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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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장소 자연지리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청와대 뒤편 주봉에서 동쪽 방면으로 뻗어내린 산자락이 성북동의 서~북~동쪽을 둘러싸고 있다.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북악’이란 이름은 한양도성의 북쪽 산인 데서 유래했으며 공극산·면악·백악이라고도 하며 높이는 342m이다. 뛰어난 자연 경관은 물론 조선시대 체계적인 도성 조형원리, 풍수로 상징되는 사상적 체계를 구체화한 역사적 유적으로서의 가치 등을 인정받아 2009년 ‘서울 백악산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명승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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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北岳山
  • 이명칭: 공극산, 면악, 백악산, 서울 백악산 일원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자연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산87-1번지 일대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명승
  • 지정일: 2009.12.09

근거자료 원문

  • ○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청와대 뒤편 주봉에서 동쪽 방면으로 뻗어내린 산자락이 성북동의 서~북~동쪽을 둘러싸고 있음 ○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북악’이란 이름은 한양도성의 북쪽 산인 데서 유래했으며 공극산·면악·백악이라고도 함(높이 342m) ○ 2009년 ‘서울 백악산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명승 제67호 지정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53쪽
  • 1. 성북동의 문화재 ○ 명승 - 명승 제67호 : 서울 백악산 일원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청운동 산2-27번지 성북구 성북동 산87-1번지 등 - 지정일 : 2009.12.09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53쪽
  • 백악산은 한양의 북현무에 해당하는 북쪽 주산으로서 조선왕조가 도성을 정하였던 사상과 지형적 기본원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수려한 자연과 문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자연유산이다. 서울이라는 고도의 체계적인 도성 조형원리, 풍수로 상징되는 사상적 체계를 구체화한 역사적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잘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궁인 경복궁의 후원으로서 소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시대 경관 조성의 원리를 간직하고 있어 역사 문화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이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항목명: 서울 백악산 일원
  • ○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청와대 뒤편 주봉에서 동쪽 방면으로 뻗어내린 산자락이 성북동의 서~북~동쪽을 둘러싸고 있음 ○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북악’이란 이름은 한양도성의 북쪽 산인 데서 유래했으며 공극산·면악·백악이라고도 함(높이 342m) ○ 2009년 ‘서울 백악산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명승 제67호 지정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53쪽
  • 임금이 표범이 백악산(白岳山)에 있으면 비와 눈이 내린 뒤에는 반드시 그 자취가 있을 것이라 하여,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과 행 상호군(行上護軍) 조득림(趙得琳)에게 명하여 추적(追跡)하게 하였다. 조득림이 아뢰기를, “신이 내불당(內佛堂) 북쪽에 이르니, 개고기가 땅에 버려진 옆에 표범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연굴암(衍屈庵) 동쪽 고개에 행차하였다. 명하여 화포(火砲)를 쏘게 하니, 표범이 놀라서 밖으로 뛰쳐 나오므로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가 쏘아서 죽이었다. 구에게 내구마(內廐馬) 1필(匹), 녹비(鹿皮) 1장(張), 표피 좌자(豹皮坐子) 1좌(坐)를 내려 주고, 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에게 말 1필(匹), 녹비(鹿皮) 1 장(張)를 내려주고, 이증(李璔)에게 말 1필(匹)을 내려 주었다. 『세조실록』 권27, 세조 8년(1462 임오 / 명 천순(天順) 6년) 1월 24일(기미) 1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45
