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전문학교
1905.04.03
장소 교육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고려대학교의 옛 이름이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4월 이용익이 설립하였는데, 아어학교(러시아어학교, 현 종로구 수송동) 건물에서 개교하였다. 1907년 이용익이 해외 망명 중 죽은 후에는 손자 이종호가 운영을 맡았는데 역시 안중근의 의거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천도교에서 학교를 인수했으나 손병희가 체포당하자 또다시 어려움에 빠졌고, 1921년 김병로 등이 재단을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총독부의 간섭은 심했고 재정의 어려움도 여전하였다. 1932년 경성방직을 설립한 사업가 김성수가 인수하여 안암동(현 고려대학교)으로 학교를 옮기고 운영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중앙학원으로 흡수하고,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으며 고려대학교로 이름을 정했다.
안암동
  • 고려대학교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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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전교(普專校) 신축지(新築地) 안암리(安岩里)로 결정(決定) 총평수 약 육(六)만 이(二)천평으로 구대지(舊基地)의 약(約) 백삼십배(百三十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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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외안암리신교사(市外安岩里新校舍)로 보성전문교이전(普成專門校移轉) 이십팔(二十八)일 오전에 성대히 거행 성동산복(城東山腹)에 일위관(一偉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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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대학교 본관
  • 보전교(普專校) 신축지(新築地) 안암리(安岩里)로 결정(決定) 총평수 약 육(六)만 이(二)천평으로 구대지(舊基地)의 약(約) 백삼십배(百三十倍)
  • 시외안암리신교사(市外安岩里新校舍)로 보성전문교이전(普成專門校移轉) 이십팔(二十八)일 오전에 성대히 거행 성동산복(城東山腹)에 일위관(一偉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普成專門學校
  • 이명칭: 고려대학교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교육

시기

  • 시대: 일제강점기
  • 시기: 1905.04.03
  • 비고: 1934년 안암동으로 이전 / 1946년 8월 고려대로 발족

주소

  • 주소: 02841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
  • 비고: 현 고려대학교

근거자료 원문

  •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5월 대한제국大韓帝國 내장원경內藏院卿인 이용익이 설립했다. (중략) 이용익은 1905년 1월 학교 설립과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을 담은 「사립보성전문학교규칙私立普成專門學校規則」을 발표하고 3월 『황성신문皇城新聞』에 학원 모집 광고를 실었다. 당시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면 초기 보성전문학교는 법률학전문과法律學專門科, 이재학전문과理財學專門科, 농업학전문과農業學專門科, 상업학전문과商業學專門科, 공업학전문과工業學專門科 등 5개 학과를 모집했다. 그러나 지원자들은 예상보다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에서는 근대적 교육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태였다. 특히 농업, 상업, 공업 실업교육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이런 과목을 가르칠 사람들도 부족했다. 이용익의 구상대로 온전하게 학교를 설립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이용익은 1905년 4월 1일로 예정됐던 개교식을 연기하고 4월 3일 그나마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 법률학전문과 학생 모집 광고를 다시 게재했다. 부족하나마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과를 중심으로 학교를 설립하기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905년 4월 3일 법률학전문과와 이재학전문과만 구성한 상태에서 개교식을 거행했다. 보성전문학교는 박동礡洞에 있던 아어학교俄語學校 건물을 교사로 사용했다. 아어학교俄語學校는 5년제 관립학교로 일본어, 중국어, 영어, 불어, 독어 등 외국어를 가르치던 학교였다.74 관립학교 건물을 사용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초기 보성전문학교는 대한제국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보성이라는 학교명이다. 