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보화각
1938 - 1966.04
국가등록문화재
장소 박물관∙미술관
유물 건축물
성북구 성북로 102-11(성북동 97-1)에 있는 간송미술관의 중심 건물이다. 보화각은 건물의 이름이자 그 자체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간송미술관의 옛 이름)을 의미한다. 1934년 전형필(호는 간송)이 부지를 매입하고, 1938년 건물을 준공하였다. 모더니즘 양식의 2층 콘크리트 건물로 건축가 박길용이 설계하였으며, 당시 최고급 자재로 튼튼하고 우아하게 지었다. ‘보화각’이라는 이름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으로 오세창이 짓고 현판을 썼다. 이 건물은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를 보관하고 전시하며, 민족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박물관의 역할을 하였고, 1966년 전형필의 호를 따서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간송미술관은 1971년부터 해마다 봄, 가을 정기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성북동
  • 보화각 전경(1938)
  • 보화각 개관기념일(1938)
  • 간송미술관
  • 북단장 사랑에서. 보화각 개관 기념일에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일제강점기
  • 시기: 1938 - 1966.04
  • 비고: 1966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

주소

  • 주소: 02837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성북로 102-11)
  • 비고: 성북동 330-115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이 소란의 와중의 모습은 일관되지 않다. 저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한국전쟁의 초입은 문화재를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긴장감으로 기억된다. 전쟁 초입 인민군들은 남침 경로의 중앙에 있는 돈암동과 성북동에 진을 쳤다. 이어 서울이 함락된 이후에는 저 유명한 간송 전형필의 문화유산의 보고인 ‘보화각’이 그네들의 손에 들어갔다. 최순우 선생 등의 기지로 이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선생은 기억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47쪽
  • 1930년대 보화각이 지어질 무렵 성북동에는 서예가, 화가, 소설가, 고미술품 수장가 및 감정가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교류하고 있었다. 이 한장의 사진으로 보화각에 모여 고미술품을 수집·감정·소장하던 성북동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 구심점에는 오세창과 전형필이 있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43-244쪽
  • 보화각은 동경대 건축과를 나온 박길용이 설계했다. 박길용은 조선인 최초로 건축사무소를 개설한 건축가이다. 보화각은 전쟁을 겪고 난 뒤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대리석이며 전시실 바닥은 당시는 구하기 힘든 단단한 합판이었다. 유물을 볼 수 있게 만든 전시함은 이태리에서 직접 수입한 것이었다. 수입 가구를 사용한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부 장식을 최대한 하지 않고, 세련되고 우아한 형태의 설계를 추구했다. 박길용은 전형필이 원하는 수준의 건물을 완성하려면 일본에 있는 건축자재상을 통해 자재를 수입하고 지하에 수장고도 만들어야 하니, 최소 3년이 걸린다고 보았다. 웬만한 건물을 짓는 데는 6~8개월이면 충분했던 당시였지만 최고급 자재로 튼튼하고 우아한 건물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 1945년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나라를 되찾은 기쁨도 잠시 민족 간의 갈등으로 인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인해 우리의 문화재는 일제강점기보다도 더 참담한 파괴를 당한다.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 북단장은 기마부대가 주둔하여 아름다운 정원은 폐허가 되었다. 보화각 소장품은 인민군이 후퇴할 때 옮기려고 큰 목통 속에 아무렇게나 포장 되어 있었다. 인민군은 전문가인 손재형과 최순우에게 포장과 목록정리를 시켰다. 두 사람은 인민군이 소장품을 가지고 가지 못하도록 매일 물건을 싸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손재형은 멀쩡한 다리에 붕대를 매고 다리를 다쳤다며 일을 제대로 하지 않기도 했다.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위스키를 이용해 담당자들을 매수하여 작업을 하지 않고 버틴 적도 있었다. 이렇게 꾀를 써서 물건의 정리를 피하니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포장되어 상자에 보관된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결국 인민군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53년 서울 수복 후 보화각에 돌아오니, 아궁이 앞에는 고서(古書)들이 불쏘시개 감으로 산처럼 쌓여있고, 벽지나 창호지로 쓰려는 사람들이 책을 뜯어가기도 하였다. 몇 트럭분의 고서적들이 중앙시장에 나와 쌓여 있어서 다시 사오기도 했다.
  •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하여 1966년 4월에 정식으로 민족미술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 간송 전형필澗松全鎣弼, 1906-1962은 일제강점기 훼손되고 빼앗기는 문화유산을 보호한 문화재수집가이다. 일본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알리려 노력하였다. 위창 오세창 선생의 안목을 잇는 감식안을 가진 간송은 헐값으로 나온 문화재라도 가치를 따져 주인에게 제대로 된 값을 쳐 주었고, 일본에 팔려나가는 문화재는 경매가의 몇 배가 넘는 돈을 내서라도 사들였다. 전적, 서화, 석조 등 전 분야를 아우르는 수집품을 온전히 보존하고자 성북동 북단장에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인 보화각을 건립하였다. 한국전쟁 때 소장품이 북한군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했으나 손재형과 최순우가 지연작전을 펼쳐 지켜냈다. 주요 소장품에는 <훈민정음>, <혜원풍속도>, <백자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 등이 있다. 수집한 문화재를 많은 사람들이 보고, 여러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게 하라는 간송의 뜻을 이어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개설되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1971년부터 지금까지 봄과 가을에 전시를 열어 소중한 문화유산을 공개하고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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