  • 어떤 사람이 와서 호랑이가 백악산(白岳山)으로 들어갔다고 고(告)하니, 임금이 경복궁(景福宮) 북쪽에 거둥하여 말을 머물게 하고, 호종(扈從)한 종친(宗親)·재추(宰樞)를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임금이 겸사복(兼司僕) 이양생(李陽生)에게 명하여 호랑이의 자취를 찾게 하고, 환관(宦官) 박존수(朴存壽)가 남보다 체모(體貌)가 잔열(殘劣)하였으나 일찍이 과장(誇張)하여 말하기를, “내가 능히 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 하였으므로, 임금이 박존수를 불러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호랑이를 잡을 때이다.” 하니, 박존수가 돈수(頓首)하고 말하기를, “신(臣)이 다만 손으로는 능히 할 수 없으나, 만약 장창(長槍)이나 대검(大檢)을 가진다면 오히려 능히 할 수 있겠습니다. 청컨대 이양생(李陽生)과 함께 가게 하여 하여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크게 웃으면서 우인(虞人) 한복련(韓卜連)으로 하여금 박존수를 거느리고 호랑이를 찾게 하였으나, 이윽고 명령하여 이를 중지시키고, 임금이 우의정(右議政) 강순(康純)에게 이르기를, “경이 건주(建州)를 정벌할 때에 나무를 쪼개어서 흰 데다 글을 썼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강순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글에다가 무엇이라고 썼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선 대장(朝鮮大將) 강순(康純)이 정병(精兵) 1만 명을 거느리고 건주(建州)를 공격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격한다는 글자는 통쾌하지 못하니, 멸(滅)한다는 글자가 가장 좋았을 것이다.” 하고, 임금이 백악산(白岳山)에 올라갔는데 호랑이가 낭떠러지 골짜기에 숨었으므로 쏘아서 잡았다. 어가(御駕)가 돌아오는데, 어떤 한 사람이 길 옆에서 통곡하므로, 이를 물으니 말하기를, “청풍군노(淸風郡奴) 연금(延金)입니다. 선상노(選上奴)로서 군기감(軍器監)에 역사(役事)하는데, 지금 또 조지서(造紙署)에 옮겨서 역사(役事)시키니, 배고프고 추운 것을 이기지 못하여 이 때문에 통곡합니다.” 하니, 즉시 유의(襦衣) 1령(領)을 내려 주고, 승전 환관(承傳宦官) 이득수(李得守)로 하여금 음식을 먹이게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군기시(軍器寺)의 관리와 청풍(淸風)의 경저인(京邸人) 등이 능히 존휼(存恤)하지 못한 죄(罪)를 핵문(核問)하게 하고, 드디어 그를 놓아서 돌려 보내어, 그 고을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존휼(存恤)하게 하였다. 어가(御駕)가 연창위 공주(延昌尉公主)의 집에 들어가서 문병하였다. 『세조실록』 권44, 세조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11월 19일(신사) 2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46
  • 취로정(翠露亭) 연못 가에 호랑이 발자취가 있었으므로, 밤에 입직(入直)한 여러 장수를 불러서 말하기를, “좌상(左廂)·우상(右廂)은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 등지를 몰이하라. 만약 살펴서 호랑이가 있는 곳을 알게 되면 내가 마땅히 친히 가겠다.” 하였다. 『세조실록』 권31, 세조 9년(1463 계미 / 명 천순(天順) 7년) 12월 9일(계사) 1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55
  • 양전(兩殿)이 세자궁(世子宮)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중문(中門)에 나아가니 왕세자(王世子)가 모시었고,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거제정(巨濟正) 이철(李鐵)·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縣祖)·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심회(沈澮)·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석형(李石亨)·문산군(文山君) 유하(柳河)·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事) 김길통(金吉通)·청원군(淸原君) 한서귀(韓瑞龜)·결성군(結城君) 최윤(崔閏)이 입시(入侍)하니, 술자리를 베풀었다. 임금이 우승지(右承旨) 이파(李坡)에게 명하여 군사들에게 술을 먹이게 하였다. 또 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에게 명하여 술을 권(勸)하게 하니, 군사들이 모두 취(醉)하였다. 한참 있다가 상군(廂軍)에게 명하여 인왕산(仁王山)·백악산(白岳山) 두 산에서 몰이하게 하여 호랑이를 잡았다. 임금이 김길통에게 묻기를, “네가 전라도(全羅道)에 가서 포도(捕盜)와 군적(軍籍) 등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하니, 김길통이 대답을 잘 못하였으므로, 임금이 관(冠)을 벗게 하여 술을 올리도록 하고, 명하기를, “포도(捕盜) 등의 일에 힘쓰고 힘쓰라.” 하였다. 『세조실록』 권34, 세조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12월 6일(을유) 1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56