이용익이 학교 설립을 구상할 무렵 생각했던 이름은 중앙이었다. 그러나 이용익의 계획을 들은 고종은 학교 이름을 보성으로 바꾸라고 말했고 이에 따라 보성이 학교 이름이 되었다. 보성전문학교에 대한 고종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초기 보성전문학교는 수업 연한 2년제의 법률학전문과와 이재학전문과 두 가지만 존재했으나 1905년 9월 한성법학교 학생들을 인수하며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했다. 1907년 1월 법률학전문과와 이재학전문과를 법학과와 경제과로 개칭하고 수업 연한을 3년제로 바꾸었다. 이처럼 보성전문학교가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고종이 보성전문학교에 큰 관심을 가졌고 측근인 이용익이 운영하는 학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용익이 사망한 이후였다. 1907년 3월 해외로 망명했던 이용익이 사망하자 보성전문의 소유권은 그의 손자 이종호李鐘浩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1907년 말 대한제국 황실이 일본에 의해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보성전문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했다. 안정적인 재정 수입원을 상실한 보성전문학교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기에 학교 운영권을 가진 이종호李鐘浩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연루되면서 구금당하자 보성전문학교의 경영난은 심화됐다. 이후 천도교에서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으나 교주 손병희가 체포되자 경영난이 다시 불거졌다. 결국 김병로金炳魯를 비롯한 몇몇 유지들이 뜻을 모아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고 보성전문학교 운영을 담당했다. 재단법인이 경영을 담당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어려움은 계속됐다. 조선총독부는 꾸준히 보성전문학교 운영에 간섭했고, 재단 학교 운영은 지지부진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한 보성전문학교는 1932년 전환점을 맞이했다.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한 기업가로서 명망이 높았던 인촌 김성수 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것이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주식회사로 대변되는 기업가로 유명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육문제에 관심이 높은 교육가이기도 했다. 김성수는 1922년부터 시작된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적극 동참했던 인물로 조선인인의 손으로 민립대학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서 김성수는 앞으로 만들어질 민립대학의 기반으로서 경영이 어려워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것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직후 김성수는 김성수는 기존에 사용하던 송현동 교사를 버리고 넓은 대지에 새로운 교사를 건설하려고 했다. 김성수가 발견한 곳 이때 김성수가 발견한 곳이 현재 안암동 고려대학교 부지였다. 김성수는 안암동 일대에 개인 소유의 땅 13,300평을 빠르게 매수했고, 인근에 이왕직李王職이 가지고 있었던 땅 47,000평을 매수해 총 62,000평의 넓은 부지를 확보했다. 김성수는 넓은 부지 위에 지을 새로운 교사의 설계를 박동진朴東鎭에게 맡겼다. 1934년 박동진이 설계한 3층짜리 고딕 양식의 석조 건물로 총 979평 규모였다. 1934년 새로운 교사가 완공되자 보성전문학교는 본격적으로 이전을 준비했다. 오전 10시 보성전문학교 교수 · 직원 · 학생은 송현동 교사에서 고별식을 갖고 안암동의 새로운 교사로 출발했다. 교기와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라는 명패를 든 학생들이 앞장서고 그 뒤를 체육부들 가져온 우승기와 우승컵을 든 학생들과 전교생들이 따라 걸으며 안암동에 만들어진 새 교사로 행진했다. 본격적으로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안암동으로 교사를 신축 · 이전한 김성수는 새롭게 교수진을 꾸리기 시작했다. 김성수는 당시 세간에 명망 있었던 우수한 교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기 시작했다. 오천석吳天錫, 유진오兪鎭午, 최용달崔容達, 박극채朴克采, 안호상安浩相 등 당시 명망 있었던 교수들이 대거 보성전문학교로 이동했다. 당시 영입된 교수들은 대부분 해외유학을 했던 사람들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이것은 영입할 수 있는 한 최고의 교수진을 모으려는 김성수의 의도가 정확히 반영된 인사였다. 우수한 교수진들이 대거 영입되면서 보성전문학교의 위상은 크게 향상되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62-268쪽
    고려대학교 홈페이지에 있는 연표에 따르면 1905년 4월 3일 개교하였다고 한다.(2021. 07. 05.)
