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군부 총무당
1868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장소 유적
유물 건축물
성북구 삼선교로4나길 19(삼선동 1가 산1-13)에 위치한 조선말 삼군부의 청사 건물이다. 삼군부는 비변사를 폐지하면서 설치한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정부기구이다. 총무당은 삼군부의 중심건물인데, 1868년 처음 건축되었을 때의 위치는 현재의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으나, 193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총무당’이라는 현판은 당시 무신이자 외교가였던 신헌(申櫶)의 글씨이다. 삼군부의 기능약화와 함께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이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총무당은 공릉에 소재한 청헌당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배치와 건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현존자료이다.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삼선동
  • 삼군부 총무당(1990)(1)
  • 삼군부 총무당(2014)
  • 삼군부 총무당(1990)(2)
  • 삼군부 총무당 경관(1)
  • 삼군부 총무당 주위 전경
  • 삼군부 총무당 경관(2)
  • 삼군부 총무당 경관(3)
  • 2018 성북구 디지털 사진 공모전 당선작_성곽길의 밤
  • 2018 성북구 디지털 사진 공모전 당선작_하얀 마을
  • 삼군부 총무당(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 현판
  • 삼군부 총무당(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
  • 광화문광장 육조거리 위치 안내도
  • 광화문광장 삼군부 터(1)
  • 광화문광장 삼군부 터(2)
  • 광화문광장 삼군부 터(3)
  • 광화문광장 삼군부 터(4)
  • 광화문광장 삼군부 터(5)
  • 광화문광장 삼군부 터(6)
  • 광화문광장 삼군부 터(7)
  • 광화문광장 삼군부 터(8)
  • 광화문광장 삼군부 터(9)
  • 제1회 성북구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_1991년 겨울, 삼군부 총무당 앞에서
  • 제1회 성북구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_1991년 봄, 삼군부 총무당 앞에서
  • 삼선동 일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三軍府 總武堂
  • 이명칭: 포도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   유물 건축물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868
  • 비고: 1930년 현재 자리로 옮겨짐

주소

  • 주소: 02877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가 1-13 (삼선교로4길 147 삼선상상어린이공원 내)
  • 비고: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총무당은 조선말 군사 업무를 총괄하던 정1품 아문인 삼군부(三軍府) 청사의 중심 건물이다. 본래 정부종합청사 자리(세종로 50번지)에 위치했던 이 관아 건물은 193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942년부터 경기도 공무원 연수장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시 직업 훈련원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건물이 낡고 퇴락하였으므로 서울시에서 1979년 8월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이해 12월 20일에 완공한 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총무당은 조선 말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을 돌렸다. 평면은 정면 7간, 측면 4간으로 중앙 정면 3간, 측면 2간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정면 1간, 측면 2간의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정면 1간, 측면 2간의 광을 두었다. 중앙 어간(御間) 창방에는 ‘총무당(總武堂)’이라는 현판이 있고, 앞면의 여덟 개 기둥에도 각각 주련(柱聯)이 붙어 있다. 총무당은 공릉에 소재한 청헌당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배치와 건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현존자료이다.
    원문에 "그러나 건물이 낡고 퇴락하였으므로 서울시에서 1979년 8월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이해 12월 20일에 완공한 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라고 되었있으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때가 1978년 이므로, 선후 관계에 대한 서술이 잘못된 것으로 파악된다.
  •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37 호 삼군부 총무당 三軍府總武堂 시대 : 조선후기 소유자 : 서울시 소재지 : 삼선공원 / 서울 성북구 삼선동 1가 512-160 지정연월일 : 1978. 12. 18. 총무당은 조선말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정1품 아문인 삼군부(三軍府) 청사 중 중심 건물이다. 현재 정부종합청사 건물(세종로 50번지)에 위치하던 이 관아 건물은 1930년대에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현재 서울에는 조선시대 관아건물은 거의 훼손되어 사라지고 이 건물 외에 육군사관학교 내의 삼군부 청헌당과 우정총국, 정독도서관으로 이전된 종친부 건물 정도만 남아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은 집권하자 외척세력을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종 2년(1865)에 310년 동안 군국사무를 담당하던 국가의 최고기관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했다. 그리고 정치는 의정부에서 맡도록 하는 한편 삼군부를 설치하여 치안과 국방관계를 담당하게 했다. 삼군부는 조선초의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계승한 것으로 훈련도감의 신영(新營)・남영(南營)・마병소(馬兵所)로서, 국가의 중추적인 관아로 삼았다. 그리하여 청사 자리를 광화문 앞의 예조(禮曹: 현재 정부종합청사 자리)가 위치한 곳으로 정한 뒤 고종 5년(1868)에 건물을 새로 지었다. 이 때 총무당을 정당(正堂), 즉 중심 건물로 삼고 그 좌우에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덕의당은 흔적조차 없어졌고, 청헌당은 1967년에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내로 이전되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그 후 삼군부는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용호영 등 5개 군문(軍門)을 비롯하여 전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에 위세를 떨쳤다가 개항 이후인 고종 17년(1880)에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이 건물은 일제 때 이곳으로 이전한 후 1942년부터 경기도 공무원 연수장으로 사용하다가 서울시 직업훈련원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건물이 낡고 퇴락하였으므로 서울시에서 1979년 8월에 복원공사를 착수하여 이 해 12월 20일에 완공한 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총무당은 조선말기의 전형적인 관아건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을 돌렸다.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중앙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광을 두었다. 중앙 어간(御間) 창방에는 ‘총무당(總武堂)’이라는 현판이 있고, 앞면의 여덟 개 기둥에도 각각 주련(柱聯)이 붙어 있다. * 참고자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24-126쪽
    2019년 기준으로 삼군부 총무당의 주소는 성북구 삼선동1가 1-13이다.