  • 헌부가 아뢰기를, “듣자니 내일 경회루에 나아가 좌상(左廂)·우상(右廂)에 명하여 인왕산과 백악산 등지의 악수를 잡는다 합니다. 악수를 몰아내는 일은 장수에게 명하여 해도 됩니다. 상체가 이제 막 회복되었는데 경회루에 나가 계시면 전령(傳令)이 왕래하는 사이에 반드시 날이 저물 것이고 오랫동안 물가 차가운 곳에 계셔야 하니 미안할 듯합니다. 또 고례(古例)에 대해서는 미처 모르지만 궐내에서 융복으로 전좌(殿坐)하여 형명(刑名)까지 쓰기에는 그 적당한 장소가 아닌 듯합니다. 만약 오랫동안 열무(閱武)를 폐했다면 혹시 친열(親閱)하거나 장수를 명하여 하거나 간에 스스로 그 장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정지하기를 계청합니다.” 하고, 정부는 아뢰기를, “이제 들으니 내일 아침 경연 후에 친히 호랑이를 잡는 것을 보시겠다 합니다. 근래에 오랫동안 친히 일을 보지 않았으니 두세 차례 신하들을 만나보신 후에 서서히 하여도 되지 않겠습니까? 또 여러 달 미령하시다가 이제 처음 일을 보시는데 갑자기 융복을 입으시면 수고롭게 될 듯하니 심히 미안합니다.” 하니, 답하였다. “아뢴 뜻이 옳다. 마땅히 장수에게 명하여 몰아내겠다.” 『중종실록』 권74, 중종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4월 12일(갑신) 4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60
  • 행 호군(行護軍) 이준생(李俊生)이 아뢰기를, “신이 소격전(昭格殿)에서 재숙(齋宿)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골짜기 안에 표범이 있어서 저녁 무렵에 출몰(出沒)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즉시 좌찬성(左贊成) 구치관(具致寬)을 주장(主將)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극배(李克培)를 좌상 대장(左廂大將)으로, 예조 참판(禮曹參判) 조효문(曹孝文)을 우상 대장(右廂大將)으로 삼고, 임금이 광화문(光化門) 앞에 나와서 여러 군사를 지휘하였다. 일이 급하고 군사가 적은 것을 염려하여 제사(諸司)에 선전관(宣傳官)을 나누어 보내어 각각 구군(驅軍)5516) 을 거느리고 어가(御駕)를 따르게 하였다.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국광(金國光) 등이 아뢰기를, “제사(諸司)의 관리들이 모두 청대(請臺)5517) 하여 출납(出納)하는데, 선전관(宣傳官)이 독촉하여 어가(御駕)를 따르게 한다면, 거두고 문을 닫을 때 간사하게 속이는 농간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어가(御駕)가 백악산(白岳山) 산허리에 이르러 여러 군사들이 몰이하였으나 끝내 표범을 잡지 못하고 해가 질 때에 환궁(還宮)하였다. 『세조실록』 권27, 세조 8년(1462 임오 / 명 천순(天順) 6년) 1월 22일(정사) 1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64
  • 병조가 아뢰기를, “신무문 밖에서 악수의 자취를 찾아 보았으나 나뭇잎이 많이 쌓여 악수의 자취가 있어도 추적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나무가 위는 울창하고 아래는 성글어서 만일 그 속에 무엇이 있을 경우 환희 볼 수 있으므로 악수가 여기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유사(苑囿司)의 종사관이 ‘지난밤에 악수가 인왕동(仁王洞)입구에서 나와 백악산(白岳山) 너머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곧 군사를 동원하여 잡게 해야 하는데 악수의 자취가 분명하지 않고 또 밖으로 향하여 갔으므로 소재를 정확하게 몰라서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악수가 성을 나간 자취가 있으니 갑자기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여러번 탐색했어도 끝내 잡지 못했는데, 함정을 만드는 것이 소극적인 방법이기는 하나 그래도 짐승을 잡는데는 효과가 있다. 지금이라도 속히 원유사의 종사관에게 여러곳에 함정을 설치하여 잡게 하라.” 『중종실록』 권73, 중종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2월 16일(기축) 2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65
    조선 중종 때 백악산(북악산) 일대에서 맹수를 포획한 일과 관련한 내용
  • 원유사 종사관 이담손이 새끼 호랑이를 잡아 바치니 상을 내리다 원유사(苑囿司)의 종사관(從事官) 이담손(李聃孫)이 백악산(白岳山) 밑에 덫을 놓아 조그마한 호랑이를 잡아다가 올리니, 별조궁(別造弓) 한 벌을 하사하였다. 『중종실록』 권73, 중종 27년(1532 임진 / 명 가정(嘉靖) 11년) 5월 10일(정사) 2번째기사
  • 정원이 아뢰기를, “원유사 종사관(苑囿司從事官) 이담손(李聃孫)이 백악산(白岳山) 남쪽 밑【성(城) 안의 땅.】에 함정을 파 표범을 잡아 바쳤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이 일이 비록 맡아서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범을 잡으면 주는 상격(賞格)이 《대전(大典)》에 실려 있다. 《대전》에 의하여 상을 준 뒤에야 그도 스스로 힘을 쓸 것이다. 이런 뜻을 병조에 말해주고, 또 이담손에게 술을 내리라.” 『중종실록』 권74, 중종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3월 15일(무오) 1번째기사