  • 보성전문학교가 안암동으로 이동하면서 학생활동들도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학생자치단체로서 역할을 했던 보전친목회가 보전학생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보전학생회는 서무 · 경리 · 연구 · 출판 · 변론 · 덕육 · 연극 · 음악부 등으로 분화했다. 이들 부서 가운데 학생자치 활동의 중심은 연구부 · 변론부 · 연극부 · 덕육부 등이었다. 연구부는 보성전문학교 학생활동에서 가장 활발한 것 중 하나였다. 연구부에서는 보성전문 교수와 교외의 학계 권위자를 초청하여 교내강연회를 개최했다. 1933년 총 11회가 개최된 교내강연회는 학생들이 강연을 하고 이에 대해 교수들이 비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강연회는 연사로 참여한 학생들과 교수들 간에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1936년 5월에 열린 교내강연회는 오후 2시부터 저녁 8시까지 6시간 동안 펼쳐졌을 정도로 뜨거운 분위기였다. 변론부는 교내 토론회와 교내 웅변대회, 전조선중등학생현상웅변대회, 전조선전문학교토론대회 등을 개최했다. 1933년에 열린 교내 웅변대회를 보면 6명의 학생이 출전하여 학구적인 문제와 현실적인 문제를 두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유진오, 김광진, 옥선진 등이 었다. 교내 웅변대회와 함께 변론부가 진행한 사업 가운데 인기가 있었던 것은 전국남녀중등학생웅변대회였다. 1933년 11월 13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웅변대회는 여운형, 백남운, 이종린, 이용설, 이인, 김병로, 박희도, 주요한. 옥선진 등 쟁쟁한 명사들이 심사를 맡았다. 당시 대회에 출전한 학생들은 시사문제를 주제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비판했으며, 일부 참가자들은 원고가 검열에 막혀 실제 단상에 오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보성전문학교에서 연극부가 활동한 것은 1925년부터였다. 그러나 1930년대 안암동으로 이전하면서 연극부 활동도 더욱 활발하게 전개된다. 1932년 12월 8일 경성공회당에서 공연한 오토 뮐러 작 하차荷車를 시작으로 1년에 2편 이상의 공연을 꾸준하게 무대에 올렸다. 덕육부는 주로 회원들 간에 친선과 단합을 추구하는 활동을 했다, 덕육부가 했던 활동은 대체로 신입생과 졸업생의 환영 · 송별 행사나 학생회 창립기념식, 학생기념 메달 제작 등의 활동에 주력했다. 보전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활동은 안암동으로 이전한 1930년대 초반 활발하게 시작됐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점차 침체되기 시작한다. 학생활동이 침체되기 시작한 것은 우선 학생회가 가진 재정이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보전학생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여러 가지 사업비용의 소요가 많아졌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학생회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대외사업에서 받는 입장료가 일제의 간섭으로 인해 크게 줄어들면서 재정 상황이 열악해진 것이다. 또한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감시와 억압이 강해진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이 사회주의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자 일제의 감시가 더욱 강해지면서 학생회 활동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가지 난관을 거치며 보성전문학교는 해방의 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1930년대 김성수의 인수와 안암동으로의 이전은 보성전문학교의많은 것을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안암동에 자리를 잡은 보성전문학교는 이전과 다른 규모와 위상을 구축할 수 있었고 해방 이후에도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보성전문학교에 있어서 안암동과의 인연은 그 무엇보다 매우 중요한 변화였던 것이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68-270쪽
  •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1922년부터 송현동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932년 인촌 김성수가 재단을 인수한 후 1934년 안암동 현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37년에는 도서관을 건립하는 등 제반시설을 갖추어 민족교육의 대표기관으로서 자리를 굳히는 동시에 본격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여 나가게 되었다.
