님이 重建, 英祖 33년(1757)에 보찬·유봉스님 이 大雄殿 修築, 純祖 26년(1826)에 정운스님이 左右增堂을 改築, 憲宗 8년(1872)에 영전스님이 다시 大雄殿 수축·萬歲樓 건립, 高宗 9년(1872)에 금훈스님이 左右僧堂 수축, 1930년에 긍탄스님이 左右僧堂수축·觀音殿 신축하였다. 그후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주지를 맡은 宋恩榮스님이 사찰을 크게 확장하여 三聖閣·選佛場·山靈閣·大鐘 및 梵鐘閣·極樂殿·普光殿·十王殿 등이 1970년까지 25년에 걸쳐 신축되었다. 비구니사찰로 꾸준히 발전한 보문사는 1972년 宗祖를 佛陀의 姨母 大愛道尼로, 所依經典을 觀音經으로 하여 ‘多聞에 의하여 지혜를 밝히고, 思惟에 입각해서 모든 事理를 바르게 簡擇決了 하며 實踐躬行에 따라 佛性을 陶治함’을 宗旨로 삼고 大韓佛敎 普門宗을 창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30쪽
  • 이 洞의 명칭이 된 普門寺는 탑골(搭洞)에 있었으므로 「탑골 僧房」이라고 불리우던 절로서 比丘尼 즉 女僧들이 거처하는 조용한 암자이다. 大韓佛敎 普門宗으로 등록된 보문사는 처음 高麗 叡宗10년(1115) 曇眞國師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重修되었다. 옛날 건물로는 英祖朝(1721∼1776) 에 건축된 대웅전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절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광복과 함께 住持宋恩榮이 취임하면서 30여년간을 佛事中興과 건물중창에 전섬노력하여 현재에는 많은 건물이 세워졌는데 경주 석굴암을 모방한 石窟庵과 舍利搭, 큰 梵鐘을 주조해 놓았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87쪽
  • 근대기 보문사의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6년 ː 문루(門樓)를 세우고 도량석축을 쌓음. 1958년 ː 선불장(選佛場)을 세움. 1962년 ː 산영각(山靈閣)을 세움. 1969년 ː 범종각(梵鐘閣)을 세우고 대종(大鐘)을 신조(新造). 1970년 ː 극락전(極樂殿), 보광전(普光殿), 호특문(護特門), 십왕전(十王殿)을 세움. 1971년 ː 재단법인 대한불교보문원 설립, 시자원(施慈苑)을 세움. 1972년 ː 법보전(法寶殿)을 세움, 대한불교 보문종 창종(創宗), 석굴암 조성. 1977년 ː 동원정사(東苑精舍)를 세움. 1978년 ː 팔각구층사리탑을 세움. 1986년 ː 비구니 법준(法俊) 스님이 대웅전 앞 좌승당(左僧堂)을 신축하면서 묘승전(妙勝殿)이라 명명. 1987년 ː 은영유치원 설립. 1988년 ː 보문사 전통사찰 등록. 1994년 ː 은영어린이집 설립. 1998년 ː 불교회관 동원정사를 세움. 보문사 연혁 (출처: ㈜아란테크 http://aranta.co.kr/sachal/seoul/bomoonsa.htm) 보문사 선불장은 이 건축설계사무소의 이병균 설계로 알려져 있다. 이병균은 일본 시바우라(芝浦)공업대학을 졸업하고, 30년 이상 건축 설계 분야에 종사하며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서울식품, 동양모직, 대한모방 등의 건물과 경기대학교와 인창고등학교 등을 설계하였다. 오랜 기간 연륜을 통해 보문사 선불장은 특이하게 사찰 건물로 당시 관심 있는 작품으로 평가를 받았다. 보문사는 도성 밖에 위치한 왕실 원찰 중 4대 승방이라는 비구니 사찰로의 독특한 역할과 함께 비구니 교육의 중요한 사찰로 성장하였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 서울의 확장과 함께 경사면이라는 제한된 영역에 많은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은영스님이 주지를 맡으며 현재 보문사 대웅전의 남측 토지를 확보하여 영역을 넓혔고, 이 자리에 1958년 선불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선불장이란 ‘부처를 뽑는다’라는 뜻으로 일종의 선방으로서 시방세계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든 선객들이 낱낱이 무위를 배우는 곳이다. 1958년 조성된 선불장은 상하 2층 205평의 건물로 1층에는 재단법인 대한불교 보문원 사무국과 대한불교 보문종 총무원 그리고 보문사 종무소가 있고, 그의 우측 끝에 대중방과 한 계단 사이에 대형 식당이 만들어졌고 그 위에는 선방식 법당과 법당 마당이 널찍하게 닦아져 있다. 200여 명이 넘는 대중이 모여 살 때는 이 선불장에서 아침저녁 발우공양을 했으며 조석예불 후에는 전 대중이 참선정진을 하던 이름 그대로의 선불장이었다. 지금은 큰 법회의 법회 장소로 쓰이고 있지만 예전엔 절 안의 대소사가 행하여지던 큰 방 역할을 하던 곳이다. 보문사 소개 (출처: 대한불교 보문종 보문사 http://www.bomunsa.or.kr/php/menu2_1.php) 2층의 선불장은 아래층은 강학 공간으로 사용하고 위층은 예불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공간의 필요성으로 인해 선불장은 중층의 공간이 필요하게 되고, 위층 인법당의 수평 구조부까지는 철근콘크리트로, 지붕틀의 범위부터는 목조로 구성하고 지붕은 한식기와로 마감하였다. 아래층과 위층 모두 외벽은 적벽돌로 마감되어 있다. 선불장은 현재 많은 도심형 사찰들이 하부를 콘크리트로 짓는 것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아래층의 공간 이용에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새로운 건축재료의 도입이 사회적 인식으로나 종단의 인식으로나 쉽지 않은 시절, 새로운 기능의 요구에 부응하는 건축 형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19-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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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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