  • 사헌부 대사헌 홍언필(洪彦弼), 집의 조인규(趙仁奎), 장령 성윤(成倫)과 김기(金紀), 지평 허항(許沆)과 임붕(林鵬)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은사(恩赦)를 반포함은 그 뜻이 비록 죄과를 용서하는 데 있다 하더라도 죄가 국가에 관계되어 먼 변방으로 유배되어야 할 자들에게는 결코 바람작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남은 화액이 있어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켜 화액의 문이 한번 열리게 되면 그 화는 예측할 수 없게 됩니다. 지난번 성체(聖體)가 회복되어 은사의 혜택이 고루 내렸지만, 이른바 권간에게는 은사의 혜택을 주지 않은 것은 바로 위에서는 은혜를 편벽되게 내리는 잘못이 없고 아래로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끊어버린 것이니, 국법을 시행하고 공론을 붙들어 세운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은사가 내리던 날 권간의 친속과 사동(使童)의 무리들이 여우나 요귀처럼 날뛰면서 서로 기뻐하기를 ‘은전이 우리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여 그 말을 사방에 퍼뜨려 널리 성세(聲勢)를 과장하므로 듣는 사람들이 매우 해괴하게 여겼습니다. 한 집안으로 말하자면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없을 수 없겠지만, 조정에 드러나도록 조금도 꺼림 없이 과장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켰으니 어찌 믿는 데가 없이 그랬겠습니까. 마땅히 국법을 써서 공의를 쾌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적발하여 다스리는 일이 혹 지나치게 까다롭고 세밀할까 염려하여 은인자중하면서 탄핵하지 않고 있는 것은 본 데가 없어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자세히 까닭을 생각해 보면 바로 황도(皇道)가 공평치 못하고 요행의 길이 매우 많아서 기회를 타고 틈을 엿봄으로 말미암아 온갖 화근(禍根)이 공격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미리 방지하지 않으면 뭇 소인들이 모두 화의 근원이 될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는 성심(聖心)을 굳게 정하시어 번잡스러운 것을 막고 공도를 넓히시어 폐단을 제거하시면 나라를 위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차자에서 이른바 권간의 친속이라 한 것은 이항(李沆)의 처부(妻父) 영성 정(永城正)인데 이름은 수장(壽長)이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예문관 검열 이원손이 이준의 집에서 술을 마실때 이장이 부르는 노래를 오랫동안 듣고 있었습니다. 전에 본부에서, 그 집에 누구누구가 모여 어떻게 비방하는 노래를 불렀는가에 대해 추고하기를 아뢸 때, 이원손은 사관(史官)으로서 붓을 들고 옆에 있었으니 즉시 대죄했어야 하는데 끝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조옥의 초사가 자기에게 언급된 다음에야 그런 사실을 실토했으니 사관에 합당치 않습니다. 체직시키소서.” 또 듣자니, 근래 악수(惡獸)가 성안을 횡행하고 있기 때문에 성밑에 사는 인가에서는 무서워서 일찍 문을 닫고 들어간다 합니다. 마치 야외(野外)와 같은 성황이어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지난번 악수의 발자국을 찾게 하였는데, 찾는 사람이 악수 잡을 일을 꺼려서 숨기고 곧바로 고하지 않는 등 병조에서 악수를 잡는 조처가 허술하니, 만약 사람을 해치게 되면 작은 일이 아닙니다. 병조를 추고하소서.” 하니, 헌부에 답하였다. “이제 올린 차자를 보니 ‘권간의 친속이 은사(恩赦)를 바라기를 기탄없이 하였다.’ 하였으니 놀라운 일이다. 내가 마땅히 마음을 굳게 가져 요동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도 그렇게 한 다음에야 조정이 조용할 것이다. 내가 마음을 굳게 가진다 하더라도 지난번 대신【이행(李荇) 등을 가리킴.】처럼 조금만 요동하는 기색을 보이면 간인들이 조정의 일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이원손이 이준인의 집에서 술을 마실 때 이장이 부르는 노래를 듣기는 했으나. 이원손은 먼저 가서 술을 마셨고 이장은 후에 와서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듣고는 놀라 즉시 나왔으니, 어찌 사관을 이것으로 체직해야 되겠는가? 더군다나 신진(新進)인 사람이 어찌 붓을 잡고 있다가 즉시 대죄할 줄을 알겠는가? 추고가 자기에게 미친 다음에야 말할 것이 당연하니 체직해서는 안 된다. 전에 병조가 ‘북문 밖에 악수의 발자국이 있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발자국을 찾도록 했더니, 다시 아뢰기를 ‘이미 백악산(白岳山) 뒤로 갔다’ 하였다. 그후에는 병조가 종사관이 악수의 유무를 확인하여 보고한 뒤에 아뢰려 한 것이다. 그러나 병조에서는 언제나 검속하여 조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추고하라.” 『중종실록』 권74, 중종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3월 8일(신해) 1번째기사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67
  • 원유사(苑囿司)의 종사관(從事官) 이담손(李聃孫)이 백악산(白岳山) 밑에 덫을 놓아 조그마한 호랑이를 잡아다가 올리니, 별조궁(別造弓) 한 벌을 하사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원유사 종사관(苑囿司從事官) 이담손(李聃孫)이 백악산(白岳山) 남쪽 밑【성(城) 안의 땅.】에 함정을 파 표범을 잡아 바쳤습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이 일이 비록 맡아서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범을 잡으면 주는 상격(賞格)이 《대전(大典)》에 실려 있다. 《대전》에 의하여 상을 준 뒤에야 그도 스스로 힘을 쓸 것이다. 이런 뜻을 병조에 말해주고, 또 이담손에게 술을 내리라.”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66