  • 3. 日帝下의 城北地域 變化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 5) 普成專門學校(현 高麗大學校)의 立地 普成專門學校 즉 오늘날 高麗大學校의 前身이 安岩洞 1·2번지 자리에 立地한 것은 1934년의 일이다. 이 학교는 1905년 5월에 당시 大韓帝國 內藏院卿이던 李容翊이 礴洞(현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전 俄語學校 건물을 사용하여 설립한 普成專門學校로 출발하였다. 이용익은 일본에 납치되어 체류하던 중 일본의 근대 교육기관을 두루 살펴보고 귀국하여 敎育救國의 이념 아래 선 교육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설립 당시 기존의 사립학교들은 대부분 외국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반면,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초대교장은 申海永이었으며 초기에는 수업연한 2년제의 法律學專門科와 理財學專門科를 두었는데, 1905년 9월에 漢城法學校 학생을 인수하여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였다. 이어 1907년 1월에 법률학전문과·이재학전문과를 각각 법학과·경제과로 개칭하고 수업연한을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2월에 제 1 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용익이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1907년 3월에 憤死하자, 그의 손자 李鍾浩가 학교경영을 인수하였으나, 1909년 이종호가 다시 안중근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됨으로써 학교는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1910년 제 1회 졸업생인 尹益善이 孫秉熙와 의논하여 학교경영을 천도교에 인계하였다. 1915년 4월에는 일제의 「전문학교규칙시행령」에 따라 재단법인을 조직해야만 전문학교의 인가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교명을 사립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 개칭하고 3년제의 법률과와 실업과를 두었다. 3·1 운동 직후 손병희가 일본경찰에 피검되어 다시 학교운영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교장 高元勳은 총독부에 전문학교 승격에 관한 타진을 거듭하는 한편, 金炳魯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사회독지가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민간독지가 58명의 공동명의로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여, 1922년 「조선교육령」에 의해 정식으로 전문학교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총독부의 간섭과 재단 경영의 부진 등으로 학교가 재정난에 빠지게 되자, 1932년 金性洙가 보성전문학교를 재단법인 중앙학원으로 인수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김성수는 3·1 운동 직후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제의 압력으로 실패하자 자력으로라도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던 뜻을 가지고 있던 차에, 보성전문학교의 경영난을 보고 사재를 기부하여 인수하게 된 것이다. 곧이어 1934년에는 안암동 현 위치에 교사를 신축·이전하였고 1937년에는 도서관을 건립하는 등 제반시설이 갖추어서 민족교육의 대표기관으로서 자리를 굳히는 동시에 본격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여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총독부의 압력은 가중되어 農科의 신설계획을 거부하는 등 각종 탄압을 가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법과 및 문과교육을 전폐하고 실과교육을 강조하여 1944년 4월에는 학교명을 京城拓植經濟專門學校로 변경하여 경제과·척식과만을 두게 하는 등의 시련을 겪었으나 꾸준히 민족교육의 맥을 이어왔다. 광복과 더불어 재단이사회가 개최되어 교병과 학사규정을 보성전문학교 당시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에는 정법·경상·문과의 3개 단과대학 8개 학과로 편성된 종합대학으로 승격, 개편하여 高麗大學校를 창립하게 되었고 초대총장에 玄相允이 취임하였다. 1947년 제 1회 고려대학교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대학원을 개설하였다. 보성전문학교 본관건물의 설계자는 朴東鎭이었다. 그는 1926년에 京城高等工業學校 건축과를 졸업한 후 곧 바로 조선총독부 건축과에 들어가서 각종 공공건물의 설계에 종사했는데 1933년에 순전히 개인자격으로 그것도 단독으로 普專 本館 건물을 설계하였고 이어 1935년에는 普專 圖書館건물도 설계하였다. 박동진의 설계를 받아 일본인 藤田幸次郞가 施工한 本館건물의 당초의 바닥면적은 3,223㎡(975평)였고 3층 石造및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되어 있다. 평면은 H자형으로 중앙에 고딕 성관(Gothic 城館)과 같은 모습의 탑부를 두고 이의 1층을 현관과 현관 홀로 하였다. 북측에 편복도를 두고, 복도의 남측에 큰방들을 배치, 총장실을 비롯한 대학행정부서의 사무실로 사용한다. 또 평면의 좌우 돌출된 곳에는 큰방을 두어 대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중앙탑부의 창호와 현관개구부는 뾰죽아취 (Pointed arch) 로 고덕양식을 취하고 또 2층의 창호를 대부분은 뾰죽아취로 처리하였으나 1층과 3층의 나머지 창호들은 수평아취 (Flat arch) 로 하여 변화를 얻고 있다. 중앙탑부의 네모서리에는 플랫버트레스(Flat buttress) 를 붙여 고덕적인 성격을 더하였다. 지붕은 박공지붕이고 삼각형 도머(Dormer)를 두었고, 스레이트로 마감하였었으나 최근의 보수공사때 동판마감으로 하였다. 당시 19만원의 공사비를 소요하였다고 한다. 1981년 9월 5일에 史廣제 285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5년 5월에 착공, 37년 9월에 준공한 普專圖書館건물은 설계자가 朴東鎭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시공자가 누구였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바닥면적이 4,089㎡(1,237평)인 이 건물은 일부는 4층이고 일부는 5층이며 石造및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되어 었다. 이 건물의 평면은 L자형으로 모서리에 현관을 가진 고덕성관(Gothic 城館) 모양의 탑(搭)부를 두었다. 출입구와 탑부의 창호들과 남측면의 창호들은 뾰죽아취(Pointed arch)로 나머지 서측 창호들은 수평아취 (Flat arch) 로 마감하였다. 특히 동남측 끝단 돌출부에는 네모서리에 고닥성당에서의 튜레트(Turret)를 두고, 남측 창들 사이에는 플랫버트레스(Flat buttress)를 두어 한층 더 고덕적인 모습을 이루고 있다. 준공당시 1층에 교수연구실 32개, 2층에는 250석의 열람실을 마련하였는데 각 책상마다 스탠드와 가죽의자를 비치하였으며, 3층에는 20만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3층 이상은 민속자료, 미술품을 진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고려대학교는 중앙도서관을 신축하고, 이 건물은 대학원동과 교수연구실로 이용하고 있다. 이 건물도 本館과 함께 1981년 9월 25일에 史蹟 제 286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31-133쪽
    고려대학교 홈페이지에 있는 연표에 따르면 1905년 4월 3일 개교하였다고 한다.(2021. 07. 05.)