  • ⑤ 三軍府 總武堂 성북구 돈암동 삼성공원 안에 있는 건평 72.1坪, 地籍 2,609평, 정면 7間, 측면 4間짜리 한말 三軍府의 청사건물이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1868년(高宗 5) 에 건립된 義興三軍府의 武略을 총찰하는 主堂이었던 總武堂으로서 당초 光化門앞 서쪽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세워져 있었으나, 1930년에 현재자리로 移築된 것이다. 건축양식은 朝鮮朝 말기의 전형적인 관아건물로, 長臺石으로 基壇을 돌렸는데 건물은 동쪽에서 보면 5벌대 높은 기단 위에 二高柱七樑이고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었으며 막새기와를 썼고 용마루 끝과 내림마루 끝에는 龍頭를 얹었고 사래 끝에는 吐首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다.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중앙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광을 두었다. 행包는 二翼工으로 모두 垂舌로 되어 있다. 중앙 御間 창방에는 ‘總武堂’이라는 현판이 있고, 앞면 여덟개 기둥에도 각각 柱聯이 붙어 있다. 總武堂은 義興三軍府의 主堂으로 그 좌우에 淸憲堂과 德義堂이 있었는데 德義堂은 그 흔적조차 없어졌고 淸憲堂은 원위치에 남아 있다가 1967년 道峰區 孔陵洞 陸軍士官學校내로 이축,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제16호 「三軍府淸憲堂」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어쨌든 이 건물 중앙에 걸려있는 ‘總武堂’이란 縣額에는 朝鮮朝 말기의 정치가인 申櫶(舊名:觀浩)의 글씨로 ‘上將之印’, ‘申觀浩印’이라 각인한 낙관이 선명하다. 낙관에 보이는 신관호는 뒷날 신헌으로 개명하기 전의 이름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琴堂初藁」에 그가 지은 〈三軍府總武堂上樑文〉이 실려 있어 高宗 5년(1868)에 건립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곳으로 移建된 總武堂은 1942년 京畿道 公務員 練成場으로 사용되다가 서울 市 職業訓練院 사무실로도 사용되어 오던 중 건물이 낡고 퇴락되어 서울시에서 1979년 8월 17일 補修復元工事에 착수하여 동년 12월 20일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정면의 8개 기둥에 붙어 있는 목판의 柱聯은 대략 아래와 같다. ○ 從新耳目名倣三衙 이목 또한 새롭구나 그 이름 三衙와 나란히 ○ 遂道九八化賁懷來 九夷八蠻외교 갖고 덕화로 승복시키니 ○ 儀同相府東西向廳 규모는 상부(議政府) 같아 동서로 청이 마주 향했고 ○ 象取天垣左右執法 모양은 천원(吏曹) 본 받아 좌우로 법을 지켰네 ○ 菫勵群士任天下重 뭇 옥관 독려하에 천하의 무거운 책임 맡았고 ○ 諸斷庶務酌時中宜 온갖 사무 결단해라 시중의 적절함 헤아려 ○ 文武吉甫爲憲萬邦 문무 대신 만국에 모범될지라 ○ 協恭和衷得與共理 화합과 충성으로 이 나라 함께 다스리세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07-709쪽
    주련의 한자 일부가 원본과 다르게 기재되어 있음
  • 삼군부 총무당 三軍府總務堂 조선시대 군사업무를 담당하던 삼군부는 태조가 군사권의 통제를 위해 고려 말의 군사체계를 정비하여 만든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줄임말이다. 조선 초기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부와 마주보는 광화문 앞 서쪽(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위치하였다. 행정·군사제도가 바뀌며 명칭과 규모의 변화를 겪었다. 흥선대원군 때 최고의 군사기관이었으나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난 이후 기능이 축소되고, 19세기 말 적극적인 근대문물 수용정책이 추진되며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설치와 함께 폐지되었다. 삼군부 청사는 정당正堂인 총무당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을 두었다. 삼군부의 기능약화와 함께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이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대가 주둔하였다. 1931년 조선보병대 해산 이후 삼군부 청사는 조선총독부의 체신국의 보험관리국으로 사용되었다. 이때 덕의당은 없어지고, 총무당은 돈암동(512-160)으로 옮겨졌다. 총무당 건물은 삼군부의 군사지략을 의논했던 주당主堂으로 조선 후기 관아건물 양식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물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각 각의 온돌방 옆에는 광이 이어져 있다. 1942년부터 경기도 공무원 연수장으로 사용되다 이후 서울시 직업훈련원 사무실로 쓰였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1978년)되었고, 이듬해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총무당의 한자표기가 잘못되었다. 정확한 한자표기는 '三軍府 總武堂'이다.