    조선 중종 때 백악산(북악산) 일대에서 맹수를 포획한 일과 관련한 내용
  • 백악과 인왕 조선시대 서울은 한양도성 18km 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지형적으로 보면 북쪽으로 백악, 동쪽에 낙산, 남쪽에 목멱, 서쪽에 인왕산의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이 산들을 연결하는 능선에 따라 조선시대 한양도성이 축조되었다. 그리고 산 능선의 조금 낮아진 곳과 수구 옆 길목에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만들어 외부와 내부를 잇는 교통로를 삼았다. 서울의 산수를 풍수에 기초해 살펴보면 진산鎭山, 또는 조산祖山인 북한산에서 주산인 백악(북악)에 연결되며 낙산이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이 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된다. 목멱(남산)은 안산案山이 된다. 그리고 그 명당 혈穴에 경복궁과 청와대가 위치한다. 인왕과 백악은 인접해 있으면서, 한양의 주산을 놓고 경쟁했으며, 그 사이에는 현재의 ‘서촌’, 과거에는 웃대上村로 불린 마을을 끼고 많은 이야기와 문화를 남겨왔다. 본문에서는 백악과 인왕산에 대한 개괄과 그 산에 기대어 이루어졌던 삶과 염원에 대해 살펴보겠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08-109쪽
  • 백악白岳(북악), 한양의 주산. 그 이름의 유래 서울의 중심지 경복궁과 청와대 바로 뒤에 있는 백악은 해발고도 342m로 예부터 그 모습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유득공柳得恭의 아들 유본예柳本藝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한경지략漢京識略』이란 책에서는 백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백악이 도성 북쪽에 있는데 평지에서 우뚝 뛰어났고, 경복궁이 그 아래 기슭에 있다. 서울 도성을 에워 싼 여러 산 중에 이 산이 우뚝 북쪽에 뛰어나니 조선왕조 초기에 이 산으로 주산을 삼고 궁궐을 세운 것은 잘 된일이다. 조선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백악은 한양을 둘러싼 산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부터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주산主山 몫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악이 사람들의 주목을 끈 것은 조선왕조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때부터가 아니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고적古蹟조에 따르면, 고려 숙종 9년(1101)에 이미 남경南京 땅 중에서 주목받았던 곳이 백악이었다. 면악面嶽. 고려 숙종 9년(1101) 최사추崔思諏와 윤관尹瓘 등에게 명해 남경 땅을 살피게 했는데, 사추가 돌아와 아뢰기를, “다만 삼각산 · 면악 남쪽이 그 산세와 수세를 보아 옛 문헌에 들어맞으니 면악의 주간主幹을 중심으로 임좌방향壬坐方向해서 형세에 따라 도읍을 삼음이 마땅하다.” 하였다. 1101년의 최사추와 윤관이 진행한 조사를 토대로, 1104년 지금의 경복궁 자리보다 약간 윗 지점에 궁궐 연흥전延興殿을 지었다. 그 위치는 지금의 청와대쯤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면악은 백악白岳, 즉 현재의 북악산을 이른다. 백 악은 고려 때부터 이미 왕기王氣 서린 산봉우리로 주목받았고 남경에 궁궐을 짓는 데에도 주산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09-110쪽
  • 백악은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남산에 대칭하여 북악北岳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고려시대에는 면악面岳, 조선시대에는 백악白岳 · 공극산拱極山이라고도 불렸다. 백악이라는 이름은 그 산 꼭대기에 조선 초부터 백악신사白岳神祠가 있었던 데서 연유했다. 조선 초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태조 4년(1395) 12월에 백악산신白岳山神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아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니 그 사당을 백악신사라 하고, 이 신사가 있는 산을 백악이라 하였던 것이다. 한편 중종 32년(1537) 명나라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왔을 때, 중종은 그를 경회루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왕은 손님을 최선으로 접객하는 풍습에 따라 사신에게 주산인 백악과 서쪽 인왕산仁王山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용경은 북쪽의 백악을 ‘공극拱極’이라 하였다. 공극은 ‘북쪽 끝을 끼고 있다’는 뜻으로 산이 도성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극산이라는이름은 조선시대에도 그다지 쓰이지 않은 듯 싶다. 현재에도 공극산이라는 이름은 잊혀져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10-111쪽