  • (2) 손병희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에서 발원한 천도교의 제3대 교주로, 1861년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났다. 1882년 동학에 들어갔고 1894년 발발한 동학농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제2대 교주 최시형(1527-1993) 이 체포된 뒤 제3대 교주에 올랐고 곧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망명 생활 중에 도 국내에 진보회(進步會) 등을 조직하여 천도교의 재건과 민족운동에 힘을 쏟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천도교 측 대표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년 8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병이 심해져 1992년에 사망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손병희가 이끄는 천도교는 1910년 재정적으로 어려워 위기에 처한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1932년 3월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기 전까지 20년 넘게 보성전문학교를 운영하였다. 손병희는 일본 망명생활 동안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이에 따라 귀국 후 폐교 위기에 처해 있던 화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나갔다. 당시 천도교에서는 교육을 강조하는 민족운동의 맥락에서, 보성전문학교뿐 아니라 동덕여자의숙, 교남학교, 일신보통학교, 종화화교 등 여러 학교를 직접 운영하거나 다방면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천도교의 교육계 지원은 3·1운동으로 손병희가 체포된 뒤에도 10여 년 넘게 이어졌다. 보성전문화교도 김성수가 인수하기 전까지 천도교의 지원을 통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고려되어 손병희 흉상이 고려대학교 서관 앞에 세워졌다.
    강제훈, 서홍석, 이지훈, 조용철, 황선익, 2018, 서울 서울 동(洞)의 역사 성북구 제3권(보문동·안암동·종암동), 241-243쪽
    손병희 관련 내용
  • 한편, 일제는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보성전문학교의 관립화를 시도하였다. 대표적인 관립화 시도는 경비 보조를 통한 예속화 기도였다. 이용익의 뒤를 이어 보성전문학교의 경영을 맡은 그의 손자 이종호(1885-1932)는 이러한 일제의 의도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런데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자 일제가 궁내부의 경리장부 일체를 탁지부로 이관하면서 보성전문학교를 비롯한 사립학교들에 지원하던 황실 자금이 끊어지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들을 중심으로 이종호를 대신하여 학교를 경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유지회사건(維持會事件)’이다. 결국 황실의 운영 경비 지원 중단 사태는 유지회사건이라는 내홍이 되어보성전문학교 경영의 근간을 흔들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식민 정책의 집행을 위해 다수의 관공립학교를 세우는 한편 항일구국이념을 가르치는 사립학교의 발전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1907년 12월에 실시된 <사립학교령>은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의 대표적인 조치였다. 여기에 1909년 2월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寄附金品募集取締規則)>을 공포하여 사립학교가 자의로 그 설립 및 유지에 필요한 기부금을 모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즉, 사립학교의 재정상황을 악화시켜 궁극적으로 일제에 귀속시키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지회사건은 보성전문학교의 존폐를 위협하는 큰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특히 1909년 이종호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재정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결국 1910년 12월 천도교 측에 경영권을 넘기게 되었다.
    강제훈, 서홍석, 이지훈, 조용철, 황선익, 2018, 서울 서울 동(洞)의 역사 성북구 제3권(보문동·안암동·종암동), 182-184쪽
    유지회사건 관련 내용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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