  • ○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문화유적 17 삼군부 총무당 조선시대 관아건축의 귀중한 자료 - 삼군부 총무당은 조선 말기의 군사기관이었던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었다. 구한말 지금의 위치로 옮긴 후 1942년부터 경기도공무원연수장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시직업훈련원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건물이 퇴락하여 1979년 크게 보수하고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지었다. 정면 중앙 3칸, 측면 2칸은 대청이고, 좌우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 있고, 그 옆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광이 있다. 세 칸 대청 전면은 사분합문을 달고, 상부에 교창을 설치하였다. 총무당은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배치와 건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최고의 자료 중 하나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36쪽
  • 현재 삼선동 한성대학교 옆 삼선공원 안에는 조선시대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의 군사업무를 관장하던 삼군부의 청사건물로, 1868년(고종5)에 청헌당淸憲堂, 덕의당德義堂과 함께 지어졌다. 원래 광화문 남쪽 현재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는데, 청사의 중심이 되는 총무당만을 1930년대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최근 서울의 궁궐 수문장 교대식과 경기도의 남한산성 및 화성행궁에서 펼쳐지는 조선무예 시연이 관광객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양도성을 수비했던 북둔과 군사연무장이 있었던 성북동과 삼선동 일대에서는 아무런 상설행사가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더군다나 삼군부총무당이라는 진귀한 국방 문화재를 바로 곁에 두고도 말이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25쪽
  • 三仙洞 1街의 史蹟으로는 漢城女高 옆의 三仙公園(512-160)내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三軍府總武堂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조선말 高宗 3년 대원군이 軍務를 통할하는 관아로서 비변사 대신 訓練都監의 新營, 南營, 馬兵所를 설치하여 삼군부라 했다. 이 건물은 2년 뒤인 高宗 5년(1868)부터 현재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三軍府가 사용하던 것을 高宗 19년(1882) 에 폐지하고 統理機務衙門과 統理軍國事務衛門의 청사로 쓰이다가 갑오개혁 후 待衛隊청사가 되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朝鮮步兵司令部로 사용하다가 1930년대에 3개 건물 중 統武堂만을 이곳으로 옮기고 경기도 公務員練成場으로 사용했다. 6·25동란 후에는 고아원과 서울시 직업훈련원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淸憲堂건물은 1967년에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내로 이전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73쪽
  • 5) 漢城府治安과 捕盜廳 城北區 돈암동 512번지 160호에 舊捕盜廳舍가 위치하여 서울특별시 지방유형문화재 제 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이 건물은 원래 漢城府 西部 瑞麟坊 惠政橋 남쪽(종로1가 89번지 동아일보사 일대)에 있는 右捕廳 건물이지만 일제 때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이로써 城北區와 관련되어 조선시대의 치안관계를 살펴본다. 捕盜廳은 朝鮮時代 죄인의 신문이나 捕盜·巡羅 등의 일을 맡았던 관청으로 일명 補廳이라고도 한다. 앞서 언급한 右捕廳과 漢城府 中部 貞善坊 把子橋동북쪽(종로구 수은동 56번지 團成社일대)에 위치한 左捕廳이 있었다. 포도청의 설치시기는 續大典에 보면 經國大典이후 창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명확히는 알 수 없으나 成宗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文宗때 이미 捕盜專擔官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成宗 초에는 捕盜主將·捕盜將의 임용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常設職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81년 3월에는 捕盜事目을 제정하여 漢城과 京畿를 左右로 나누고 2인의 捕盜將이 책임을 맡게 하였다. 일시적으로 漢城五部에 1인씩의 포도장을 두기로 하였지만 대체로 2인의 捕盜將制는 계속되었다. 捕盜廳의 조직과 기능을 보면 續大典에는 좌·우포청에 각각 종2품의 大將과 從事官·部長·無料部長·架設部將·書員이 두어졌으며 시대에 따라 인원의 증감이 있었다. 포도대장은 포도청을 지휘감독하는 책임자로 다른 군사지휘관을 겸할 수 없으며 왕의 행차 때 수행하였고 大典會通에 보면 左·右尹을 지낸 사람으로 임명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從事官은 文武堂下官(종6품)으로 임명하여 포도대장을 보좌하고 죄인의 신문을 주관하는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부장·무료부장·가설부장은 군사를 지휘하여 捕盜나 巡邏에 임하였고, 書員은 中人身分으로 사무기록을 담당하였다. 高宗 31년(1894) 갑오개혁 때 좌·우포청을 폐합하여 警務廳을 설치하고 內務衙門에 소속시켰으며, 그 책임자인 警務使는 왕과 직결되어 있어 독립된 업무를 수행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90-91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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