  • 2006년 10월 3일 문화재청은 백악 일대 170필지 368만 2,738㎡를 사적 및 명승지로 지정 예고하였다. 사적 지정 명칭은 조선시대 도성과 도성 축성의 개념인 내사산 보존의 의미를 되살리고, 조선시대 각종 고지도 및 문헌 등 사료에 전하는 ‘백악白岳’의 지명을 살리기 위해 ‘서울 백악 일원’으로 정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주로 불렸던 북악산이란 이름 대신에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불린 백악으로 회복시키기로 한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11쪽
  • 왕기가 서린 곳은 어디인가? 백악과 인왕의 주산논쟁 『조선왕조실록』에는 구체적 정황이 보이지 않으나, 한양정도 당시에 백악과 인왕을 두고 어느 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을지 논쟁이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조께서 임금이 된 뒤 팔도 방백方伯들에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어디 있는지 찾아오라 했다. 무학대사를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며 나라 도읍을 어디에 정하였으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무학이 점을 쳐서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북악)과 남산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삼으라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鄭道傳이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이르기를 옛적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으로 향하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무학은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니라” 하였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주산논쟁은 결국 정도전의 백악주산론白岳主山論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무학대사의 말대로 200년 뒤인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나 도성이 무너지고 불타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무학대사의 신통함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무학대사가 주장했다는 인왕주산론仁王主山論은 『조선왕조실록』에는 보이지 않아 그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인왕산 서편 선바위 전설과 더불어 조선왕조 초기에 불교세력과 성리학세력 간의 주도권 다툼의 일 면을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13-114쪽
  • 한양사람들의 염원의 땅 백악신사 조선 개국 직후, 태조 2년(1393) 1월 21일에 여러 산과 함께 백악의 산신을 국가의 호국백護國伯으로 삼았고, 태조 4년(1395) 12월 29일에는 다시 백악의 산신을 진국백鎭國伯으로 봉하고 한양의 주산主山은 물론 국가의 주산으로 확정하여 국가 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이듬해 1월 한양도성의 공사를 시작할 때 백악과 오방신五方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태조 년간에 백악산신의 지위가 변화한 모습을 보면, 한양이 도성의 지위를 확고히 해나간 과정이 엿보인다. 백악은 처음에는 지리산, 무등산, 금성산, 계룡산, 감악산, 삼각산과 함께 호국백이 되었으나 진국백이 된 것은 독보적인 조치였다. 다른 산들과 달리 조선은 도성의 백악을 나라의 신성한 산, 호국의 산으로 정하였고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제단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 백악의 제단에서는 도성 공사, 국가의 천재지변 또는 가뭄이 심할 때에도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사는 정조 년간까지도 계속 지속되었다. 백악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백악 신사는 백악 정상에 위치했다. 태종때에는 이곳에 삼각산신도 함께 모시고 제사지내게 했고 삼각산신 신위는 남쪽으로 향하여, 백악산신 신위는 서쪽을 향하게 두었다. 전설에 의하면 ‘백악의 신위’는 정녀부인貞女夫人이라는 여신이었고 신사 내에 그 화상을 모셨었다‘고 한다. 이 신사는 조선 초부터 있었지만 고종 년간에 만든 역사 지리책인 『동국여지비고』에는 이미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15-116쪽
  •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이 출몰하는 것은 그만큼 인왕산이 산신이 있는 산, 신성한 산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인왕산과 북악산 곳곳에 사람들이 여러 기도처를 만들고 기도를 하는 것도 그러한 신성한 산의 이미지가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결과일지도 모른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22쪽
  • 일제강점기 인왕과 백악의 수난 조선시대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고 기자祈子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인왕과 백악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해서 조선 민중들의 염원이 담긴 장소였다. 독립의 바람을 품고 태극기를 인왕산에 크게 내려놓는 일도 생기곤 했다. 이에 대해 일제는 그 의미를 훼손하고 다른 의미를 담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악에 있는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아 풍수에 근거한 한양의 기운을 끊고자 한 일이었다. 광복 후에 이 바위의 쇠말뚝을 제거하고 한민족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워 그 이름을 ‘촛대바위’라 정하기도 했다. 현재는 쇠말뚝을 제거한 위치에 콘크리트 기둥으로 마감되어 있어, 일제 행위의 자취가남아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26쪽
  • 인왕과 백악의 폐쇄, 그리고 다시 개방 지금은 인왕산과 백악을 포함해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도는 순성巡城이 가능하지만, 불과 7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양도성 순성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1968년부터 인왕산은 1993년까지, 백악은 2007년까지 민간인 출입 통제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왕산과 백악을 통행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코스를 돌다보면 여러 곳에 군부대와 군 초소가 위치하고 있고, 탐방객들이 청와대를 향해 사진 찍는 것을 제지하기도 한다. 인왕산과 백악에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게 되었던 1968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34-135쪽
  • 1968년 1월 16일.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려는 지령을 받고 남파되었다. 경계를 속이고 서울까지 진입하기 위해 이들은 한국군 복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이들은 휴전선을 넘어 파주 법원리, 북한산 비봉, 서울 종로구 구기동 승가사를 지나 1월 21일밤 8시에 세검정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한국 경찰을 마주치면 CIC방첩대라고 속여 의심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다 밤 10시 자하문 고갯길 검문초소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러자 그 순간 공비들은 기관총을 난사했고, 최규식 서장은 총을 맞고 사망했다. 이 충돌로 청와대 근방 500m까지 접근했던 공비들은 당황해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도주한 공비들에 대한 소탕작전은 1월말까지 계속되어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체포하였다. 이것이 북한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사건인 1 · 21사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여파만큼 인왕산과 백악에 미친 영향 역시 컸다. 백악과 인왕산에 민간인 출입 통제와 군부대 시설의 증강이 이루어졌다. 1968년 이후인왕산은 25년, 백악은 30년가량 민간인이 절대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군부독재가 끝나고 북한과의 충돌이 이전보다는 잦아들어 과거와 같이 인왕산과 백악을 통제하면서까지 안보를 강조할필요가 없어졌고, 시민들의 품에 인왕산과 백악이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백악의 여기저기에는 1·21사태의 흔적이 남아있다. 공비들을 검문했던 창의문(자하문) 바로 아래에는 순직한 고 최규식 총경의 동상이 서있고, 한양순성 백악구간에는 1·21 사태 소나무가 남아있어 당시 치열했던 교전 양상이 느껴진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1·21 사태 소나무에는 15발의 총탄자국이 남아있다. 또 2009년에는 ‘김신조 루트’라고도 불리는 북악산 제2북악스카이웨이 제2코스가 개방됐는데, 이 길에는 호경암護警岩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역시 50여발의 총탄자국이 남아 있는데, 이 바위가 대한 민국 군경을 지켜주어 공비들을 사살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이제는 전설처럼 전해져오고 있다. 남북 간의 대립 속에서 벌어졌던 무력충돌의 기억이 한양도성 백악코스에는 깊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일이 다시는 우리 곁에 안 일어나기를 빌며 ‘김신조 루트’를 밟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35-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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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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